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한시(2012.6.9)이다. 안대회 교수의 한시평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호(文豪)인 송강 정철(1536~1593)의 아들 정홍명이 동해 바닷가에 머물 때 비를 맞으며 성곽에 올랐다. 바다에는 고래가 떼로 몰려와 솟구쳤고 어선이 다가가 총을 쏘며 잡으려 했다. 성곽 위에서 그 장면을 내내 지켜보던 그는 시를 지어 호쾌한 기분과 벅찬 감동을 힘차게 드러냈다. 운 좋게 본 장면에 몸도 마음도 바다와 고래의 기운을 받은 듯 허리에서 검을 뽑아 고래를 회 치고 싶다는 호기가 불끈 솟구쳤다. 누군들 그러지 않으랴! 거대하고 역동적인 고래의 군무(群舞)를 구경한다면 흉금이 툭 터질 것만 같다.
정홍명 [鄭弘溟]조선 문신·학자 | 브리태니커
1592(선조 25)~ 1650(효종 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서인 중 소서(少西)에 속했고 김장생(金長生)의 학풍을 이어 주자학 경전과 예학(禮學)에 밝았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용(子容), 호는 기암(畸庵)·삼치(三癡). 아버지는 서인의 거두 우의정 철(澈)이며, 어머니는 유강항(柳强項)의 딸이다. 송익필(宋翼弼)·김장생에게 수학했고,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합격했다.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나, 대북(大北)의 견제를 받자 사직하고 향리에서 학문연구에 진력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관직에 복귀하여 검열·정자·수찬을 거쳤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공주까지 왕을 호종(扈從)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 정언·헌납·이조정랑을 거쳤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후 좌의정 김유(金瑬)가 북인 남이공(南以恭)을 대사헌으로 등용하려 할 때 이귀(李貴)·장유(張維)·김상용(金尙鎔) 등과 함께 반대, 소서를 이루어 김류·신흠(申欽) 등의 노서(老西)와 대립했다. 1627년 집의를 거쳐 부제학·대사성·김제군수 등을 역임한 뒤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가 은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했고 전쟁 후에는 다시 함양군수로 임명되었다. 1646년 대제학을 끝으로 은퇴하여 주자학 연구에 진력했다. 저서로 〈기암집〉·〈기옹만필〉이 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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