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이어오는 우정
이집(李集) 선생과 최원도
***** 광주(廣州)를 본관으로 하는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중시조 이집(李集)은 이자성의 7세손인 당(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아전 계급이었던 광주이씨 가문을 일조에 혁신하였다. 그런 중에서도, 문장이 뛰어나고 절개가 높은 선비로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이집에 대한 옛 기록을 요약해 보면, 고려 충숙왕 14년(1327)에 태어나 어릴 때의 이름은 원령(元齡)이고 호는 둔촌(遁村)이다. 문경공 안보(安輔)에게 글을 배웠으며, 충목왕 3년(134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최원도는 이집과 과거 동기생으로 영천최씨이며, 호는 천곡(泉谷)이다. 이집은 진작에 요승 신돈의 화를 피하여 그를 찾아왔다. 이집은 개경의 용수산 아래 살면서 학문지절이 뛰어난 폭넓은 교유를 하고 있었는데, 신돈의 독재를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되어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집은 무엇보다도 70이 가까운 아버지에게 미칠 화를 염려하여 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등에 업고 낮에는 숨고 밤에 산길을 택해가며 멀고도 험한 야행천리를 영천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이집 부자가 가까스로 영천에 당도한 그 날은 마침 최원도의 생일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집이 아버지를 바깥채 툇마루에 내려놓고 한숨 돌리는데 최원도가 나왔다. 이리하여 둔촌과 천곡 두 친구는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천곡의 태도는 참으로 뜻밖이었다. 반가와 할 줄만 알았던 천곡이 둔촌을 보자 크게 화를 내면서.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일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을 안아다 주지는 목 할망정 화는 싣고 오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소리치며 당장에 내모는 것이었다.
물 한 그릇 잘라는 청마저도 거절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곡은 둔촌이 떠나자 앉았던 툇마루마저 뜯어내어 불태워 버렸다. 잔치 손님들이 그 연유를 묻자 역적이 앉았던 자리는 태워야 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둔촌은 이런 박대를 받고 떠나면서도 천곡의 깊은 마음을 짐작했다. 천곡의 박대가 진심이 아니라 포박령이 내려진 친구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이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둔촌은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산 속에 숨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과연 천곡은 날이 어둡자 둔촌을 찾아 나섰다.
늙은 아버지를 등에 업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급히 둔촌이 간 쪽을 탐색하여 쉽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두 지기지우는 서로 끌어안고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고,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천곡은 둔촌을 집으로 데려가 다락방에 숨겼다.
이렇게 둔촌의 피신 생활은 시작되었고, 그것이 4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둔촌 부자를 다락방에 숨긴 뒤 천곡은 그것을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속여 밥을 큰 그릇에 고봉으로 담고 반찬도 많이 가져오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그러다가 이 광경이 심부름하는 여종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큰일이었다. 천곡은 당황하여 여종을 불렀다. 그리고 만약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두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것을 간곡히 설명한 뒤 함구를 당부했다.
그러자 일의 중대성을 알게 된 여종은 상전을 안심시키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말았다. 이 여종의 이름은 ‘제비’로 전해지고 있으며, 한문으로 된 기록에는 연아(燕娥)로 되어 있다. 그 뒤 영천에 수색이 시작되어 신돈의 부하가 천곡의 집에 들이닥쳤으나 물 한 그릇도 주지 않고 둔촌을 내치는 것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 등으로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또 큰일이 일어났다. 둔촌이 영천으로 피한 그 다음 해인 공민왕 18년(1369)에 아버지 당(唐)이 별세한 것이다. 아무 준비도 없었음은 물론 장례도 몰래 치러야 할 입장이어서 그 어려움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천곡은 자신의 수의를 내어다가 예에 어긋남이 없이 염빈을 하고 그의 어머니 묘 아래 장사지냈다. 영천의 나현에 있는 세칭 ‘광주이씨 시조공묘’가 바로 그 묘인 것이다.
이런 연유로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력 10월 10일이 되면 나현에서는 양가가 같은 날에 묘제를 지내고 서로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참배를 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충비 연아(제비)의 묘에도 양가가 모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리고 광주이씨 대종회에서는 천곡의 모부인 묘에 상석을 기증하였고, 1985년 이를 다시 개수하는 등 양가의 우의가 오늘의 후손에게도 감동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 현종 10년(1669)에 사림에서 “둔촌의 학문과 지절은 삼은(三隱)과 함께 일컬을 만하다”하여 광주의 암사 강변(현재 서울 강동구 암사동 산1)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을 세웠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리고 지금은 그 터였음을 알리는 비석과 주춧돌만 남았고, 강동구청에서 구암정(龜巖亭) 정자를 지어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둔촌동은 둔촌의 호를 딴 지명인데, 지금은 서울시로 편입되었지만 옛 광주 땅인 이 지역 일대가 광주이씨의 세거지로 둔촌동 이후에 크게 부각되었으며, 자손들의 학문과 관계 진출이 또한 혁혁하여 광주이씨는 조선시대 최고의 가문을 이루었다.
관련 문화재
문화재명 : 둔촌 이 집 선생 묘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219호
소 재 지 :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243-1
지정년월일 : 2008. 05. 26
보호구역 : 40,693m²
규 모 (격) : 1기
소 유 자 : 광주이씨대종회
관 리 자 : 광주이씨대종회
둔촌 이집(遁村 李集)선생 묘
광주이씨 고옥과 재실(追慕齋)
광주이씨 재실(追慕齋)
둔촌 이집선생 영정(출처 : 성남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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