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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채근담-사자소학

명심보감[심가일 형불가불로]채근담[사기 무처기의]/덕수궁 설명

[명심보감] 51. 마음은 편하지만 육신은 수고롭다

 

明心寶鑑 正己篇


景行錄
경행록 왈

心可逸이언정 形不可不勞道可樂이언정 心不可
심가일 형불가불로 도가락 심불가

不憂形不勞則怠惰易弊하고 心不憂則荒淫
불우 형불로즉태타이폐 심불우즉황음

不定故逸生於勞而常休하고 樂生於憂而無
부정고 일생어로이상휴 낙생어우이무

하나니 逸樂者憂勞豈可忘乎아.
염 일락자 우로 개가망호

경행록에 씌어 있다.

"마음은 편할지언정 육신은 수고롭지 않을 수 없고, 도는 즐거울지언정 마음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육신은 수고롭게 하지 않으면 게을러서 허물어지기 쉽고
마음이 걱정하지 않으면 주색에 빠져서 행동이 일정하지 않다. 그러므로 편안함
은 수고로움에서 생기어 항상 기쁠 수 있고 즐거움은 근심하는데서 생기어 싫음
이 없으니 편안하고 즐거운 자가 근심과 수고로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逸 : 편안할 일 / 形 : 형상 형 / 勞 : 수고할 로 / 憂 : 근심 우 / 怠 : 게으를 태 /
惰 : 게으를 타 / 弊 : 폐단 폐 / 荒 : 거칠 황 / 淫 : 음탕할 음 / 休 : 쉴 휴 /
厭 : 싫을 염 / 豈 : 어찌 기 / 忘 : 잊을 망 / 乎 : 어조사 호.

心可逸 :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도 됨.
形不可不勞 : 몸은 수고롭히지 않을 수 없음. 즉, 몸은 수고롭혀야 함.
不可不 : ~하지 않을 수 없음, 즉 "~해야한다"의 뜻.
怠惰易弊 : 게을러져서 폐단이 되기 쉬움.
荒淫不定 : 마음이 거칠고 음탕하여 안정되지 않음.
常休 : 항상 안정됨.
無厭 : 싫어지지 않음.
逸樂者 : 마음을 편히 갖고 道를 즐기는 사람.
憂勞 : 마음의 근심과 몸의 수고로움. 豈可忘乎 :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채근담] 91. 자기를 버리려거든 이해타산의 미혹

 

舍己, 毋處其疑. 處其疑, 卽所舍之志多愧矣.
施人, 毋責其報. 責其報, 倂所施之心俱非矣.

사기, 무처기의. 처기의, 즉소사지지다괴의.
시인, 무책기보. 책기보, 병소시지심구비의.

자기를 버리려거든 이해타산의 미혹에 사로잡히지 말라.
의심을 품는다면 내 몸을 버렸던 뜻에 부끄러움이 많아지리라.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거든 그 보답을 구하지 말라.
그 보답을 구한다면 은혜를 베푼 마음 마저 함께 그릇되느니라.

 


 

舍 : 집 사, 버릴 사 / 毋 : 말 무 / 處 : 곳 처 / 疑 : 의심할 의 / 愧 : 부끄러울 괴 /
施 : 베풀 시 / 報 : 갚을 보 / 責 : 꾸짖을 책, 빚 책 / 倂 : 아우를 병.

舍己 : 자기를 버림.
所舍之志 : 버린 바의 뜻.
施人 : 남에게 베품.
責其報 : 은혜갚을 것을 따짐.

덕수궁 연못

 

경복궁

 

경복궁의 왕의 침전의 이름은 강녕전이다.()

경복궁의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접대 하던 곳이다. ()

경복궁의 모든 건물에는 용마루가 설치 되어있다( X )

명성황후가 시해 된 사건을 을사조약이라고 한다.(X )
경복궁은 현재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있다 (X )


일월오악도에 그려져 있는 것은 (해), ( ),(소나무),(폭포) 그리고 ( ) 입니다.

 

대비마마를 위해 지은 건물의 이름은 (자경전)입니다.

교태전 뒤편에 있는 (아미)은 경회루 연못에서 퍼낸 흙으로 만든 인공산 입니다.


창덕궁

선정전에는 용마루가 있다.()

창덕궁의 정전은 인정전,중궁전은 대조전이다.()
낙선재의 단청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X )

궐내각사는 창덕궁 안에 있는 관청이다.(X )

창덕궁은 현재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왕의 집무실인 (선정전)은 푸른 청기와로 지어져 아름답다.

왕비의 침천인 (대조전)은 일제 강점기에 불이나서 일본인이 보수공사를 하였는데 목재가 부족하자 (경복궁)의 (교태전)뜯어 지어졌다.

(인정전)은 창덕궁에서 가장오래된 정전으로,이곳에서는 왕의 즉위식과 세자책봉,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국가의 행사가 벌어졌던 곳이다.


덕수궁

 

덕수궁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진 궁이다.(X )

덕수궁은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
덕수궁 내 석조전은 전통 우리나라 양식의 건물이다.(X )

정관헌은 왕의 침전 이였던 장소로 대화제 불에 타 다시 복원한 건물이다.(X )
대한문은 덕수궁의 남문으로 정문이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어려운 시절을 회상하는 공간이라는 뜻의 (경운)입니다. <- 덕수궁이 원래 '경운궁'은 맞는데 그 뜻은 정확히 몰겠군요.

지위를 막론하고 말에 내려 걸어 들어가라는 뜻의 비석 이름은 (하마비)입니다.

정관헌의 박쥐는 ( )과 (다산 )을 상징합니다.

덕수궁의 정전의 이름은 (중화전)이며,단청장식이 들어가 화려함과 움장함을 보여 줍니다.


 

 

덕수궁 [ 德壽宮 ]

  • 이칭별칭

    경운궁, 명례궁

  • 유형

    유적

  • 시대

    조선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사적 제124호. 지정면적 6만3190㎡. 이 궁은 조선시대에는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려왔으며,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죽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여기서 즉위하였다. 그해 창덕궁이 완성되었으므로 광해군은 이곳을 떠났으며, 경운궁이라는 궁호(宮號)를 붙여주었다.

조선 후기의 이 궁에는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이곳에 유폐시킨 일이 있고,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는 정도였다.

고종 말년 조선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왕이 경운궁으로 옮기자,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897년 왕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하여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다. 이 무렵 궁내에는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도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에 궁에 큰불이 나 전각의 대부분이 타 버렸으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05년 즉조당(卽?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준명전(浚明殿)·흠문각(欽文閣)·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으며, 중화문(中和門)·조원문(朝元門) 등이 세워졌다.

1906년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되었는데,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되고 궁의 정문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으며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910년 궁내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한편,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 궁에서 일어났는데, 1897년에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년까지 거처하였고, 1904년 헌종의 계후(繼后) 명헌태후 홍씨(明憲太后洪氏)가 인수당에서 별세하였으며, 황태자비 민씨(閔氏)도 석어당에서 별세하였다.

 

1907년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하였고 고종의 순헌귀비 엄씨(純憲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은 1907년 왕위를 물려주고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와 같이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며, 궁내의 각 건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그 뒤 별다른 사건을 겪지 않다가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이 자리에 들어오게 되어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석조전은 6·25사변 중 내부가 불타기도 하였으며 사변 후 이 궁은 공원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석조전은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어왔다.

덕수궁은 당초 사가(私家)이던 것을 선조 때 임시로 왕이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이 된 것인 만큼, 궁이 자리잡은 위치나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 위치는 한성부(漢城府)의 서부 황화방(皇華坊)·정릉동(貞陵洞)일대로 이곳은 원래 태조의 계비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능은 태종 때 옮겨지고 그 자리에 월산대군의 집이 지어졌던 것이다.

이곳은 도성 내의 주요가로와도 직접 면하여 있지 않은 곳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은 궁이 있는 곳으로는 여겨지지 않던 것으로 보인다.

 

덕수궁은 결국 고종 말년에 왕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갑자기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건물의 배치도 이때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현재의 상태에서 그 위치를 알아보면 궁의 서쪽은 미국대사관 남쪽 길을 따라 러시아공관이 있던 언덕 일대와 신문로 일대에 해당되고, 북쪽은 영국대사관을 거쳐 성공회(聖公會) 앞길을 따라 덕수국민학교 담 위쪽을 지나 신문로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

이 자리에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로 영국·미국·러시아의 공관터를 내주면서 궁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서양식 건물이 지어지고 도로가 생기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정전과 침전(寢殿)이 있는 부분, 선원전(璿源殿)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重明殿)이 있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궁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남쪽에 중화문, 그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등이 있었다.

정전의 뒤편에는 석어당·즉조당이 있는데, 이 두 건물은 고종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건물들이다.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녕전이 있고 함녕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 동북쪽에 수인당(壽仁堂), 동쪽에 영복당(永福堂)이 있었다. 중화전의 서북쪽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으며 관명전(觀明殿)·보문각(寶文閣) 등이 중요한 것들이었다.

중화전은 처음 중층지붕의 장대한 규모로 세워져, 2층으로 조성된 월대(月臺)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화재 뒤 재건되면서 규모를 줄여 단층건물로 만들었다. 중화전 주변에는 사방에 행각이 세워져 있어 중화문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이것도 철거되어 없어졌다. 중화문 역시 당초는 중층건물이었으나 재건되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축소되었다.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형식(翼工形式)의 간결한 건물이다. 1985년 중화전 및 중화문이 보물 제819호, 함녕전이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석어당은 궁내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본래 이 건물은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여 선조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1906년 재건된 건물이 지금 남아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정관헌은 서양식 건물로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조적식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이다.

평성문 밖 지금 미국대사관 서쪽에는 이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던 중명전이 있었고,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에 대하여는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이밖에 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는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러시아공관 북쪽 언덕에서 큰 길을 건너 경희궁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지방법원이 있는 자리로도 이어졌다. 남쪽의 구름다리는 그 건너에 과거 의정부(議政府)가 옮겨와 있었기 때문에 궁과의 내왕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었다.

 

궁의 배치는 1904년 큰 화재가 있은 뒤로 변화되었고,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조화를 잃게 되었는데, 특히 나중에 지어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은 기존의 정전 건물들과 축(軸)도 일치되지 않고 그 위치도 정전과 인접하여 대규모로 지어지면서 종래의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리고 말았다.

화재 뒤 건물이 중건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의 변경이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정전의 정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1906년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그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쳐 이 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궁으로의 진입은 동쪽 모퉁이에서 시작되어 서쪽을 보고 들어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꺾여 정전에 이르게 되었다. 대한문은 1968년 도시계획에 의하여 덕수궁 담장이 안쪽으로 옮겨지면서 1970년에 안으로 옮겨졌다.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며, 이 가운데 돈덕전·석조전이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돈덕전은 평성문 밖 북쪽에 있었으나 철거되었고 그 남쪽 가까운 위치에 석조전이 세워졌다.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건물로 이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이웃한 궁의 정전과 주변의 한식 건물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건축구성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더욱이,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의 본래의 모습이 상당히 파괴되었다.

덕수궁은 비록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