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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빗 속의 고래 싸움―정홍명(鄭弘溟·1582~1650)/안목해변 파도외 2장

 

빗 속의 고래 싸움

 

고래가 비를 맞으며 바다에서 노는데
솟구친 이마와 코, 기세가 흉포하다
높은 파도 말아 올려 우주를 막아선 듯
외로운 섬 뒤흔들어 폭풍우가 싸우는 듯
대양의 남만(南蠻) 배는 뒤집힐까 걱정하고
바닷가 어촌에는 비린내가 뒤덮였다
회를 치면 배부르게 포식 한번 하겠구나
허리에 찬 청평검(靑萍劍)을 웃으며 바라본다

―정홍명(鄭弘溟·1582~1650)


雨中觀鯨鬪(우중관경투)

鯨魚得雨戱滄溟(경어득우희창명)
額鼻軒空氣勢獰(액비헌공기세녕)
怒捲層濤妨宇宙(노권층도방우주)
聲掀孤嶼鬪風霆(성흔고서투풍정)
中洋蠻舶渾愁覆(중양만박혼수복)
傍岸漁村盡帶腥(방안어촌진대성)
斫膾可堪供一飽(작회가감공일포)
笑看腰下有靑萍(소간요하유청평)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한시(2012.6.9)이다. 안대회 교수의 한시평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호(文豪)인 송강 정철(1536~1593)의 아들 정홍명이 동해 바닷가에 머물 때 비를 맞으며 성곽에 올랐다. 바다에는 고래가 떼로 몰려와 솟구쳤고 어선이 다가가 총을 쏘며 잡으려 했다. 성곽 위에서 그 장면을 내내 지켜보던 그는 시를 지어 호쾌한 기분과 벅찬 감동을 힘차게 드러냈다. 운 좋게 본 장면에 몸도 마음도 바다와 고래의 기운을 받은 듯 허리에서 검을 뽑아 고래를 회 치고 싶다는 호기가 불끈 솟구쳤다. 누군들 그러지 않으랴! 거대하고 역동적인 고래의 군무(群舞)를 구경한다면 흉금이 툭 터질 것만 같다.

정홍명 [鄭弘溟]조선 문신·학자 | 브리태니커

1592(선조 25)~ 1650(효종 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서인 중 소서(少西)에 속했고 김장생(金長生)의 학풍을 이어 주자학 경전과 예학(禮學)에 밝았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용(子容), 호는 기암(畸庵)·삼치(三癡). 아버지는 서인의 거두 우의정 철(澈)이며, 어머니는 유강항(柳强項)의 딸이다. 송익필(宋翼弼)·김장생에게 수학했고,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합격했다.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나, 대북(大北)의 견제를 받자 사직하고 향리에서 학문연구에 진력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관직에 복귀하여 검열·정자·수찬을 거쳤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공주까지 왕을 호종(扈從)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 정언·헌납·이조정랑을 거쳤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후 좌의정 김유(金瑬)가 북인 남이공(南以恭)을 대사헌으로 등용하려 할 때 이귀(李貴)·장유(張維)·김상용(金尙鎔) 등과 함께 반대, 소서를 이루어 김류·신흠(申欽) 등의 노서(老西)와 대립했다. 1627년 집의를 거쳐 부제학·대사성·김제군수 등을 역임한 뒤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가 은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했고 전쟁 후에는 다시 함양군수로 임명되었다. 1646년 대제학을 끝으로 은퇴하여 주자학 연구에 진력했다. 저서로 〈기암집〉·〈기옹만필〉이 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강원도 안목해변 파도

 

낙산사 의상대에서 바라다 본 전진항 바다 

 

낙산사 의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