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싸이 신드롬' 어디까지
조선일보/연예
'강남스타일 효과' 한국 국가브랜드 15위→13위로 상승
조선일보/경제 종합/연합뉴스
입력 : 2013.01.10 17:03 | 수정 : 2013.01.10 17:30
삼성硏 연구 결과…국가 이미지 순위도 19위→17위
국가브랜드 이미지 순위 역시 개선됐다. 전 세계에 분 ‘강남스타일’ 열풍이나 국가신용등급 격상 등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대통령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와 공동 개발한 모델로 국가브랜드지수를 조사한 결과 지난해 한국의 국가브랜드 순위(실체)가 13위로 전년보다 2계단 상승했다고 10일 밝혔다. 국가브랜드 이미지 순위 역시 2단계 오른 17위였다.
이는 연구소가 26개국 오피니언 리더 1만3천500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10월20일~11월19일까지 설문조사를 벌여 도출한 결과다. 세계은행(WB), 세계경제포럼(WEF) 등 통계자료도 활용했다.
국가브랜드 순위는 2009년 19위에서 2010년 18위, 2011년 15위로 꾸준히 상승했다. 국가브랜드 이미지 순위는 2010~2011년(19위)의 정체를 마감했다.
국가브랜드의 세부 순위를 보면 우리나라는 유명인 분야에서 7위(1계단↑), 현대문화 분야에서 8위(1계단↑)로 비교적 높은 편이다. 연구소는 “강남스타일의 싸이 뿐 아니라 케이팝(K-pop)스타들이 ‘현대문화’를 홍보하는 ‘유명인’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학ㆍ기술은 6위로 전년도 4위보다 두 단계 내렸다. 경제ㆍ기업은 15위(2계단↓), 정책ㆍ제도는 24위(2계단↓), 국민은 35위(4계단↓)였다.
국가브랜드 이미지의 세부 순위에서는 경제ㆍ기업 분야가 11위에서 9위로 올라 처음 10위권에 진입했다.
9위인 과학ㆍ기술도 7위로 높아졌다. 세계 일류 상품이 10년간 5배 이상 늘고 3대 국제신용평가사가 모두 우리나라의 국가신용 등급을 격상한 것이 주효했다고 연구소는 풀이했다.
국가브랜드 순위의 세계 1위는 미국이다. 그 뒤를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이 뒤쫓았다. 국가브랜드 이미지 순위도 전년도 3위였던 미국이 1위로 올랐다. 독일이 2위, 영국이 3위, 일본이 4위, 스위스가 5위였다.
연구소는 “한국의 국가브랜드가 실체와 이미지 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을 웃돈다”며 “앞으로도 경쟁력이 취약한 부문을 개발하고 유명인, 경제ㆍ기술 등 강점을 강화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글로벌 아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들과의 대화
[중앙일보]입력 2013.01.05 00:23 / 수정 2013.01.05 00:23
정경민 뉴욕특파원
반 총장=강남스타일이 11억 뷰를 넘겼다는데 그게 중국 빼고도 그런 거라면서요?
싸이=네. 유튜브가 구글 소유인데 구글이 중국에서 철수했거든요. 한데 얼마 전 구글에서 재미있는 통계 하나를 귀띔해주더라고요. 강남스타일 11억 뷰 중에 북한으로 출처가 확인된 게 6건 있다고요. 도대체 6명이 누구일지 무척 궁금해요.
반 총장=6건이 적은 건 아니에요. 개미 한 마리가 큰 댐을 무너뜨리는 법이에요. 눈에 띄지도 않는 미세한 개미굴이 삽시간에 댐 전체를 허물어뜨리죠. 게다가 북한엔 개미가 6마리나 있다지 않아요.(웃음) 그나저나 싸이의 미국 매니저가 대단한 사람이라면서요?
싸이=세계적인 아이돌 스타 저스틴 비버를 키워낸 스쿠터 브라운이란 친굽니다. 미국 와서 보니 불과 10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북미 음악시장을 주무르고 있더라고요. 이 극소수의 사람들 손바닥 위에서 전 세계 음악시장이 돌아가고 있는 거죠. 브라운도 그중 한 사람인데 지난해 7월 15일 강남스타일을 유튜브에 올린 지 꼭 8일 만에 직접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장난전화인 줄 알고 뚝 끊어버렸더니 e-메일을 보내 ‘나 저스틴 비버 매니저 맞다’며 한번 만나자고 하더군요. 이런 파격이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구나 느꼈습니다.
반 총장=지난달 백악관 공연을 앞두고 과거 반미 노래 때문에 마음고생을 좀 했다죠?
싸이=오바마 대통령 가족이 참석하는 공연을 불과 며칠 앞두고 백악관 청원 사이트에 한 재미교포가 싸이를 초대하지 말라는 글을 올렸더랬습니다. 입에 담기도 힘든 댓글이 막 쏟아졌죠. 이대로 짐 싸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과를 하고 나니까 저를 두둔하는 댓글이 쇄도하는 거예요. 욕설이 난무하자 백악관도 해당 게시글을 삭제하고는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딱 잘라버리더군요.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문화 칼럼/김작가]‘강남스타일’ 빌보드 1위 왜 안될까
동아일보/오피니언/기사입력 2012-10-13 03:00:00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아이튠스(애플의 온라인 음원 판매 사이트)에선 1위를 차지했는데 빌보드에서는 왜 안 될까? ‘강남스타일’은 빌보드 64위로 입성해 2주차 11위, 3주차에는 2위로 수직 상승했다. 언제 1위를 차지할지가 국민적인 관심사가 돼 버린 분위기다. 사실 아이튠스 차트 1위에 오른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빌보드 1위를 기다리는 걸까.
미국은 차트의 나라다. 팔리는 모든 것에 순위가 매겨진다.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많은 음악 잡지와 매체가 차트를 수록한다. 빌보드 잡지의 차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다. 빌보드는 1936년 첫 차트를 발표한 이래, 다양한 종류의 차트를 추가하며 산업과 트렌드의 지표 역할을 해왔다. 현재는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싱글 차트 ‘핫 100’을 중심으로 100여 종의 차트를 발표한다.
빌보드에 권위를 부여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대중의 소비패턴을 반영하는 집계 방식이다. 최근 디지털 산업의 변화에 따라 ‘핫 100’의 순위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는 셋으로 나뉜다. 디지털 다운로드(인터넷 음원 사이트에서 음원을 내려받는 것)와 에어플레이(방송 횟수), 온라인 스트리밍(음원 사이트에서 음원을 내려받지 않고 듣기만 하는 것) 횟수다. 디지털 음원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아이튠스 차트 1위를 했음에도 빌보드 ‘핫 100’에서 2주간 2위에 머문 이유는 에어플레이와 온라인 스트리밍 횟수에서 ‘마룬5’의 ‘원 모어 나이트(One More Night)’에 밀렸기 때문이다.
에어플레이에서 ‘원 모어 나이트’가 ‘강남스타일’을 앞선 것은 ‘강남스타일’이 언어 장벽의 한계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언어장벽을 깨고 빌보드 정상에 오른 노래도 있었다. 1958년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모두뇨가 부른 ‘넬 블루 디핀토 디 블루(Nel Blu Dipinto Di Blu)’, 1987년 멕시코계 밴드인 ‘로스 로보스’의 ‘라 밤바’, 1996년 스페인 출신 ‘로스 델 리오’의 ‘마카레나’가 1위를 차지했다. 서양이 아닌 동양권에서 나온 빌보드 1위 노래는 1963년 사카모토 규의 ‘스키야키’가 유일하다.
이 노래들이 1위를 차지했던 것은 주류 미디어를 통해 어필했기 때문이다. ‘스키야키’의 경우 일본을 방문한 미국의 DJ가 이 노래를 듣고 감동해 방송에서 집중적으로 틀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본 문화에 대한 환상이 당시 미국 사회에 깔려 있던 것도 인기를 북돋웠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라 밤바’는 같은 해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의 주제가로 쓰인 게 절대적이었다.
‘마카레나’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미국 여자 체조팀이 경기에서 사용해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울려 퍼진 덕에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노래가 됐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다른 비영어권 1위곡들과 차이가 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지금까지 노래들은 방송, 영화 같은 올드 미디어에 의해 ‘살포’됐다. 하지만 ‘강남스타일’은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의해 전 세계적 인기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최초의 비영어권 노래다. 인터넷의 인기를 등에 업고 빌보드라는 종합 차트를 위협했다.
지금까지 비영어권 빌보드 1위곡들이 미디어로부터 대중을 향해 하향 전파됐다면, ‘강남스타일’은 대중으로부터 주류 미디어로 상향 진입을 한 셈이다. 이 같은 사실은 레코드 산업이 탄생한 이래 음악 시장을 지배했던 미국의 대형 레코드사와 올드 미디어로부터, 뉴 미디어로 스타 탄생의 권력이 넘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팝의 본고장 미국이 시스템도, 언어도 다른 ‘강남스타일’의 파죽지세에 무릎을 꿇은 셈이라고 할까.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국어로 쓰인, 한국 가수가 부른 노래에 의해서 말이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문화 칼럼/서지문]싸이와 잡스 그리고 외톨이 인생들
동아일보/오피니언/기사입력 2012-09-01 03:00:00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보았다. 천방지축으로 겅중겅중 뛰고 마음껏 흔들어대며 교묘히 외설의 경계를 살짝살짝 넘나드는 이 넉살 좋은 젊은이는 많은 사람에게 풍성한 즐거움과 해방감과 영감을 줄 것이다. 그런데 그 화려한 영상과 흥겨운 리듬과 짜릿한 가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소외감과 낙오감을 심화시킬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싸이는 머리 좋고 뱃심 좋고 운 좋은 젊은이임에 틀림없다. 단 몇 분짜리라도 그렇게 엄청난 인원이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현란한 영상물을 제작하려면 분명 치밀한 기획과 엄청난 수고가 들어가야 하지만 희대의 행운아가 아니라면 마음껏 ‘(자칭)6甲’을 떨어서 우주적 스타가 되고 돈방석에 올라앉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싸이는 희대의 행운아
잘생기지도 못한 외모에 조금 푸석해 보이는 몸매가 오히려 친근감을 주는 것 역시 비범한 행운이다. 그의 행운은 꽃미남, 엄친아에 주눅 든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겠지만 한편 자신의 불리한 조건을 도저히 자산으로 전환하지 못할 것 같은 젊은이들에게는 절망감을 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종작없는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요즈음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나 강연이 한결같이 모든 제약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자아실현을 성취하라고 권고하는 것 같아서이다. 물론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20∼30년 전의 젊은이들과 비교해도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아실현을 이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몇백 배 크니까 매우 적절한 독려이다.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는 사회
그러나 아직은 두뇌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모두 성공 신화를 이룩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세상은 아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신화’를 이룬다면 그것은 이미 ‘신화’가 아닐 것이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 ‘신화’가 나올 수 있는 것은 그 선수들 못지않게 필사적으로 정진했으나 목표를 이루지 못한 많은 경쟁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점점 더 2등을 기억하지 않는 비정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농경사회’였을 때는 정해진 신분질서에 순응하며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사는 것이 미덕이었다. 생산자원이 한정된 사회에서는 자기 신분을 초월하려는 노력은 사회를 교란시키기 일쑤였기 때문.
그러나 서양에서는 15, 16세기 대항해시대 이래 자기의 ‘분수’를 훌쩍 넘는 모험심과 창의력이 그 자신에게 부와 영광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사회 발전과 국력 신장에 큰 기여를 하면서 ‘개인주의’가 탄생했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악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개인주의’는 사실 서양에서는 발전의 원동력이었고 인권과 민주주의의 초석이었다.(물론 서양의 개인주의 역시 폐단도 무척 많았다.)
우리나라는 유교적 관념과 사회 여건상 20세기 초까지도 개인의 자아실현 욕망이 올바르게 발현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개인주의’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의 의식이나 사회 여건이 다수 개인의 자아실현을 가능하게 하고 있고, 억눌렸던 개인주의적 욕망이 무섭게 분출하고 있다.
광복 이후, 진취적인 개인의 강렬한 성취욕이 한국 사회 발전과 부강의 원동력이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 현대사의 주역들, 한국을 빛낸 인물들 대부분이 자아실현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름 없는 대중이 없었다면 그들이 빛나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신명나지 않는 일이라도 성실히 하면서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다수가 없으면 사회는 삶의 터전이 되지 못한다. 모든 젊은이들이 스티브 잡스를 닮으려 하는 사회는 상상만 해도 어지럽다.
최근에 자포자기적인 반사회적 범죄가 횡행하는 것도 이렇게 가능성이 크게 열리고 재능으로, 집념으로, 승부수로 성공한 많은 사람에 비해서 자신이 너무 왜소해 보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은 사회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아져서가 아니겠는가.
평범함의 가치를 가르쳐야
싸이는 “(나는) 누가 뭐라든 내 방식대로 해” 하고 당당히 선언하는데 내 방식대로 해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의 비애는 클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명목상으로는 평등사회이지만 실제로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너무 심하다. 세계가 놀라는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우리 사회가 학력이 신분을 결정하고 신분이 곧 그 사람의 인간적 가치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두 ‘성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만 ‘성공’한 사람도 행복하기 어렵고 낙오한 사람은 불행을 넘어 반사회적으로 되기 쉽다.
우리 사회는 젊은이에게 모험정신과 성취욕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자아실현’이란 것이 반드시 독특한 방식으로 출세하고 명성을 얻는 삶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해 보이는 삶 속에서도 귀한 가치를 이룰 수 있음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생의 낙오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세상과 인간이 두려운 사람들을 구원하기에는 경제민주화만으로는 역부족일 것 같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이준희 칼럼/9월 20일] '강남스타일'에서 읽는 시대정신
한국일보/오피니언/기명칼럼/이준희 논설실장/
'강남스타일' 성공요인은 기존 틀 깨는 당당한 촌스러움
낡은 엘리트정치문화에 갇혀선 국민 마음 얻을 수 없어
'강남스타일' 성공에 대한 해석들은 구구하다. 위선적 부유층 문화에 대한 조롱이 통쾌해서, 낮엔 정숙하다 밤이면 미쳐버리는 반전의 묘미 때문에,
코믹과 섹슈얼리티가 절묘하게 결합돼 있어서, 그냥 재미있고 신나서… . 싸이의 진짜 의도가 뭐였든 상관없다. 어차피 모든 작품의 느낌과 해석은
수용자의 권한이므로.
그러니 나름의 견해 하나쯤 더 얹어도 상관없을 터. 사실 이 곡은 부유층 패러디라기 보다는, 오히려 분수
모르고 그들 흉내를 내고 싶어하는 서민뱁새들에 대한 조롱에 가깝다. 싸이 본인 말대로 워낙 '강남스럽지 않은' 그의 용모가 이 불순한 도발을
가릴 뿐이다.
강한 비트에 단순 멜로디의 반복은 물론 인상적이지만,
반응이 유튜브를 통해 폭발한 현상에 주목하면 핵심은 영상이다. 싸이가 강남 젊은이인양 잔뜩 폼을 잡는 장소는 동네놀이터, 목욕탕, 관광버스,
놀이배(요트가 아닌), 한강둔치, 지하철 등 온통 서민공간이다.
나름 차려 입은 싸이의 옷차림도 이 배경 속에선 촌티가 줄줄
흐른다. 진짜 강남스타일의 포스를 뿜어내는 유재석의 빨간 차와 노랑 의상, 싸이의 파랑 옷의 배합은 촌스러움의 압권이다. 말춤은 그 절정이다.
연습 없이도 누구나 어릴 적 한번쯤 서부영화를 보고 말 타는 흉내를 냈음직한 딱 그 동작이다. 다른 춤들도 초등학교 오락시간에나 어울릴
수준이다.
'강남스타일'의 성공포인트는 결국 허접하고 싼 티 나는 키치(Kitch)의 정서다. 정제되고 세련된 주류문화의 틈을
비집고 돌연 튀어나온 이 전복(顚覆)이 세계인들을 뒤집어지게 만든 진짜 요인이다. 가사가 뭔 뜻인진 몰라도 폼 잡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영상,
배경, 춤이 다 유쾌 통쾌한 것이다.
문화에 입 댈 깜냥이 아닌데도 '강남스타일'을 말하는 건 이 전복적 감수성이 지금 우리,
나아가 지구촌사회 저변에 깔린 압도적 정서라는데 생각이 미친 때문이다. 근엄한 엘리트주의의 완고한 구조 속에서 그들만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이
보통사람의 행복과는 무관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정서다. 지난해 세계를 휩쓴 월스트리트 점령형(形) 시위도, 한동안 대단했던 우리의 '나꼼수'열풍
같은 이상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원래 가짜나 사이비예술을 지칭하던 키치가 최근엔 가식 없는 진정성, 솔직함 따위로 의미가 전도됐다.
예전 거울에 비치던 이발소그림을 떠올려보라. 개울가 꽃밭에 물레방아 도는 예쁜 초가집이 있고, 멀리 산마루에 붉은 노을이 걸린 풍경에 사실은
멍하니 눈길을 빼앗기지 않았던가. 키치문화는 그러므로 더 이상 주눅들 필요가 없는 보통사람들의 당당한 자기표현이며, '그들만의 세상'에 대한
저항이자 조롱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정서에 대한 진솔한 이해와 포용 수준이 올해 대선의 승부를 가를 것이다. 현실에선 실패했던
노무현이 부활해 제1야당의 대통령후보를 만들어낸 것도 서민정서와 간극이 없는 그의 키치적 느낌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안철수는 고급스럽지만,
그들끼리 노는데 익숙한 일반적 엘리트들과는 전혀 다른 전복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출마선언에서 국민일반을 개혁의 주체로 놓고 자신을 리더가 아닌
조율사로 겸손하게 자리매김한 것도 기성정치인에게서 봐왔던 모습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는 여전히 완강한 기존구조에 갇힌 느낌을 주는
박근혜가 가장 불리할 것이다. 시대를 거스르는 경직된 역사인식, 불만을 허용치 않을 것 같은 절대적 권위, 끊임없는 주변의 구태와 부패,
오랫동안 보아온 낡은 인물들, …. 단언컨대 기존 틀을 벗어나지 못한 이런 과거형 엘리트정치문화로는 시대의 마음을 잡기 어렵다. 과도한
의미부여일지 모르나 '강남스타일'의 성공은 시대정신의 흐름이 어디쯤 머물러있는가를 가늠케 하는 지표 중 하나다.
어쩌면 유력
대선주자들이 한번 써먹어보겠다고 남몰래 말춤 연습들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 그렇더라도 중요한 건 흉내가 아니라 공감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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