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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6월 1일 금요일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유스티노

2012년 6월 1일 금요일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복음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라.>


 

유스티노 성인은 100년 무렵 팔레스티나 나블루스의 그리스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그리스 철학에 몰두하던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입교하여 신앙의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성인은 에페소에서 유다인 트리폰과 종교 토론을 가지고 이를 토대로 『트리폰과 나눈 대화』를 저술하였으며, 로마 황제와 원로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책도 많이 펴냈다. 로마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기도 한 성인은 165년 무렵 다른 6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하였다.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는 종말이 임박한 것으로 알았다. 베드로 사도는 교우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면서 어떤 시련 속에서도 기뻐하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데 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 받을 징벌에 대한 예고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성전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깨워 주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가 되십시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4,7-13

복음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1-25


 

오늘의 묵상

상인들과 환전상들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얻은 이익은 대사제 같은 백성의 지도자 몫으로 돌아갑니다. 상인들과 환전상들은 성전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동은 그들의 돈줄을 끊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절의 횡포와 수탈로 고통 받던 절 아래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사하촌』(寺下村)이라는 단편 소설이 생각납니다. 이 소설에서, 절은 화려하고 웅장하나 마을 사람들은 절 땅을 소작하면서 겨우 목숨을 이어 가며 살아갑니다. 가뭄이 들어 주민들이 어려움을 하소연해도 절은 관심이 없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주민들을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수탈의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분노한 주민들이 참다못해 절에 불을 지르러 가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은 그리하지 못하더라도 종교인들은 다르게 살아가기를 기대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살되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지 않는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크고 화려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에 살되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부와 명예를 좇아도 교회의 발걸음은 먼저 어둡고 그늘진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지 살펴볼 일입니다.

 

 

명동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니다

 

유스티노(6.1)
성인명 유스티노(Justin)
축일 6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교부, 순교자, 호교론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00/110?-165년
같은이름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누스, 저스틴


교부 성 유스티노(Justinus)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리스도 신앙도 사실은
2000년에 걸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노력에 의해
전해지게 된 것임을 잊게 되는데
성 유스티노는 이런 점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신앙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유스티노(100-165년)는 그리스 사람으로 사마리아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135년 경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당대 지식인들이 그러하듯이 그 역시 수사학, 시,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스토아학파나 피타고라스학파 등 당시의 철학에서 진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유스티노가 에페소의 바닷가를 걷고 있던 중
한 노인을 만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관해 듣게 되었다.
“나의 영혼은 즉시 끓어올랐고,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엄습해왔다.
그리고는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유익하고 확실한 철학임을 깨닫게 되었다.”
노인과의 섬광 같은 만남을 술회한 내용으로 그가 그토록 도달하고자 했던 진리를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찾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150년경에는 로마로 건너가서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을 가르쳤으며,
호교론 학파를 설립하였고, 대표적인 저서들을 저술했다.
성 유스티노의 중요성은 성 클레멘스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저술을 집필한 반면 그는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방어하는 글들, 이른바 호교론을 썼다는 데에 있다.

유스티노가 살았던 로마 제국은 수천 종류의 신이 존재했던 다신교 국가였으며
당시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는 존중되지도, 인정받지도 못했던
수많은 종교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그리스도교인들은 근친상간을 한다는 둥,

식육을 먹는다는 둥 흉흉한 소문마저 나돌고 있었고,
세례와 성체성사는 이상한 마술로 여겨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스티노는 그리스도 교인들이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한 신의 모습임을 알림으로써
당시 떠돌던 흉흉한 소문들이 근거 없음을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이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정직하게 상업을 하며,
이웃과 평화를 나누는 사람들임을 알렸다.

유스티노가 살았을 무렵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오늘날의 형태로 완벽하게 완성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기 위해
하느님이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힘을 통해 하느님이 죄와 마귀의 힘을 누르고 인간을 구원했음을 알렸다.
또한 부활한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것임을 알렸으며,
타 종교와 구별되는 세례 성사와 성체 성사에 대해서도 자세한 기술을 남겼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교리들이 바로 이런 학자들의 덕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성 유스티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성적 방어와 반대파의 주장을 누르는
빼어난 논쟁 능력은 많은 적들을 낳게 되었고,
마침내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 시절인 165년6명의 교인들과 함께 참수형을 당했다.
대표적 저서로 ‘호교론’과 ‘트리폰과의 대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 유스티노를 그린 명화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필자가 찾은 유일한 이 그림은 20세기에 한 무명의 화가가 그린 것으로
성 유스티노를 토가를 걸치고 있는 로마 귀족의 모습으로 그렸다.
좌측에 SPQR이라고 쓴 대는 ‘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로,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을 뜻하며 유스티노가 로마제국 시대에 살았음을 암시한다.
그림에서와 같이 학자나 복음 저자를 그릴 때 흔히 책이나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초기 교회의 신학적 밑거름이 되셨으며
주님 제단에 순교의 피를 뿌리신
성 유스티노 님이시여,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영원한 복락 가운데
저희를 위하여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