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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조선[최보식이 만난 사람]한일 관계 전문가… 김영작(金榮作) 명예교수

[최보식이 만난 사람] 도쿄대 유학→밀입북→무기징역→민정당 창당→한일 관계 전문가… 김영작(金榮作) 명예교수 

 

"양쪽 다 어른답지 못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때도 똑같은 고민"
밀입북으로 '간첩죄' 무기징역 민정당 '이념실장' 직책 맡아 국회의원 1년만 하고 사표
"나는 '돈키호테' 같은 삶 남자가 자기 소신대로 살지 '어용'이란 말이 무섭겠나"

김영작(金榮作·71) 국민대 명예교수를 만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1960년대에 도쿄대 석·박사를 했다. 전공은 '동북아 국제정치'였다. 젊은 날 그는 "국제정치를 공부하는 학도로서 북한이 어떤 사회인지를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며 밀선(密船)을 타고 북한에 들어간 인물이다.

이 행적이 드러나 그는 '간첩죄'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5년 만에 풀려나서는 예상을 깨고 5공(共)의 '민정당 창당' 작업에 참여했다. 당의 이념(理念)을 만드는 핵심 역할이었다.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돼서는 딱 1년을 하고 대학으로 돌아갔다. 어용 교수 시비에 대해 묻자 "남자는 자기 배짱대로 하는 것이지, '어용'이라는 말 듣기 싫어 자기 소신대로 못 하면 되나"라고 말했다.

그 뒤로 그는 현실 정치에 관심은 보였지만, 어떤 '자리' 제의에도 응하진 않았다. 그는 국민대에서 정년퇴임한 뒤 일본에 건너가 작년까지 호세이(法政)대학에서 '한중일 국제정치'를 강의했다.

―지금 한일 모습을 보면 어떤가?

"어제 일본 도쿄대의 내 은사와 통화하니 '료호가 민나 오토나나시쿠 나가타(양쪽이 다 어른답지 못했다)'고 하더라."

―우리 일각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대해 '미숙한 외교'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 문제로 후배들과 토론을 해보면 '이렇게까지 갈 필요가 있었나' '다른 방법이 있었겠나'로 의견이 갈렸다. 지금까지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응수하지 않는 게 최고의 정책이었다. 하지만 '노 코멘트'가 효과가 있었나. 이 때문에 '마침내 올 게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독도 방문이 잘됐다고 보나?

"이미 불거진 마당에 '잘했다 못했다' 따지는 것은 우리 측 책임론으로 몰고 가게 된다. 이는 외교 관계에서 우리 입지만 좁힐 뿐이다. 우리가 먼저 일본을 자극했다고만 볼 수도 없다. 그전부터 기회만 있으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들고 나온 일본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임기 말에 대중적 인기를 노린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왕 터져나올 것이었다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정권에서 촉발한 것이 어쩌면 다행이다. 차기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는 면도 있다고 본다."

김영작 교수는“임기가 얼마 안 남은 현 정권에서 독도 문제를 촉발시킨 것이 어쩌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대해서는 찬성이었다. 다만 그 다음 날 "일왕이 방문하려면 사과부터 하라"고 한 발언은 불필요했다고 본다.

"일본이 문제 삼는 것은 '일왕' 호칭이다. 국제적 용어로는 '천황(덴노)'인데, 우리만 일왕이라고 부른다. 저희가 '천황'으로 불러달라고 하면 그렇게 불러줘도 나는 상관없다고 본다. 민족적 감정에서 반론이 있겠지만. 중국에서는 '일황(日皇)'으로 쓴다."

―일왕이 방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도 없는데, 먼저 꺼내서 쓸데없이 일본 국민의 감정만 건드린 격이 됐다.

"단편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어차피 터져나올 문제였다. 우리가 안 건드렸어도 일본 국내 정치와 맞물려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일본의 가려운 데를 긁어준 면도 있지 않았나 싶다. 일본 정부로서는 '기다렸는데 바로 이때다' 하며 들고일어난 것이다. 양쪽 다 어른답지 못한 것이다."

―나는 당초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에 비판적이었지만, 그 직후 일본의 집단적 히스테리를 보면서 그 비판을 거둬들였다.

"일본이 저렇게 나오는 것은 국내 정치용이다. 경제 침체와 국제 외교의 위상 하락을 맞아 민심을 돌리는 카드가 필요하다. 과거 메이지 유신 때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征韓論·한반도 정벌론)'이 그랬듯이, 일본은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 나라에서 '속죄양'을 찾았다."

―2년 전 쓰나미가 났을 때 질서정연하고 이성적인 모습에서 '진화한 인류'라고 칭찬받던 일본인들과, 낯 두껍게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인들은 같은 일본인들인가?

"일본인들의 이중성은 있다. 하지만 과거사나 독도 문제에 대한 비양식적인 태도는 일본 정부나 정치권에서 나왔다. '반한(反韓) 감정'도 매스컴에서 부추긴 것이다. 일반 일본인들이 다 그렇지는 않다. 이들은 대부분 한일 근대사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른다. 관심도 없다. 이를 혼동하면 대(對)일본 전략이 세워지지 않는다."

―우리 지식인들이 우리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듯, 일본 지식인들도 그런 내부 비판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일본에서는 이런 문제가 터지면 여야가 따로 없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은 바깥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친정부 쪽 지식인만 매스컴에 나온다. 하지만 대체로 일본인들은 솔직하진 않아도 정직한 편이다."

―지금과 같은 한일 간 극단 상황이 언제까지 갈 것으로 보나?

"우리 정권이 바뀌고 일본에도 새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는 당분간 이렇게 갈 것이다."

―해법이 없을까?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는 없고, 고약한 것은 일본도 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발을 빼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일본은 국내 정치를 위해 한일 관계를 활용 또는 악용해왔다. 이러니 묘수가 있을 수 없다."

―한일 관계의 우호 협력 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인가?

"1965년 한일 회담 때도 양쪽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때 그걸 결판내지 않았다.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다. 끝까지 모두 따지지 않은 데는 더 대국적인 것, 국교 정상화나 한일 간 우호 협력과 준동맹 관계를 잃게 된다는 묵언의 동의가 있었다. 고비마다 중요 현안이 미해결로 남은 채 협정이 체결됐다. 미진한 대로 그렇게 봉합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봉합해놓은 과거의 불씨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지금 와서 과거사를 덮고 가자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한일 관계에서 과거사를 논하지 않는 것은 이미 늦었다. 하지만 논쟁을 벌이고 싸운들 출구(出口)는 없을 것이다. 1965년 한일 회담 때와 똑같은 상황이 됐다. 양국 간에 현실과 장래의 이익을 위해 좀 더 큰 발상이 요구되는 것이다. 가령 일본으로서는 강대국 중국의 등장으로 한국과 더 우호적인 관계가 필요할 수도 있다. 양국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이런 인식을 갖고 여론을 환기해야 한다."

―우리도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 배상 요구를 접어야 하나?

"일본의 내심에는 이미 다 끝난 문제를 왜 다시 들고 나오느냐는 게 깔려있다. 생존자는 얼마 남지 않았고 살 날도 길지 않다. 비(非)학자적인 표현이지만 일본 정부의 옹졸함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선생은 2006년 일본 정부의 '욱일중수(旭日中綬)' 훈장을 받은 걸로 안다.

"천황이 주는 훈장이다. 내가 현대일본학회장을 맡아 광복 후 최대 규모의 한일 관계사 회의를 개최해 한일 양국 분위기 개선에 기여한 공로라고 했다."

―천황 훈장을 받고서 일본을 비판하게 되니 역설적이다.

"학자로서 말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상황은 일본 정부와 매스컴에서 조성한 것이다. 일본 사람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설령 정부 간 한일 관계가 파탄이 나도, 내 도쿄대 은사나 동료들과 맺은 개인적 관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도쿄대 얘기가 나온 김에, 유학 시절 왜 밀입북했나?

"그때 '동북아 국제정치학을 전공한다면서 북한을 직접 보지 않고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1967년 도쿄대 박사과정 때 북한 안내원과 함께 밀선(密船)을 타고 니가타에서 청진으로 들어갔다. 50일간 머물면서 북한 전역을 봤다."

―'반공(反共)'이 국시인데 잘못되면 인생 끝이라는 주저함이 없었나?

"그런 생각을 왜 안 했겠나. 하지만 그것에 매이면 미친 짓을 할 수가 없다. 모험을 할 수가 없다. 당시 유학생 대부분이 북한에 한번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나처럼 돈키호테와 같은 만용을 부리진 않는다. 스물여섯 살 때였다."

―당시 지식인의 유행처럼 '반(反)박정희'였나?

"유학 시절에는 '반박정희'였다. 하지만 북한을 보면서 '김일성 체제는 곤란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을 비교해볼 수 있었으니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살렸다'고 높이 평가할 수 있게 됐다. 지금도 이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1972년에야 그 사실이 밝혀져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고 들었다.

"북한 방문 뒤 일본에서 대학교수로 지냈다. 그러던 중 국내에 들어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 '간첩죄'로 체포됐다.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가 5년 만에 석방됐다. 재일 교포인 큰 처남이 당시 일본의 후쿠다 다케오 총리의 주치의였다. 후쿠다 총리가 직접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준 덕분이었다. 전두환 대통령 때 사면 복권이 됐다."

―1980년 민정당 창당 작업에 참여한 걸로 되어있는데.

"창당 멤버로 참여해 5년간 민정당의 '이념실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학문적 열정에서 북한을 다녀오고, 고초까지 겪었던 젊은 학자가 신군부에 협력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나는 전두환 집권에 대해 비판할 생각이 없었다. 불가피한 것으로 봤고 그 판단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시 남북한의 대치 국면에서 민정당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신당 창당에 나 같은 사상과 경력을 가진 인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권유도 있었다. 하지만 내 정치적 소신과 신념에 따라 택한 것이다. 나는 창당 이념을 만들었고, 핵심에서 5년간 일했다."

―1985년에는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는데, 1년 만에 그만둔 걸로 안다.

"국회의원도 안 해보고 대학에 돌아오면 '집권당에 가서 심부름만 하다가 왔나' 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한 것이다. 국회의원 1년만 하고 사표를 냈다."

―그 좋은 걸 1년만 하다가 그만두다니, 누구는 돈 싸들고 가서라도 하려고 한다.

"다른 일을 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그럴 수 있다. 내게는 대학교수만큼 좋은 직업이 없다."

―'어용 교수'라는 말은 듣지 않았나?

"학생들도 비판하고 논쟁도 많이 했다. 어용 교수라 부르든 '충성 교수'라 부르든 마음대로 하라고 답한다. 남자가 자기 소신대로 하는데 '어용'이라는 말 듣기 싫어서 못 하나. 제 배짱대로 하는 것이지."

―5공(共)은 '탄생하지 말았어야 할 불의(不義)의 정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정의와 불의의 문제는 아니다. 어떤 확신이 없었으면 당시 숱한 정치인과 학자가 5공에 참여했겠나. 지금의 여론이 항상 옳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 그를 만났다. 두 시간쯤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한 인간의 '이해가 쉽지 않은'유니크한 삶까지 만나게 됐다. 그래서 흐름이 다른 내용을 함께 붙였다.

[출처]조선일보 사회 최보식선임기자 입력 : 2012.09.03 03:09  

 

 


 

ㅎㅎㅎ김영작(金榮作·71) 국민대 명예교수...그는 국민대에서 정년퇴임한 뒤 일본에 건너가 작년까지 호세이(法政)대학에서 '한중일 국제정치'를 강의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응수하지 않는 게 최고의 정책이었다. 하지만 '노 코멘트'가 효과가 있었나. 이 때문에 '마침내 올 게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미 불거진 마당에 '잘했다 못했다' 따지는 것은 우리 측 책임론으로 몰고 가게 된다. 이는 외교 관계에서 우리 입지만 좁힐 뿐이다. 우리가 먼저 일본을 자극했다고만 볼 수도 없다. 그전부터 기회만 있으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들고 나온 일본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이왕 터져나올 것이었다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정권에서 촉발한 것이 어쩌면 다행이다. 차기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는 면도 있다고 본다."

 

"일본이 저렇게 나오는 것은 국내 정치용이다. 경제 침체와 국제 외교의 위상 하락을 맞아 민심을 돌리는 카드가 필요하다. 과거 메이지 유신 때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征韓論·한반도 정벌론)'이 그랬듯이, 일본은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 나라에서 '속죄양'을 찾았다."

두 시간쯤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한 인간의 '이해가 쉽지 않은'유니크한 삶까지 만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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