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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오피니언

영화 '레미제라블' 오피니언 10개

'레 미제라블'의 100년 전 제목, '너 참 불쌍타'

[중앙일보]입력 2013.01.05 00:47 / 수정 2013.01.05 06:28

모든 억압에 대한 도도한 저항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은 19세기 초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 당대 민중의 지난한 삶을 파고든다. 장발장이란 불멸의 캐릭터도 빚어냈다. 톰 후퍼 감독의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 [사진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레 미제라블 열풍’이 거세다. 지난해 12월 19일 개봉한 영화는 4일 현재 누적관객 370만 명을 넘어섰다. 또 뮤지컬·연극·음반·DVD도 인기를 끌며 요즘 문화계 전반을 엮는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원작소설도 인기다. 민음사에서 내놓은 5권짜리 완역본 판매량이 출간 두 달 만에 10만 부를 넘어섰고, 펭퀸 클래식의 5권짜리 완역본 역시 한 달 만에 6만 부가 팔렸다.19세기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1802~85)가 집필해 1862년에 첫 출간된 『레 미제라블』이 15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21세기 한국인과 소통하고 있는 모양새다. 철학·문학 분야의 두 전문가에게 물었다. 『레 미제라블』의 식지 않는 매력은 무엇인가. 또 한국인은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



장발장의 매력은 무엇

이탈리아 로마 그레고리안대 철학 석·박사. 그레고리안대 철학과 교수 역임. 저서 『메두사의 시선』 『철학 광장』 『서사철학』 등.

 

톰 후퍼 감독의 ‘레 미제라블’은 뮤지컬의 음악과 스토리를 그대로 가져와 만든 영화이지만, 클로즈업이라는 영화의 특성 때문에 감동의 스펙트럼은 많이 달랐다.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머리를 잘라 팔고 이를 두 개나 뽑힌 팡틴의 얼굴이 카메라 줌의 진폭만큼 스크린에서 진동할 때, 관객의 심장도 더 이상 그 진동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는 울음을 들을 수 있었다. 이도 작품이 품고 있는 낭만적 열정 때문이리라.

 우리 각자에 내재하는 낭만적 열정이란 무엇보다도 ‘틀 지워진 삶에 대한 저항’이다. 그 틀이 정치·사회 구조이든, 경제의 원리든, 미학적 원칙이든, 이 모든 것은 생명의 힘과 다양성을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산다는 것은 삶의 모양새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삶의 형식이 고착화된 틀로서 인간을 획일화하고 억압하려 할 때, 인간 심성에 잠재하는 낭만성은 언제든 꿈틀대며 때론 혁명의 기운으로 산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레 미제라블』의 장대한 서사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편재하는 낭만의 특성은 각 개인의 다양한 욕구와 그것을 구체화하는 형식 사이의 관계다. 이러한 관계는 이성만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 그리고 세밀한 인간 감정으로 맺어지며, 미와 추, 생과 사, 빛과 어둠 같은 반명제를 해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공존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고의 서사시 같은 소설이 상상력의 힘으로 보여주듯이, 비참함 속에서 비극적 우아함이 꽃 피고, 그로테스크한 환경에서 천진무구한 어린 생명이 꿈틀대며, 악취 나는 하수구에서 숭엄한 인간미가 구원을 향한다.

 이 공존은 때로 혼돈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격정적인 혼돈의 세계에서 장발장의 삶은 말 그대로 ‘소설’ 같은 삶이다. 이에 ‘낭만적(romantic)’이라는 말이 ‘소설(romance) 같은’이라는 의미를 내포함을 상기해봄 직하다. 그것은 우리와 동떨어진 불가능해 보이는 삶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한 개인의 고귀한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장대한 이야기 속에서 ‘소설 같은’ 삶을 사는 장발장의 대척점에 기존의 질서에 지독하게 충실한 자베르 형사가 있다. 그는 법과 정의의 화신이다. 클로드 쇤베르그의 뮤지컬에서 자베르의 노래는 ‘법의 의미’를 열창한다. 그러나 ‘법과 사회질서의 적’ 장발장이 그에게 어처구니없게도 ‘천사 같은’ 충격적 태도를 보이기 전까지, 자베르는 그 소중한 법의 의미가 자신의 적뿐만 아니라 자신마저도 ‘법의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지할 수 없었다. 아니 느낄 수조차 없었다. 그에게는 인생의 낭만이 너무 오래 동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과 정의의 질서 잡힌 틀은 역동적인 낭만에게 마취제다.

 본디 미학적 개념인 낭만은 의외로 정치·사회적 개념인 정의의 이면을 드러내 보인다. 정의는 조화의 개념과 밀접하다. 아니 그것을 바탕으로 하며 그것에서 유래한다. 서구에서 정의의 정치학은 조화의 미학 없이 발전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이 최적의 비례와 질서를 이루며 존재하는 상태를 조화로 인지하는 인간의 감각 없이 고전적 사회 정의의 개념이 형성되기는 어려웠다.

 ‘모든 것은 조화로울 때 아름답다’는 조화의 미학은 대칭·비례·균형 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고대로부터 발달하여 르네상스시기에 절정에 이른 미학의 대(大)이론이다. 그러나 절정에 이르면 내려오기 시작해야 한다. 르네상스 말기에서 3세기를 거쳐 위고가 활동하던 19세기의 낭만주의에 이르러, 아름다움이 더 이상 비례와 조화가 아니라 어떤 규칙 너머를 향한 열정과 긴장일 수 있다는 감수성이 발달하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지 모른다.

 현대의 미학이 조화의 고전주의에 도전하듯이, 현대의 낭만은 전통적 법과 정의의 신념에 반성을 요구한다. 반면 질서 잡히고 조화로운 사회의 틀로서 정의 실현의 욕구는 종종 낭만주의자들의 이상을 향한 염원과 희생 그리고 방랑의 자유를 견디지 못하여 이를 삭제하려 한다. 하지만 낭만적 욕구와 열정은 우리 삶에서 해소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 대립이 극단에 이르면 피를 부른다. 『레 미제라블』은 이 변증적 긴장과 파국의 사태를 그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공동체적 삶의 필요조건으로서 정의에 대해 논쟁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삶에서 정녕코 해소될 수 없는 인간미로서의 ‘낭만’에 대해 이야기 하라고 일러준다

김용석 영산대 교수·철학

영화한판고고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머리를 잘라 팔고 이를 두 개나 뽑힌 팡틴의 얼굴이 카메라 줌의 진폭만큼 스크린에서 진동할 때, 관객의 심장도 더 이상 그 진동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는 울음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각자에 내재하는 낭만적 열정이란 무엇보다도 ‘틀 지워진 삶에 대한 저항’이다.... 우리는 이를 『레 미제라블』의 장대한 서사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고의 서사시 같은 소설이 상상력의 힘으로 보여주듯이, 비참함 속에서 비극적 우아함이 꽃 피고, 그로테스크한 환경에서 천진무구한 어린 생명이 꿈틀대며, 악취 나는 하수구에서 숭엄한 인간미가 구원을 향한다.

 ‘낭만적(romantic)’이라는 말이 ‘소설(romance) 같은’이라는 의미를 내포함을 상기해봄 직하다....장대한 이야기 속에서 ‘소설 같은’ 삶을 사는 장발장의 대척점에 기존의 질서에 지독하게 충실한 자베르 형사가 있다. 그는 법과 정의의 화신이다. 클로드 쇤베르그의 뮤지컬에서 자베르의 노래는 ‘법의 의미’를 열창한다....그에게는 인생의 낭만이 너무 오래 동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립이 극단에 이르면 피를 부른다. 『레 미제라블』은 이 변증적 긴장과 파국의 사태를 그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공동체적 삶의 필요조건으로서 정의에 대해 논쟁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삶에서 정녕코 해소될 수 없는 인간미로서의 ‘낭만’에 대해 이야기 하라고 일러준다

 


 

 



한국인은 어떻게 받아들였나

서강대 국문학 박사. 저서 『』속물 교양의 탄생』 『한국문학과 개인성』.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라. 제목만 보자면 ‘불쌍한 자들’ ‘비참한 자들’의 이야기다. 아이 양육비를 벌기 위해 생니 두 개를 빼어 파는 팡틴과 범죄자라는 이유로 하룻밤 묶을 방 한 칸을 얻지 못하는 장발장. 이 비참함이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아마도 단지 비참함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이 책이 조선에 처음 번역됐을 때 『레 미제라블』은 수난받는 자의 이야기였다. 제목도 『너 참 불쌍타』와 『애사』, 그리고 『장발장의 설움』 등이었다. 그런데 이 무정한 감정이 조선에서는 민족적인 이야기, 즉 ‘수난받는 자’ 설움과 슬픔의 이야기로 수용되었다. 그래서 그가 차별받으면 차별받을수록, 자베르의 시선이 냉혹하면 냉혹할수록 장발장의 ‘성공’에 더 열광했다.

 일본의 번역본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희! 무정(噫無情)』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무정하다!’이다. 조선과 일본의 경우 약간의 이점은 있지만, 『레 미제라블』의 역사적 의미보다 장발장의 파란 중첩한 이야기에 열광한 것은 매일반이었다. 심지어 일본판 역자인 구로이와 루이코는 빅토르 위고가 서문에서 ‘법과 제도를 넘어’ 역사의 빛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레 미제라블』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은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나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요즘 영화 ‘레 미제라블’을 둘러싼 사회적 반향은 사뭇 다른 듯하다. 영화 후반부에울려퍼지는 노래 ‘민중의 노래가 들립니까(Do you hear the people sing)’를 통해 원작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그만큼 ‘비참한 자들’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가 새로운 역사에 대한 의지와 지향으로 드러나고 있다.

 2013년 현재 많은 이가 이 책을 다시 붙잡는 것은 ‘비참한 현실’에 대한 수긍과 ‘그럼에도’ 이 현실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를 간절하게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원작 소설에서 읽어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17년 동안 집필된 이 소설은 묵직하고 두툼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하기도 녹록하지 않다. 프랑스혁명 이후의 역사를 굽이굽이 파헤칠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왜 ‘소설’이 불가피한지 설득해내는 소설의 형식이다. 총 5부의 이야기에서 1부의 제목은 ‘팡틴’, 2부는 ‘코제트’, 3부는 ‘마리우스’이며 5부에 이르러서야 ‘장발장’이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또한 단수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 격변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이다.

 실제 ‘장발장’조차 수없이 다른 인물들로 변신한다. 어머니는 ‘잔마티외’로 불렀으며, 아버지는 ‘저 장이란 놈’의 약칭인 ‘장발장’으로, 자베르는 ‘24601’번의 죄수로, 시민들은 ‘마들렌’ 시장으로, 마리우스는 ‘포슐르방’으로, 이처럼 장발장은 복수적 존재이다. 장발장의 존재가 그러하듯, 소설은 프랑스 격변기 속에 놓인 다수의 군중, 시민의 얼굴을 담아낸다.

 또 영화에서와 달리 소설 『레 미제라블』은 생각만큼 시민·군중·청년의 존재를 마냥 긍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참한 현실을 이겨낼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과 그 현실을 냉소로서 버텨내는 허약한 환멸이 더 농도 짙게 그려진다. 프랑스혁명의 진취적인 기운은 미지의 심연 속에 갇혀있으며, 남아있는 것은 속악하고 비굴하게 타인의 것을 탐하는 인물군상뿐이다.

 청년들이 비참한 현실에 분노하며 바리케이드를 치고 가두를 점거하자, 시민들은 그 분노가 현재의 삶조차 허물어낼지도 모른다면서 창문조차 닫아버린다. 분노로 가득한 그 거리는 시민들에 의해 모두 닫혀버린다.

 바로 이 시점에 위고는 장발장의 ‘양심’을 역사의 빛으로 내놓는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 신의 영혼을 대신하는 ‘양심’의 탄생이 그것이다. 마차에 깔린 자를 살려내고, 여공의 아이를 대신 키워내며, 죽음을 자처하는 청년을 구출하는 순간마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는 두려워하지도, 그렇다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을 넘어서 고백하며, 분노를 넘어서 상생한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혁명 이후 자유와 평등의 기운이 어떻게 인간 내면에 젖어 드는지를 역설해 낸다. 이 양심은 자베르의 ‘법’이 닿지 못한 세계이며 ‘법 너머의 법’이다. 이 세계를 엿보고자 하는 다수의 열망이 지금 다시 『레 미제라블』을 불러들이고 있다. 
박숙자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영화한판고고 100여 년 전 이 책이 조선에 처음 번역됐을 때 『레 미제라블』은 수난받는 자의 이야기였다. 제목도 『너 참 불쌍타』와 『애사』, 그리고 『장발장의 설움』 등이었다. 그런데 이 무정한 감정이 조선에서는 민족적인 이야기, 즉 ‘수난받는 자’ 설움과 슬픔의 이야기로 수용되었다. 그래서 그가 차별받으면 차별받을수록, 자베르의 시선이 냉혹하면 냉혹할수록 장발장의 ‘성공’에 더 열광했다.

 

2013년 현재 많은 이가 이 책을 다시 붙잡는 것은 ‘비참한 현실’에 대한 수긍과 ‘그럼에도’ 이 현실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를 간절하게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원작 소설에서 읽어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17년 동안 집필된 이 소설은  총 5부의 이야기에서 1부의 제목은 ‘팡틴’, 2부는 ‘코제트’, 3부는 ‘마리우스’이며 5부에 이르러서야 ‘장발장’이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또한 단수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 격변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이다...실제 ‘장발장’조차 수없이 다른 인물들로 변신한다. 어머니는 ‘잔마티외’로 불렀으며, 아버지는 ‘저 장이란 놈’의 약칭인 ‘장발장’으로, 자베르는 ‘24601’번의 죄수로, 시민들은 ‘마들렌’ 시장으로, 마리우스는 ‘포슐르방’으로, 이처럼 장발장은 복수적 존재이다. 장발장의 존재가 그러하듯, 소설은 프랑스 격변기 속에 놓인 다수의 군중, 시민의 얼굴을 담아낸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 신의 영혼을 대신하는 ‘양심’의 탄생이 그것이다. 마차에 깔린 자를 살려내고, 여공의 아이를 대신 키워내며, 죽음을 자처하는 청년을 구출하는 순간마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는 두려워하지도, 그렇다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을 넘어서 고백하며, 분노를 넘어서 상생한다....이 양심은 자베르의 ‘법’이 닿지 못한 세계이며 ‘법 너머의 법’이다. 이 세계를 엿보고자 하는 다수의 열망이 지금 다시 『레 미제라블』을 불러들이고 있다.

 

 


 

 

 영화·뮤지컬·소설 동시 돌풍… '레 미제라블'엔 3가지 얼굴이 있다

조선일보/문화/신정선 기자

입력 : 2013.01.09 02:01

400만·7만 관객, 20만 독자각 장르별로 이렇게 다르다
소설 - 인간사·철학 성찰 담은 현학적 강의 못지않아
뮤지컬 - 이야기 기본 뼈대에 음악으로 감동 살려
영화 - 클로즈업 활용으로 관객 감정이입 극대화

장발장은 1795년‘한밤중에 남의 집 창문을 깨고 도둑질한 죄’로 5년 노역형을 받았다가 네 차례에 걸친 탈옥 미수로 형기가 늘어나 19년간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레미제라블코리아·UPI코리아 제공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돌풍이다. 영화로는 400만명이 봤고, 소설(완역본)로는 20만권(민음사, 펭귄클래식, 동서문화사 합산)을 넘었다. 지난해 11월 용인에서 개막한 뮤지컬은 대구 공연 한 달 만에 5만 관객이 들었다. 현재까지 관객 총 7만명으로, 4월 서울 입성 때의 순항이 예고된다.

세 장르 모두 '장사'가 되는 것은 책과 영상 장르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 뮤지컬, 영화를 모두 보고 어떤 점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봤다.

◇소설에만 있다, 위고의 장광설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빅토르 위고(1802~1885)의 현학적인 강의를 듣는 것과 다르지 않다. 1권을 펼쳐들면 주인공 장발장은 나오지 않고 미리엘 주교 이야기가 90쪽이 넘도록 설명된다. 간신히 이 고개를 넘으면 100쪽에 걸쳐 워털루전투가 묘사되고, 결말을 기대할 쯤이면 파리의 하수도 묘사가 80쪽이나 나와 독서 의지를 시험한다. 이런 점 때문에 산만하다는 불평도 있다. 그러나 독자는 책장을 다 덮을 즈음에는 무릎을 치게 된다. 위고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딴 길로 샌 줄 알았던 장광설에 다 들어 있다. 워털루전투 묘사의 경우, 10여년 후 이어질 마리우스와 악당 테나르디에의 관계에 대한 복선(伏線)이다.

소설에 나온 샹브르리 거리의 바리케이드 장면은 실제 있었던 1832년 6월 5일 봉기를 다뤘다. 소설에서는 '현재와 미래가 단절되어 신(神)이 양끝을 잇지 못해서 발생했다'는 등의 설명으로 혁명의 기운이나 격정을 강조할 뿐, 구체적인 반대 대상을 밝히지는 않았다. 왕당파였던 위고는 1848년 2월 혁명을 계기로 철두철미한 공화주의자로 변신해 민중의 권력을 지지한다.

◇장발장의 양심 거울, 미리엘 주교

위고는 장발장의 마음에 평생 우뚝 서 있을 존재로 주교를 설정했다. 소설 속에서 주교는 이른바 실천적 종교인으로 묘사된다. 권위에 찌들어 부패한 교회 권력이 아닌, 민중을 보듬는 종교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주교는 어둠 속에서 썩어가던 장발장의 영혼에 선(善)과 양심, 희망과 연민의 불빛이 되며, 장발장과 헤어진 이후에도 두 개의 은촛대로 평생 그의 가슴에 남는다. 뮤지컬에서 주교는 은촛대를 건네주고 용서하는 미미한 역할이나,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다시 등장해 장발장의 영혼을 거두어간다.

◇또 다른 양심, 프티 제르베

소설에서 장발장의 양심을 일깨우는 또 다른 기호는 40수(sou·프랑스의 옛 화폐 단위) 은화다. 미리엘 주교의 집을 나온 장발장은 동전을 밟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가난한 소년의 돈을 빼앗게 된다. 영화에는 전혀 안 나오고, 뮤지컬에서는 웬만한 관객은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스쳐가듯 등장하지만, 소설에서는 장발장에게 양심의 가시 면류관이 된다.

◇죄수의 아들, 자베르

뮤지컬과 영화에서 자베르는 '나는 감옥에서 태어났다. 너와 같은 시궁창 출신'이라는 짧은 노랫말로만 자신을 설명한다. 소설을 보면, 그의 모친은 형무소에서 트럼프 점을 치는 여자였고, 부친은 항구 감옥의 죄수였다. 일찌감치 법적 테두리 바깥세상에 눈뜬 자베르는 역으로 악과 불법을 단죄하는 길을 선택한다. 가차없는 법의 수호자로 묘사되는 그는 무자비한 원칙을 자신에게도 적용한다. 소설에서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온다. 위고는 그가 장발장의 선의에 무릎 꿇게 함으로써, '가슴 없는 법전'을 단죄한다. 자베르를 통해 자신의 법 철학을 설파하는 셈이다.

◇독자의 선택은

소설 레미제라블은 공화주의자였던 빅토르 위고의 정치사상서라고 봐도 좋을 만큼 정치와 법, 인간의 운명에 관한 묘사가 방대한 양을 차지한다. 혁명 정신의 역동성에도 방점이 찍혔다. 뮤지컬은 장발장과 자베르의 대결,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 등 절절한 인간애가 강조된다. 영화는 뮤지컬을 80% 이상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면서도 스펙터클한 민중 봉기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관객들의 '피'를 끓게 하는 연출법을 택했다. 독자의 선택은?

 


"야권 지지자들, 대선 패배 위로받아" "휴머니즘과 구원 향한 대중의 호응"

조선일보/영화/허윤희 기자 

입력 : 2013.01.09 03:01

한국에서 유독 인기 있는 이유

'레 미제라블'은 영화와 뮤지컬로 지금 미국영국 등 세계 각국에서 상영 중이거나 공연 중이다. 물론 흥행은 매우 잘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격한 반응'은 아니다. 대한민국 상황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대선 실패를 위로받았다"

전문가들은 "대선 정국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끌지는 못했을 것"이라 분석한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낙선한 후보를 지지했던 48% 국민은 민중 참여가 이뤄지지 않아 시민혁명이 패배하는 상황을 대선에서 패배한 자신들과 동일시한다"며 "하지만 역사적으로 100년에 걸친 프랑스 시민혁명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가져오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민중이 승리한 모습이다. 대선 실패를 맛본 사람들도 그 장면을 보며 '그래, 다음에는 우리도 이길 수 있어'라고 힘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장은수 민음사 대표는 "무려 200년 전 사회를 비탄에 잠기게 했던 무지와 빈곤, 불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횡행한다는 현실, 21세기에도 여전히 불우한 이웃과 절망에 빠진 청년들이 존재한다는 현실에 한국 독자들이 격하게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한국의 대다수 중산·서민층은 경제 불안, 실직, 치솟는 대학 등록금 등에서 오는 심리적 박탈감을 '레 미제라블' 속 인물들이 처한 극한 상황에 감정이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1832년 6월 봉기에 뛰어든 마리우스가 동지들과 함께 프랑스 국기를 흔들고 있다. 영화에서 마리우스는 소설이나 뮤지컬보다 훨씬 적극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UPI코리아 제공

"결국엔 사랑·구원·휴머니즘"

신의 용서와 사랑, 구원이라는 보편 주제의 '힘'을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랑·인권·휴머니즘 같은 보편적 코드, 모든 사람에게 호소력 있는 주제가 힘을 발휘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서석희 신부는 "희생과 구원, 용서와 화해라는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라며 "'정의'를 말하는 자베르, '용서'와 '관용'을 상징하는 장발장을 통해 악인이 단지 악인이 아니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특정 캐릭터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했다.

감성 자극하는 멜로

문학·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 '장발장을 잡고 싶다'는 자베르의 열망 같은 '감정적 라인'들도 작품에 빠져들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며 "코제트를 사랑하듯이 혁명을 사랑하는 마리우스의 격정적 모습에 열광하는 관객이 많다. 뮤지컬이라는 형식의 특성상 직접적 감정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몰입도가 더 높다"고 했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예전엔 예쁜 소녀 코제트를 뮤지컬 포스터 이미지로 많이 썼지만 최근에는 런던 등에서 에포닌을 전면에 내세운 포스터가 많이 등장한다"며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다가 바리케이드 위에서 죽어가는 에포닌을 보며 동일시하는 관객이 많아졌다. 마이너 캐릭터들에 연민의 정, 동질감을 느끼는 게 시대적 유행인 것 같다"고 했다.

 

 [2030 콘서트]레미제라블, 비참함… 우리사회의 ‘장발장’

경향신문/오피니언/노태정 자유기고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연거푸 탈옥을 시도하고 또 붙잡힌 끝에 급기야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 한 남자가 있다. 청춘을 모두 감옥에서 탕진한 그는 끝없는 분노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만을 가진 채 하룻밤 몸을 누일 곳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가,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던 미리엘 주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이것은 최근 화제를 불러오고 있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시작 부분 줄거리이면서, 동시에 그 원작이 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내용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내용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장발장은 은혜를 배신하고 은식기를 훔쳐서 달아나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나는 이 그릇뿐 아니라 은촛대도 주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장발장을 구해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레미제라블>을 회상할 때, ‘미리엘 주교의 용서로 감화를 받은 장발장은 몇 년 후 막대한 부자이면서 동시에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다’라고만 기억한다. 19세기 초 프랑스를 배경으로 19년간 징역을 살고 돌아온 장발장이라는 한 사내가 단지 ‘삐뚤어진 내면’으로 인해 세상과 불화하였노라고, 그래서 그가 마음을 고쳐먹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빅토르 위고가 만든 이야기와 다르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가 자신을 용서해준 순간, 크게 놀랐지만 당장 개심하지는 않았다. 한 어린아이가 놓친 동전을 발로 밟아 빼앗은 후 자신은 은그릇을 훔친 것도 용서받았으면서 어린애의 돈이나 강탈했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충격을 받는다.

그 이후에는 또 어떤가. 위고가 묘사하는 바, 당시 프랑스에서는 한번 징역을 살고 나면 평생토록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아예 다른 색깔의 신분증이 발급되며, 여행이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 신분증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범죄자가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다.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요컨대 장발장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평생토록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보호관찰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발급된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감옥 밖의 세상으로부터 또 한번 탈출한다. 우리가 아는, ‘부자가 되었지만 자베르가 쫓아와 다시 도망가는 장발장’은, 애초에 그가 보호관찰로부터의 무단이탈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캐릭터이다. 지금의 현실에 억지로 대입해본다면, 전자발찌를 끊어버린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본 후 대선에서 패배한 상처가 ‘힐링(치유)’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민중들을 위해 혁명을 하지만 그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쓰러져나가는 마리우스의 동료들을 보며 비감에 젖어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더 큰 바리케이드, 더 뜨거운 혁명의 모습과 함께 웅장한 목소리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울려퍼질 때, 많은 이들은 정서적 위무를 받는다.

물론 영화나 소설의 감상에 어떤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처럼 말하자면 ‘총체성’을 지니는 작품을 감상한 후 그것을 오직 갓 끝난 대선과 연결지어 생각할 뿐이라면, 그 또한 비극적인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레미제라블>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마저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범죄로 내몰고 범죄자들을 결코 다시 받아주지 않던 차가운 세상. 그 속에서 자신의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새 삶을 시작하지만 계속 쫓겨다니는 선량한 사람. 이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을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지금의 현실에 대입할 수 있다. 파업을 해서 전과자가 되고 손해배상으로 신용불량자가 되면 그는 사회 밖으로 간단히 추방된다. 관객들이 ‘도망친 범죄자’가 아니라 ‘실패한 혁명가’에게 감정이입할 때, 그들은 또 한번 잊혀지고 있다.

빅토르 위고에게 그의 장발장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장발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들을 다시 우리 사회로 끌어안을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힐링’은 값싼 자기 위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영화한판고고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연거푸 탈옥을 시도하고 또 붙잡힌 끝에 급기야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 한 남자가 있다. 청춘을 모두 감옥에서 탕진한 그는 끝없는 분노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만을 가진 채 하룻밤 몸을 누일 곳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가,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던 미리엘 주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본 후 대선에서 패배한 상처가 ‘힐링(치유)’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민중들을 위해 혁명을 하지만 그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쓰러져나가는 마리우스의 동료들을 보며 비감에 젖어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더 큰 바리케이드, 더 뜨거운 혁명의 모습과 함께 웅장한 목소리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울려퍼질 때, 많은 이들은 정서적 위무를 받는다.

 


 

 

 

 

[정동에서]“장발장이 무슨 죄인가요”

경향신문/오피니언/박래용 디지털뉴스편집장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인기다. 젊은 시절부터 사회고발 소설을 구상했던 빅토르 위고는 꼬박 16년을 매달려 작품을 탈고했다. 위고가 그려낸 1830년대 프랑스는 현실속 지옥이요, 소설에 등장한 수많은 군상은 사회적 약자이다. 한국에서는 1918년 우보(牛步) 민태원이 매일신보에 <애사(哀史)>란 제목으로 처음 연재했다. 일본어판을 중역한 것이지만 소설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한 독자는 연재 한 달 뒤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왔다.

“장팔찬은 무슨 죄인가요. 배고파 우는 생질들을 보다 못해 면보(빵) 한 조각을 훔친 죄가 무엇이 그리 크오리까. 만일 장팔찬이 나는 길로 비단보에 싸이며 입에다 은술을 물게 되었던들 그러한 죄명을 쓰고 그러한 고생을 하였을 리가 없습니다.”(매일신보, 1918년 8월16일자)

 

 

식민치하 조선인에게 장발장은 “우리처럼 박해받는 사람의 이야기”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일제의 토지조사령 발동 이후 전 토지의 40%를 빼앗겼던 시대이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경작권과 소유권 등 토지에 관한 모든 권리를 잃고 소작농이나 화전민으로 전락했다. 일본이 자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빼앗아간 쌀은 1917년 9%에서 1925년 35%로 격증했다. 조선인 한 사람이 먹는 쌀 소비량은 일본인의 절반도 안됐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핍박받던 시절, 먼 나라 불란서 공화주의자들의 궐기는 식민지 민중의 가슴을 두드렸던 것 같다. 누군가 도화선에 불만 댕겼다면 조선대혁명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일제 때 열광했던 <레미제라블>이 100년이 지나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현실에서 좌절을 맛본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통해 위안을 찾는다는 분석이지만, 설마 우리 현실이 그때 프랑스의 절망과 동격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찡한 구석은 있다. ‘바리케이드 저 편 어딘가엔 그리던 낙원이 있을까. 내일이면 새 날이 밝아오네….’ 민중의 노래에 함께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 이들도 하나씩 둘씩 마음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개인의 삶에 멍울이 들면 사회도 병들게 마련이다. 우리 중산층 비율은 1997년 75%까지 높아졌다가 외환위기 이후 64%로 내려앉았다. 같은 기간 빈곤층은 7.7%에서 12.5%로 늘어났다. 매년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젊은 세대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최소 4%대 성장이 필요하다는데, 성장률은 3%대로 주저앉았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이고, 자살률은 세계 1위다. 20대 여성의 66%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고통스러운 세상에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이를 낳기 싫다고 말한다. 네 가구 중 한 가구는 최근 5년간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절대빈곤을 경험하고 있다.

절박한 현실은 숫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월 15만원 노령연금으로 살아온 60대 부부는 “그동안 무엇을 향해 그토록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부모가 생때같은 자식을 안고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병든 노부모가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세상을 떠나고 있다. 한국 사회 특유의 가족이란 방패막이조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모두 빈곤했던 시절에 나의 가난이나 힘든 노동은 한탄거리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고생하더라도 거기서 보상을 얻고, 거기서 보람을 찾는 게 자랑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부자와 빈자가 극으로 벌어지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들 한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한 ‘비참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이웃과 다를 바 없다.

그동안 온갖 진단과 분석이 쏟아졌다. 처방은 말뿐 사회는 증오와 대립, 갈등이 더 커졌으면 커졌지 줄지는 않은 것 같다. 국가 경제의 덩치는 커졌지만 개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기득권층은 스스로 만들어낸 암흑에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사랑과 자비가 사라진 자리에 상실과 분노가 들어오면 반동(反動)이 팽창하고 끝내 폭발한다는 사실은 그간의 역사가 보여준다. 양극화는 이제 단순한 빈부격차를 넘어 ‘상호 손해’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없는 자들은 공격적이 되고, 가진 자들은 심리적 부담을 느껴 서로 손해가 되는 구조다.

새해 새 아침 좋은 얘기를 하고 싶다. 어느 대통령도 국민이 못되라고 정치를 펼치지는 않을 것이다. 위고는 서문에 ‘지상에 무지와 가난이 존재하는 한, 이 책은 무용지물일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박근혜 당선인은 어머니같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아이가 밥을 먹으면 어미는 절로 웃는다. 박 당선인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수백년 전 이국의 고전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책을, 이 영화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영화한판고고일제 때 열광했던 <레미제라블>이 100년이 지나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현실에서 좌절을 맛본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통해 위안을 찾는다는 분석이지만, 설마 우리 현실이 그때 프랑스의 절망과 동격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찡한 구석은 있다. ‘바리케이드 저 편 어딘가엔 그리던 낙원이 있을까. 내일이면 새 날이 밝아오네….’ 민중의 노래에 함께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 이들도 하나씩 둘씩 마음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이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들 한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한 ‘비참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이웃과 다를 바 없다.......위고는 서문에 ‘지상에 무지와 가난이 존재하는 한, 이 책은 무용지물일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2030 세상보기/1월 3일] 세대문제와 영화 '레미제라블'

한국일보/한윤형 칼럼니스트

1,577만표 대 1,469만표의 놀라운 양자 결집 끝에 '87년 체제', '최초의 과반대통령'을 탄생시킨 그 대선이 끝났다. 박근혜 당선인이 2007년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득표수 총합인 1,500만표를 돌파하기는 어렵다고 오판했던 필자는 승패와 관계없이 그 득표수에 놀랐다.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유사)공학적 예측'을 반성해야만 했다. 또 이를 만들어낸 요인 중 하나인 출구조사 추정 '투표율 90%'라는 특정 세대의 놀라운 결집을 보고 세대문제와 이른바 '민주개혁세력'의 무능을 생각했다.

세대문제는 오늘날 필자가 이 지면에 글을 쓸 수 있도록 한 주제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년 촛불시위 이후 청년층의 정치적 각성과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청년세대에게 지면을 내주는 풍조가 생겼다. 물론 실컷 특집기사로 청년층을 질타한 다음 너희들 변명도 들어보자는 식으로 마지막 지면을 던져주는 경우도 적잖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의 기회였다.

이런 종류의 지면이 생겼을 때, 필자는 본인이 생각하는 정치적 문제를 세대문제라는 틀거리 안에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특정 세대의 삶이 힘들다고 '징징'대는 것을 넘어 그 세대의 문제를 통해 사회문제를 드러내야 의미있는 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을 하며 글을 쓰다 보니 또래 세대의 문제도 더 잘 파악을 하게 되고, 시대의 문제도 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얘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론에 관한 글들은, 사회문제를 세대 간 갈등으로 파악하거나 특정 세대의 몫을 뺏어 다른 세대에게 나눈다는 식의 발상으로 이해될 위험이 있었다.

2030세대와 50대 이후 세대가 대결하는 것처럼 되어버린 이 선거 결과의 '세대분열'은 필자가 느꼈던 그 딜레마를 떨쳐내지 못한 것이라 해석된다. 이 세대와 저 세대는 주로 부모 자식관계로 얽혀 있고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차원에선 반드시 대립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언어들 속에서 각 세대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구도가 진실에는 부합하지 않더라도 야권에게 승리하는 길이었다면 그러한 전술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의 성공이 가져온 평균 수명의 증대와 민주정부 이후 신자유주의의 수용 등이 얽혀서 가속화된 저출산의 기조는 세대 인구구성의 측면에서 야권이 '세대분열'의 승자가 될 날을 끝없이 지연시키고 있다. 그리고 민주당과 진보진영은 그간 본인들이 서민을 어떻게 대변할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설명하기보다 종종 저학력 노년층들의 '무지한 선택'에 한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 결과는, 박정희에 대한 폄하를 자신의 청년시절의 노동에 대한 폄하로 받아들이는 특정세대에 대해선 본인들이 대변해야 할 취약계층에 대해서도 접근할 길이 막혀버린 답답한 현실로 드러났다.

최근 영화 '레미제라블'이 300만 관객을 넘기며 대선 결과에 실망한 어떤 유권자들을 정서적으로 '치유'한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그런데 그런 감동의 기저에 깔린 인식이 자신들을 바리케이트의 학생으로 느끼며 기성세대와 분리하는 것이라면 이도 걱정이다. '레미제라블'이 감동적인 부분이 있다면 늙은이가 젊은이들을 챙기는 이야기라는 점에서일 것이다. 청년들은 이번 선거에서 그런 배려를 받지 못했다고 느꼈기에 이 영화에서 위로받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혁명엔 동참하지 않고 수양딸의 정인만을 구한 장발장의 태도는 사실 있는 재산이라도 지키며 자녀에게 물려주겠다는 선택을 한 우리네 부모님의 그것에서 크게 멀지 않다. 바리케이트의 학생과 자신을 동일시했다면, 박근혜를 찍은 부모님과 장발장을 포개보는 정도의 상상도 나쁘지 않다.

영화에서도 장발장은 '민중의 노래'에 동참하지 않다가 죽은 이후에야 개사된 노래를 힘차게 함께 부른다. 누군가는 바리케이트 희생자들이 부르는 천상의 노래에서 위안을 받은 모양이지만, 굳이 상상해야 한다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이런 종류의 '화해'가 아닐까.

 

 영화한판고고 '레미제라블'이 감동적인 부분이 있다면 늙은이가 젊은이들을 챙기는 이야기라는 점에서일 것이다. 청년들은 이번 선거에서 그런 배려를 받지 못했다고 느꼈기에 이 영화에서 위로받는지도 모른다.

 


 

 

[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장 발장과 미리엘

한국일보/오피니언

늘 옳은 말만 하는 경직된 사람보다는 슬쩍 잘못을 덮어줄 줄 아는 온화한 사람에게 끌리지 않나요? 좋은 물건으로 넘치는 집보다는 있어야 할 것 외엔 아무것도 없이 정갈하게 정돈된 방이 편합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인 초라한 밥상을 부끄럼 없이, 차별도 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몸에서, 방에서, 물건에서 그런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가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신부네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대박입니다. 사는 건 힘겨운 전쟁, 세상엔 자비가 없다는 팡틴의 노래에서는 눈물이 나네요. 영화를 보고 나니 영화보다도 ‘레미제라블’을 읽고 며칠 동안 책 생각만 했던 20대 때 그때의 감동이 깨어납니다. 영화에서는 잠깐이지만 원작에서 빅토르 위고는 미리엘 신부와 장 발장의 만남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삶의 모든 일이 표지라면 장 발장이 미리엘 신부를 만난 것은 변화의 예감이지요? 억울하게 당해야 했고 견뎌야만 했던 긴긴 인욕의 세월이 묵은 만큼 아픈 만큼 빛으로, 사랑으로 변하는 계기였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내 꿈이 내가 가꾼 화단이 있는 집에서 대문 걸어놓지 않고 사는 것이었던 것도 미리엘 신부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그랬으니까요. 나는 귀족이 와도, 걸인이 와도, 언제나 한결같이 검소한 식탁을 흔연하게 나누는 그가 참 좋았습니다. 그는 일용할 양식의 힘을 알고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와 함께라면 거친 빵과 따뜻한 수프도 신이 차려주신 훈훈한 밥상이 됩니다.



그의 유일한 사치는 손님이 올 때나 내는 은식기와 은촛대지요? 그는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차별이 없이 그의 식탁으로 흘러들어온 인생을 기꺼이 대접합니다. 그의 은식기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자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촛대를 쓰는 자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촛대는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태우며 작은 빛을 내는 촛불의 집입니다. 잘 닦인 은촛대는 정화의 힘을 아는 정갈한 자를 증거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 신성한 식탁에 사람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암담한 죄수 장 발장이 앉게 된 것입니다. 모두들 위험하다고 경계하라고 하는데 신부만 괜찮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집은 고통받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며 재워주기까지 합니다. 위험하다고 한 사람의 예감대로 장 발장은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잡혀 옵니다.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는데, 신부만 준 거라고, 선물이라고 하지요? 은촛대도 줬는데 왜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되묻습니다. 그의 능청에 경찰도 의혹을 풀어버립니다.

어떤 이는 사랑도 숨 막히는 집착으로 바꾸지요?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도 의혹으로 바꿉니다. 그런데 미리엘은 의혹을 평상심으로 바꾸고, 도둑질도 자비로, 사랑으로 바꿉니다. 위악적일 수밖에 없었던 장 발장이 위악의 가면을 벗고 말갛게, 괜찮은 자기 얼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건 괜찮은 사람 미리엘 때문입니다. 미리엘은 긴긴 부조리의 세월을 마르지 않은 사랑의 에너지로 바꿔주는 마법사였습니다.

19년의 부조리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로 전환된 큰사람에겐 거칠 게 없습니다. 미리엘을 만나 전환점을 맞으며 장 발장은 우뚝 성장하고 고독 속에서도 빛이 나, 조용한 사랑, 깊은 사랑, 큰 사랑을 할 줄 아는 진정한 사내가 된 것입니다. 그렇듯 사랑은 사랑으로 흐릅니다.

따스한 사랑의 온기에 삶이 바뀐 적이 있으신지요? 억울해서 소화가 되지 않고 명치끝에 걸려 있기만 했던 버림받은 시간들이 그 온기로 인해 진실하고 다부진 에너지로 전환될 때 비로소 우린 ‘존재 이유’를 믿게 됩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영화한판고고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대박입니다. 사는 건 힘겨운 전쟁, 세상엔 자비가 없다는 팡틴의 노래에서는 눈물이 나네요. 영화를 보고 나니 영화보다도 ‘레미제라블’을 읽고 며칠 동안 책 생각만 했던 20대 때 그때의 감동이 깨어납니다. 영화에서는 잠깐이지만 원작에서 빅토르 위고는 미리엘 신부와 장 발장의 만남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아침논단] 영화 '레 미제라블'을 통해 보는 大통합

조선일보/오피니언/사외칼럼/김미현 이화여대 국문과교수 문학평론가

입력 : 2013.01.09 23:30

관객 400만명 돌파한 열풍은 대선 이후 '48%'의 좌절 표현
이념·계층·세대 갈등 재확인… '갈등' 꼭 부정적이지는 않아
共感은 '차이'를 깔고 있는 것, 다른 목소리에 더 귀기울여야

김미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모든 유행에는 이유가 있다. 작년 대선일인 12월 19일에 개봉한 영화 '레 미제라블'의 누적 관객 수가 400만명을 넘어섰다. 심지어 책에서 OST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인기몰이 중이다. 지난 6일 열린 한국 피겨스케이팅 대회에서 김연아가 국내 팬들에게 처음 선보인 프리스케이팅의 배경 음악도 '레 미제라블'이었다. 이 정도면 제목의 원래 의미와는 달리 전혀 불쌍하거나 비참하지 않다. 왜 이토록 '레 미제라블'이 유행일까.

분주하게 이뤄지고 있는 해석 중 하나는 대선 패배로 이른바 '멘붕' 상태에 빠진 48%의 야권 후보 지지자들이 느낀 상실감과 그에 대한 위로를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고통받는 인물들이 영화 엔딩 부분에서 함께 부르는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는 "오늘 우리가 죽으면 다른 이들이 일어서리. 이 땅에 자유가 찾아올 때까지"라는 대사와 어우러져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마치 김연아가 전날 쇼트 프로그램에서 한 실수를 '또 다른 김연아'가 '레 미제라블'의 음악에 맞추어 멋지게 만회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주요 등장인물인 판틴이 부르는 '나는 꿈을 꾸었네(I Dreamed a Dream)'의 좌절이 더 오래 남는 관객은 없을까. 지난 대선 결과에서 재확인된 지역이나 이념·계층·성·세대 등의 갈등이 이런 의문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빅토르 위고가 원작 소설의 서문에서 밝힌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는 집필 의도 또한 아직 유효한 듯하다. 꿈을 잃어버린 '레 미제라블'이라고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면 더욱 그렇다.

2월 25일에 있을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민생' '여성'과 더불어 제시되는 중요 키워드의 하나가 '대통합'이라니 이에 반(反)하는 갈등의 뿌리나 본질은 여전히 새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일 듯하다. 통합이라는 가치를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 아니라 '가능한 것의 불가능성' 측면에서 비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무늬만 통합인 가짜 통합이 제시될 수도 있다는 우려다. 거꾸로 갈등 없는 세상은 없다. 그럴 경우 갈등을 없애야 한다는 당위 자체가 억압일 수 있다. 희망도 고문이 될 수 있고, 힐링도 질병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갈등도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요즘의 핫 이슈인 세대 갈등을 예로 들어보자. 세대별로 갈린 지지자와 투표율이 주요 변수로 작용한 이번 대선 결과에서 2030 세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불공평하다며 좌절한다. 반면 5060 세대는 '술 권하는 사회'는 위험하다며 방어한다. 그러고는 다르면 틀린 것이라고 서로 경계한다. 그렇다고 이 두 세대 사이에 끼어 있는 40대가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평생을 40대인 채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능사도 아니다. 오히려 각 세대는 각자의 세대 감각을 차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2030 세대는 제대로 불온해야 하고, 5060 세대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흔히 갈등을 넘어 통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즉 '공감하는 인간'의 자질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때 '공감(共感)'은 '동감(同感)'과 다르다. 동감이 '같게' 느끼는 것이라면, 공감은 '함께' 느끼는 것에 가깝다. 이 때문에 '동일성'보다는 '차이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하나인 둘'이 아니라 '둘인 둘'이 중요하기에 '단일체(單一體)'가 아니라 '공동체(共同體)' 안에서 더 요구되는 능력이 바로 공감이다. 그러니 갈등을 잘 사용할 필요가 있다. 갈등을 조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사상 처음으로 해를 넘기면서 새해 예산안을 호텔방에서 처리한 국회 예결위 의원들의 외유성 출장이 문제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투다가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한목소리'를 내는 여야 의원들보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딴 목소리'를 내는 2030 세대와 5060 세대의 갈등이 오히려 더 생산적일 수 있다. 나쁜 통합이 있다면 선한 갈등도 있다. 통합에 물어본 것을 갈등이 대답해 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면, 강하니까 갈등이다. 척력(斥力)이 강할수록 인력(引力)도 강해진다. 이것이 48%와 52%라는 다수(多數)와 다수의 갈등이 의외로 소중할 수 있는 이유다.

 

영화한판고고프랑스 혁명기의 고통받는 인물들이 영화 엔딩 부분에서 함께 부르는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는 "오늘 우리가 죽으면 다른 이들이 일어서리. 이 땅에 자유가 찾아올 때까지"라는 대사와 어우러져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주요 등장인물인 판틴이 부르는 '나는 꿈을 꾸었네(I Dreamed a Dream)'의 좌절이 더 오래 남는 관객은 없을까....빅토르 위고가 원작 소설의 서문에서 밝힌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는 집필 의도 또한 아직 유효한 듯하다.

 

 갈등을 잘 사용할 필요가 있다. 갈등을 조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나쁜 통합이 있다면 선한 갈등도 있다. 통합에 물어본 것을 갈등이 대답해 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면, 강하니까 갈등이다. 척력(斥力)이 강할수록 인력(引力)도 강해진다.

 

 ‘레미제라블’ 역사 알고보면 더 재밌다

경향신문/문화/박은하 기자/입력 : 2013-01-12 10:17:58

 

 

올겨울 대중문화계 화제는 단연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비참한 사람들)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9일 440만 관객을 돌파, 국내 뮤지컬영화 최초 500만 관객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빅토르 위고의 원작소설도 영화 개봉 이후 15만부 더 팔려나갔으며, 현재 대구에서 상영 중인 뮤지컬도 7만여 관객을 모았다.

‘레미제라블’이 이처럼 뜨거운 반응을 얻는 이유는 작품에 등장하는 ‘실패한 혁명’과 ‘가난한 민중들의 비참한 현실’이 현재 한국의 사회상과 맞물리며 공감을 자아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루는 시대적 배경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막연히 ‘프랑스 혁명’을 다룬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긴 19세기 100년 동안 프랑스에서는 소위 성공한 혁명만 3차례, 유혈 봉기는 그보다 수도 없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작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프랑스 역사를 소개한다. 다만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들은 영화를 보고나서 읽는 편이 좋다. (편집자 주)

1815년 출소한 장발장. 그는 1796년 빵을 훔쳐 감옥에 갔다.



■ 프랑스 대혁명 7년 … 장발장, 배 고픈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치다

고개 숙여, 하늘에는 신이 없고, 땅에는 자비가 없고, 나는 죄가 없네. 주님은 관심도 없어. 고개 숙여. 모두 다 널 잊었어. 넌 영원한 노예일 뿐 - 오프닝 테마곡 ‘Look down’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19년 동안 노역을 살게 된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한 인간의 불행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1789년 프랑스에서는 극심한 굶주림과 신분제에 대한 불만으로 혁명이 일어난다. 민중들은 국왕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왕이 없는 나라’, 즉 공화국을 선포한다. 이것이 흔히 알려져 있는 ‘프랑스 대혁명’이다.

혁명 이후 프랑스는 굶주림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큰 소용돌이에 빠진다. 오스트리아 등 이웃나라들은 자국으로 혁명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 프랑스에 군대를 파견했고, 쫓겨난 왕족과 귀족들이 이들과 결탁했다. 혁명지도부는 외국군과 내부의 반혁명 세력과 전쟁을 벌이면서 한편으로 내부 권력다툼에 돌입한다.

전쟁과 혁명이 지속되는 아수라장에서 경제는 엉망이 됐다. 날로 물가가 치솟아 민중들의 고통이 극심했다. 혁명지도부 중 가장 과격파였던 로베스피에르는 1793년 정권을 장악해 ‘최고가격제’를 실시해 일시적으로 물가안정을 이뤘다. 그러나 1년 동안 1만 명 이상을 ‘반혁명’ 혐의로 처형하는 등 지나친 공포 분위기 조성으로 2년 만에 실각한다. 최고가격제는 폐지되고 다시 물가는 뛰어올랐다. 바로 그 이듬해인 1796년 장발장은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치다 체포된다.

혁명정부는 혁명 이후의 혼란을 강력한 국가권력으로 평정한다.



장발장은 정확히 감옥에 간 것이 아니라 ‘노역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유럽에서 범죄자들은 일정 기간 노예가 돼서 일하는 형벌을 받았다. 대부분 지중해 갤리선에서 노 젓는 일을 하는 수부(水夫)로 일했다. 처우는 말 그대로 노예였다. 음식과 의복은 형편없었고, 매질도 다반사였다. 혁명으로 왕은 사라졌지만 전근대적 형벌제도는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의 혼란은 1799년 군인 출신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비로소 일단락된다. 나폴레옹은 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국내 반혁명 세력을 소탕하는 한편, 토지분배·법 제도 정비·초등교육 확립 등의 정책으로 사회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통령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1804년 스스로 황제에 즉위, 반혁명 위협이 사라졌는데도 외국과 계속 전쟁을 벌였다.

사람들이 점점 나폴레옹에게 지쳐가던 무렵, 그는 워털루 전쟁에서 패해 1815년 완전히 몰락한다. 바로 이 해 장발장이 출소한다.

■ 시민왕과 산업화…‘부르주아’ 그리고 ‘거지’와 ‘부랑아’와 ‘매춘’의 시대

1823년 팡틴은 프랑스 북부 지방의 구슬 공장에서 일한다.



하루가 지나가면 또 하루 늙어갈 뿐. 이것이 가난한 자들의 삶. 주머니에는 1주일을 버틸 돈만 있어. 뼈빠지게 일 안 하면 굶주릴 수밖에 없네. - 공장 노동자들의 테마곡 At the end of the day



나폴레옹 몰락 이후 프랑스에는 외국으로 망명했던 루이 16세의 동생들이 돌아와 차례로 즉위한다. 오랜 전쟁에 지쳐 평화를 갈망하던 프랑스인들은 왕정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처음에는 혁명세력의 눈치를 살피던 왕이 점차 언론자유를 탄압하고 선거권을 축소하는 등 과거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이자 1830년 7월 다시 한 번 혁명을 일으켜 새 왕을 추대한다.

이 혁명을 ‘7월 혁명’이라 부른다. 이 때 왕위에 오른 이가 ‘루이 필리프’이다. ‘레미제라블’은 이 시대를 무대로 본격 펼쳐진다. 작품에 등장하는 ‘왕’도 바로 루이 필리프를 가리킨다.

루이 필리프는 왕족의 신분이지만 혁명의 이념을 지지하고 시민의 대변자가 되겠다고 공언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약속대로 자유, 특히 언론·출판과 산업활동의 자유를 크게 보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진행된다. 직물·금속공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달하면서 수출액도 늘어났다. 장발장은 앞서 1820년대 프랑스 북부 소도시 몽레이유에서 기업가로 변신해 크게 성공했는데, 이 지역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다른 프랑스 지역보다 산업화가 먼저 진행된 곳이었다. 공장을 소유한 부르주아들은 산업화로 인한 성장에 힘입어 예전의 귀족과 같은 지위를 누리기 시작했다.

1820~30년대 산업화로 인해 노동빈민도 늘어났다.



하지만 성장의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갑자기 도시 인구는 늘어났지만 주택, 수도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염병이 돌 때마다 슬럼가에 사는 빈민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물가도 함께 오르는데 임금은 턱없이 낮았다. 빈민가의 남성들은 시름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여성들은 살기 위해 매음굴로 흘러들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버려져 부랑아가 됐다.

부르주아의 시대이자, 한편으로 거지와 부랑아와 알코올 중독자, 그리고 매춘의 시대였다. ‘장발장’과 같은 선량한 자선가가 없지는 않았지만 자선에 기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부는 ‘산업 자유에 관한 원칙’에 따라 부르주아들을 전혀 규제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은 ‘바리케이드의 시대’를 열었다.

■ 자유를 위해 싸우던 민중들, 빵을 위해 싸우다

우리는 예전에 자유를 위해 싸웠는데 지금은 빵을 위해 싸우네. 평등이란 대체 무엇인가, 죽으면 평등해지지. 기회를 잡아. 비바 프랑스! - Paris Look dowm, 가브로슈의 독백

일하면서 자유롭게 살던가 싸우다 죽자(Vivre libre en travaillant ou mourir en combattant) - 1831년 폭동을 일으킨 리옹 노동자들의 구호



1832년 파리 광장에서 빈민들을 선동하는 학생들.



1831년 11월 프랑스 대표적 공업도시인 리옹에서 노동자 수천명이 가담한 폭동이 일어났다. 이 지역은 프랑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로, 전체 수출액의 30%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노동자들은 오르는 물가에 비해 임금이 턱없이 낮다며 ‘최저임금’을 협상했지만, 공장주 1400명 가운데 104명이 이에 불응했다.

이를 계기로 리옹 지역의 노동자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한때 시정까지 장악했지만,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해 잔인하게 탄압했다. 공장주 90% 이상이 합의한 최저임금법도 수포로 돌아갔다. 노동자들의 결사의 권리 등도 크게 제한됐다.

리옹 사건을 계기로 빈민과 노동자들, 공화주의 성향의 학생들은 7월 왕정에 등을 돌렸다. 걸핏하면 폭동이 일어났다. 1832년 6월 5일, 나폴레옹의 부관 출신 국회의원으로 ‘민중의 편’에 섰다고 평가받는 라마르크의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폭동도 그 중의 하나였다. 마리우스는 왕정을 뒤엎기 위해, 장발장은 마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이 폭동에 참여한다.

뮤지컬과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는 다소 규모가 작은 폭동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약 800명이 사망한 대규모 폭동이었다. 하지만 왕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1835년부터는 폭동도 잦아들었다. 이후 프랑스는 부르주아 문화를 꽃피우며 번영의 시대를 맞이한다.

■ 처참한 바리케이드 몰락, 그 이후…



1848년 2월 혁명을 상징하는 영화 ‘레미제라블’ 마지막 장면.

이것은 그들이 미래에 이뤄갈 이야기 - 마지막 장면 Do you hear the people sing



영화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은 합창으로 끝난다. 1848년 2월 혁명을 암시하는 듯한 이 장면은 원작 소설과 달리 뮤지컬 버전에서 오리지널로 삽입한 것이다. 원작은 6월 폭동 2년 후, 장발장이 사망하고, 그의 소박한 묘지에 얽힌 이야기로 끝난다.

1835년부터 안정을 유지했던 루이 필리프 왕정은 1846년 대흉작으로 물가가 폭등하고,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이한다. 마침내 1848년 2월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돼, 루이 필리프 왕정을 끌어내리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2월혁명’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민주공화정이 정착하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더 겪는다. 2월 혁명 이후 선포된 새로운 공화국에서는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통령으로 당선됐다. 그 역시 스스로 황제(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나폴레옹 3세는 권위주의적이긴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민중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개혁안을 마련하는 한편 ‘프랑스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외국과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1871년 프로이센(현 독일)과의 전쟁에 패해 물러난다.

나폴레옹 3세가 물러난 이후 프랑스 급진 좌파 세력이 봉기해 파리 시청을 점령하고 자치정부 ‘파리 코뮌’을 결성한다. 하지만 파리 코뮌은 정부에 진압돼 약 3만명이 처형당하는 처참한 결과로 끝났다.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출범한 ‘제3공화정’에 가서야 프랑스는 극좌와 극우 사이를 오가지 않고 민주공화정으로 정착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거의 100년이 걸렸다.



참고문헌

- <혁명과 반동의 프랑스사> 로저 프라이스, 김정근·서이자 옮김, 개마고원, 2001.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노명식, 까치, 1993.

- <혁명의 역사> 피터 벤데, 권세훈 옮김, 뤼마니떼, 2004.

- <혁명의 시대> 에릭 홉스봄, 정도영·차명수 옮김, 한길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