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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문화원·문화해설사·인문학

성남 옛 이야기 2 - 여인의 표상, 강정일당(姜靜一堂)

여인의 표상, 강정일당(姜靜一堂)

 

***** 강정일당(1772~1832)은 조선 후기의 여류문인. 본관은 진주(晋州), 초명 지덕(至德), 정일당(靜一堂)은 당호이다.

어릴 적 이름은 지덕(至德)으로, “여기 지극한 덕을 갖춘 사람이 있으니 네게 부탁한다는 어머니의 태몽에서 따온 것이다. 어릴 적부터 성품이 정정단일(貞靜端一)하고 희로애락을 잘 드러내지 않았으며, 문밖에 나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삼가 조심하는 등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허약한 체질이긴 하였지만 누구보다도 뛰어난 여공(女工) 솜씨를 지녀서 모든 어른들로부터 ‘”천인(天人)과 같은 아이로구나!” 하는 칭찬의 말을 자주 들으며 성장하였다.

부모가 병이 들면 옷도 벗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약과 음식에 정성을 다하였고, 어머니의 바느질과 길쌈을 밤새워 도왔다. 여덟 살 때부터 시경≫, ≪예기등에 나오는 경전 구절을 배웠다. 여자에게 학문을 가르치지 않던 당시의 관행으로 보면, 예외적일 만큼 문학적 소양과 재덕을 겸비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정신적 스승인 아버지를 열일곱에 여윈 정일당은 몸이 상할 만큼 슬퍼하며 3년 상을 치렀지만, 바느질과 베짜기로 어머니를 도우며 집안일에 헌신하는 등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정일당은 20살 때, 6살 연하의 충주 선비 탄재(坦齋) 윤광연(尹光演 : 1778~1838)에게 출가한다. 그의 어머니 천안전씨는 전여충(全汝忠)의 딸로 아호를 지일당(只一堂)이라고 하였는데 역시, 시문(詩文)으로 며느리 강정일당과 화답이 될 만큼 여류문사의 자질이 뛰어난 훌륭한 집안이었지만, 가정형편은 아주 곤궁했다. 그래서 정일당은 가난한 친정에 계속 머물다가 3년 후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시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남편을 도와 함께 공부하였다.

이후 18년 동안 모신 시어머니가 사망하자 정일당은 더욱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며 온갖 궂은일을 감당하게 된다. 게다가 5 4녀라는 자녀를 모두 어린 나이에 잃는 참척(慘慽)의 슬픔을 당하고 양자를 둔다. 그러나 정일당은 의연했다.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은 자기 도리를 스스로 다할 수 없는 데 있으니 무엇을 원망하며 허물하겠습니까?” 라며 슬픔을 극복했다니, 보통 여자와는 다른 도학자적 면모가 강했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후 정일당은 남편의 공부를 독려하며 집안을 혼자 이끄는 한편 자신의 공부에도 매진한다.

정일당은 남편의 학문에 대한 점검과 채근도 자주 했다. 이는 필요할 때마다 조언해 달라는 남편의 부탁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 윤광연도 정일당의 조언을 반발 없이 수용했으니 그 역시 당시의 보통 남자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던 듯하다.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 외에도 공부중 의문이 들거나 견해가 다를 때면 척독(尺牘)을 주고받았는데, 이를 보면 정일당은 선현의 생각을 그냥 따라가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주체적 시각으로 해석하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이 높이 평가된다.

과천에 살던 어느 해 흉년이 들어 3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도 가계(家計)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등 치산(治産)에도 힘써, 말년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에 서울로 이사하여 남대문 밖의 약현(藥峴 : 지금의 중구 중림동)에 살 때에는 남편의 호를 따서 지은 탄원(坦園)이라 명명한 정원이 딸린 넓은 집에서 살게 되었으며, 청계산 동쪽 넓은 임야를 선조들의 위토로 사서 3대 조상의 묘소를 새로 옮겨 단장하기도 하였다. 또 형제와 친척들 혼례와 상례를 대신 치러주기도 하였다.

현재, 성남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 관리되는 수정구 금토동(金土洞) 산자락 묘역 전체가 모두 정일당이 생존시에 마련한 선영(先塋)으로 자신의 묘소도 이곳에 있으며 여성으로는 드물게  추모 사당도 가지고 있다.

정일당은 서화에도 능하여 홍의영(洪儀泳), 권복인(權復仁), 황운조(黃運祚) 등의 필법을 이어받았으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사람들이 그의 남편에게 글을 청하면 대신 지어주는 일이 많았다. 정일당이 죽은 후 남편 윤광연은 이제 공부하다 의심나는 것을 누구에게 물어보고, (∙∙∙∙∙∙) 허물은 누가 타일러줄 것인가?” 라며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내의 유고문집을 펴내었으니, 그 또한 범상한 일이 아니라 생각된다. 그렇게 탄생한 정일당유고에는 시 38, 5, 10, 3편과 묘지명, 행장 등 정일당이 생전에 추구하고 쓴 글들이 오롯이 실려 있다.

언젠가 이직보(李直輔)가 정일당의 시 한 수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는데, 이 소문을 들은 이후로는 자신의 저술을 일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정일당유고 1책이 있다.

 

관련 문화재

강정일당 묘 (성남시 향토유적 제1)

문화재명   : 정일당 강씨 묘

지정번호   : 성남시 향토유적 제1

소 재 지    :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청계산 산75

지정년월일 : 1986. 3. 4

규 모()    : 높이 1.5m, 둘레 15.5m

보호구역    : 500

소 유 자     : 파평윤씨 28세 단제공파종회

 

묘소 위치 : 찾아 갈 일이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