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굿뉴스 강론

2012년 7월 5일 목요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2012년 7월 5일 목요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복음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말씀의 초대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아모스가 임금과 나라에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고발한다. 아모스는 자신의 부르심을 역설하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시며 죄의 멍에에 눌려 살던 그를 자유롭게 해 주신다. 그러자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한다(복음).

 

제1독서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10-17
복음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

 

오늘의 묵상

사람들은 병이 들면 ‘내가 평소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이런가?’ 하며 자책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도 자신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중풍 병자는 목숨은 살아 있지만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당신 앞으로 데려오는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과 끊어진 끈이 다시 연결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용서해 주시며 그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제 중풍 병자는 용서를 통하여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짓누르던 무거운 멍에를 그의 어깨에서 벗겨 주셨습니다. 죄의식으로 족쇄에 묶여 있던 병자를 자유롭게 해 주신 것입니다.
중풍은 혈관에 피가 제대로 흐르지 않아서 몸이 마비되는 병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앞이 꽉 막혀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면 그분께서는 우리 인생의 막힌 곳을 뚫어 주십니다. 우리는 약하고 불완전하여 죄로 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의식에 짓눌려 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며 자유롭게 살도록 해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분당 요한성당 성모상

 


2012-07-04 오후 12:38:16 조회수 115 추천수 1


7월5일(목) 음5/16

聖 김대건 안드레아 님..등




김대건 안드레아(7.5)
성인명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w)
축일 7월 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21-1846년
같은이름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부산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마당의 성 김대건 신부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그곳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안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16세에 부모의 품을 떠나
천만리 머나먼 곳 마카오로 유학하여

이국땅의 외로움과 프랑스 선교사들의 보살핌의 10년으로
겨레의 첫번째 사제로서 귀국하였으나

그동안 아버지, 고모님이 순교하셨고 증조부도 순교하셨는데
눈물의 어머니를 남겨두고
26세의 젊음을 주님 제단에 바치신 님


겨레의 영원한 빛,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시여
천상 영원한 복락 가운데 한국 교회를 위하여 빌어주소서!...아멘+



당신의 뜻이라면

안토니오 마리아 즈가리야(7.5)
성인명 안토니오 마리아 즈가리야(Anthony Mary Zachary)
축일 7월 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02-1539년
같은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자카리아, 자카리아스, 자카리야, 재커리, 즈가리아, 즈카르야


성 안토니오 마리아 즈가리야(Antonius Maria Zacharias)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자카리아(Antonius Maria Zacharias, 안토니오 마리아 즈카르야)는
1502년 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크레모나(Cremona)
귀족 가문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안토니에타(Antonietta Pescarolli)에게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일찍이 정결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함께
자신에게 남겨진 유산을 포기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고 청빈을 사랑했다.

1522년 파도바(Padova)의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로 활동하던 중
자신의 소명이 영혼의 병자를 치료하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신학을 배운 뒤 1528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0년 밀라노(Milano) 과스탈라(Guastalla)의 토렐리(Torelli) 백작 부인의
지도 신부가 된 그는 ‘영원한 지혜의 형제회’에 합류하였고,
그곳에서 밀라노 귀족 출신인 페라리(Bartolomeo Ferrari)
모리쟈(Jacomo Antonio Morigia)를 만나 그들과 함께
성 바오로(Paulus)를 주보성인으로 하는 성직 수도회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르나바회’(Barnabitarum)라고도 불리는 ‘성 바오로 성직 수도회’이다.

이 수도회의 목적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쇄신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여자 수도회인 ‘성 바오로의 천사 수녀회’도 설립하였다.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1539년 과스탈라에서 병에 걸려 크레모나에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그 해 7월 5일 29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1849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97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안토니우스 마리아 즈카르야 성인은 이탈리아의 아버지요 수호성인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어려서부터 정결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함께
자신의 유산을 모두 포기할 정도로 맑고 성숙했던 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에서
곧 영혼의 병자를 치유하는 소명에 귀를 기울였고

29살의 젊은 나이에 주님 품에 안기실 때까지
그 짧은 생애에도 다시 시간을 쪼개어
성직 동료와 함께

평신도와 성직자를 위한‘성 바오로 성직 수도회' 와
‘성 바오로의 천사 수녀회’도 설립하신 님


성 안토니오 마리아 즈가리아 님이시여

매사에 막연한 이 영혼을 위하여
님의 고결한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