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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조용헌 살롱]甲申政變과 원세개/독립문 2장

[조용헌 살롱] [858] 甲申政變과 원세개

 조선일보 사외칼럼 입력 : 2012.10.21 22:39

 

한·중·일 3국이 섬(島) 문제로 긴장이 고조되는 형국이 되다 보니까, 구한말 일어난 사건들의 배경을 좀 자세히 공부할 필요를 느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도 그렇다. 당시 조선에 파견되어 있던 청나라의 군사 실무 부책임자는 원세개(袁世凱)였다. 일본의 지원을 받고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파악한 원세개는 매우 신속하게 판단을 내렸다. 난리가 발생한 상황에서는 대처 매뉴얼이 없는 법이다. 임기응변이 최고이다. 이 임기응변 능력에서 그 사람의 자질이 드러난다.

원세개는 본국의 허가도 받지 않고 전격적으로 병력을 출동시켰다는 점이 주목된다. 당시 청나라 천진과 인천 사이에는 전보선이 없었고, 상부 결재를 받으려면 천진과 인천을 오고 가는 북양함대 군함을 통해서 연락을 취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면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상황은 떠내려간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상부의 결재를 받고 난 후에 움직이자는 직속상관 오조유를 설득한 원세개는 정변 발생 나흘째에 자기 밑에 있던 병력 800명을 동원하여 개화파가 머무르던 창덕궁을 치고 들어갔다. 머뭇거리던 오조유도 500명을 이끌고 같이 공격에 합세하여 갑신정변은 사흘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이때 원세개가 몇 살이었는가? 1859년생이니까 만 25세였다. 군대 갔다 온 대학 4년쯤 되는 나이이다. 불과 스물다섯 살의 새파란 애송이가 조선의 운명을 좌우했던 것이다. 갑신정변 진압의 공으로 후일 원세개는 황제에 오르는 발판을 마련하였다(신동준 '인물로 읽는 중국근대사').

한편 개화파의 배후에 있던 다케조에(竹添進一郞) 일본 공사는 44세였다. 원세개가 창덕궁 공격을 감행하자 다케조에는 일본 경비대의 철수를 결정하였다. 맞붙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맞붙지 못하고 후퇴한 이유는 상부의 결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매한 상황에서 머뭇거리다가 스물다섯 살의 새파란 원세개에게 44세의 중년 다케조에가 당한 것이다. 다케조에는 한학자 출신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문사는 격식과 절차를 생략하기가 힘들다. 반면에 원세개는 10대 후반부터 사격을 잘하고, 여차하면 사람을 죽여 버릴 수 있는 과단성의 소유자였다. '갑신정변'을 읽다 보면 구한말에 우리는 어떻게 그리도 못나고 무력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갑신정변]

 


임오군란은 수구적인 민씨정권과 급진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켰다.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하여 봉기를 진압한 뒤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침략

을 획책했고, 민씨정권은 청에 의지하여 정권유지를 꾀했다. 그들에겐 개화파는 큰 위협적

존재였다. 이 때문에 민씨정권은 개화파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였다. 이런 정세 아래 민

씨정권에 참여하면서 평화적으로 개혁을 꾀하려던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축소될 수밖

에 없었다. 안남(安南)문제를 두고 형성된 청과 프랑스의 대립관계는, 개화파에게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있는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주었다. 마침내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청과 프랑스가 전쟁이 일어나자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1500명을 철수시켰다. 한

편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축출하려는 일본은 민씨정권과 대립하던 개화파에게 접근하기 시작

하였다.

그리하여 급진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갑신정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대는 천(天:하늘)을 아는가?"

"요로시(좋소)."

'천'과 '요로시'는 김옥균 무리와 일본군 사이에 정해 둔 암호였습니다.

'별국이 불길에 휩싸이면...이제 세상이 바뀌리라....'



김옥균은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손에서는 땀이 배어 나왔습니다.

잔치는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정된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궁에서는 불길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김옥균은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그렇다면...아, 이대로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건가?'

시계는 벌써 밤 10시를 기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우정국 주변이 환해지면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불이야! 불!"하는 비명 소리도 들려 왔습니다. 잔치는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휴우, 시작됐군!'



김옥균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북쪽 창문으로 뛰어나가 "천!" 하고 암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일본 공사관에 들러 다시 한번 약속을 확인하고는 고종이 자고 있는 창덕궁으로 향했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청나라 군대가 난을 일으켜 이 곳은 위험합니다."



김옥균은 고종에게 거짓말을 하고 서둘러 경우궁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러자 일본군 2백여 명이 경우궁을 에워쌌습니다. 모든 게 미리 약속된 일이었지요. 그 다음으로 자신들과 반대편에 서 있는 세력을 왕의 명령이라며 불러서 죽였습니다.
늦은 밤, 난데없이 일어난 불길처럼 갑신정변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김옥균의 3일 천하


김옥균 등이 중심인 급진 개화파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모든 제도를 급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민씨 세력과 개화를 반대하는 세력에 밀려 그들의 개화정책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자 개화파는 자신들의 방해세력을 무력으로 제거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1884년 봄부터 따로 군사를 기르고 일본 군대의 지원을 요청하는등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2월 4일, 드디어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갑신정변 첫날, 가까스로 1차 계획에 성공한 개화파는 밤새 개혁 정책을 만들고 자신들이 주요 관직을 차지했습니다.



둘째 날, 새로운 개혁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각 대사관에 알리고,
개혁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셋째 날,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온 고종은 개화파를 지지하는 조서를 내렸읍니다.
그런데 그 때 청나라 군대가 포탄을 쏘며 궁궐로 들어왔읍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약속을 깨고 돌아가 버렸고 개화파들은 목숨을 잃거나 외국으로 망명했읍니다. 결구 고종이 내린 조서는 휴지 조각이 되었고 갑신정변은 3일만에 막을 내렸읍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첫째,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점입니다. 그들은 성공적인 혁명이 역사의 중심인 민중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지요.



다음으로 외국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어서 개화파는 청나라 군대의 개입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또,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읍니다.
일본이 김옥균의 군대 요청에 흔쾌히 응한 것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개화파의 세력을 이용하려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개화파는 일본에 너무 의지하다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또한, 갑신정변은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화가 얼마나 중요한것인가를 알려 주었습니다

 

짱나3일천하 '갑신정변'...1884년 8월 베트남에서
청과 프랑스가 전쟁이 일어나자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1500명을 철수시켰다. 한
편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축출하려는 일본은 민씨정권과 대립하던 개화파에게 접근하기 시작 하였다.

그리하여 급진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1884년 12월4일 우정국 축하연에서 일으켰다.

갑신정변 첫날, 가까스로 1차 계획에 성공한 개화파는 밤새 개혁 정책을 만들고 자신들이 주요 관직을 차지했습니다.
둘째 날, 새로운 개혁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각 대사관에 알리고,
개혁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셋째 날,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온 고종은 개화파를 지지하는 조서를 내렸읍니다.


 

 

그런데 그 때 청나라 군대가 포탄을 쏘며 궁궐로 들어왔읍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약속을 깨고 돌아가 버렸고 개화파들은 목숨을 잃거나 외국으로 망명했읍니다. 결국 고종이 내린 조서는 휴지 조각이 되었고 갑신정변은 3일만에 막을 내렸읍니다.

 

우정국

 

한국 최초의 우편행정관서로서, 1884년(고종 21) 종래 역참제(驛站制)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통신제도를 도입, 그 운영을 위해 설치하였다. 병조참판 홍영식(洪英植)이 총판(總辦)에 임명, 박영효(朴泳孝) 등 15명이 사사(司事)가 되어 사무를 분담하였으며, 견평방(堅平坊:鍾路區 堅志洞)에 있던 전의감(典醫監)을 개수하여 청사로 사용하였다.

조선정부는 처음으로 일본 ·영국 ·홍콩 등 외국과 우편물교환협정을 체결하고, 11월 17일 역사적인 근대적 우편제도의 사무를 개시하였다. 이때 서울의 총국과 인천의 분국(분국장 李商在)이 제1차로 개국하였다.

그러나 12월 4일 우정총국 청사의 개업축하연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12월 9일 폐쇄되었으며, 1895년 우체사(郵遞司)가 설치될 때까지 10년 동안은 다시 구제(舊制)인 역참에 의한 통신방법이 계속되었다.

우정국이 어떠한 계기로 생겨났는가?
개혁의 일환이었지요.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인해 대원군이 청으로 잡혀가고 조선에서 다시 개혁정책이 실시되었고, 1884년 위와 같이 우정국이 설치되지요.
하지만, 갑신정변과 함께 조선에서 '개혁'이라는 코드가 사라지게 되자, 한동안 없어졌었지요. 그러다 1895년 갑오개혁때 다시 등장하게 되죠. 위에서 보다시피 우체사라는 이름으로...

 

 

 

독립문 1

 

독립문 2

 

독립문: 대한제국 말기 자주민권과 민족자강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석조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사적 제32호. 높이 14.28m, 너비 11.48m.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의 정문인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건양 1)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했으며, 당시 서양건축의 조영경험이 있던 목수 심의석(沈宜碩)이 공사감독을 맡아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만들었다. 설계자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많은 건물을 설계한 러시아인 사바틴이라는 설도 있다.

 
45×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지만 쌓는 방법은 우리나라 전통기법을 사용했다. 무지개문 좌우의 받침기둥, 모서리의 귓돌, 꼭대기의 난간만이 서양식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1917년 수리공사를 했으며 1928년 기초가 무너질 위험이 있어 조선총독부에서 공사비 4,000원을 들여 벽체 안쪽을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했다. 1979년 금화터널 공사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7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긴 동판이 묻혀 있다. 독립문 앞에 영은문의 석재 초석이 있는데 이는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립문의 뜻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峴底洞)에 있는 돌 문. 1897년 11월 20일에 독립(獨立) 협회(協會)가 각계 각층 국민(國民)의 헌금으로, 한국(韓國)이 청국(淸國)의 기반(羈絆)을 벗어난 것을 기념(記念)할 목적(目的)으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웠던 것인 데, 1980년 현재(現在) 자리로 옮겨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