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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6월 2일 [(녹) 연중 제8주간 토요일]/<권위를 행사하되 맛들이지 말아야>

2012년 6월 2일 [(녹) 연중 제8주간 토요일]

 

복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묵상 <예수님께서는 답변 대신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하고 되물으십니다.>

 

 

말씀의 초대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신자들에게 믿음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성장시켜 나가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가지고 시비를 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편견과 오해를 스스로 성찰하도록 질문을 되돌리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은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서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 유다서의 말씀입니다. 17.20ㄴ-25
복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7-33

 

오늘의 묵상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으며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답변 대신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하고 되물으십니다. 그들은 군중을 두려워하여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군중은 요한 세례자를 참된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군중은 마음이 순수하여 요한을 제대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실속을 차리려고 군중이 아는 진실을 외면합니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이는 백성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는 백성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백성의 마음을 읽어 내야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를 생각해 봅니다. 공동체의 책임자는 구성원들을 이해하며 포용할 수 있는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면 오히려 기대하는 권위는 사라지고 맙니다. 침묵 속에 있는 가난하고 슬픈 소리를 많이 들을 때 거기에서 참된 권위가 나옵니다.

 

 

명동성당 대성전 십자가의 길 제15처~ 십자가의 길이 '14처'가 아니고 '15처' 입니다...ㅜㅜ...^-^

 


6월 2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 마르코 11,27-33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권위를 행사하되 맛들이지 말아야>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디든지 권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간사회는 불가피하게 권위의 행사를 필요로 하고 어쩔 수 없이 지도자가 요구됩니다.


인간 세상에서 권위는 때로 큰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누군가 위에 군림한다는 것은 꽤 괜찮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주의할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권위를 행사하되 권위에 맛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위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의 눈에는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나’뿐입니다. 세상 역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왜곡된 권위는 자신도 망가트릴 뿐만 아니라 이웃도 괴롭히고, 공동체 전체를 힘들게 만듭니다. 교회 봉사자로서 목숨 걸고 끝까지 배척해야할 것이 쓸데없는 권위주의입니다.


관료 사회 안에서 늘 염두에 둬야할 요소가 ‘권한’ 문제입니다. 군대생활이나 직장생활도 마찬가지겠지요.


‘내 권위가 발휘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 인가?’를 잘 파악하고 처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괜히 멋모르고 ‘나대다가’ 남의 영역을 침범하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뛰어넘어 권위를 행사하다가는 ‘직권남용’으로 쇠고랑을 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나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지니고 있는 직속라인, 그래서 내가 목숨 걸고 줄을 잘 서야 하는 직속 라인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권한 문제를 가족구성원들 간이나 교우관계 안에서, 또는 신앙생활이나 교회 안에서까지 똑같이 적용하려한다면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 모든 권한이나 권위의 원천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계신 분입니다.


존경하는 주교님이나 신부님들, 수도자들이나 평신도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교황님조차도 스스로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분들은 주님나라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으로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당신의 권위를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권위나 권한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뛰어나서 지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권위나 권한은 베푸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배하고 군림하라고, 휘젓고 다니라고, 큰소리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도 그 반대입니다. 봉사하라고, 희생하라고, 죽으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역사가 흘러갈수록 유다사회 지도자들은 역행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수석 사제들, 율법학자들, 원로들... 이들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영적, 정신적, 사회적 흐름을 주도하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부여하신 권위를 잘못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남용했습니다. 그 결과 다 함께 죽음의 길을 향해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웃사랑의 실천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 신앙의 쇄신이나 성장을 위한 본래적 의미의 권위 행사는 뒷전이 되었고 경직된 권위주의만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은 예수님은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는 철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권위행사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위한 권위행사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한 아름 은총의 선물을 나눠주기 위한 권위의 행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당신의 권위를 나눠주십니다. 그 권위는 다름 아닌 사랑의 권위입니다. 봉사의 권위입니다.


겸손과 온유를 바탕으로 한 권위야말로 진정한 권위입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수난, 십자가의 영성을 바탕으로 한 권위야말로 참된 권위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