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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6월11일 월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위로의 아들, 바르나바>묵상

2012년 6월 11일 월요일 [(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의 레위 지파 출신으로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성인의 본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이다(콜로 4,10 참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는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

 

말씀의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파견한다. 바르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안티오키아로 가는데, 그곳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복음 선포자로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평화를 빌어 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하신다(복음).

제1독서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21ㄴ-26; 13,1-3

복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7-13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나갈 때에 전대에 아무것도 넣지 말뿐더러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할 때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은 약간의 돈과 양식, 속옷 두 벌, 신발과 지팡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도 지니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예수님 말씀을 가장 완벽하게 따른 분이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성인은 아시시에서 미사에 참석했다가 ‘길을 나설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복음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은 그에게 주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대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신발과 옷, 지팡이를 버리고 가난을 누이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한 삶은 당시 무너져 가는 교회를 떠받쳐 주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집 안을 둘러보니 일 년 동안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옷과 책이 많습니다. 제 삶의 목적은 짐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홀가분하게 살면 그만큼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나 자꾸만 채우고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필요도 없이 지나치게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요?

 

 

 

 

천주교 양근성지 순교자 기념성당 순교자의 길 제8 처

 

 

 


 

6월 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 사도행전 11,21ㄴ-26; 13,1-3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위로의 아들, 바르나바>

 

 

 

바르나바 사도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후부터 사도들로부터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르나바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입니다. 그는 이름에 걸맞게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그칠 줄 모르는 격려를 건넸습니다.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 아시다시피 참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갖은 오해와 모함, 몰이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 박해로 인해 하루하루 풍전등화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흔들리고 방황하는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바르나바 사도는 든든함 그 자체였습니다.

 

 

지중해 동쪽에 위치한 키프로스 섬에서 태어난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지만 예루살렘 순례 중에 우연히 사도들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자진해서 가입하게 됩니다.

 

특별히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가입하기 전에 밭을 비롯해서 꽤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들 다 팔아 사도들 앞에 갖다 바쳐 복음 선포 사업에 쓰이게 했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사도행저 4장 36~37절)

 

사도행전 1장 24절을 통해 우리는 배반자 유다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도 한명을 뽑는 과정에서 최종 결선까지 올라갔다가 탈락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르나바는 사도들의 제비뽑기에서 탈락해 열두 사도단에 들지는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12사도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성심성의껏 그리스도교 전파에 투신합니다. 그 결과 12사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당시 사람들로부터 바오로와 함께 사도라는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함께 열두 사도들에게 소개되었고 그들의 동역자가 됩니다. 특별히 바르나바 사도는 안티오키아 지방 복음화에 1년 이상 헌신하였고,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습니다.

 

 

특별히 바르나바는 회심 초기 바오로 사도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을 때 그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박해에 워낙 앞장섰던 바오로 사도였기에 아무리 그가 크게 회심을 했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그런 순간 바르나바는 정성껏 그를 보필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집회에 그를 모시고 가서 소개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는 아주 끈끈한 우정관계가 형성되어 바오로 사도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도 동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 사촌동생 마르코를 선교팀에 포함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바오로 사도와 견해를 달리하게 되어 결국 바오로 사도와 갈라서게 되어 마르코 복음사가와 키프로스로 돌아오게 되지요.

 

교회 전통에 따르면 바르나바 사도는 로마, 밀라노 등지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기원후 63년경 키프로스섬 살라미나에서 유다인들의 돌에 맞아 죽음을 통해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바르나바는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초세기 교회, 복음 선포 과정에서 직면한 숱한 난관과 시련 가운데서도 그의 태도는 일관되게 긍정적이었고 낙관적이었습니다. 복음 선포 과정에서 겪는 노골적인 적개심, 그리고, 추방 앞에서도 항상 당당했고 기뻐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의 삶 한 가운데 늘 현존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와 삶, 지칠 줄 모르는 복음 선포 열정에 큰 감동을 받은 수많은 이교도들이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심초기 유다인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당하던 바오로 사도를 끝까지 지지해주었으며 그의 복음 선포 사업에 성심성의껏 협조함을 통해 초기 교회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바르나바 사도에 대한 사도행전의 묘사를 읽다가
          문득 어떤 사람이 복음을 잘 선포할까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르나바를 착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착한 사람이기에 바르나바는

          복음을 잘 선포하고 사도가 되었을까요?
          착하다고 복음을 잘 그리고

          열심히 선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 혼자 착하게 사는 것으로 그칠 수 있지요.

          우리 주변에 그런 분들이 꽤 있지요.
          너무도 착해서 그것으로 사람들을 감화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신앙생활에 입문하기는 하지만
          착한 사람이 꼭 복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착한 사람보다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복음을 잘 또는 열심히 선포할 것 같습니다.
          착한 사람은 선을 많이 지니고 있고

          그 선을 움켜쥐지는 않아도
          그 선을 적극적으로 나누는 것은

          역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착한 사람은 분명 선을 많이 가지고 있고

          움켜쥐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나눠주려고 하지 않을 수 있고,
          적어도 주지 못해서 안달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장사로 치면 착한 사람은
          많은 좋을 것을 진열해놓고는

          찾아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고,
          스스로 누가 와 좋은 것임을 알면

          그래서 원한다면 사라는 식입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적극적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지도 않고
          물건이 얼마나 좋은지

          붙잡고 설명하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 많은 사람이

          선을 적극적으로 나누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복음을 잘 그리고

          훌륭히 선포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복음은 주님의 복음이기에
          은총으로 주님을 체험한 사람,
          아니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
          곧 주님의 성령을 체험한 사람만이

          잘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기 기원이 아닙니다.
          은총으로 체험한 주님이 그 복음 선포의 기원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은총은 공짜이고
          높으신 하느님이 공짜로 주신 최고의 선입니다.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진

          최고의 선이 바로 복음임을 믿은 사람,
          이 사람이 바로 바르나바 사도이고,
          그 믿음 덕분에 충만한 성령의 사랑으로

          복음을 선포한 사람이
          또한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착한 사람도 되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되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