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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북한산 삼천사 진관사

 

삼천사 입구 단풍

 

삼천사 입구

 

삼천사 입구에서 바라본 북한산

 

삼천사 입구에서 바라본 북한산

 

삼천사 표지석

 

삼천사 입구와 5층석탑

 

삼천사 5층석탑

 

삼천사 소개 안내문

 

삼천사 마래여래입상 안내문

 

삼천사 5층석탑

 

삼천사 금강문

 

삼천사 지장보살상

 

삼천사 금강문

 

삼천사 연못 거북이바위

 

삼천사 금강문

 

삼천사 금강문 역사 밀적금강

 

삼천사 금강문 역사 나라연금강

 

삼천사 연못 거북이바위

 

삼천사 대웅보전 입구

 

삼천사 대웅보전 입구

 

삼천사 대웅보전

 

삼천사 대웅보전 현판

 

삼천사 마래여래입상 입구 문

 

삼천사 종형 사리탑

 

삼천사 마래여래입상

 

삼천사 종형 사리탑

 

삼천사 산령각

 

삼천사 마래여래입상 안내문

 

삼천사 마애여래입상

 

삼천사 대웅보전 단청

 

삼천사 대웅보전 앞 석조 두꺼비상

 

삼천사 대웅보전 전경과 북한산

 

삼천사 석등

 

삼천사 지장보살상

 

진관사 입구 부처상들

 

1968년 121 무장공비 침투로 안내문

 

진관사 일주문

 

진관사 일주문

 

진관사 사적비

 

진관사 입구 1

 

진관사 입구 2

 

진관사 입구 3

 

진관사 입구 4

 

진관사 입구 5

 

진관사 입구 6

 

진관사 보호수 은행나무

 

진관사 보호수 은행나무 안내문

 

진관사 돌담과 단풍 1

 

진관사 돌담과 단풍 2

 

진관사 돌담과 단풍 3

 

진관사 대웅전

 

진관사 대웅전과 나가원

 

진관사 나한전

 

진관사 명부전과 나한전

 

진관사 홍제루와 나간원

 

진관사 홍제루

 

진관사 대웅전 입구의 문

 

진관사 대웅전 입구의 문

 

진관사 나가원

 

진관사 동종각

 

백초월 스님의 독립운동 사료

 

진관사 칠성각 내부

 

진관사 칠성각

 

진관사 독성전

 

진관사 태극기 기념비

 

2011-11-01 북한산 삼천사, 진관사 탐방

 

1, 교통편

    9000(9401)승차-종로2가 하차-701승차-삼천사(진관사, 하나고)입구 하차

2. 북한산둘레길 마실길 구간방향으로 들어서니 우측에 반원으로 무지개같은 비행기길 하늘에 그려져 있고, 비행기가 흰점으로 보여

    맑은 날씨, 가시거리 좋은 날씨라고 감탄했다.

    넓은 벌판에 능선으로 이어진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졌으니, 가슴이 탁 트이고 눈이 번쩍 뜨였다. 단지 산봉우리의 이름마저 알았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3. 가는길

    가는 길에는 키가 큰 상수리나무 많고 굴참나무도 많다. ‘삼각산적멸보궁삼천사석비 서있는곳에 사시나무 5~6그루에게 인사하고

    직하니 공사중이므로, 탱크소리 들으며 올라가니 뚜껑덮인 약수고인물 있고 물바가지 있는데 먹기에 부담되었음.

    1) 입구 및 안내판

        입구로 들어가니 큰 규모의 5층석탑이 8각형으로 있는데, 기단에 다양한 악귀(?) 조각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음. 우측에 커다란 관

        음보살 입상이 서있어 불자들을 바라보는 자세로 서있고, 안내판에 AD 661년 신라 문무왕1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2) 마래여래입상~보물로 지정, 대웅전 위쪽 30m지점 병풍바위에 각인되어 있는데, 높이3.2m 불상높이2.6m로 고려시대 초기의 대

        표 모습이라고 한다. 실제로 보니 단아하고 고우며 기도하는 불자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사랑받는 불상임이 느껴졌다.

    3) 삼각산삼천사(三角山三千寺) 현판

        현판앞에 작은 연못 2개 있는데, 아래쪽에 붉은색화강암의 자연석이 거북이 닮아 신기해 하였음. 대문에는 아()금강역사,

        ()금강역사 그려져 있음. 다람쥐석상 양끝배치

    4)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 양옆으로 용머리목조각품이 앞으로 나와 있고, 문짝이 화려함. 앞의 돌계단 난간에는 두꺼비석상이 각각 앉아있는데 우측은

        등위에 새끼두꺼비 2마리를 엎고 있었음.

        뒤로 돌라 마래여래입상 올라가는 돌계단 난간에도 각각 두꺼비석조상이 앉아있음.

4. 진관사

    1) 가는길

        가는 길에 공원이 있는데 보호수 수령 200년 수고18m 둘레 10.67m 느티나무 연륜을 자랑하고, 우측에 어린은행나무 1,000여그

        루 군락조성하여 고즈넉하고 운치있는 풍광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국립공원 시작임을 알리는 전철형 게이트 들어서자마자 쉼터

        의자 있는곳 쓰레기더미 보자 한숨소리 나왔고, 등뒤에서 까마귀 소리 애절하게 들리는데, 좌측에 꺽어진 아까시 나무 보니 더

        욱 심란했다.

    2) 진관사 수륙재(津寬寺 水陸齋)

        플랭카드 걸려 있는데, 화장실은 새로 지은 건물로 깨끗함.

        건너편 길로 가면 봉은사 가는 길이다.

        연등이 죽 걸려있는 길로 가다 큰바위 밑 작은불상 1인기도처보고 웃으며 사진 한 장 찍었다.

    3) 삼각산 진관사 

        현판이 한글임.

        대문앞 다리는 극락교

        좌측으로 올라가니 삼각산진관사사적비삼각산진관사공적비가 거북이 기단위에 있음

        은행나무 보호수 수령145년 수고26m 있고, 계곡에 박혀있는 느티나무 보호수 수령260년 수고19m, 18m 둘레2.5m 3.1m 2그루

        가 있었다.

    4) 금강역사 그림 그려진 홍제루

        삼천사 금강역사에 비해 각지고 마른얼굴 모습에 당나귀귀이며 무도하는 듯 함.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올라가니 경내 나옴

    5) 대웅전

        대웅전까지 신도길 깔렸고 좌우 잔디밭 조성되어 안정감 있다.

        현판에 삼천사처럼 용머리목조각품 양옆으로 나와 있다. 건물 우측으로 명부전,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있다.

        대웅전에서 낭랑한 여스님의 독경소리 들리는데 마이크 켜고 함. 어느 집 를 올린 듯 하다. 제방을 소각로에서 태우고 음식을

        싸가지고 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았다.

        화단에서 곱게 단풍든 불당나무와 소각로 옆에 능소화가 나무하나에 감긴모습도 보고, 엄나무를 관리실의 스님에게 문의하여 확

        실히 인지했다. 길상사처럼 커다란 엄나무가 있음.

 

삼천사(三川寺) 연혁

유형              : 유적 

시대              : 고대/삼국

성격              : 절, 사찰

건립시기/연도 : 7세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127-1

정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北漢山)에 있는 절

내용

삼천사는 신라시대 원효(元曉)가 흥국사(興國寺) 등과 함께 창건한 절이라 하나, 그 뒤 중창 및 중수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다만, 고려 현종 때 이 절 등의 승려들이 쌀로써 술을 빚어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전하며, 6·25 때 불탄 뒤 1960년에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선실(禪室),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 대웅전 위쪽 30m 지점에 보물 제657호로 지정된 높이 3m의 석가여래입상이 있다.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양각과 음각을 함께 섞어 조각하여 선을 잘 살린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또한, 이 절에는 오래된 큰 석조(石槽)와 고려시대 이영간(李靈幹)이 쓴 비명(碑銘)이 있다.

[출처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한국학중앙연구원]

 

요약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

종파    : 대한불교조계종

창건자 : 원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본문

삼천사(三千寺)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661(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이후 연혁이 전하지 않아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고려사》에는 1027(고려 현종 18) 6월에 이 절과 장의사(莊義寺청연사(淸淵寺)의 승려들이 쌀 360여 석으로 술을 빚은 것이 발각되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481(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한때는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1592(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진영이 중창하였다.

1950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60년에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1994 11월에는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을 설립하고, 1996 12 30일 지하 1, 지상 3층의 2동으로 된 복지관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보전과 산령각·선실·요사채·인덕원복지관 등이 있다. 이 중 대웅보전은 정면 5,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이며, 십육나한과 오백나한·신중탱화·지장보살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산령각은 정면 2,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다른 사찰의 산신각보다 규모가 커서 북한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 절을산신이 보좌를 튼 절이라고도 부른다.

유물로는 대웅전 위쪽에 있는 마애석가여래입상이 보물 제657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각과 음각을 섞어 조각한 독특한 작품이다. 전체 높이는 3m이고, 불상 높이는 2.6m이다. 그밖에 경내에는 대형 석조(石槽)와 대지국사(大智國師) 목암찬영(木庵粲英:1328∼1390)의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doopedia 두산백과)]

 

진관사(津寬寺) 연혁

유형              : 유적

시대              : 고대/삼국

성격              : 절, 사찰

건립시기/연도 : 신라 진덕왕 연간

소재지           :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정의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삼각산(三角山)에 있는 절.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북한지 北漢誌에 의하면, 신라 진덕왕 때 원효(元曉)가 삼천사(三川寺)와 함께 창건하여 신혈사(神穴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고려 현종이 중창하고 진관사라 하였다.

고려 경종이 죽자 젊은 왕비는 왕태후가 되어 파계승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나누다가 사생아를 낳았다. 그 때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태조의 아들이던 욱(:安宗)의 직손이며 법통을 이어받을 대랑원군(大良院君)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왕태후는 대랑원군을 없애고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하여 목종에게 참소하여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로 옮기도록 하였다.

신혈사는 진관(津寬)이 혼자서 수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살해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사실을 눈치 챈 진관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굴을 파서 열두 살인 대랑원군을 숨겼으므로 왕태후가 보낸 자객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3년 뒤 목종이 죽자 대랑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 현종이 되었고, 1011년 진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하였다. 그 뒤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1090(선종 7)에 왕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1099(숙종 4) 1110(예종 5)에도 왕이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하였다. 조선에서는 1397(태조 6) 태조는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육지와 수중의 고혼과 아귀를 위하여 법식(法食)을 공양하는 수륙재를 지냈다.

이를 본받아 척불왕이던 태종도 1413(태종 13) 이 절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이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 15일에 수륙재를 열었다.

그 뒤 1463(세조 9) 화재로 소실된 것을 1470(성종 1)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1854(철종 5) 1858년에 중수하였다. 1879(고종 16)에 경운(慶雲)이 대방을 중수하였고, 1908년에는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나한전·독성전(獨聖殿칠성각·홍제루(弘濟樓종각(鐘閣일주문·선원(禪院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대웅전에 봉안된 본존불은 고려 현종을 구해준 불상이라 전하며, 홍제루의 고색이 깃든 초석이나 축대, 대웅전 후면의 축대나 석불 등은 이 절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법당 앞에는 석탑 대신 석등 2기가 있다.

참고문헌

文化遺蹟總覽(文化財管理局, 1977)
韓國寺刹全書 下(權相老 編, 東國大學校 出版部, 1979)
韓國의 名山大刹(國際佛敎徒協議會, 1982)
전통사찰총서 3(사찰문화연구원, 1993)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요약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전통사찰

종파       : 조계종

창건시기 : 고려시대

소재지    : 서울 은평구 진관동 354

본문

진관사(津寬寺)는 삼각산 서쪽 기슭에 있는 조계종 소속 고려시대의 고찰로, 불암사, 삼막사, 보개산 심원사와 함께 한양 근교의 4대 사찰 중 하나였다.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지은 절이라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 도량이었다.

수륙재란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으로, 이곳에서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랏일로 죽었어도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재를 올렸다.

현재 대웅전, 명부전, 홍제루, 동정각(動靜閣),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나가원(那迦院), 객실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 석가모니 불상과 미륵보살상, 제화갈라보살상을 모셨고, 비로자나 후불탱화와 석가모니 후불탱화, 노사나 후불탱화를 봉안하였다.

명부전은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상, 시왕상, 동자상 등이 있으며 지장보살상 뒤편에 지장 후불탱화가 있다. 명부전 옆의 독성전은 정면 1,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독성상과 독성탱화, 산신탱화를 모셨다.

주변에 북한산국립공원, 도봉산, 북한산성, 도선사, 문수사, 망월사, 승가사, 천축사, 화계사, 서오릉, 정릉 진흥왕순수비유지 등의 관광지가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doopedia 두산백과)]

 

사진 : 니콜라이

글    : 수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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