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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벗어놓은 스타킹- 나희덕

 

벗어놓은 스타킹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 처럼

 

생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그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색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 나희덕(1966~) -

 

나희덕(羅喜德, 1966 ~ )대한민국시인이다. 충청남도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인의 말>

뿌리에게꽃의 향기에 비해 과일의 향기는 육화된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다. 나의 시가 그리 향기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는 이유는,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삶과 시에 대한 이 미더움을 버리지 않고 천천히 익어가고 싶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삶의 깊이를 헤아리고 담아내는 일이란 결국 그것의 비참함과 쓸쓸함을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걸 이제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비참함과 쓸쓸함이 또한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면, 느릿느릿, 그러나 쉬임없이 그리로 갈 것이다. 매순간 환절기와도 같을 세월 속으로.

그곳이 멀지 않다고통을 발음하는 것조차 소란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이 안으로 안으로 타올라 한 줌의 재로 남겨지는 순간을 기다려 시를 쓰고는 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침묵의 순연한 재가 아니었다. 끝내 절규도 침묵도 되지 못한 언어들을 여기 묶는다. 이 잔해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의 소음 속으로 돌아갈 운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두워진다는 것언제부턴가 내 눈은 빛보다는 어둠에 더 익숙해졌다. 그런데 어둠도 시에 들어오면 어둠만은 아닌 게 되는지, 때로 눈부시고 때로 감미롭기도 했다. 그런 암전(暗電)에 대한 갈망이 이 저물녘의 시들을 낳았다. 어두워진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밝히려는 내 나름의 방식이자 안간힘이었던 셈이다.

사라진 손바닥'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이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이제 나를 놓아다오.

[출처] 위키백과

민속촌 마상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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