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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6월7일[(녹) 연중 제9주간 목요일]/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6월 7일 [(녹)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복음 전파의 성실한 일꾼이 되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첫째가는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며 그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2,8-15

복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오늘의 묵상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내리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무슨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리사랑을 도덕적 의무로 규정하는 일은 없습니다. 부모로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의무로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려면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효도를 의무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무슨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억제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느님의 본능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느님께서 나와 똑같이 당신의 자녀인 나의 이웃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와 나를 거쳐 이웃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천주교 양근성지 순교자 기념성당 십자가의 길 제5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6월 7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The first is th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Lord alone!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The second is this: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Mk.12,30-31)


제1독서 2티모테오 2,8-15
복음 마르코 12,28ㄱㄷ-34

1943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입체파 화가로 유명한 피카소가 길을 걷다가 우연히 버려진 자전거 한 대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전거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안장과 핸들을 떼어 내고 안장 위에 핸들을 거꾸로 붙인 뒤 ‘황소머리’라는 이름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버려진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로만 만들어진 이 작품이 50여 년이 지나 런던의 한 경매장에 나와서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예술성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이 작품(제가 미술에 문외한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쓰레기에 불과한 자전거를 이용한 작품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 싶었는데 글쎄 자그마치 293억 원이라는 금액에 낙찰된 것입니다.

그가 안장과 핸들에 색깔을 입혔거나 어떤 기술을 이용해서 인위적인 가공을 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것은 단순히 안장 위에 핸들을 거꾸로 붙인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쓰레기에 불과할 수 있는 자전거가 수백억이 넘는 고가의 미술품으로 탈바꿈된 것입니다.

여기서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제가 피카소처럼 안장과 핸들을 떼어서 ‘황소머리’라는 작품을 발표했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떻게 평할까요? 또 사람들은 이를 얼마에 구입하려 할까요? 아마 아무도 구입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저런 장난을 치는 거야? 혹시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냐?”라면서 흉을 볼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누구의 손을 거치느냐에 따라서 뛰어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누구의 손을 거쳐서 창조된 것일까요? 바로 세상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손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귀하고 뛰어난 작품이 될 수 있도록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을 전해주십니다. 그 계명이 오늘 복음에 나오지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역시 귀한 존재, 하느님의 뛰어난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렇게 만들려는 하느님의 의지에 제대로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보다 미움을 따르려하고, 긍정적인 마음보다는 부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과연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오늘 복음에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를 향해 하셨던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말을 과연 들을 수 있을까요?

이제는 사랑을 최고의 계명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나를 귀하고 뛰어난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계명입니다.


행복만큼 당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화장품은 없다(마거리트 가드너 블레싱턴).



이것이 피카소의 '황소머리'라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어느 외국 대학 건물 벽에는 ‘그리고, 그래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매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자네는 지금 여기에 왜 앉아 있는가?”
“공부하려고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 열심히 해서 졸업해야지요. 그리고 졸업하면 취직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취직해서 결혼도 하고 먹고 살아야지요.”
“그리고?”
“그냥 사는 겁니다. 세상에 좋은 일도 해 가면서요.”
“그래서?”
“글쎄요. 살다가 때가 되면 죽겠지요.”
“맞아. 그러니까 자넨 지금 여기에 죽기 위해 앉아 있구먼.”

여러분들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일까요? 끊임없이 ‘그리고’와 ‘그래서’를 반복해서 질문하여 보십시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