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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전쟁의 신’, 동이 최초의 여장군/판교박물관...한성백제 1호 돌방무덤 1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전쟁의 신’, 동이 최초의 여장군

경향신문/문화/이기환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부호(婦好)? 바로 그 부호란 말이지.”

1976년 5월16일, 중국 안양(安陽) 인쉬(殷墟) 유적을 발굴 중이던 여성 고고학자 정전샹(鄭振香)은 경악했다.

확인된 명문 청동기 190점 가운데 반이 넘는 109점에서 무덤의 주인 이름인 ‘부호’라는 상형문자가 보인 것이다. 놀라웠다. 갑골복사에서 숱하게 보였던 상나라의 중흥군주 무정왕(재위 기원전 1250~1192년)의 왕비인 바로 그 ‘부호’였기 때문이었다. 갑골복사란 동이족이 세운 상나라(기원전 1600~1046)의 국왕이나 무인(巫人)이 거북 등에 나라와 대소사의 길흉을 점친 뒤 그 점복의 내용을 기록한 것을 뜻한다.

이 갑골기록들을 종합하면 ‘은국대치(殷國大治)’를 이룬 무정왕의 여인은 64명에 이른다. 그런 무정왕에게는 비무(비戊)·비신(비辛)·비계(비癸) 등 3명의 법정배우자가 있었다. 이 가운데 ‘비신’은 부호가 죽은 뒤 받은 시호이다. 부호묘 출토 청동기 중에는 ‘사모신(司母辛)’이라는 명문 청동기가 5건이나 나왔다. ‘사모신’이 바로 ‘비신’, 즉 ‘부호’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1976년 홀연히 발굴된 이 무덤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부호’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성발굴대장’의 삽 끝에서 3300년 전의 ‘여걸’이 현현했으니 이것도 운명이 아니었을까.

부호묘에서 발굴된 삼련언 청동기에는 ‘부호(왼쪽 그림)’라고 새긴 상형문자가 보였다.

 



■1만3000명 통솔한 여장군

뭐니뭐니 해도 부호의 가장 큰 업적은 군사활동이었다.

사실 무정왕 초기에는 국가기반이 확고하지 않아 외침이 잦았다. 심지어 북방의 오랑캐인 토방이 도읍(안양) 근처까지 쳐들어와 수도권 읍락 2곳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정은 귀방(鬼方)과 토방(土方), 강방(羌方), 파방(巴方) 등 주변국들과의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부호는 지알·사반 등 남성 대장군들을 이끌고 전선에 나서 맹활약한다.

“이번에 왕이 부호에게 명을 내려 토방을 정벌하려고 하는데 신의 보호가 있을까요?(今或王登人 乎婦好伐土方 受有又)”

이 갑골문은 무정왕이 토방(북쪽의 오랑캐) 정벌에 부호를 지휘관으로 파견하면서 점을 친 내용을 거북판에 남긴 것이다. 과연 갑옷을 입고 청동꺾창을 들고 출전한 부호는 단 한 번의 정벌 만으로 토방을 격퇴시켰다. 그녀는 만족하지 않고 토방을 맹렬하게 추격, 결국 전멸시켰다. 그 후 토방은 상나라를

안양 박물관에는 갑골복사에서 부호를 언급한 내용들을 절명해놓고 있다. |이기환 기자

넘보지 못했다.

또 하나의 강적은 파방(巴方·서남쪽 오랑캐)이었다.

“부호가 지알(상나라 장군 이름)과 연합해서 파방을 치게 하고, 대왕은 친히 동쪽으로 파방에 진격하면 적군은 부호의 매복지로 쳐들어올까요?(婦好其比沚알 伐巴方 王自東探伐戎 陷于婦好立)”

이 갑골의 내용이 무엇인가. 상나라가 파방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양동작전을 펼 예정인데, 성공할 것인지를 묻는 내용이다. 즉 부호가 지알 장군과 연합하여 매복하면, 무정왕은 정예병을 이끌고 파방의 정면을 공격한다는 치밀한 작전을 펼친 것이다. 무정시대 정벌전쟁의 백미는 역시 서방의 강자인 강방(羌方)과의 싸움이었다.

강방은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했다. 또한 강족의 용맹성은 자타가 공인했다. 강족은 끊임없이 상나라를 괴롭혔다. 이 때 강방 정벌의 주역 역시 부호였다.

“부호에게 군사 3000명을 징집하게 하고, 또 1만명을 징집하여 강방을 정벌하라고 할까요?(登婦好三千 登旅萬 呼伐羌)”

부호가 상나라 시기 전쟁 사상 최다병력인 1만3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강방을 정벌했음을 알려주는 갑골문이다. 구체적인 출병규모까지 나온 보기드문 기록이다.

■영락없는 여인네

인쉬 유적 안에는 발굴된 부호묘를 복원해놓고, 부호 동상을 세워놓았다. |이기환 기자

부호는 이렇듯 전장을 호령한 여전사였지만, 남편(무정)의 사랑을 독차지한 영락없는 여인네였다.

특히나 부호의 임신출산은 무정왕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갑골문을 보면 남편 무정왕은 부호의 임신과 출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부호에게 출산능력이 있을까요.(婦好有受生)” “부호에게 아이가 있다는 소식이 있을까요? 3월에?(婦好有子 三月)” “부호가 아이를 갖겠습니까? 4월에?(婦好 有子 四月)”

남편은 부호의 임신여부를 월 단위로 묻고 있다. 어지간히 안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임신하고 출산에 임박하면 또 불안에 떨었다. 아들을 원했기 때문이다.

“부호(왕비)가 아이를 낳으려 합니다. 아들일까요?(婦好娩 嘉)” “신(申)일에 낳으면 길(吉)하니 아들일 것이다.(申娩吉 嘉)” “(하지만) 갑인일에 아이를 낳았다.(甲寅娩) 길하지 않았다. 딸이었다.(不吉 女)”

갑골문을 보면 무정왕은 아들을 어지간히 바랐지만, 결국 출산날짜를 맞추지 못하는 바람에 딸을 낳았다. 그래서 매우 실망했음을 알 수 있다. 갑골의 내용을 보면 아들을 낳으면 ‘길(吉)’하고, ‘기쁘다’는 뜻의 ‘가(嘉)’로 표현했다. 반면 딸은 ‘불길(不吉)’하고 ‘기쁘지 않다(不嘉)’라 했다. 상 말기엔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야만 왕비로서의 자격을 얻었다. 정벌작전을 지휘했던 여걸이었지만 엄습해오는 남아선호사상의 그림자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벌써 3200년 전에 출산 날짜를 계산했다는 것이니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호는 또 자신이 낳은 갓난아기가 죽는 아픔도 맛봤다.

“각(殼·점을 친 관리이름)이 점을 치며 물었다. ‘부호가 출산하는데 불길하겠습니까.’ 왕이 점궤를 보고 길흉을 판단해서 말했다. ‘길할 것 같기도, 불길

부호묘 내부 모습. 순장자들의 인골 16구가 발굴됐다.

할 것 같기도 하다.’ 결과는 불길했는데, 과연 아이가 죽었다.(殼貞 婦好娩 不其嘉 王占曰 不嘉 其嘉 不吉 于□若 玆주死)”

부호의 출산을 앞두고 점궤가 불길했는데, 결국 그 점궤대로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전쟁에, 임신에, 출산에…. 동분서주한 슈퍼우먼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철의 여인’이었지만, 잦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염 여인네 역할까지 해야 했던 부호…. 그랬으니 몸이 고장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부호가 1만3000여 대병력을 이끌고 강족 정벌에 나섰다는 사실을 알려준 갑골복사

갑골문에는 남편인 무정왕이 부인인 부호의 잦은 병치레를 걱정하는 대목이 자주 보인다.

“부호가 감기(혹은 신경통)에 걸릴까요?(好骨凡有疾)” “부호의 질병에 재앙이 있을까요?(婦好又疾추有)”

이밖에 부호는 복통과 잇병, 귀병 등과 함께 악몽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남편은 부호의 쾌차를 기원하는 갖가지 제사를 드린다. 하지만 부호의 병세는 점점 위독해진다. 남편은 불안에 떨면서 잇달아 점을 친다.

“부호가 죽을까요?(好其死)” “부호가 병으로 죽지않겠지요?(好病不死)

그러나 남편의 지극 정성에도 불구하고 부호는 숨을 거둔 것 같다. 남편인 무정왕은 ‘돈(敦)이라는 사냥터에서 부호의 사망소식을 듣고 그 곳에서 곡제(哭祭)를 지냈다.

부인이 죽은 뒤 남편은 악몽을 꾸었다.

“왕이 불길한 꿈을 꾸었는데 부호의 혼령에 해를 끼치지는 않겠습니까?(王夢婦好不추)”

그러자 남편은 죽은 부인의 혼령을 달래려 갖가지 제사를 지낸다. 이 가운데는 잡아온 여자노예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도 있었다.

동이족 최초의 여장군이자, 역사상 최초의 실존여성이기도 한 부호의 삶은 이처럼 파란만장했다.

부호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남성우위사회로 접어든 상나라 말기를 풍미했다. 이후 부호가 ‘지켜낸 여권(女權)’은 은(상)의 뒤를 이은 한족(漢族)의 나라인 주나라 때부터 급전직하했다. 여인의 지위가 신권-족권-부권의 밑인 최저층으로 추락한 것이다. 새삼 부호의 삶을 돌이켜보면 과연 동이의 여인 답다. 결혼에, 임신에, 출산을 모두 감당하면서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여기에 나라까지 구했다니 그야말로 ‘슈퍼우먼’이 아니었던가. 무려 3200년 전이었는 데도 말이다. 역시 ‘가정의 신’이자 ‘직장의 신’을 강요받는 3200년 후 요즘의 여인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참고자료>

양동숙, <갑골문자로 본 상대 무정비 부호>, ‘아시아여성연구’ 31,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1992년. <갑골문 해독>, 서예문인화, 2005년
曹定雲, <殷墟婦好墓 銘文硏究>, 雲南人民出版社, 2007年
王宇信·徐義華, <商周甲骨文>, 文物出版社, 2000年
古力, <紅粉帝國的 幽夢-圖說 殷墟婦好墓>, 重慶出版社, 2006年
陳志達, <殷墟>, 文物出版社, 2000年
李付强 等, <世界遺産-殷墟>, 中國對外飜譯出版公司, 2008年
이기환·이형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성안당, 2009년

 

 갑골복사란 동이족이 세운 상나라(기원전 1600~1046)의 국왕이나 무인(巫人)이 거북 등에 나라와 대소사의 길흉을 점친 뒤 그 점복의 내용을 기록한 것을 뜻한다.

동이족 최초의 여장군이자, 역사상 최초의 실존여성이기도 한 부호의 삶은 이처럼 파란만장했다.

부호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남성우위사회로 접어든 상나라 말기를 풍미했다. 이후 부호가 ‘지켜낸 여권(女權)’은 은(상)의 뒤를 이은 한족(漢族)의 나라인 주나라 때부터 급전직하했다. 여인의 지위가 신권-족권-부권의 밑인 최저층으로 추락한 것이다. 새삼 부호의 삶을 돌이켜보면 과연 동이의 여인 답다.

 

- 2013년 5월13일 월요일...수산나 -

 

 

 

판교박물관...한성백제 1호 돌방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