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1일 목요일 [(백)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은 1568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군인이 될 처지였던 그는 귀족 사회의 폭력과 방종에 실망하고 선교사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다. 그는 17세 때 재산 상속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채 로마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성인은 1591년 로마 전역에 번진 흑사병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다가 감염되어 23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생 신분으로 선종하였다.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은 그를 시성하고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말씀의 초대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회개시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시키려고 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 또한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용감히 전한다(제1독서).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진솔한 대화이므로 기도할 때에는 꾸밈이 없어야 하고 빈말을 해서도 안 된다.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용서할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다(복음)
제1독서 <엘리야가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48,1-14
복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5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평생 남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을 위해 사신 분으로만 기억하기 쉽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관심사를 먼저 헤아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위한 존재이셨고, 하느님의 사람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나치게 인간 위주의 사고에 익숙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 것에 너무 얽매여 거기에 집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기가 쉽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의지를 죽이고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식별을 청하는 기도’로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주님! 제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시고, 참된 믿음과 굳은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제게 심어 주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거룩하고 참된 계명을 깨닫고 알아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십자가의 길 제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니다...^-^
6월21일(목) 聖 알로이시오 곤자가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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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정유경(p33233323) |
번 호 |
738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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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06-20 오후 12:15:59 |
조회수 |
102 |
추천수 |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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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이시오 곤자가(6.21)◀ |
성인명 |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
축일 |
6월 21일 |
성인구분 |
성인 |
신분 |
수사, 신학생 |
활동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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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연도 |
1568-1591년 |
같은이름 |
공사가, 알로이시우스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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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또는 알로이시오)는 1568년 3월 9일 이탈리아 북부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의 후작 페란테(Ferrante Gonzaga)와 마르타 타나 산테나(Marta Tana Santena)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다소 야만적이고 부도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깊은 사랑으로 알로이시우스를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알로이시우스의 아버지는 그가 군인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가정 교사였던 피에르프란체스코(Pierfrancesco del Turco)는 알로이시우스의 영혼과 정신을 길러 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577년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Felipe II, 1556-1598)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는, 알로이시우스를 피렌체(Firenze)의 대공 프란치스코 데 메디치(Francesco de Medici) 궁의 시동(侍童)으로 보냈다. 2년 후인 1579년에 알로이시우스와 그의 동생 로돌포(Rodolfo)를 브레시아(Brescia) 지방 만토바(Mantova)로 옮겼다. 1581년 알로이시우스의 가족은 마드리드(Madrid)로 갔고, 알로이시우스는 펠리페 2세 궁정에서 왕자 돈 디에고(Don Diego)의 시동으로 지내면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왕자가 사망하자 1583년 8월 15일 알로이시우스는 예수회에 입회할 것을 결심하였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하며, 일단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아들을 설득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온갖 방법으로 알로이시우스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를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1585년 11월 2일 로마(Roma)에 있는 예수회에 입회한 성 알로이시우스는 밀라노(Milano)의 예수회 분원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만토바에서 수련을 받았다. 이듬해 2월 15일 아버지가 사망하여 잠시 집에 들러 모든 일을 정리하고 돌아온 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는 나폴리(Napoli)에 머물면서 형이상학을 공부하였고, 로마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다. 1587년 11월 25일 첫 서원을 한 뒤 곧바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를 가르치던 교수들 중에는 당시의 유명한 학자 바스케스(G. Vazquez, 1549-1604)가 있었으며, 훗날 성인이 된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9월 17일)가 알로이시우스의 영성지도 신부였다. 성 알로이시우스가 신학을 공부한 지 4년째 되던 1590년 도시 전체에는 흑사병이 퍼졌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병자들을 돌보던 알로이시우스는 이듬해 3월 초 이 병에 전염되어 6월 21일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성 이냐시오(Ignatius)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시중하고 분별력 있게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하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긍정적이고 관찰력이 탁월하였던 알로이시우스는 철학과 신학의 전 과목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어려서부터 정결을 지키며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고, 어떠한 반대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특별히 정결에 대한 은사를 받은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악습들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자존심과 이기심을 이기기 위한 수련을 끊임없이 하였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162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12월 31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 후 3년 후 알로이시우스 성인은 젊은이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