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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6월 22일 [(녹)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聖 토마스 모어 님

2012년 6월 22일 [(녹)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복음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묵상: 계영배란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의 초대

예후가 유다 임금 아하즈야를 죽이자 아하즈야의 어머니 아탈야는 아들의 죽음을 복수하듯 폭정을 휘두른다. 그러나 아탈야도 결국 여호야다 사제에 의해 죽고 만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강조하신다. 보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는 길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복음).

 

제1독서 <사람들은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은 다음,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1,1-4.9-18.20
복음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9-23


 

오늘의 묵상

소설가 최인호 씨의 『상도』가 널리 읽힌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이 언급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후기의 거상(巨商) 임상옥은 계영배를 늘 곁에 두고 과욕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계영배란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입니다. ‘계영배’라는 잔에는 술을 가득 채울 수 없습니다. 술이 어느 정도 차면 넘쳐 옆의 구멍으로 새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70퍼센트쯤 채워야 따른 술이 그대로 남게 된다는 신비의 잔입니다.

 

임상옥은 말년에 평생 모은 재물로 빈민들을 구제하고 자신은 초가삼간에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다.”(財上平如水)는 말을 마음에 새기며 재물을 움켜쥐지 않고 물 흐르듯 가난하고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 만능의 시대에 살면서 소유의 욕심을 버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행과 아낌없는 나눔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기억은 영원합니다. 이렇게 쌓아 놓은 보화는 결코 썩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이기심과 욕심을 극복한 정화된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십자가의 길 제4처~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니다....^-^

 


6월22일(금) 聖 토마스 모어 님
작성자 정유경(p33233323) 쪽지 번 호 73878
작성일 2012-06-21 오후 12:46:40 조회수 105 추천수 2


6월22일(금) 음5/3

聖 토마스 모어


토마스 모어(6.22)
성인명 토마스 모어(Thomas More)
축일 6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인본주의자,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477-1535년
같은이름 도마, 토머스


에드워드 매튜 와드의 딸을 구하는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Joannes More)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요한 모턴의
조수생활을 하다가 옥스퍼드로 가서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의회에 진출했으며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Jane Colt)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1515-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1523년)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주 장관대리가 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엘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Walsh)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Catharina of Aragun)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모어는 재상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고,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理性의 '유토피아' 를 꿈꾸며
정치 권력의 중심에서 활동했었지만
진리를 위해서
주님의 제단에 자신을 봉헌하신 순교자
성 토마스 모아 님이시여

현세의 정치가들을 위하여
님의 고결한 천상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