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키 39.2m로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뿌리 부분 둘레만 해도 15.2m나 된다. 나이는 약 1,100년으로,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가 용문사를 창건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심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큰소리로 울어 위험을 미리 알렸다고 하는데,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승하했을 때는 가지 한 개가 부러졌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이런 용문사 은행나무를 소중히 여겨 조선 세종 때 당상관(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망국의 한을 품고 떠난 마의태자”
마의태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로, 신라가 고려 왕건에 대항할 길이 없어 군신회의를 열고 항복을 논의할 때 신라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말하며 항복에 반대하였다. 결국 고려에 항복 문서가 전달되자 마의태자는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마의태자가 궁을 떠나 개골산으로 가던 중 용문사에 들렀을 때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상세설명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서 최고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외에도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 정미의병(1907)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도 한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당상관(정3품)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키 39.2m로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뿌리 부분 둘레만 해도 15.2m나 된다. 나이는 약 1,100년으로,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가 용문사를 창건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심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키 39.2m로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뿌리 부분 둘레만 해도 15.2m나 된다. 나이는 약 1,100년으로,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가 용문사를 창건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심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키 39.2m로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뿌리 부분 둘레만 해도 15.2m나 된다. 나이는 약 1,100년으로,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가 용문사를 창건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심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키 39.2m로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뿌리 부분 둘레만 해도 15.2m나 된다. 나이는 약 1,100년으로,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가 용문사를 창건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심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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