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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김석종의 만인보]예술가·운동권 인사들의 ‘피맛골 누님’ 한귀남/광화문 광장 3장

 

[김석종의 만인보]예술가·운동권 인사들의 ‘피맛골 누님’ 한귀남

경향신문/오피니언/테마칼럼/김석종 선임기자/입력 : 2012-10-10 21:11:15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1980~90년대 서울 종로 피맛골의 ‘시인통신’은 가난한 예술가와 장안의 기인, 재사들의 ‘소굴’이었다. 이 술집은 종로 재개발로 뒷골목이 왕창 잘려나가면서 사라졌다. 20년 넘게 ‘시통’(다들 그렇게 줄여서 불렀다)을 지키며 하고많은 주당(酒黨)들을 동생으로 거느렸던 ‘누님’ 한귀남(68)도 종로통을 떠났다. 지금은 서울 재동의 북촌 한옥마을에서 같은 이름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 중이다. “떠나지 않으려고 싸우고 버텨도 봤지만 다 소용 없었어. 시절이 옛날 같지 않아. 술집은 낭만이 없고, 술꾼들은 정이 없고….”

시통은 1982년 박종수란 시인이 문인들의 연락처 겸 커피를 파는 일종의 무허가 카페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광화문 교보빌딩 옆 피맛골 초입의 작은 건물 한 귀퉁이에 딸린 두 평짜리 방이었다. 통행금지는 풀렸지만 심야영업은 금지된 시절이었다. 그러니 젊은 문인과 문학청년들이 인사동이나 청진동을 배회하다가 자정 넘으면 술과 안주를 사들고 마치 후조처럼 하나둘씩 시통으로 모여드는 거였다.

마흔살 한귀남이 시통을 떠맡은 게 1984년이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서 집을 나가고 홀로 아들 셋을 키워야 하는 막막한 처지였다. 낮에는 커피를 팔고 밤에는 근처 구멍가게에서 소주 맥주와 마른안주를 사다 날랐다. 그러다가 달걀말이(5000원)와 통북어(8000원), 골뱅이(8000원)를 안주로 내놨다.

실내는 귀퉁이가 다 닳아빠진 낡은 탁자 두 개가 전부였으니, 어찌보면 포장마차만도 못했다. 일어서면 머리가 닿는 낮은 천장과 울퉁불퉁한 회벽은 온통 낙서투성이였다. 달랑 알전구 하나로 불을 밝힌 그 칙칙하고 비좁은 ‘골방’에 스무 명씩이나 기어들어가 바짝바짝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술을 마셔댄 거다. 그런데도 단골들이 자꾸자꾸 가지를 쳐서 아이들이 잠자고 공부하는 지하 쪽방까지 점령하곤 했다(지금은 세 아들 모두 훌륭한 40대로 장성했다).

‘겨울공화국’의 한복판이었으니, 술 권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시통에서는 날마다 낭만으로 혹은 암울한 시대의 울분으로 대취한 가난한 예술가들이 뒤엉켜 질탕한 술주정과 난리 활극 퍼포먼스를 벌였다. 한쪽에서는 핏대를 세워가며 토론하고, 다른 쪽에선 춤과 노래로 신명을 냈다.

어떤 화가가 양말에 짜낸 새까만 땟국물 막걸리를 권했더니, 그 술잔을 단숨에 들이켠 사진가가 누런 팬티에 술을 짜서 돌려줬다는 식의 기상천외한 무용담이 나날이 쌓여갔다. 자주 술잔이 박살나고, 때로는 팔이나 이빨을 부러뜨리는 드잡이도 끝없었다.

“누님, 누니임! 여기, 술!” “아이구! 이 징글징글한 화상들아!” “전두환 물러가라!” “씨끄럽다! 고만해라!” 경험도 밑천도 없이 시통을 떠맡은 한귀남은 이 행패 막심한 애물단지 ‘화상들’을 뒤치다꺼리하면서 어느새 아주 노련하고 통 큰 누님이 돼갔다. 때로는 서릿발 같은 ‘카리스마’로 단호하게 싸움을 정리하고, 또 너그럽게 화해도 시켰다.

 


손님들이 어느새 형님 동생 하면서 합석을 하고, 중간에 불쑥불쑥 자리를 뜨기도 해서 마지막엔 계산할 사람이 분명치 않은 게 늘 골칫거리였다. 원고료나 그림값을 받아야 호기롭게 술값을 냈다. 가끔은 밀린 외상값을 대신 갚아주는 선배가 있었고, 어떤 작가는 맘껏 마시라고 출판 계약금을 전부 맡겨놓고 갔다. 술값 대신 그림을 놓고가는 화가도 있었다.

결국 한밤중의 소란에 지친 건물 주인이 시통을 내쫓았다. 하긴 서울 한복판에서 주당들이 생난리를 치는데도 10년 동안 무허가영업에 심야영업까지 했다는 게 더 신기한 일이다.

이때 단골들이 만든 ‘시발연’(시인통신발전연구회)이 나섰다. 서로서로 연락해 외상값을 갚고, 형편 되는 대로 성금도 모았다. 한귀남은 푼푼이 부은 곗돈에 빚을 보태서 피맛골 한 가운데(지금의 ‘르메이에르’ 건물 자리다)에 1, 2층을 합쳐 ‘무려’ 열 평짜리 ‘번듯한’ 새 가게를 얻었다. 1992년 5월의 어느 날 한밤중, ‘시통 식구’들이 탁자와 의자, 주방기구, 낙서판까지 죄다 떼서 줄지어 나르던 모습은 정말로 다시는 못 볼 구경거리였다. 화장실 있지, 자리 넉넉하지, 정식 영업허가까지 냈으니 장사는 나날이 번창했다.

한귀남은 지금도 시통의 낙서와 그림, 사진, 외상장부까지 보관하고 있다.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었어….” 특히 낙서는 1980년대 한국의 풍속도라 할 만하다. ‘방관은 죄악이다’ ‘허무, 그 단단한 놈’ ‘맥주는 길고 소주는 짧다’ ‘有酒有樂 無酒無樂(유주유락 무주무락)’ ‘누님은 잡혀가고 우리는 술도 못 먹고 노태우나 욕하다 간다’….

그 시절 시통을 모르면 서울의 예술가, 술꾼이 아니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장안의 유명 무명 문인, 화가, 연극인, 음악인, 사진가, 건축가, 산악인, 기자, 출판인, 학자, 역술가, 스님, ‘운동권’ 인사에다 사업가, 샐러리맨, 그냥 ‘날라리’ 허풍쟁이까지 시통에 진을 쳤다. 말하자면 시통은 낭만시대 주당들의 마지막 ‘해방구’이자 은신처였던 거다. “문화판 괴짜들의 상상할 수 없는 ‘끼’와 기행 속에서 살았어. 그렇게라도 창작의 고통과 시대의 아픔을 풀어냈던 거지. 지금은 다들 유명한 예술가가 되고 존경받는 사회인이 됐잖아. 단골 중에 대통령 후보(권영길)와 서울시장(박원순)이 나왔고, 7~8명은 금배지를 달았어.”

한귀남은 시통의 그 악다구니 속에서도 틈틈이 글을 써서 시인(1993년)·소설가(2000년)로 데뷔했다. 시통 단골들 이야기로 <간큰 남자 길들이기>(1995년)라는 수필집도 냈다(이 글을 쓰면서 많이 참고했다). 시통은 피맛골이 뜯긴 2004년부터 인사동, 청진동으로 옮겨다니다가 끝내 달라진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2008년 문을 닫았다. “어쩌면 뒷골목에 켜켜이 서린 사연들도 문화적 재산일 텐데, 골목을 깡그리 허물고 고층 건물만 떡 하니 지어놓으니 서울에 살맛이 없어졌어.” 종로 뒷골목을 주름잡던 가난한 술꾼들의 광기, 취기, 치기와 희로애락을 다 다스리고 받아줬던 ‘시통의 대모’ 한귀남은 게스트하우스 말고도 강원도 홍천을 오가며 농사를 짓는다.

 

 

놀아줘1980~90년대 서울 종로 피맛골의 ‘시인통신’은 가난한 예술가와 장안의 기인, 재사들의 ‘소굴’이었다.... 20년 넘게 ‘시통’(다들 그렇게 줄여서 불렀다)을 지킨 ‘누님’ 한귀남(68)...^-^

 

시통은 1982년 박종수란 시인이 문인들의 연락처 겸 커피를 파는 일종의 무허가 카페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광화문 교보빌딩 옆 피맛골 초입의 작은 건물 한 귀퉁이에 딸린 두 평짜리 방이었다. 마흔살 한귀남이 시통을 떠맡은 게 1984년이다...^-^

 

한밤중의 소란에 지친 건물 주인이 시통을 내쫓았다. 하긴 서울 한복판에서 주당들이 생난리를 치는데도 10년 동안 무허가영업에 심야영업까지 했다는 게 더 신기한 일이다. 이때 단골들이 만든 ‘시발연’(시인통신발전연구회)이 나섰다. 서로서로 연락해 외상값을 갚고, 형편 되는 대로 성금도 모았다. 한귀남은 푼푼이 부은 곗돈에 빚을 보태서 피맛골 한 가운데(지금의 ‘르메이에르’ 건물 자리다)에 1, 2층을 합쳐 ‘무려’ 열 평짜리 ‘번듯한’ 새 가게를 얻었다. 1992년 5월의 어느 날 한밤중, ‘시통 식구’들이 탁자와 의자, 주방기구, 낙서판까지 죄다 떼서 줄지어 나르던 모습은 정말로 다시는 못 볼 구경거리였다...흑흑...^-^

 

한귀남은 시통의 그 악다구니 속에서도 틈틈이 글을 써서 시인(1993년)·소설가(2000년)로 데뷔했다. 시통 단골들 이야기로 <간큰 남자 길들이기>(1995년)라는 수필집도 냈다...종로 뒷골목을 주름잡던 가난한 술꾼들의 광기, 취기, 치기와 희로애락을 다 다스리고 받아줬던 ‘시통의 대모’ 한귀남은 게스트하우스 말고도 강원도 홍천을 오가며 농사를 짓는다...^-^

 

 피맛골 '막내집'에서 낚지볶음을 먹었는데...그 근처에 '시인통신'이 있었구먼...ㅎㅎ...^-^

 

- 2012년 12월1일토요일 오전 10시...수산나 -

 

 

광화문광장~ 구 경제기획원(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대사관 1

 

광화문광장~ 구 경제기획원(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대사관 2

 

광화문광장~ 교보빌딩의 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