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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한양호일(漢陽好日)- 서정주/ 작약 5장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시] 2012.5.7(월)

 

한양호일(漢陽好日)

열대여섯짜리 少年이 芍藥(작약)꽃을 한아름 自轉車뒤에다 실어끌고 李朝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길을 지내가면서 軟鷄(연계)같은 소리로 꽃사라고 웨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디려진 玉色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脈이 담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白紙의 窓을 열고 꽃장수 꽃장수 일루와요 불러도 통 못알아듣고 꽃사려 꽃사려 少年은 그냥 열심히 웨치고만 가오. 먹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위에 올라서선 芍藥꽃 앞자리에 넹큼 올라타서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 가오.

―서정주(1915~2000)

 



열대여섯 살의 꽃이 이제 막 핀 꽃을 팔러 다닌다. 하마터면 자기까지를 사겠다고 덤비는 이도 있겠다. 나 같으면 그러고 싶을 게다. 꽃에 반해서 자기 신명 속을 가는 소년이여. 나의, 우리들의 영영 잃어버린 고향이여. 꽃을 팔아 이문을 남겨 돈을 벌게 생겼는가. 꽃에 반해 그저 싱글벙글 한시라도 행복하겠는가. 막 목청 트인 목소리로 꽃을 사라고는 외치나 그것은 호객일 수 없고 그저 그러한 가사의 신명 들린 노래였으니 그 소리에 반해서 창호지 창문 열고 부르는 아주머니의 표정도 꽃빛이었을 터.

실지로 이 소년은 꽃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양의 어느 골목의 풍경을 넉넉히 하기 위한 것이 제 일인 듯하다. 꽃 앞자리에 냉큼 앉아 내닫는 꽃 소년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과속이여. 나랑 자리를 바꿀까나. 먹기와집 위의 옥색 공기, 그 사이의 백색 창호문, 그리고 작약꽃의 그 진보라 내지 유백색의 꽃잎들, 이만한 색채면 저 색(色)의 마술사라는 앙리 마티스의 붓만 빌리면 되지 않겠나. 호일(好日)은 호일이다! [시평: 장석남 시인]

 

서정주 [徐廷柱]한국 시인 | 브리태니커

1915. 5. 18 전북 고창~ 2000. 12. 24 서울.향년 85세. 토끼띠. 시인.

호는 미당(未堂)·궁발(窮髮). 시세계의 폭넓음과 깊이로 해서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손꼽힌다.

어린시절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부안 줄포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 이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곧 자퇴하고 박한영의 도움을 받아 대한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1941년 동대문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동아대학교·조선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60년 이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해방 후에는 좌익측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대응하여 우익측이 결성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사 문화부장,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역임했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 위원장을 지냈고, 1950년 6·25전쟁 때는 종군 문인단을 결성했다.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천되었고,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서정주(徐廷柱 1915년 5월 18일 ~ 2000년 12월 24일)는 토속적 불교적 내용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쓴 한국의 이른바 생명파 시인이다. 호는 미당(未堂)이다..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했다. 남의 집의 종이 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3년 겨울 개운사 대원암에서 영호당 박한영 스님 밑에서 수학했다. 1936년 동국대학교를 중퇴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출처] 위키백과

 

생명파 시
1930년대의 시
특징 : 삶의 깊은 오뇌와 본원적 생명력의 탐구 정신을 강조
토속적인 소재와 전통적인 가치의식 추구
철학적 사색으로 시의 내부공간 확대
서정주
경 향 : 원시적 생명 의식과 전통적 정서에 의거한 인생의 성찰
대표작 : 화사, 자화상, 국화 옆에서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1915~2000)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어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작약 전체 모습

 

작약 꽃과 벌들 모습

 

작약꽃의 암술 수술 모습

 

작약 6월 열매

 

작약 6월 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