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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최보식이 만난 사람] "지방시인들 중앙에 명함 못 내밀어도… 내가 왜 굽실거려야 하나"… '평생 지방시인' 도광의

[최보식이 만난 사람] "지방시인들 중앙에 명함 못 내밀어도… 내가 왜 굽실거려야 하나"

조선일보 사회 최보식선임기자 입력 : 2012.08.13 03:08  

[베스트셀러 시인 안도현·서정윤 배출… '평생 지방시인' 도광의]
"대폿집 순례, 주머니가 비면 '달아놔라'하고 일어서지… 날 조롱해 '로맨티스트'라고"
"검은 책보 들고 복도 걸어가는 靑馬의 뒷모습 지워지지 않아… 김춘수 강의 때는 학생 몰려"

동대구역(驛)으로 마중 나오겠다는 것을 말렸더니, 도광의(71) 시인은 자기가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지. 어찌나 흥분되는지. 이렇게 중앙 언론에서 나를 찾아준 것은 처음이지."

그가 최근 펴낸 시집 '하양의 강물'을 보내왔을 때 평생 '지방시인'으로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를 나는 생각했다.

그는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대구에서 50년 동안 시를 써왔고, 대구문협(文協) 회장을 두 번 맡았으며, '제1회 대구문학상'도 받았다. 하지만 대구를 벗어나면 그의 존재감은 없다. 중앙 언론에서는 지금껏 그에 대해 한 줄짜리 기사도 허락하지 않았다.

도광의 시인은 "집사람에게 용돈을 타 쓰고 있지만 오늘은 한잔하려고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좀 뽑아왔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kangho@chosun.com
―유명세를 탄 작가는 의미 없는 말 한마디도 뉴스가 되고, 신변 잡담까지 문학면에 실립니다. 선생님은 평생 시를 써도 중앙 언론에 한 줄도 얻지 못했군요.

"글쎄, 어떻게 답변해야 하나."

―작품 수준 때문입니까?

"이 나이에 속된 얘기 하려니 그렇네. 특별한 몇몇을 빼고 지방 시인들은 죽어도 중앙에는 명함을 못 내밀지. 하지만 어쩌겠나."

―선생님은 그렇게 된 연유가 뭐라고 봅니까?

"서울에 왔다 갔다 하며 부대끼거나 '문학과 지성' 같은 출판사에 인사했으면 달라졌겠지. 그쪽에서 나온 시인들은 떴지. 하지만 나는 서울서 잘나간다는 시인들과는 어울리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어."

―자존심 때문이었나요?

"정확하게 보시네. 내가 너희보다 못한 게 어딨나, 내가 왜 굽실거려야 하나, 너희 시 수백 편과 내 시 한 편 안 바꾼다, 이런 자존심으로 대구에 살았지. 명절 때 누구 누구 집에 찾아가 세배하는 걸 해본 적이 없어. 내가 현대문학에서 추천 완료를 받고 등단했지만, 최근 20여년 동안 그쪽에서 원고 청탁을 받은 적이 없어. 그렇다고 '청탁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지."

―선생님의 시가 시대 흐름을 못 따라간 게 이유가 아닐까요?

"내 나름대로 일관된 서정을 추구해왔지. 그때는 신경림씨의 '농무(農舞)'보다 내 '갑골(甲骨)길'이 훨씬 낫다는 자부심도 있었네."

술 몇 잔이 들어가자 그는 시를 낭송했다. "경남 함안여고(咸安女高)/ 백양(白楊)나무 교정에는/ 뼈모양의/ 하얀 갑골(甲骨)길이 보인다/ 함안 조씨, 순흥 안씨, 재령 이씨/ 다투어 살고 있는/ 갑골리에는/ 바람 많은 백양나무 생애로/ 노총각 한 선생이 살아왔다(중략)/ 어쩌다가 높은 둑길 위로/ 청람빛 가을이 펼쳐지면/ 청동색 강이 오히려 외롭다…"

―생전에 미당 서정주를 인터뷰했을 때 '시를 짓고 마음에 쏙 들면 당나귀가 풀밭에 뒹굴듯이 안방을 뒹굴기도 한다'고 하더군요. 선생님은 어떤가요?

"제일 좋은 질문인데, 나는 좋은 시를 쓰고 나면 '느그는 죽다 깨어나도 이래 못 쓴다'고 말하지. 치기(稚氣)라고 해도 좋은데, 소위 자부심이지."

―50년간 시를 써왔는데 작품 수가 너무 적습니다. 이번 시집은 '갑골길'(1982년) '그리운 남풍'(2003년)에 이어 10년 만에 나왔지요.

"과작(寡作)이라고들 하지. 나는 작품에 결벽증이 있지. 봄에 시작한 게 가을에 완성되고, 가을에 쓴 작품은 이듬해 봄에 끝날 때도 많아. 고치고 또 고치는 거지. 자기도 그 뜻을 모르고 독자들에게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써놓고 시라고 내놓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지."

―시는 화장실에 앉아서도 쓸 수 있다고 하지 않나요?

"청마(유치환) 선생이 '나는 화장실에서도 시밖에 생각 안 했다'고 했지. 고뇌를 지불하지 않으면 절대 좋은 시가 나올 수가 없어. 소설이야 엉덩이만 붙이면 나오는 거지. 미당(서정주) 선생이 대구에 오셨을 때 내가 앞에서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하고 미당 시를 낭송했지. 어떻게 이렇게 쓸 수가 있겠나. 천의무봉한 미당도 고심을 거듭했을 걸세."

그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국어 교사였다. 문예반 지도 교사도 한동안 맡았다. 안도현 시인과 200만부나 팔린 시집 '홀로서기'의 서정윤 시인, 박덕규·권태현·하응백·이정하씨 등이 그때 문예반 학생이었다.

―교직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 작업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습니까?

"시를 활발하게 써야 할 시기에 3학년 담임을 연속 7년 맡았지. 교사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지. 그때 한 선배가 '자네 한심하다. 작품이 중요한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해도,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네. 교사로서 농땡이를 좀 치고 문학에 좀 더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떠했을까."

―고3 반(班)을 맡아도 교과서 진도나 입시 공부에는 별로 관심 없던 걸로 들었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시 낭송을 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다른 시인들을 욕하는 걸로 수업을 끝낼 때도 많았고.

"등단 직후라 마음이 들떠 있었으니 그랬겠지. 나에 대한 결핍도 안 있었겠나. 작품이 내 마음먹은 대로 안 쓰이는 데서 오는 콤플렉스…. 밤새 술 마시고 교재 준비도 안 하면 수업하는 게 얼마나 힘이 드노. 그래도 내가 다 해냈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도 다 외웠지. 그걸 낭송해서 가르쳤어. 지금도 시 약 200수를 암기하고 있어."

―대구 출신의 한 작가는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술에 살고 시에 죽는 의리 있는 인물'이라며 선생님 실명 소설을 발표한 적도 있다면서요?

"작년에 '향토문학연구'라는 잡지에 그렇게 썼지. 나는 술 마시며 마음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가장 좋았지. 지금은 그런 친구가 거의 다 죽었어."

―그래서 대구 바닥에서는 선생님을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로 부르는군요.

"사실은 내가 '로맨티스트'가 아니지. 철저한 '리얼리스트'지. 내 시는 두보(杜甫) 쪽이야. 사회 현실에 밀착해있지. 내가 대구문협 회장으로 나왔을 때 경쟁자가 '도광의는 로맨티스트이기 때문에 사무 능력에 의심 간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얼마나 리얼리스트인지 알게 될 거다'라고 대응했지."

―이왕이면 '로맨티스트'가 더 멋있지 않나요?

"내가 대폿집을 많이 순례했지. 봉급을 술값으로 탕진했어. 주머니가 비면 '달아놔라' 하고 일어서지. '로맨티스트'라는 말은 이렇게 살아온 나를 반조롱 삼아 부르는 것이지.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가 알뜰해 지금 살고 있지."

―대학원 진학 등록금으로도 술을 마시는 바람에 결국 대학에서 강의하지 못하고 고교 교사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원 등록금을 내러 가던 날 봄비가 내렸어. 문 열린 대폿집 안에서 김상훈 선배(전 부산일보 사장)가 '자네 어디 가나, 잠시 들어와봐라'고 불러. 내가 대학원 얘기를 꺼내니 '청마(유치환) 선생도 대학 중퇴했고 이육사도 중퇴했다. 신춘문예 당선한 시인이 무슨 대학원이냐. 그러면 좋은 시인 못 된다'고 했어. 등록금을 술값으로 좀 써버린 거지. 써버린 돈을 빌리려고 못사는 이모를 찾아갔는데 입이 안 떨어져. 등록을 못 했지. 집에는 다니는 것처럼 꾸몄어. 나중에 알게 된 아버지가 '물 젖은 나락(벼) 팔아서 대학원 등록금 만들어줬더니 니가 그랬나'고 한탄했지."

―대학 은사인 김춘수(金春洙) 시인을 많이 비판했다면서요. 그러다가 김춘수 시인과 마주치면 도망가고.

"대학 다닐 때 청마 선생의 강의를 들었지. 이분은 검은 보자기에 책을 싸들고 와서 교탁에 놓고는 칠판에 '유치환'이라고 쓴 뒤 아무 말씀도 안 하셔. 강의 생각은 잊은 듯 인문관(館) 북쪽의 측백나무와 오동나무를 응시하더니, '시는 햇볕이 가득 내리는 마당에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깨진 사금파리를 갖고 노는 장난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어. 이 얼마나 순수한 얘기냐. 이런 청마 선생은 강의 못 한다고 1년 만에 쫓겨났잖아. 검은 책보를 들고 긴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아."

―그게 김춘수 시인 비판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후임으로 김춘수 선생님이 왔어. 폴 발레리, 말라르메, 랭보, 보들레르가 어떻고 하며, 손을 떨면서 강의했어. 강의가 소문이 나서 복도까지 학생이 몰렸어. 그때는 멋있었지. 나중에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걸로 말장난한 것이지. 선생님이 자기 시에 대해 '무의미(無意味)의 시'라고 했는데, 그게 말장난이지."

―지금도 김춘수 시를 '말장난'으로 봅니까?

"요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실험시도 위대한 방법론의 하나로 보니까. '꽃을 위한 서시(序詩)'는 절창이야.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이렇게 좋은 시가 많지. 그렇지 않은 난해한 시도 많아. 시는 의미가 살아있어야지, 어불성설(語不成說)은 시가 아니야. 나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시는 시라고 할 수가 없어.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차마 눈물 보이진 못하고 하관(下棺)을 지켜봤어."

―이번 시집 '하양의 강물'은 세월의 흐름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노래이더군요.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은 도랑물이 됐고, 발가벗고 놀던 냇가 바위는 작은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지. 호랑이가 낮잠을 자고 있다는 산은 사실 언덕만한 야산이었어. 고향을 말할 때마다 고향은 늘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미국 작가 토머스 울프가 '그대 다시는 고향 못 가리'라고 하지 않았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 쓰는 작업은 익숙해집니까?

"시를 보는 눈은 있는데, 좋은 시를 쓰기는 갈수록 힘들어지지. 시 쓰는 게 하도 몸서리쳐서 더 안 쓰려고도 했지. 하지만 시가 없었으면 난 무엇이 됐을까. 볼펜 꽂고 면사무소 앞을 왔다 갔다 하며 '김 주사 술 한잔 할래' 이렇게 지내지 않았겠나. 좋은 시를 쓰든 못 쓰든 죽을 때까지 만년필을 놓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해. 내게는 몽블랑 만년필이 두 개가 있지."

―선생님의 시에서 '우슬(牛膝)을 안고 갔던 자리에/ 가을비 내렸으나 흙이 젖지 않았다/ 반짝이는 은회색 털 나부끼며/ 우슬과 오르던 소방산이/ 혼자 오르는 소방산이 되었다/ 삶이 죽음으로 이은 목숨일지라도/ 잠자리 날개만큼이나 가벼워졌다…'고 했는데, 지나온 삶이 어떻게 보입니까?

"또 어려운 질문이네. 나는 내 가치대로 살았어. 통금 시간에 붙잡혀 파출소에 한 번 자본 것 외에는 남에게 피해를 줘본 적 없어. 남의 술을 얻어 마시기보다 훨씬 많이 샀지."

그보다 시를 잘 쓰는 시인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누구 못지않게 시인다운 삶을 살아온 것은 틀림없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집사람한테 용돈을 타 쓰고 있지만, 오늘 자네와 한잔하려고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좀 뽑아왔는데" 하며 몹시 섭섭해했다. 2차 대폿집 문전에서 우리는 작별했다.

 


 

[댓글]시처럼 살아가는 시인 이시네요. 지들끼리 밀어주고 돌아가며 상 싹쓸이 하고, 한국 문단도 이제는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기사 잘 보았습니다. 최기자님.

 


그랬구나대구에 사는 평생 지방시인 도광의(71)... 대구 바닥에서는 선생님을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로 부르는군요...대학원 진학 등록금으로도 술을 마시는 바람에 결국 대학에서 강의하지 못하고 고교 교사가 됐다고 들었습니다..."시를 활발하게 써야 할 시기에 3학년 담임을 연속 7년 맡았지. 교사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지. 그때 한 선배가 '자네 한심하다. 작품이 중요한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해도,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네. 교사로서 농땡이를 좀 치고 문학에 좀 더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떠했을까."

 

미당(서정주) 선생이 대구에 오셨을 때 내가 앞에서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하고 미당 시를 낭송했지...그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국어 교사였다. 문예반 지도 교사도 한동안 맡았다. 안도현 시인과 200만부나 팔린 시집 '홀로서기'의 서정윤 시인, 박덕규·권태현·하응백·이정하씨 등이 그때 문예반 학생이었다.

 

 "대학 다닐 때 청마 선생의 강의를 들었지. 이분은 검은 보자기에 책을 싸들고 와서 교탁에 놓고는 칠판에 '유치환'이라고 쓴 뒤 아무 말씀도 안 하셔. 강의 생각은 잊은 듯 인문관(館) 북쪽의 측백나무와 오동나무를 응시하더니, '시는 햇볕이 가득 내리는 마당에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깨진 사금파리를 갖고 노는 장난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어. 이 얼마나 순수한 얘기냐. 이런 청마 선생은 강의 못 한다고 1년 만에 쫓겨났잖아. 검은 책보를 들고 긴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아."

 

"그 후임으로 김춘수 선생님이 왔어. 폴 발레리, 말라르메, 랭보, 보들레르가 어떻고 하며, 손을 떨면서 강의했어. 강의가 소문이 나서 복도까지 학생이 몰렸어. 그때는 멋있었지. 나중에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걸로 말장난한 것이지. 선생님이 자기 시에 대해 '무의미(無意味)의 시'라고 했는데, 그게 말장난이지."

―지금도 김춘수 시를 '말장난'으로 봅니까?

"요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실험시도 위대한 방법론의 하나로 보니까. '꽃을 위한 서시(序詩)'는 절창이야.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이렇게 좋은 시가 많지. 그렇지 않은 난해한 시도 많아. 시는 의미가 살아있어야지, 어불성설(語不成說)은 시가 아니야. 나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시는 시라고 할 수가 없어.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차마 눈물 보이진 못하고 하관(下棺)을 지켜봤어."

―이번 시집 '하양의 강물'은 세월의 흐름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노래이더군요.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은 도랑물이 됐고, 발가벗고 놀던 냇가 바위는 작은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지. 호랑이가 낮잠을 자고 있다는 산은 사실 언덕만한 야산이었어. 고향을 말할 때마다 고향은 늘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미국 작가 토머스 울프가 '그대 다시는 고향 못 가리'라고 하지 않았나."

 

―선생님의 시에서 '우슬(牛膝)을 안고 갔던 자리에/ 가을비 내렸으나 흙이 젖지 않았다/ 반짝이는 은회색 털 나부끼며/ 우슬과 오르던 소방산이/ 혼자 오르는 소방산이 되었다/ 삶이 죽음으로 이은 목숨일지라도/ 잠자리 날개만큼이나 가벼워졌다…'고 했는데, 지나온 삶이 어떻게 보입니까?

"또 어려운 질문이네. 나는 내 가치대로 살았어. 통금 시간에 붙잡혀 파출소에 한 번 자본 것 외에는 남에게 피해를 줘본 적 없어. 남의 술을 얻어 마시기보다 훨씬 많이 샀지."

그보다 시를 잘 쓰는 시인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누구 못지않게 시인다운 삶을 살아온 것은 틀림없다.

 

 71세 도광의 시인의 이야기 속에 전설같은 구수한 스토리가 있다... 대학원 등록금을 술로 탕진하고...다닌체 하고...청마 유치환 선생이 이름석자 칠판에 써놓고...강의생각은 잊은 듯 창문너머 보다가.. '시는 햇볕이 가득 내리는 마당에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깨진 사금파리를 갖고 노는 장난에 불과한 것'이라 했는데.. 이런 청마 선생은 강의 못 한다고 1년 만에 쫓겨났잖아. 검은 책보를 들고 긴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아."...아하~ 그랬구나...ㅎㅎ...^-^

 

후임으로 온 김춘수 시인 이야기도 재미있다... 폴 발레리, 말라르메, 랭보, 보들레르가 어떻고 하며, 손을 떨면서 강의했어. 강의가 소문이 나서 복도까지 학생이 몰렸어. 그때는 멋있었지. 나중에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걸로 말장난한 것이지. 선생님이 자기 시에 대해 '무의미(無意味)의 시'라고 했는데, 그게 말장난이지."... 나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시는 시라고 할 수가 없어...이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ㅎㅎ...^-^

 

고교은사인 미당 서정주 선생 이야기... 하여튼 재미있다...ㅎㅎ...^-^

 

- 2012년 8월13일(화)요일 런던올림픽 폐막식 날 오후 7시20분...수산나 -

낮에 나온 반달 1

 

낮에 나온 반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