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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박완서의 글- 나는 왜 카톨릭을 믿게 되었나?-5개

 

2012-07-18 오전 8:45:11 조회수 298 추천수 4
찬미예수님!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 이야기

박완서 - 나는 왜 가톨릭을 믿게 되었나
아들이고 딸이고 가리지 않고 우리 집에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그렇게 기쁘고 극진하게 모시는 시어머님은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분이셨다.

고단하지만 배울 게 많았던 시집살이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한 것은 시 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부터였다. 나는 26년 5개월 동안 시어 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며느리 보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은 한 번 도 외박이라는 걸 하지 않으셨으니까 26년 5개월은 거의 정확한 숫 자일 것이다. 그러나 모시고 살았다는 건 그분 입장에선 적절하지 않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외아들이긴 해도 그분에겐 친동 기간과 조카 사촌들도 여럿 있었고, 소문난 음식 솜씨와 구식 예법 에 대한 안목 때문에 친족 간의 대소사 때마다 불려 다니실 일이 잦 았다. 결혼식만 식장에서 치르고 잔치는 다 집에서 할 때였다. 그때 만 해도 장례식은 물론 회갑, 돌, 백날 잔치 등을 음식점에서 치른다 는 건 상상도 못할 때였다. 나도 결혼하고 나니까 결혼식에 참석하 고 난 시이모님, 시숙모님이 내가 근친 갔다 올 때까지 머물고 계셔 서 귀여움도 듬뿍 받고, 덕담도 많이 들었지만 내심 앞으로 말 많은 시집살이가 될 것 같은 예감으로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과연 무슨 때가 돌아올 때마다 손님 치를 일이 잦았고, 시어머님의 친동 기간들은 으레 며칠씩 묵어가곤 했지만 시어머님이 며느리 허물을 가리고 칭찬만 하니까 몸은 좀 고단해도 친척 어른들 때문에 스트레 스를 받거나 하진 않았다. 친정 쪽도 군식구가 떠날 날이 없는 집이 어서 어른을 모시고 살면 으레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당일로 가도 좋을 친척도 붙들어 묵어가도록 하기를 좋아하는 어른이 당신은 어 디 가서 한 번도 주무시고 오시는 일이 없는 것이 조금씩 답답해지 기 시작했다. 살림에 서투른 며느리가 못 미더워 그러시는 줄 알고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보다는 손자들 때문
이었을 것 같다.
나는 결혼하자마자 애가 들어서서 한 해 걸러 십 년 동안에 내리 오 남매를 낳았다. 전후의 베이비 붐 때였다. 먹고살기도 어려운 때 여서 인구 조절이 시급했지만 믿을 만한 피임법도 잘 몰라서 각자 알아서 한, 가장 손쉬운 가족계획이 인공중절이었다. 신혼 시절이 라는 걸 즐길 겨를도 없이 배가 부르지 않으면, 젖을 물리고 있어야 하는 임산부 노릇이 내리 십여 년이나 계속되니 나라고 소파 수술이 라는 걸 왜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차마 못 한 건, 워낙 겁 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시어머님 때문이기도 했다. 유난히 사람을 아끼시는 분이었다. 며느리가 임신한 눈치만 채면 그때부터 조심조 심 떠받들다가 해산을 하면 신생아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경건해서 마치 종교 의식 같았다. 나는 위로 딸을 넷 낳고 막내로 아들을 하나 낳았다. 남존여비가 극심할 때라 딸을 내리 둘만 낳아도 시어머니가 미역국도 안 끓여 주는 집이 흔할 때였다. 만약 내가 그런 대접을 받 았더라면 내 성질에 그 시집 안 살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아들이고 딸이고 가리지 않고 우리 집에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그렇게 기쁘고 극진하게 모시는 시어머님은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분이셨다. 나는 아이를 낳고 젖만 먹였다 뿐, 다섯 아이를 다 그분이 업어 기르셨다. 아이가 둘이 되고부터 우리 집도 당시에 흔한 식모 아이를 두게 되 었는데, 부리는 사람에게 아기를 맡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저귀도 빨리지 않으시고 손수 빠셨다. 내 귀한 손자 기저귀를 왜 남이 찡그 리고 빨게 하느냐는 거였다. 그분의 그런 태도는 내 손자뿐 아니라 없어서 남의집살이하는 남의 자식에 대한 배려까지 자연스럽게 배 어 있어서 그분을 존경스럽게 했다.
실상 그분은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본 분이고 한글도 제대로 못 읽 는 분이셨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나 남에 대한 배려는 교양이 아니 라 그렇게 타고나셨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분의 천성이었다. 그 분은 새로운 생명을 기쁘고 경건하게 마중하셨을 뿐 아니라 기르는 일에도 지극정성이셨다. 젖만 떨어지면 어미 곁에서 떼어다가 당신 옆에 데리고 주무시면서 "은자동아, 금자동아 은을 주면 너를 사랴, 금을 주면 너를 사랴----." 고운 목소리로 자장가를 부르셨고, 아이 가 아프면 어미보다 더 근심하며 머리맡을 지키셨다. 손녀딸이 초등 학교에 입학해 첫 소풍으로 창경원 가는 데 따라가신 걸 당신 생애 의 가장 기쁜 날로 기억하고, 둘째가 어서어서 학교 가서 소풍가기 를 어린애처럼 기다리곤 하셨다.
그렇게 천사의 마음을 타고난 분이 말년의 3, 4년 동안은 노망이 드셔서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지금으로 치면 치매라는 건데 나는 치매라는 말이 싫어서 그분에게는 그 말을 쓰기를 삼가 왔다. 손자 사위까지 보고 돌아가셨는데 손녀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을 해서 가족이 되었다는 걸 아무리 말씀드려도 이해하지 못하 셨다. 손녀가 제 신랑하고 한방에 있는 걸 보면 저놈이 누군데 남의 집 처녀 방에 들었냐고 그 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셨다. 그런 증세 가 점점 심해져서 나중엔 당신 아들도 못 알아보시고 툭하면 "댁은 뉘시유?" 하면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눈빛이 되곤 하셨다. 마지막 까지 알아보고 따른 건 나밖에 없었다. 나만 졸졸 따라다녀서 급한 볼일이 있어서 외출을 해야 할 때는 몰래 따돌리느라 애를 먹었다. 그렇게 억지로 외출을 했다가 귀가가 늦은 날이었다. 그때는 그분 도 많이 쇠약해지신 후여서 혼자서 걷지도 못하실 때였는데 식구들 이 만류해도 듣지 않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골목 밖까지 나와 며느 리 오기를 기다리시다가 넘어지셔서 이마가 까지고 멍이 드는 큰 타박상을 입으셨다. 그 멍이 채 가시기 전에 돌아가셔서 내 마음을 두고두고 죄송스럽게 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2012-07-19 오전 8:42:39 조회수 492 추천수 3
찬미예수님!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 이야기

박완서 - 나는 왜 가톨릭을 믿게 되었나
아들이고 딸이고 가리지 않고 우리 집에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그렇게 기쁘고 극진하게 모시는 시어머님은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분이셨다.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여든이 넘는 장수를 하시는 동안 그 많던 그분의동기간은 다 들 먼저 가 버리시고 남편도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집안에 어른이라 곤 없었다. 장례 절차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의논할 데도 마땅치 않았다. 근래에는 종교 의식을 치르는 집이건 안 치르는 집이건 거 의 다 병원 영안실로 모시게 돼 있지만, 그때만 해도 병원에 입원했 다가도 임종이 가까우면 집으로 모시는 걸 도리로 여길 때였다. 무 종교인 집은 우선 장의사 먼저 불렀다. 우리도 그렇게 했고 장의사 가 다 알아서 해 주긴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흥정을 해야 했다. 사실 흥정이랄 것도 없었다. 이 정도로 살면 관은 얼마짜리 정도는 해야 하고, 수의는 얼마짜리 정도는 해야 한다는 식으로 바가지를 씌우려는 상혼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조금이라도 그 부르는 값에 이의를 제기할 눈치만 보이면 자식 된 도리가 아니라는 식으로 우 리를 윽박질렀다. 그런 일은 누군가 대신해 줘야 하는데 경험이 없 는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 우리가 직접 관여한 게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만만한 봉으로 보였대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가 당하기만 하는 걸 보다 못한 남편의 친구나 친척들이 중간에 끼 어들어 장의사의 횡포를 완화시켜 보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자 식의 마지막 효도를 왜 막느냐면서 상주인 우리 내외하고만 흥정을 하려고 했다. 비록 오랫동안 노망을 부리시긴 했어도 돌아가시자마 자 황폐했던 표정이 말끔히 가시고 아기처럼 순한 표정을 회복한 걸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수의도 그분이 평소에 아끼시던 고운 비 단 치마저고리를 입혀 드리고 싶었다. 그런 나의 제안은 장의사 사 람들에 의해 본데없는 불효막심한 며느리로 그 자리에거 각하를 당 했다. 이 정도로 사는 집이면 좋은 안동포로 갖은 수의를 해 드리는 게 자식 된 도리라고 했다. 친척이나 친구들도 노환으로 오래 고생 하시는 동안 수의 정도도 해 놓지 않은 나를 나무라는 투였다. 나는 '갖은 수의' 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하 도록 했다. 예전에 하던 식의 구색을 고루 갖춘 수의를 그렇게 말한 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수의를 다 입혀 드리고 나서 유해를 여러 마디로 묶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묶으면서 그 마디마디마다 상주가 돈을 찔러 넣게 했다. 그건 고인이 저승길에 노잣돈으로 쓸 거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넉넉하게 넣어 드려야 편안하게 가실 수 있 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했다. 입엔 동전을 물려 드리라고 했다. 그 또한 시키는 대로 했다. 염습을 끝낸 장의사는 마디마디에 찔러 넣 은 두툼한 지폐는 날렵하게 꺼내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동전만 남겨 놓았다. 저승길에 노잣돈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선산은 국도와 인접한 완만한 둔덕이어서 승용차나 영구차나 조금도 헐떡 거리지 않고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영구차는 몇 바퀴 안 구르고 멈춰 서서는 길에다 돈을 깔아야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신 부 집에 함 들어올 때 신랑 친구들이 경사에 흥을 돋우려고 재미삼 아 하는 짓을 영구차 기사가 하니까 상제가 나서서 뭐라 할 수도 없 고, 그저 일을 조용히 끝내고 싶은 일념 하나로 하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님의 장례를 이렇게 치르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분은 종교도 없었고 학교도 안 다녔지만 인간을 아끼 고 생명을 존중하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신 분이었다. 만일 장례란 누구나 다 그렇게 치르는 거라면 구태여 죄책감을 느 낄 것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전에 가 본 문상 중에서 나도 죽으 면 저런 대접을 받고 싶다고 생각이 들 만큼 인상 깊은 장례식은 거 의가 천주교 의식의 영결 미사였다. 영결 미사는 고인이 부자든 가 난하든 명사든 보통 사람이든 관계없이 고인이 이 세상을 살아 냈 다는 데 대한 극진한 대접을 한다. 본 적은 없지만 사형수의 죽음이 라 해도 천주교에서는 이런 존엄한 대접을 해 줄 것 같다. 고인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절망보다는 큰 평화 안에서 다시 만날 수 있 을 것 같은 희망을 갖게 하는 장례 미사를 보고 나면 인간이란 슬픔 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정화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슬픔이 있 는 기쁨이랄까. 그건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남기고 가는 선물일 수도 있었다. 이 세상에 온 새 생명을 맞는 의식을 종교 의식처럼 정성을 다해 경건하게 치르던 그분은 어디서 배운 바 없이도 천성 적으로 생명의 존엄함을 알고 계셨던 분이다. 자식과 손자들을 받 들어 모시듯이 키운 분이라면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그 애들로부터 그에 합당한 감사와 공경과 애도를 받으셔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해 드렸다. 부모가 아닌 남한테도 우리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게 도리거늘 나는 내가 시어머 님에게 해 드린 것 같은 대접을 받고 싶지 않아서 가톨릭 신자가 되 었다. 이렇게 불순하고 이기적인 며느리지만 그분이라면 저승에서 도 괜찮다, 괜찮아 하시며 고개를 끄덕이실 것이다. 나는 그분이 그 리스도를 모르고 돌아가셨다고 지옥에 가셨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 은 한 번도 없다. 만일 천주교 교리가 그렇게 가르쳤다면 나는 천주 교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세례 받을 것을 진지하게 생각했 다고 해서 단지 장례 미사의 아름다움에 감동했기 때문만이었다고 는 말 못하겠다. 상식으로 또는 교양으로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그 냥 좋아했었다. 납득할 수 없는 몇 군데를 건너뛰고 나면 조금도 낯 설지 않고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처럼 친근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2012-07-20 오전 8:58:35 조회수 270 추천수 1
찬미예수님!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 이야기

박완서 - 나는 왜 가톨릭을 믿게 되었나
아들이고 딸이고 가리지 않고 우리 집에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그렇게 기쁘고 극진하게 모시는 시어머님은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분이셨다.

유교는 신앙으로는 조금 부족해서

나는 개성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산골에서 태어났다. 가난하 지만 학문을 즐기고, 체면을 중시하는 선비 집안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 부성애에 대한 결 핍감은 거의 모르고 자랐다. 아들 셋을 다 장가들인 후에도 한집안 에 거느리고 사셨던 할아버지가 가족을 통솔하는 통치 이념은 철저 하게 유교적이었다.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사람 다움의 근본으로 늘 강조하신 거나, 네가 싫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 잔칫집이나 친척집에 손님으로 가서 윗자리에 앉지 마라. 일 꾼이 게으르게 굴었다고 품삯 깎지 마라 등등 집안에서 흔히 듣던 할아버지의 훈계와 뜻을 같이하는 구절이 성경에서도 제일 먼저 마 음에 와 닿았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도 우리 집 가풍 과 비슷한 것 같았다. 누구 집에서나 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멀리하 고 착한 일을 하도록 가르치는 건 유아 교육의 기본일 것이다. 엄한 할아버지 모시는 우리 집 분위기도 물론 그랬지만 덮어놓고 야단치 고 훈계하는 게 아니라 재미있고 단순한 이야기를 통해 가르치셨다. 어려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는 건 내 유년기의 가장 큰 축복 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단순하고 알아듣기 쉬운 비유로 말씀 하신 게 마음에 들었다. 루카 복음서에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얘기 를 읽으면서는 예수님을 우리 할아버지로 착각할 정도였다. 할아버 지는 그 시절의 유학자로는 드물게 아들 딸, 손자와 손녀를 차별하 지 않으셨다. 특히 배우고 싶어 하면 손자든 손녀든 차별하지 않고 기특해하시고 밀어주셨다. 손녀 중에서는 내가 유일하게 사랑에서 나보다 큰 동네 머슴애들과 함께 천자문을 익혔을 뿐 아니라 넉넉 지도 않은 집안 형편에 걸맞지 않게 초등학교부터 서울서 다닐 수 있었다. 그때의 시대상이나 우리 집 형편으로 봐서 어떻게 그럴 수 가 있었을까. 그때는 특별히 고마운 줄 모르다가 철들면서 내가 누 린 특혜를 신기해하는 느낌은,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그 시대에 예 수님은 여성을 어쩌면 이렇게 차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신기해 하는 마음과도 비슷하다. 그렇다고 우리 할아버지가 성경을 읽으신 건 아닐 것이다. 평생 맹자 왈, 공자 왈밖에 모르시던 분이다. 그러 니까 그런 공통점은 고등 종교끼리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 과 인仁이 다른 것이 아니듯이. 사람 노릇의 근본을 설한 걸로 보면 유교로도 부족함이 없는데 왜 그리스도를 따로 믿어야 했는지, 종교宗敎를 문자 그대로 으뜸 가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할 때 유교로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신앙으 로서는 좀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유교에는 고통 중에 기도하 고 매달리고 의논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없다. 아무리 악을 멀 리하고 선을 행하기에 힘쓰는 도덕적인 인간이라도 이성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매달리고 기도하고 싶은 때가 있는 법이다. 특히 죽음 의 문제에 있어서 그러했다. 내가 죽을 때도 물론 그러하겠지만 가 족이나 친지가 죽어 갈 때도 사람은 누구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 라는 희망을 갖고 싶어 한다. 안 죽게 해 달라고 매달릴 때도 절대 자를 찾게 되지만, 마침내는 죽음의 손에 목숨을 내맡길 때도 이 세 상에 내 뜻으로 온 것이 아니듯이 거두어 가는 손길을 느끼고 그 손 길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고 싶어 한다. 죽을 때 우아하게 죽고 싶어서, 행복할 때 감사하고, 불행할 때 기도하고 싶어서, 자신의 존재가 불안하게 흔들릴 때 의지하고 싶어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 다. 유교적인 집안이라고 기도를 안 하는 건 아니다. 6 - 25때 북으로 끌려간 오빠의 생사를 모를 때 엄마는 새벽이고, 밤이고, 끼니때고 아무 데나 대고 빌고 또 빌었다. 부뚜막에 오빠의 밥그릇에다 밥을 담아 놓고도 빌었고, 장독대에 정안수를 떠 놓고도 빌었고, 하늘 보 고 북두칠성한테도 빌었다. 까치가 짖으면 고마워서 가치한테도 두 손을 모았고, 까마귀가 짖으면 까마귀한테 삿대질을 하며 저주를 퍼 부었다. 체면을 중시하던 분이 이성을 잃으니 미친 사람 같아서 집 안 식구들을 불안하게 했다. 전쟁이 끝나고 엄마의 모든 정성은 무 위로 돌아갔다. 엄마는 그 후 절에 다니면서 마음을 달래시다가, 말 년에는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셨다. 기도는 사람의 정신을 돌게 하 는 게 아니라 바로잡아 주는 것이고, 바로잡는다는 건 중심을 잡아 주는 일이 아닐까. 종교의 다름은 그 중심에 누구를 세우냐의 차이 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한 기도의 묘미는 잗다란 기도는 잘 들어주시는 데 큰 기도는 잘 안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큰 기도는 과욕이나 허욕 아니면 신의 영역을 넘보는 기도였으니 안 들어주시 는 게 당연하고, 잗다란 기도는 잔 근심에서 나온 것이니 그런 잗다 란 근심은 기도하는 과정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게 되니까 들어주실 수밖에. 기도의 은총은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고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기 도한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2012-07-21 오전 7:22:43 조회수 12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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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 이야기

박완서 - 나는 왜 가톨릭을 믿게 되었나
아들이고 딸이고 가리지 않고 우리 집에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그렇게 기쁘고 극진하게 모시는 시어머님은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분이셨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마중 간 밤에

앞에서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 서 종교를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고 했지만 실지로 세례를 받기까지는 4, 5년이 더 걸렸다. 그때 살던 동네엔 가까이에 성당도 없었고,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가 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주일에 명동성당에 몇 번 가 본 적이 있지 만 그게 교리 공부 등 신앙생활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마치 기독교 염탐을 다니듯이 전통 있는 개신교 교회도 몇 차례 기웃거려 보았지 만 어디서도 마음이 크게 움직이진 않았다. 그러다 단독주택에서 잠 실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상 가 2층에 성당이 들어섰다.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아이들은 제각기 약속이 있다고 시내로 놀러 나가고, 텔레비전에서도 젊은이들이 쌍 쌍이 혹은 떼를 지어 시내 환락가에 넘치는 모습을 비춰 주고 있었 다. 그때만 해도 강남의 환락가가 아직 형성되기 전이어서 젊음과 환락의 본고장은 뭐니뭐니 해도 명동이었다. 명동의 은성한 불빛과 곧 폭발할 듯 아슬아슬한 젊음의 활기를 화면으로 보면서 집에 단둘 이 남은 우리 부부는 쓸쓸한 소외감을 느꼈다. 내가 먼저랄 것도 남 편이 먼저랄 것도 없이 성당에나가 볼까, 한 것 같다. 바깥 날은 살 갗을 저미듯 혹독했고 전철이 지나가는 굴다리 밑은 불빛도 인적도 없이 어둡기만 해서 성탄과는 상관없는 딴 세상 같았다. 큰 마음 먹 고 나설 때와는 달리 성당밖에는 갈 곳이 없는 우리가 딱하고 청승 맞게 여겨졌다. 상가 2층을 빌린 성당의 성탄 미사는, 신앙보다는 명동성당의 고딕식 건축미 때문에 머리 숙이고 숙연해졌던 성당 체 험 때문인지,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복도와 계단까지 붐비고 있어 기대한 엄숙한 분위기는 찾아지지 않 았다. 성탄 전야에 우리처럼 갈 곳 없는 사람들도 이렇게 많구나, 그 나마 이런 동류의식이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 이윽고 미사가 시작되 자 무질서는 거짓말처럼 해소됐고 자발적인 질서와 엄숙하고도 화 해로운 분위기가 되었다. 젊은이들은 다 명동으로 나간 줄 알았는데 성당에 온 신도들의 연령층도 젊은 부부와 청소년층이 압도적이었 다. 남들이 하는 대로 일어섰다 앉았다를 되풀이하면서 장장 세 시 간에 걸친 자정 미사를 보고 구유 예배까지 보고 밖으로 나왔다. 그 동안에 날이 바뀌어 성탄 새벽을 바라보는 시간의 추위는 어찌나 매 서운지 이빨이 다 딱딱 마주칠 정도였다. 우리 부부는 조금이라도 덜 추우려고 꼭 붙어 걸으면서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서 로 물으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오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순전히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마중 간 우리의 행동에 우리는 둘 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 후 같 은 성당에서 교리 공부를 받기까지는 같은 단지에 사는 교우의 적극 적인 권면이 있어서였지만 막상 세례를 받을 때도 그날 밤처럼 뜨거 운 기쁨과 감동이 내 마음속 깊은 데서 우러난 것 같진 않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2012-07-22 오전 7:55:19 조회수 37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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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 이야기

박완서 - 나는 왜 가톨릭을 믿게 되었나
아들이고 딸이고 가리지 않고 우리 집에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그렇게 기쁘고 극진하게 모시는 시어머님은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분이셨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다가

내가 먼저 세례를 받고 남편은 나보다 일 년 늦게 받았다. 남 편이 세례 받은 후 손잡고 같이 성당에 가서였다. 영성체 전에 다 같 이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였다. 그때 옆의 사람이 남편이란 걸 깜박 잊고 무심히 평화의 인사를 나누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사람이 누구지? 나는 내 남편의 얼굴이 처음 보는 이웃보다 더 낯선 데 경 악을 금치 못했다. 보통 때 나란히 앉은 교우끼리 또는 앞뒤로 앉은 교우끼리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은, 미사만 끝나면 뿔뿔이 흩어 져 남이 되는 교우끼리지만 그때만은 서로 친애감을 확인하고 축복 을 교환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다. 나처럼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봉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은 교우들 얼굴을 익힐 새도 없 기 때문에 그때만이라도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고 또 좋은 표정과 만나고 싶어 한껏 부드러운 미소를 짓다 보면 상대방도 조금도 낯설 지 않고 어디서 본 듯한 착한 이웃으로 다가온다. 비록 잠깐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도 서로 낯설지 않게 맺어 주는 귀한 친교의 시간에 평생을 같이 산 사람에게 느닷없이 낯가림을 한 것은 무슨 조화일 까. 아니, 저 사람이 누구지? 저 초라한 중늙은이는 누구란 말인가? 나는 내 남편의 낯섦에 놀라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난 줄 알고 살아 왔다. 그는 뭐든지 나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가족을 위해 고 달프게 돈을 벌고, 아이들에게는 믿음직스럽게 굴어야 하는 가장이 었다. 그가 번 돈은 내 돈이었고 내 생각은 그의 생각도 된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순간적인 돌연한 낯섦이 이런 나의 관습적인 생각에 충격이 되었다. 내 몸과 동일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남편 을 독립된 타자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되고 유일하게 경험한 신비 체험이다. 개인에게뿐 아니라 가톨릭에는 관습을 뚫고 새로워지는 어떤 힘 이 있는 것 같다. 성령의 힘이랄까, 2000년이 넘게 이어져 내려오는 종교가 관습화되지 않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거듭하는 힘에서 가톨 릭의 위대성을 느낀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