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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7월 20일 복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서소문 순교자현양탑 7장 /서소문 순교자 8위 순교하신날

2012년 7월 20일 [(녹)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복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말씀의 초대

히즈키야 임금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이사야가 그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임금은 이사야의 권고대로 주님께 간청한다. 그러자 그가 병에서 회복된다(제1독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율법을 어겼다며 예수님께 따진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은 자비와 사랑이라고 강조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8,1-6.21-22.7-8
복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

 

오늘의 묵상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에 쉬셨으므로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정해졌습니다. 안식일의 휴식은 하느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노동을 한 사람들에게 하루를 쉬게 함으로써 인간을 존중해 주고자 정한 날입니다.
안식일 법에는 안식일에 추수나 타작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추수나 타작은 노동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안식일의 본디 의미는 희미해지고 세부적인 규정들이 더 중요한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보면, 밀 두 이삭을 따면 그것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행위가 됩니다.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곡식을 타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라고 따집니다.
제자들이 오죽 배가 고팠으면 영글지도 않은 밀 이삭을 뜯어 먹었겠습니까?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제자들의 딱한 처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법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을 얽어매어서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하느님의 법이라면 분명 사람을 살리고 행복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계명들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 1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 2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 3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 4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 5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 안내문

1784년 한국 천주교가 창설된 이후 100여년 동안 박해가 계속하면서 전국적으로 1만명 내외의 순교자를 탄생시켜야만 했다...^-^

이곳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 이래 1870년 무렵까지 처형되었다...^-^

이 중 44명은 1983년 5월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맞이하여 선포된 103위 성인 가운데 포함되었다...^-^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 봉헌자 명단

  

 


 

2012-07-19 오후 12:38:04 조회수 104 추천수 0

 


7월20일(금)
음6/2

서소문밖 형장에서 8위 순교하신 날



 

김 로 사

 

로 사

 

서소문 밖

 

1839.7.20

 

김 성 임

 

마르타

 

서소문 밖

 

1839.7.20

 

이 매 임

 

데레사

 

서소문 밖

 

1839.7.20

 

김 장 금

 

안 나

 

서소문 밖

 

1839.7.20

 

이 광 렬

 

요 한

 

서소문 밖

 

1839.7.20

 

이 영 희

 

막달레나

 

서소문 밖

 

1839.7.20

 

김 루치아

 

루치아

 

서소문 밖

 

1839.7.20

 

원 귀 임

 

마리아

 

서소문 밖

 

1839.7.20

 

 



聖女 김 로사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과부가 된 뒤 입교하여열심한 신앙 생활로 친정 식구들을 입교시킨 김 로사님은
1839년 1월 16일 권득인(權得仁) 님등과 함께 체포되셨다.
포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을 때
“하느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큰 주인이시라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며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1839년 7월 20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서소문 형장의 칼 아래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목을 내민 로사님,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을 배반할 수는 없다'는 님에게
주님깨서는 56세에 순교의 면류관을 허락하셨군요.

 

주님 곁에 아름답게 피어나신 성녀 로사님

영원히 저희의 빛이 되어 주소서!...아멘

 

 


聖女 김성임 마르타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인천 부평(富平)에서 태어난 김성임님은 혼인에 실패한 뒤서울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점쟁이와 재혼하셨다.

 

이 때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뒤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하던 김성임님은

 

1839년 4월 11일 자신이 몸붙이고 있던 이매임님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님 등과 순교를 결심한 뒤

 

이미 체포된 남명혁님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셨다.

 

포청과 형조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지내셨다는 님

50세에 서소문의 칼날 아래서 순교의 면류관을 쓰신
성녀 김성임 마르타 님이시여,

저희도 언제나 밝은 마음으로 현세를 살아갈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를 보내주옵소서!....아멘

 

 


聖女 이매임 데레사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20세에 과부가 되어

 

 

경기도 봉천(奉天)의 친정으로 돌아온 이매임님은

 

한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조카 이정희와 영희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셨다.

 

이영희님이 동정 생활을 결심하여 서울로 피신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4월 초 이매님임은

 

남명혁, 이광헌님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을 이겨 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에 감동하여

 

순교를 결심하셨다.

 

 

마침내 4월 11일 자수하여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2세에 순교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어려운 삶 가운데 친정에 돌아오시어

조카들을 주님 곁으로 인도하시고

52세에 올캐, 조카들과 함께 순교의 면류관을 쓰신

 

성녀 이매임 데레사 님이시여,

고결한 순교 성혈의 은혜로

저희 부족한 후손들을 위하여 천상의 기도를 보내주옵소서!....아멘

 

 

 

 


聖女 김장금 안나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김장금님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였고,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자 노모와 함께 이광렬님과 친하게 지내셨다.

 

두 집은 사이가 좋고 화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장금님은 1839년 4월

 

이광렬, 이광헌님 일가와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마침내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시다가
이광렬 요한님 댁과 이웃으로서 오손도손 지내시다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입으신

성녀 김잗금 안나 님이시여,

저희도 이웃 교우끼리 성가정의 사랑을 나누며 살다가

영원한 복락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

 

 


聖 이광렬 요한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경삼’으로도 불렸던 이광렬님은

 

명문 양반인 광주 이씨의 후예로 태어났다.

 

22세쯤 형 이광헌님과 함께 입교한 뒤

 

헌신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였으며,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님 등과 함께

 

북경을 왕래하며

 

나 베드로(모방) 신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 등을 맞아들였다.

 

북경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귀국한 뒤로는 육식을 끊고,

 

극기와 인내로 동정을 지키며 생활하셨다.

 

1839년 4월 7일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 내고,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형 이광헌 아우구스티노님과 함께 입교하여
순교자 정하상,조신철,유진길 님등과 함께
북경을 왕래하며 나신부, 정신부를 영입해 오셨으며

육식을 끊고 동정을 지키는 등
극기의 삶으로 지내시다가 45세에 순교하시니
형, 형수, 어린 조카까지 모두 순교한 명문 성가정이었습니다.

민족의 등불이신 순교자 성 이광렬 요한 님이시여,

천상 영광 가운데 저회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아멘

 

 

 


聖女 이영희 막달레나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동정 순교자 이영희님은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님의 권면으로

 

어머니 허계임, 언니 이정희님과 함께 어린 나이에 입교하셨다.

 

성장하면서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여 혼기에 이르자

 

혼담을 피해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하여,

 

이매임님과 함께 살며 신앙 생활을 하셨다.

 

1839년 김성임, 김 루치아, 어머니, 언니와 함께 자수한 뒤

,

포청과 형조에서 일곱 번 형문(刑問)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고모 이매임님<순교자>의 인도를 받아 입교하여
31세의 동정녀로서 피로써 순교하신 님

 

고모 이매임 데레사님

어머니 허계임 막달레나님

언니 이정희 바르바라님

15세의 어린 조카 이바르바라 님까지

모두 순교의 영광을 입으신 거룩한 가정의

 

장한 순교 성녀 이 영희 막달레나 님이시여

천상의 영원한 기도 가운데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아멘

 

 


聖女 김 루치아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동정 순교자 김 루치아님은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셨다.

 

14세 때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고,

 

부모를 여읜 뒤로는 자신을 받아 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천진한 태도와 한결 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과 유혹을 참아 냈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

강원도 강촌에서 태어나 14세에 동정을 결심하였고

교우들 집에서 잔심부름으로 연명하며 신앙을 지키시다가

22의 꽃송이로 주님 제단에 피를 뿌리신

 

순교 성녀 김루치아 님이시여

님의 고결한 천상 기도 가운데 저희를 기억해 주소서!..아멘

 

 

 

하느님을 아버지라


聖女 원귀임 마리아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동정 순교자 원귀임님은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아홉 살 때 서울의 친척집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때 동정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언제나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셨다.

 

 

1839년 3월 29일 원귀임님이 있던 친척집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길거리에서 원귀임을 아는 사람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던 원귀임님은

 

정신을 가다듬고포청으로 끌려가셨다.

 

포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하는 형리에게

 

“내 영혼을 이미 하느님께 맡긴 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오직 죽을 뿐입니다." 하며 배교를 거부하니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원귀임님은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7월 20일 일곱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2세에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아홉살에 고아가 되어 이집 저집 돌며 힘들게 연명하면서도
주님 사랑에 안기는 동정녀의 꿈을 잃지 않고

22살에 순교의 영광을 입으신 님,

 

8위가 한 자리에서 차례대로 참수당하는
처절한 상황을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천상에서 영복을 누리는 성녀 원귀임 마리아 님과
8위 순교자 님들이시여
부족한 저희 후손들을 위하여 천상의 기도를 보내주옵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