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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7월 31일 화요일 복음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2012년 7월 31일 화요일[(백)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복음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쟁 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가 되었고,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을 맡았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한 그는 1622년에 시성되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백성에게 큰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예레미야는 백성을 대신하여 주님께 죄를 고백하며 벌을 거두어 주십사고 간청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상이라는 밭에 좋은 말과 행실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복음).

 

제1독서 <주님,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4,17ㄴ-22
복음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6-43

 

오늘의 묵상

우리가 즐겨 부르는 성가 가운데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의 봉헌의 기도에서 가사를 따온 성가가 있습니다. 『가톨릭 성가』 221번 ‘받아 주소서’입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은 모두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도로 돌려 드려 당신께 맡깁니다. 그러하오니 주님의 뜻대로 처리하소서.”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인 이냐시오 성인은 군인으로 전쟁터에 나가 큰 부상을 당한 뒤 치료받으면서 회심을 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뒤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봉헌하게 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기쁨과 슬픔, 기도와 노동,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기회이며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봉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순례자였습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갈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세상 안에서 활동한 관상가’로 부르고 있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쁘게 살면서도 무엇 때문에 바쁜지, 발걸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때에 이냐시오 성인의 삶은 나침반의 바늘처럼 우리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 향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풍요와 편리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무엇이 참된 행복인지 일깨워 줍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을 많이 누리는 데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는 데에서 옵니다.

 

 

분당 요한성당 벽화


2012-07-30 오후 12:40:25 조회수 89 추천수 0


7월31(화) 음6/13

로욜라의 聖 이냐시오


이냐시오(7.31)
성인명 이냐시오(Ignatius)
축일 7월 3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로욜라(Loyola)
활동연도 1491-1556년
같은이름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이니고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Ignatius)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Azpeitia) 읍 위쪽의 로욜라 성에서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네스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이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인 1517년에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Navarra)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해 주었고, 로욜라의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성 안에 그러한 책은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회심 후 로욜라를 떠난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Monserrat)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수련”(Exercitia Spiritualis)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을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예루살렘 순례 후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Barcelona)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Paris)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이냐시오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보아 출신인 파브르(P. Faber), 나바라(Navarra) 출신인 사베리오(F. Xaverius),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J. Laynez)와 살메론(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S. Rodriguez) 등이다.
이들은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달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Montmartre)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온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Venezia)에서 9명의 동료들과 모였으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이냐시오는 동료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Roma)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하던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무절제와 사치에 젖은 젊은이가
성인전을 읽으면서
세속을 멀리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특은으로 환시까지 경험하면서


동료들과 더불어 예수회를 창설하여

교회 분열의 시대를 비추는 등불이 되셨고
전세계 가톨릭 교육사업에도 큰 역할을 끼치신 님
<....서강대학교도 예수회 재단임....>

주님의 큰 일꾼 로욜라의 성 이나시오 님이시여

현세의 저희를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