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굿뉴스 강론

2012년 6월 12일 화요일 [(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여복 많은 신부-강길웅 묵상

2012년 6월 12일 화요일 [(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복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묵상 “소금 인형의 전설”

 

 

말씀의 초대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방인 지역인 시돈 지방의 사렙타에 사는 한 과부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청한다. 오랜 가뭄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한데도 가난한 과부는 자기가 가진 것을 엘리야에게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강조하신다. 제자들의 착한 행실은 결국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7-16
복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3-16

 

오늘의 묵상

소금으로 만든 인형이 있었는데, 우연히 바닷가에 다다랐습니다. “얘, 이름이 뭐니?” “응, 내 이름은 바다야.” “바다? 바다가 뭐야?” 바다가 대답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는 곤란해. 직접 네가 내 안에 들어와 보면 알 수 있어.” 소금 인형은 이 말을 듣고 바다에 들어갔습니다. 소금 인형은 점점 자신의 몸이 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이 없어질수록 소금 인형은 바다를 조금씩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작은 알갱이마저 사라지려고 하는 순간, 소금 인형은 “난 이제 바다야.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바로 나란 것을.” 하고 환희에 찬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금 인형의 전설”이라는 짧은 우화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그의 세계에 뛰어들어 그의 기쁨과 슬픔을 나의 것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세계에 내 몸을 담그고 그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바다를 만나도 바다에 온몸을 담그지 않으면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소금 인형처럼 자신의 몸이 녹아 사라질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것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뇌를 우리 것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나를 녹이는 아픔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것은 내가 비로소 소금이 되어 녹아야만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천주교 양근성지 순교자 기념성당 십자가의 길 제 9 처

 

 


 

찬미예수님!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강길웅 신부의 소록에서 온 편지

1 "안 된다니까, 그래!"

여복(女福) 많은 신부
지난 6월(1999) 충남 합덕에 있는 솔뫼성지에서 광주교구 사제 피정을할 때의 일이었다. 방을 함께 쓰던 동기 신부가 휴대폰 전 화기를 켜 놓고는 수시로 뭔가를 점검하는데 침묵에 방해가 될 뿐 만 아니라 보기도 아주 민망스러웠다. "아니, 이 사람아! 피정하면서 뭔 전화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가?" 보다 못해 한마디를 퉁명스럽게 던졌더니 그 신부가 코 먹은 소 리를 했다. "아따, 성님은 좀 가만 계쇼!" "자네 하는 꼴을 보니 정신 사나워 무슨 피정이 되겠는가?" 볼멘 소리를 한 번 더 했더니 그 신부가 야릇한 웃음을 지으면 서 설명을 했다. 우리가 피정을 하는 바로 그 시간에 광주에 있는 자기 본당에서 는 아침에 자매들이 버스를 다섯 대나 대절해 남해 금산으로 여행 을 떠났는데 본당신부가 함께 동행을 못하니까 카세트 테이프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서 미리 반장을 시켜 각 버스에 나눠주고 왔 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테이프에는 본당신부 자신이 집접 부른 대중가요 두 곡과 그리고 정중한(?) 훈화가 들어 있는데 그것을 들은 부인들의 반응이 몹시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별일도 아니었다. "신경 끄게!" 괜한 것을 가지고 수선을 떤다고 잘라서 한마디 던지고는 말문 을 닫았는데 드디어 점심 때의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휴대폰으로 연락이 오는데 어쩌면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시고 사람을 웃기시느냐 하면서 아마 반응들이 제법 굉장 한 모양이었다. 전화 받는 꼴을 보니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서로가 킬킬 깔깔, 막말로 지랄 발광(?)을 하면서 오두방정을 다 떨었다. "아니, 이게 뭔 불상산가?" 희희낙락하며 요란 법석을 떠는 것이 내심 밸이 골려서 심통을 부렸더니 이 친구가 드디어 '불안한 남자들의 세태' 를 세대별로 털어놨다. 다음은 그 신부가 녹음해서 부인들에게 들려줬다는 내 용이다. 30대의 주부가 아침 화장을 짙게 하면 남편이 불안해한다고 한 다. 자기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는가 싶어서. 40대의 주부가 저녁에 집에서 샤워를 세게(?) 하면 남편이 아주 불안해한다고 한다. 오늘 밤엔 죽어났구나 하면서. 50대의 주부가 아침에 국을 잔뜩 끓이면 남편이 불안해한다고 한다. 저 여자가 도대체 밤 몇 시에 들어오려나 하고. 60대의 주부가 서랍을 만지작거리면서 남편보고 대화를 하자고 하면 남편이 덜덜 떨면서 계속 잘못했다고 마누라에게 빈다고 한 다. 이혼하자는 말이 나올까 봐. 70대의 할멈이 영감보고 제주도에 놀러 가자고 하면 남편이 절 대로 안 간다고 엉엉 운다고 한다. 혹시라도 할멈이 당신을 거기 에다 내버리고 올까 봐. 누가 만들어 내 유먼지, 신부들이 듣기에는 좀 얼굴 뜨거운 부 분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피정을 하다 말고 그야말로 실컷 웃었다. 그런데 불쌍한 건 남편만도 아니다. 어떤 본당의 주방언니는 본당신부보다 권한이 더 막강해서 신 자들이 "주교님" 이라고 부른다는데, 참으로 별 해괴망측한 주 교(?)도 다 있는 모양이지만, 신부도 그런 의미에서는 여복(女福) 이 있어야 한다. 상식이 없고 교양이 없는 여자는 대책이 없게 된 다. 반면에 여복이 있는 신부는 사제관이 조용하여 그 자체만으로 도 신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지만, 여복이 없는 신부는 사제관 의 시끄러움 때문에 자기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본당 전체가 아 주 몸살을 앓게 된다. 여자는 좌우간 바탕이 좋아야 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여복이 참 많은 신부다. 내가 만난 주방의 자매들은 하나같이 다 좋은 분들이었다. 배움이 부족한 분도 있었 지만 그러나 그만큼 더 순수했으며, 욕심들이 없으니 심성들이 참 고왔다. 아마 고생을 많이 하신 분들이라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를 몸에 익힌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심성 좋은 사람들이 세상살이에서는 팔자가 기구한 지 때로는 하느님이 야속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이 받은 아픈 상처가 아니라면 도대체 신부가 어떻게 혼자서 밥 먹고 살 건지 하느님의 섭리는 기묘하기만 하다. 남편이고 신부고 여자 잘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집회서에 나온다(25,18). "고약한 여자의 남편은 잔칫집에 가서도 한숨만 나온다." 신부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