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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오피니언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 탄생의 비밀 <1>~<6>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 나는 왜 지금 ‘한국인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가

[중앙일보]입력 2009.03.25 02:38 / 수정 2010.10.02 21:20

이어령 ‘한국인 이야기’ 4월 6일부터 연재

‘한국 대표 지성’이자 ‘우리 시대의 늙지 않는 크리에이터’ 이어령 본사 고문(77·사진)이 4월 6일부터 새 연재 ‘한국인 이야기’로 독자를 찾아갑니다. 디지털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로 지면을 장식한 지 3년 만입니다. 그는 ‘한국인 이야기’를 새로운 글쓰기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관통해 온 자신의 회상이면서 동시에 한국인 모두가 주인공인 ‘집단추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인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는 ‘한국인 이야기’의 보따리를 그가 막 풀려 합니다.

올해 한국 나이로 77세를 맞는다. 한자로 七七(칠칠)이라고 쓰면 기쁠 ‘喜(희)’자의 초서체와 비슷하다 하여 흔히 희수(喜壽)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 나이는 기쁨도 아니요, 노락(老樂)을 의미하는 숫자도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물음에 “더 이상 아름다운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나에게 누군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한국말로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줄곧 글을 써왔다. 그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으로 살아왔다. 평생을 쉬지 않고 평론과 논문, 에세이, 칼럼, 드라마, 시나리오, 소설, 시 그리고 얼마 전에는 뮤지컬 공연물까지 썼다. 심지어 표어까지 썼다. 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와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라는 캠페인 카피가 그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한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 일장기가 걸린 교실에서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던 탓이다. 남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식민지 아이로 태어난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한국말로 글을 쓰며 그것으로 밥 먹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맙고 황송하고 눈물겹도록 큰 축복이라고 여겨 왔다.

그런데 아직도 쓰지 못한 글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도 역사도 아닌 이를테면 한 사람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모든 한국인의 이야기, 소설이며 전기이며 동시에 역사인 그런 글이다.

용광로의 쇳물처럼 튀어오르는 저 열기가 바로 우리다. 이런 ‘집단추억’을 어느 사회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인가. WBC에 출전한 한국 야구단을 응원하는 한국 교민과 응원단 [조문규 기자], [연합뉴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숫자다”는 말이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한 사람의 죽음은 소설이요, 100만 명의 죽음은 역사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불행은 ‘로마인 이야기’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도 ‘한국인 이야기’는 이념논쟁을 해야 하는 재미없는 역사교과서에서 배울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일단 그 굴레에서 벗어나면 소설보다 재미있고 역사보다 엄숙하게 흐르는 한국인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쓰고 싶은 한국인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스토리가 되어서도 안 되며 추상적인 집단의 히스토리가 되어도 안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누이가 나물 캐러 다니던 채집시대 때의 아이가 농경, 산업, 지식 정보시대를 걸쳐 우리 손으로 개를 복사하는 바이오 시대의 전 문명과정을 한꺼번에 겪으며 머리털이 세어 가는 그런 나라가 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큰 전쟁을 두 번씩이나 겪고 혁명을 서너 번 치르며 70여 년을 블랙 홀 같은 소용돌이를 횡단한 사람들의 ‘집단추억’ 그런 이야기를 어느 사회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의 물음을 한국인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 보자. 한국인의 가슴과 성벽, 장터와 그 깃발에 부는 천의 바람을 통해 한국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어령, 사진=조문규 기자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 탄생의 비밀 ① 산불과 비숍

[중앙일보]입력 2009.04.06 02:41 / 수정 2009.04.22 17:08

100년 전 영국인 여행작가 비숍은 보았다
위기 때마다 한 몸이 되는 한국인 DNA를

산불이 나면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깨진다. 큰 짐승이든 작은 짐승이든 평소에 쫓고 쫓기던 관계에서 벗어나 다 같은 방향으로 살길을 찾아 달려간다. 위기의 한순간이 정글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또 이런 말을 한다. 단세포 편모충(鞭毛蟲)인 클라미도모나스는 암수의 구별 없이 세포 분열로 번식을 한다. 하지만 환경이 변해 질소 같은 것이 부족해지면 둘로 갈라졌던 것이 다시 한 몸으로 합친다고 한다. 위기에 대처하는 이러한 능력 때문에 클라미도모나스는 발생생물학이나 유전학의 모델 생물로 많이 이용된다. 우리는 평균 3년 만에 한 번꼴로 난을 겪어온 민족이다. 국난의 산불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한 방향으로 뛰었고 환경이 어려워지면 클라미도모나스처럼 한 몸이 되었다. 하지만 관과 민이, 계층과 분파가 서로 증오하고 분열하고 얼굴을 할퀴다 나라를 잃는 실향민이 된 적도 있다.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여행작가로 구한말 세계 각처를 탐사한 이사벨라 비숍(1831~1904)은 한국을 이렇게 적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러시아의 자치구 프리모르스키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같은 한국인인데도 정부의 간섭을 떠나 자치적으로 마을을 운영해 가는 그곳 이주민들은 달랐다. 깨끗하고 활기차고 한결같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국의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심과 게으름과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은 어느새 주체성과 독립심으로 바뀌어 있었고, 아주 당당하고 터프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평상시보다 위기에 강한 민족, 남이 멍석을 펴주는 것보다 제 스스로 일을 할 때 신명이 나는 한국인의 기질을 일찍이 그녀는 한국의 난민을 통해 간파한 것이다. 어느 민족보다도 부지런하고 우수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로 변해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비숍 여사는 이렇게 희망의 말로 결론을 맺는다. “고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도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면 참된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은 어떤가. 지금 세계시장의 정글은 불타고 있다. 그 불길은 한국을 향해 번져 오고 북한은 로켓을 발사해 불난 데 부채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를 향해 뛰고 있는가. P리스트, J리스트, K리스트…. 끝없는 검은 리스트의 행렬 속에서 우리의 가슴은 더욱 암담하다. 백 년이 지났는데도 비숍 여사가 말한 ‘정직한 정부’, 그리고 ‘참된 시민의 발전’은 아직도 먼 곳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눈을 돌리면 세계의 무대에서 타오르는 또 다른 불꽃이 보인다. WBC의 다이아몬드에서 뛰는 한국의 야구선수들이, 세계피겨선수권의 아이스링크에서 나는 김연아가, 그리고 한마음으로 열광하는 모든 한국인의 얼굴이 보인다. 함께 외치고 함께 감동의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또 미사일이 아니라 축구공을 놓고 남북한 젊은이들이 대결하는 잔디밭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비숍을 놀라게 했던 프리모르스키 난민들의 유전자가 어디엔가 마르지 않고 우리 핏속을 흐르는 게 보인다. 그러나 미안하다. 겨우 백 년 전 이방의 한 여인의 시각으로 한국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 탄생의 비밀 ② 쑥쑥이는 외계인이 아니다

[중앙일보]입력 2009.04.07 03:11 / 수정 2009.05.05 10:59

평생 처음 배 속 아이에 책 서명
나기 전부터 이름 있어 당당한
놀랍고 신비한 태아들의 세계

&Total
『젊음의 탄생』 강연이 끝나자 책을 든 청중이 사인을 받으려고 몰려왔다. 거의 기계적으로 사인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쑥쑥이라고 써 주세요”라고 말하는 여성이 있었다. 놀란 표정을 짓자 “제 아이에게 주려고요”라고 말한다. 군이라고 써야 할지 양이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물었다. “여자애요, 남자애요.” 그러자 그 여성은 “아직 몰라요”라고 이상한 대답을 한다. 그제야 나는 그 여성의 배가 불러 있는 것을 봤고 그 옆에는 곧 애기 아빠가 될 젊은이가 참나무처럼 서 있는 것을 봤다. 쑥쑥이는 태명(胎名)이었던 것이다.

이름이 있으면 태아도 우리와 같이 존재한다. 칠십 평생 처음으로 글씨도 모르는 배 속 아이에게 책 서명을 해 준 것이다. 처음엔 미소를 지었지만 나중에는 눈이 축축해졌다. 요즘 젊은이들의 말로 안습(眼濕)이었다. 나와 동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기계총이 나고 부황 난 얼굴에는 으레 버짐이 번진 그 애들에겐 태명은 고사하고 본명조차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쇠똥이, 개똥이가 아니면 그 흔한 돌쇠였다. 그래도 남자아이는 천한 이름이라야 오래 산다는 속신 때문이라고 하자. 하지만 여자애들은 갓 났다고 ‘간난이’, 섭섭하다고 ‘섭섭이’다. 그 흔한 ‘언년이’란 이름도 아마 언짢은 년이라는 욕일 것이다. 남과 다른 특성을 나타낸 이름이라 해도 겨우 점이 있다고 해서 점박이고 점순이다.

검으면 검둥이, 희면 흰둥이 그리고 검고 희면 영락없이 바둑이가 되는, 거의 강아지 이름을 짓는 수준이다. 동네에다 대고 “바둑아!”라고 불러 봐라. 틀림없이 대여섯 마리의 개들이 떼를 지어 달려올 것이다. 동명이인의 여자애들이 강아지 이름처럼 그렇게도 흔했으니 이름이 없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요즘 젊은 부부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태명에는 남녀의 성별도, 누구 성을 따르느냐의 성씨(姓氏) 문제도 없다. 그저 쑥쑥 자라라고 쑥쑥이, 무럭무럭 성장하라고 무럭이다. 튼튼히 크라고 튼튼이, 기쁘다고 기쁨이 그리고 또 그런 행복과 축복을 받으라고 행복이요 축복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태 안에서 우리와 함께 당당한 쑥쑥이에게 사인을 해 준 덕분에 그동안 잊고 살던 나 자신의 태아기(胎兒期)에 대해서도 눈뜨게 됐고, 하마터면 빠뜨릴 뻔했던 한국인 이야기에 태아들이 생활하고 있는 신비롭고 놀라운 이야기도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양철북』을 쓴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그 소설 첫머리에 자신의 탄생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양수의 어둠 속에서 철퍽거리고 놀다가 갑자기 환한 바깥세상으로 나오면서 처음 보는 불빛이 몇 촉짜리 전구였는지 그 상표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어제 일처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상상력으로 치면 그 못지않은 영화감독 스필버그는 외계인(ET)들을 태아의 모습처럼 보여 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가의 허풍이요 영화 속의 허상이다. 우리와는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쑥쑥이는 분명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내계인(內界人)이다.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탄생의 비밀을 풀어 가자면 소설가나 영화감독의 상상력에만 의존할 수 없다. 로물루스 형제를 젖 먹여 키운 수상한 늑대 이야기로부터 시작한 『로마인 이야기』와 좀 더 다른 이야기를 하려면 늑대를 곰으로 바꾸는 상상력만 가지고서는 안 될 것이다. 시인과 과학자가 손을 잡아야만 쑥쑥이가 살고 있는 저 어둡고 신비한 태내 공간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 탄생의 비밀 ③ 어머니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중앙일보]입력 2009.04.08 02:54 / 수정 2009.04.22 17:05

자궁 속 양수, 바닷물과 비슷
어둡지만 고요한 그 바다에서 태아들은 무슨 꿈을 꾸었을까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들은 바다에서 어머니를 본다. 한자의 바다 해(海)자에는 어머니를 뜻하는 모(母)자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말도 그렇다. e의 철자 하나만 다를 뿐 바다도 어머니도 다같이 ‘라 메르’라고 부른다. 거기에 인당수 바닷물에 빠져 거듭 태어나는 심청이 이야기, 실험관의 인조인간 호문클루스가 갈라리아의 바다에 떨어져 생명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괴테의 『파우스트』, 그리고 또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장 콕토의 시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 자신도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서 “생명의 시원인 모태는 태초의 바다”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과학자들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바다가 아니라 20억 년 전 최초의 생명 세포를 태어나게 한 태고의 바다라고 한다. 이유는 그 바닷물과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의 성분이 비슷하고 거기에서 생명의 기적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海水)와 양수(羊水)의 미네랄 화학기호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겨자씨만 한 태아(胎芽)가 되어 어머니의 자궁 속 바다를 떠다니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태고의 그 바다는 어둡지만 참으로 고요하고 아늑했을 것이다. 하루에 일 밀리미터씩 자란다는 수정란의 미생물에서 수아가미와 지느러미가 달린 물고기 모양으로 변해간다. 지구 생물의 진화과정으로 본다면 10억 년의 세월이 지나간 셈이다. 그 지느러미가 손과 발이 되고 폐가 생겨나면 물고기였던 나는 도롱뇽 같은 양서류로 변신한다. 정말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 같은 흔적도 남아 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손톱, 발톱이 생기기 시작하면 나는 어느새 쥐와 같은 포유류가 되고 그 몸에 뽀얀 잔털이 자라면 영장류의 원숭이 모습으로 진화한다. 그래도 인간이 되려면 아직 수백만 년이 지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어떤 서사시도 이렇게 스케일이 크고 놀라운 변신의 드라마를 보여준 적이 없다. 생물학자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머니의 바다(양수) 속에서 20억 년, 더 올라가면 40억 년의 기나긴 생물의 계통 발생 과정을 단 10개월 만에 치렀던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너나 할 것 없이 빛의 속도로 질주해도 불가능한 그 길고 긴 생명의 여정을 거쳐서 우리는 이 한국 땅에 안착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신화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동굴 속의 곰이었지만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면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미생물이었다. 한국인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원숭이와 쥐와 도롱뇽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였다. 그 바다 생물 중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껍질은 물론 가시조차 없었던 척색(脊索)생물 피카이어였다는 게다. 못된 바다의 포식자 노티라스의 먹이로 쫓겨 다니다가 물고기로 진화하고 개구리 같은 양서류가 되어 헐레벌떡 육상으로 올라와 파충류와 포유류의 선조가 된 인간의 먼 핏줄이라 했다. 만약 피카이어가 절멸했더라면 우리들 인간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포식자들에 쫓겨 다니던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슬프고 이상한 생명의 이야기가 어머니의 양수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태아들도 꿈을 꾼다는 데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때 무슨 꿈을 꾸었을까. 지상의 꿈과는 분명 다른 꿈이었을 거다. 프로이트 박사의 분석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순수한 꿈, 초록색 바다의 꿈이 아니면 그냥 하얀 꿈이었을지 모른다. 축제의 불꽃처럼 일시에 생물들이 터져나온 캄브리아기의 바다 꿈이었을까. 그보다도 먼 우주 대폭발의 하늘 꿈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과 그 태아들도 그 안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잘 기억해 주기 바란다. 한국인 이야기를 하는데 두고두고 되풀이될 중요한 화두이니까.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 탄생의 비밀 ④ 왜 울며 태어났을까

[중앙일보]입력 2009.04.09 02:25 / 수정 2009.04.22 17:05

태어나자마자 아이들은 왜 큰 소리로 우는가. “바보들만 사는 당그란 무대에 타의에 의해 끌려나온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셰익스피어는 풀이했다. 과연 대문호다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한 가지 씻을 수 없는 실수를 했다. 아이들이 타의에 의해 끌려 나왔다는 그 대목이다. 태아들은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호흡운동을 하고 걸음마의 다리운동까지 한다. 이렇게 충분한 준비를 다 마치고 나서야 여행을 떠날 마음을 갖는다. 그 깜깜한 암흑 속에서도 출구의 산도를 용케 알고 그 방향으로 머리를 돌린다. 달력도 시계도 출생을 가르쳐 줄 학원 선생도 없는 나 홀로 공간에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오히려 출산일을 모르는 것은 산모 쪽이다. 배 속에 든 아이가 사인을 보내 진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분만일이 온 것을 눈치채질 못한다. 초음파로 태내를 환히 훑어보는 산부인과 전문의도 아이가 언제 나올지 정확한 일시를 모른다.

그래서 이따금 구급차 안에서 몸을 푼 산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셰익스피어 같은 멍청한 말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사주팔자 타고난다고 하지만 그 운명의 날을 선택한 것은 바로 배 안에 있는 ‘나’다. 오히려 진짜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것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아이들이 아니라 인공 분만에 의해 억지로 끌려 나온 요즘 아이들일 것이다. 제왕절개의 인공 출산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아이들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고고(呱呱)의 성(聲)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들이마시는 호흡작용으로 닫혀 있던 폐벽이 열리는 소리다. 그리고 그 최초로 들이마신 숨이 생을 마칠 때 마지막 내쉬는 날숨으로 이어지는 한 호흡이 다름 아닌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험난하고 허무한 세상으로 나가려고 목숨을 걸며 비좁은 산도를 빠져나오는 모험을 했다. 양수가 터지는 탄생의 순간 행복의 바다, 평화의 바다는 사라진다. 어머니의 심장 박동을 파도소리로 듣던 태아의 추억은 멈춘다. 아이의 출산이란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하는 것이다. 그때 터뜨리는 울음소리야말로 수억 년 전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상륙했던 생물들의 울부짖음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왜 편한 바다를 버리고 모래와 용암밖에 없는 불모의 육지로 올라왔는지. 포식동물들로부터 피난처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의 신비한 힘이 있었던 것 같다고 진화론자들은 말한다. 정든 곳을 버리고 미지의 공간으로 나가려는 생명의 의지, 논리만으로는 풀 수 없는 어떤 고통에 대한 모험과 도전, 그것이 탄생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게 진화론인지 킬리만자로의 산꼭대기에서 얼어 죽은 표범 이야기를 하는 헤밍웨이 소설인지 분간할 수 없다.

태아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했을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싶은 날에 태어났다. 나의 생일날은 내가 선택한 가장 성스러운 날이며 어머니의 바다를 떠나 육지로 상륙한 고난의 기념일이다. 나는 그날 총탄이 날아오는 육지를 향해 단신 상륙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성공을 했을 때 내 아가미는 허파로 변해 있었고 그 허파는 풍금처럼 상실한 바다와 새로 만난 대륙을 향해 울리고 있었다. 진통이 끝난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고고의 성을 들었으며 다음에 태어날 아이들의 바다를 준비하기 위해서 가장 청정한 바다에서 딴 미역국을 부지런히 드시고 계셨다.”

그러니까 바다에서 뭍으로 상륙한 우리 신생아들은 용감한 해병대요 영원한 해병대였던 것이다.

산모는 출산을 통해 자연의 큰 힘과 그 지혜를 배운다고 했다. 어찌 여성만의 일이겠는가. 탄생의 비밀을 통해 우리는 대륙으로 올라온 생명의 바다를, 생물학과 시학이 하나로 합쳐진 지혜의 책을 읽는다.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5> 탄생의 비밀 ⑤ 한국인은 한 살 때 태어난다

[중앙일보]입력 2009.04.10 03:02 / 수정 2009.04.22 17:04

마음의 눈으로 보는 동양
렌즈로 봐야 아는 서양
생명·자연을 보는 차이
연령 계산법에서 드러나

 “나는 한 살 때 태어났습니다.” 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 첫 줄에 나오는 대목이다. 당연한 소린데도 아주 참신한 충격을 준다. 그래, 정말 그래. 우리는 태어나면서 한 살을 먹었지. 나는 양력으로 12월 29일 태어나서 이틀 만에 두 살을 한꺼번에 먹은 사람이다. 하지만 비웃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태어난 아이를 0살부터 정확히 계산하는 서양 사람들이다.

그것은 일 년 가까이 어머니 배 안에서 열심히 살아온 태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과학이요 합리성이요 라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제 나이 헤아릴 줄도 모르는가. 공장에서 나온 물건이라면 출고 날짜부터 따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눈·코·입을 달고 나온 아이들은 부품들을 꿰맞춘 TV 상자가 아니다.

19주째만 되어도 벌써 태아 손에는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지문이 생기고 손금이 잡힌다. 손금을 보는 사람은 태내 생활을 통해 앞날의 운명을 비춰보려는 것과 같다. 배 속에서부터 왼손가락을 빠는 아이들에게 왼손잡이가 많다는 것은 영국의 실험 결과에서도 드러나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태내 버릇 백 살까지 간다’는 새 속담이 생겨날 판이다.

“태내에서부터 성인병이 시작된다”는 데이비드 버커의 책을 읽고 감동한 사람이라면 “나는 한 살 때 태어났습니다”라고 한 한국 작가의 소설에도 박수를 보낼 것이다. 현대소설은 고사하고 판소리 ‘심청가’를 들어보면 왜 한국 사람들이 태아의 나이까지 계산했는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앞 못 보는 심 봉사는 태어난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몰라서 손으로 더듬어봐야 했지만, 그 애가 열 달 동안 어떻게 어머니 배 속에서 자랐는지는 초음파 사진을 찍듯 훤히 들여다본다.

그것이 중중모리 신가락으로 읊어대는 “사십에 점지한 딸 한두 달에 이슬 맺고……”로 시작하는 심청이 출산 대목이다. 첫 대목부터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정자·난자가 결합하는 것을 “이슬을 맺는다”고 한 촉촉하고 정감 있는 표현이다. 석 달에는 그 이슬에 피가 어리고, 넉 달에는 인형(人形·사람 모양)이 생긴다. 다섯 달과 여섯 달에는 오포(五包:간장·심장·비장·폐장·신장)와 육점(六點:담·위·대장·소장·삼초·방광)이 생겨난다고 묘사한다.

재미난 것은 여섯 달까지는 맺고 어리고 생겨난다고 하다가 일곱 달부터는 그 달수의 운에 맞춰 모두 열리는 것으로 바뀐다. 칠 개월에는 칠규(七竅)가 열리고 구 개월이 되면 구규(九竅)가 열리고, 열 달째는 금강문·하달문·뼈문·살문의 모든 자궁 문이 열리면서 아이가 태어난다. 일곱에서는 일곱 수의 얼굴 구멍이 아홉에서는 하체의 두 구멍을 합친 아홉 수의 구멍이 열린다는 것도 짝이 맞지만 열 달에는 자궁문이 모두 열린다는 것도 딱이다.

일곱 수부터 모두가 ‘ㅇ’의 열린 모음으로 시작하는 한국말도, 그리고 정말 ‘열’에서 ‘열리’는 자궁문도 절묘하다. 과학의 정밀성과는 또 다른 시의 정교함이다.

과학적 관점으로 봐도 태아들은 일곱 달부터 듣고 느끼고 기억하기 시작한다. 감각이 열리고 뇌가 발달한다. 이때 태명(胎名)을 계속 불러주거나 같은 음악을 되풀이해 들려주면 태어난 뒤에도 산아들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한 개의 수정란에서 42사이클의 세포분열을 되풀이하면서 자라던 태아가 이 세상 밖으로 나온 뒤에는 겨우 5사이클로 줄어들면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탄생 전에 우리 몸은 거의 다 만들어진 것이나 진배없다.

태아 의학이나 주산기학(週産期學)의 발달로 태내의 많은 신비가 풀어지면서 나이는 태아 때부터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요 과학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작은 일 같지만 이것이 서양인과 동양인의 사고 체계를 가르는 중요한 철학의 랜드마크다.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보는 차이가 바로 이 연령 계산법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최첨단 자기공명 기기라 할지라도 앞 못 보는 심 봉사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생명공간을 들여다 보는 것은 렌즈도 수정체도 아니요 ‘마음의 눈’이기 때문이다.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6> 탄생의 비밀 (끝)‘만인의 친구’ 미키마우스는 배꼽이 없다

[중앙일보]입력 2009.04.13 02:52 / 수정 2009.04.22 17:04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해보면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큰 대접을 받고 있는 생쥐 한 마리가 있다. 이름은 미키마우스, 국적은 미합중국, 출생지는 뉴욕이다. 종교는 기독교이고 키는 70㎝, 혈액형은 B형이다.

걸핏하면 “Oh, boy!”라고 말하는 버릇과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더러는 독서도 한다. 교제하는 지인들의 리스트에는 전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부터 스페인 국왕에 이르기까지 저명인사들이 줄줄이 올라 있다. 거기에 동료 유명 배우와 디즈니 식구까지 합치면 대군단이 된다.

그러나 진짜 사람과 다를 게 없던 미키도 출생 약력에 오면 역시 흔들린다. 미키는 1928년 11월 18일 일요일에 처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나이는 80세, 설정 연령은 10대라는 메모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미키가 절대로 못 하는 게 하나 있다는 걸 발견한다. 80세 나이에도 10대 행세를 할 수 있겠지만 한국 나이로 계산해 한 살을 더 보태는 건 천금을 줘도 안 된다.

미키에는 믹(mic)이라는 애칭이 있고 중국에서는 미노서(米老鼠), 이탈리아에서는 토포리노, 스페인에서는 라톤 미겔리토, 인도네시아에서는 미키 티쿠스 등 별의별 이름이 다 있지만 우리 쑥쑥이처럼 태명(胎名)만은 가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무리 사람 대접을 받고 사람 행세를 해도 미키에게는 태가 없고 배꼽이 없다는 것, 그것이 그의 ‘출생 비밀’이다. 그래서 태생적(胎生的) 비극이라는 말도 쓸 수가 없다. 한국에 와서 ‘281118’로 시작하는 주민등록증을 받을 수는 있지만 “나는 한 살에 났다”는 소설은 쓸 수가 없다. 0살과 한 살에 태어나는 차이는 불과 일 년이지만 바이오의 시간, 우주의 시간으로 치면 20억 년이 넘는다. DNA의 발생 시기부터 치면 40억 년의 나이 차이가 난다.

태가 아니라 두뇌에서 탄생된 미키에게는 생물학적인 진(gene)이 없다. 오직 문화적 유전자 밈(meme)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0살부터 나이를 따지는 서양 사회에서는 사람과 미키를 분간하기가 힘들어진다. 태내(胎內)를 태반으로 해서 성장한 사회와 뇌내(腦內)를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사회의 차이는 크다. 오늘날에는 한국인도 탯줄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어 아무렇지 않게 임신 중절로 한 해 약 35만 명으로 추정되는 태아를 죽이는 나라가 되었다.

미키처럼 배꼽이 없고 탯줄의 기억이 없는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사회는 ‘환상공동체’라 할 수 있다. 디즈니랜드와 해리포터와 같은 판타지가 지배하는 유아적 세상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발보다 훨씬 큰 아버지 신발을 신고 다닌다. 귀여워 보이지만 진짜 사이즈와는 맞지 않는 거북함이 숨어 있다. 사람보다 하나가 적은 네 손가락인데도 엄청난 부와 명예와 사랑까지도 움켜쥘 수 있다. 천적인 고양이도 무서워하지 않는 미키는 마음 놓고 지구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그의 밈을 뿌렸다.

미키와 거의 동시대 사람인 나는 오늘까지 줄곧 그와 즐겁게 동행해 왔다. 30년대의 나는 일제 식민지시대의 불행한 아이로 자랐지만, 미키는 ‘타잔’ ‘킹콩’과 함께 세계의 대공황기에 나타난 3대 캐릭터로 급식소에 늘어선 실직자들의 행렬보다 더 긴 줄을 극장마다 세웠다.

냉전시대에 나는 전전긍긍 초라하게 살고 있었지만, 미키마우스 풍선은 홍콩의 하늘 위에 당당하게 떠서 주룽반도의 중국 영토에 자유를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했다. 중공 측에서는 즉각 커다란 쥐덫을 올려 미키가 한 마리 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 타격을 가하려 했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쥐덫의 모욕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의 밈은 전 지구로 급격히 번져 나갔고 그의 변형된 유전자는 디즈니랜드와 인터넷 같은 또 다른 환상의 사이버 공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만인이 싫어하는 쥐를 만인이 좋아하는 쥐로 역전시킨 미키의 놀라운 창조력과 상상력의 문화 유전자 밈을 부러워했다. 쥐를 보면 신발짝부터 벗어 들거나 쥐덫을 놓는 사회는 늘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드디어 미키도 노쇠했는가. 이번 세계 경제위기의 쓰나미 앞에서는 쥐 죽은 듯 소리가 없다. 아니다. 막지 못한 게 아니라 그 주역 노릇을 한 셈이다. 미키를 닮아 가던 미국인들은 탯줄 없는 서브프라임의 판타지 드라마를 통해 부동산과 금융 버블을 일으키게 되고, 그 환상의 거품이 꺼지자 전 세계는 제정신이 들었다. 위기 극복의 탯줄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태아들은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어도 판타지가 아니다.

지식도 기술도 없는 태아들이지만 두 엄지를 꼭 틀어쥐고 태어난다. 자궁벽을 찢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자기가 자란 그 아기집을 성한 그대로 아우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다. 미키마우스의 유전자 밈에 쑥쑥이 같은 한국의 태명을 달아주고 어머니의 몸 안에 있는 태고의 바다와 연결된 탯줄을 이어주기 위해서 한국인 이야기는 다시 계속돼야 한다.

이어령

 

                                                                                                          자귀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