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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김석종의 만인보]대중문화의 ‘살아있는 전설’ 방송작가 유호/서울 경교장 등 3장

 

[김석종의 만인보]대중문화의 ‘살아있는 전설’ 방송작가 유호

 경향신문/오피니언/ 테마칼럼/김석종 선임기자/입력 : 2012-07-18 21:19:01

 

 

자, 이번엔 노래 한 곡조! “눈무울도 한수움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밤거리에 뒤잇골목을 헤매고 다녀도/사아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거어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마라/그대를 태에양처럼 그리워하는/사나이 이이 가아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음치인데도 취했다 하면 꼭 이 노래를 부르는 친구가 있다. 부산 사투리를 묘하게 섞어 ‘싸나이 이 가슴’을 악써대는, 그 열창이 절절해서 모두들 쓰러진다.

가사를 ‘씹어 삼키며’ 불러야 제맛나는 이 노래, ‘맨발의 청춘’(1964년 청춘스타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한 영화 주제가로 이봉조가 곡을 쓰고 최희준이 불렀다) 노랫말을 쓴 이가 유호(91·전 방송작가협회 이사장)다. 흑백TV 시절부터 수많은 시청자를 텔레비전 앞에 무릎 꿇렸던 바로 그 ‘인기작가 유호’ 말이다. 그이는 이런 ‘국민애창곡’을 100곡도 넘게 썼다.

얼마 전 유호 선생(원체 어른이어서 ‘만인보’에 처음 경칭을 쓴다)을 일산의 한 일본식 선술집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왕년의 명프로듀서 김수동(전 KBS 드라마국장), <서울의 달> <짝패>의 방송작가 김운경, 그리고 소설가 김훈이 함께 있었다. 방송 일로 얽힌 세 사람은 자주 만나는 사이니 그렇다치고, 김훈이 합석한 것은 또 사연이 있다.

그이와 김훈 아버지인 소설가 김광주 선생(1973년 작고)이 생전에 아주 절친한 사이였단다(1950년대 경향신문 기자 선후배로 차례로 문화부장을 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함께 통음을 일삼던 술벗이었다. 김훈이 어릴 때 한 동네서 살았는데, 연락이 끊겼다가 이번에 김운경이 다리를 놓아 20여년 만에 처음 만난 거였다.

유 선생은 요즘 건강 때문에 술은 삼간다. 이날만은 옛 선배를 그리워하며 정종잔을 거푸 비웠다. 김 선생은 명동의 ‘은성’, ‘통술집’ 같은 대폿집을 주름잡던 ‘주호문사(酒豪文士)’였다고 한다. 김훈은 “세뱃돈을 제일 많이 주셨던 어른”, “여동생 결혼 때 아버지처럼 챙겨주신 분”이라면서 언뜻언뜻 눈시울을 붉혔다.

고향 황해도 해주. 본명 유해준. 일본 유학을 했고, 1943년부터 연극 상설극장인 동양극장에서 두 편의 극본을 써서 청춘좌(靑春座) 무대에 올렸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세운 서울중앙방송(KBS 전신)에 들어가 낭독소설과 라디오 연속극을 쓰면서 우리나라 첫(제1호) 방송작가가 됐다. 노랫말은 당시 방송국 경음악단장이던 박시춘의 부탁으로 쓰게 됐다. 하도 성화를 부려서 자신의 첫 노랫말이자 해방 후 최고 히트곡으로 꼽히는 ‘신라의 달밤’(아~ 신라의 밤이여)을 단숨에 썼다는 그다. 심지어는 술집으로 찾아온 박시춘에게 즉석에서 가사를 불러주기도 했다. ‘고향만리’(남쪽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럭키 서울’(서울의 거리는 희망의 거리), ‘서울야곡’(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에) 같은 ‘유호-박시춘-현인’ 트리오의 ‘공전의 히트가요’들이 그렇게 나온 거다(노래 불러보라고 일부러 괄호 안에 가사를 적는다).

‘낭랑 18세’(저고리 고름 말아쥐고서), ‘아내의 노래’(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었기에)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한국전쟁 때 만든 노래가 '진중가요'인 ‘전우야 잘자라’(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와 ‘전선야곡’(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이다. 국방부의 요청을 받아서 군가 ‘진짜 사나이’(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도 내놓았다. ‘삼다도 소식’(삼다도라 제주에는 아가씨도 많은데), ‘이별의 부산 정거장’(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은 전쟁중 국군 문예중대에 소속돼 만들었다.

 

1960~70년대 연속극은 가히 ‘유호시대’였다. <짚세기 신고 왔네> <시거든 떫지나 말지> <일요부인> <서울야곡> <딸> <님은 먼곳에> <왜 그러지> <돼지> <그건 그려> <종점> <세자매> <새댁> 등 써내는 연속극마다 인기 폭발이었다. 숫제 ‘유호극장’이라는 드라마 코너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이게 또 방송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란다. 이쯤에서 300회 넘게 방송된 일일연속극 <딸>을 기억해내거나, 코믹터치의 홈드라마 <왜 그러지>를 떠올리며 미소짓는 이도 있을 성싶다.

‘유호 드라마’의 인기는 서민들의 애환을 ‘내 얘기처럼’ 짚어내는 리얼리티가 있어서다. 무엇보다도 위트와 유머가 넘쳐나는 거였다. 신문과 주간지에 애간장 녹이는 ‘핑크 무드’의 소설도 연재했다. 그이가 쓴 드라마와 소설은 속속 영화로도 제작됐다. 당연히 연속극과 영화 주제가 노랫말은 직접 썼다.

그게 ‘비나리는 고모령’(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길잃은 철새’(무슨 사연이 있겠지 무슨 까닭이 있겠지), ‘카츄샤의 노래’(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가신), ‘님은 먼 곳에’(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종점’(너를 사랑할 땐 한없이 즐거웠고), ‘떠날 때는 말없이’(그날 밤 그 자리에 둘이서 만났을 때) 같은 노래들이다.

하나같이 누구나 서슴없이,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명곡’ 아닌가. 중년 이상이라면 노래방 ‘십팔번’으로 가장 많이 꼽을 테니, 한국 가요사의 주옥이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스탠더드랄 밖에. 게다가 시대와 세대를 넘어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 레퍼토리 1순위로 꼽는 것도 대단하다. 그래서 좀 찾아봤는데, 김추자의 ‘님은 먼곳에’를 패티김, 위일청, 장현, 조미미, 이은하, 김희진, 조미령, 채수정, 최진희, 이미연, 거미, 춘호, 조관우, 장사익, 수애까지 줄줄이 이어 불렀다.

이건 노랫말에 젊은 감각이 펄펄 살아 있어서다. 안 그러면 어찌 ‘서울야곡’을 현인에 이어 이미자, 하춘화, 문주란, 박일남, 배호, 나훈아, 조미미, 전영, 그리고 최근에는 린과 말로까지 50명이 넘는 가수가 불렀겠나. 조용필, 김세레나, 김연자, 김부자, 송대관, 정훈희, 조영남, 한서경, 심수봉, 주현미, 사랑과 평화, 윤수일, 이수미, 문희옥, 박재범, 노브레인 등이 죄다 그이의 노래를 불렀다. 어쩌면 ‘유호 작사’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면 그야말로 무명가수라고 보면 될 거다. ‘신라의 달밤’, ‘님은 먼 곳에’, ‘낭랑18세’는 얼마 전에도 새로운 영화, 드라마로 나왔다. 그러니 유 선생을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산역사,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러도 찍자붙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그이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전후의 폐허, 70, 80년대까지 이어지는 굴곡진 세월을 방송, 영화, 가요뿐 아니라 기자, 소설가 등 ‘1인 다역’으로 살았다. 그것도 손대는 분야마다 ‘최고’였으니 그 저력이 놀랍다. ‘신라의 달밤’은 경주에, ‘비 내리는 고모령’은 대구의 옛 ‘고모역’에 노래비가 서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작곡가 박시춘, 황문평, 손목인, 이봉조, 신중현 등 당대 제일의 작곡자들에게 숱한 히트곡 노랫말을 써주고는 돈 한 푼 받은 적 없단다. “모두들 ‘후딱 쓰고 나가 대포 한잔 합시다’ 하면 끝이야. 나도 막걸리 한 잔 마시는 것으로 만족했지. 허허허.” 그래도 지금은 날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리는 그 노래들 덕에 매달 수백만원씩 음악저작권료가 들어온다고 했다.

유 선생은 늘 “내 본령은 방송작가”라 한다. 그동안 쓴 연속극만 100편 넘으니, 양에서도 단연 추종 불허다. 그랬건만, 그가 쓴 초창기 드라마는 대부분 영영 다시 볼 수 없다. 1980년 방송통폐합 당시 KBS가 통합된 민방의 필름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서다. 한국 방송사의 중요한 자료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다니 입맛이 쓰다.

구순에도 흰색 면바지에 납작모자(도리우치), 보라색 줄무늬 셔츠를 센스있게 차려입고 다니는 이 멋쟁이 노신사는 아직도 드라마를 구상 중이다. 제목은 ‘왜사니’로 정해뒀단다. 이거, 방송이든, 노래든 요즘 젊은세대도 욕심낼 만한 제목이다.

창밖에 비내리니, 그이가 ‘서울야곡’ 흥얼거릴 것만 같다. “봄비를 맞으면서/충무로 걸어갈 때에/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이슬처럼 꺼진 꿈 속에는/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맨발의 청춘’ 노랫말을 쓴 이가 유호(91·전 방송작가협회 이사장)다....이런 ‘국민애창곡’을 100곡도 넘게 썼다.... 김훈은 “세뱃돈을 제일 많이 주셨던 어른”, “여동생 결혼 때 아버지처럼 챙겨주신 분”이라면서 언뜻언뜻 눈시울을 붉혔다...^-^

 

 1960~70년대 연속극은 가히 ‘유호시대’였다...‘유호 드라마’의 인기는 서민들의 애환을 ‘내 얘기처럼’ 짚어내는 리얼리티가 있어서다. 무엇보다도 위트와 유머가 넘쳐나는 거였다...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산역사,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러도 찍자붙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당대 제일의 작곡자들에게 숱한 히트곡 노랫말을 써주고는 돈 한 푼 받은 적 없단다....그래도 지금은 날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리는 그 노래들 덕에 매달 수백만원씩 음악저작권료가 들어온다고 했다....^-^

 

1980년 방송통폐합 당시 KBS가 통합된 민방의 필름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서 그가 쓴 초창기 드라마는 대부분 영영 다시 볼 수 없다...ㅠㅠ...^-^

 

 

 

- 2012년 11월30일 금요일 오전 9시2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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