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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오피니언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2> 소금장수 이야기 ①~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2> 소금장수 이야기 ①

[중앙일보]입력 2009.05.05 01:16 / 수정 2009.05.05 10:46

삿갓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나라

“옛날 얘기 한 자루만!” 아이들은 할아버지·할머니에게만 성화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장마철이거나 눈이 많이 내린 겨울밤이면 아이들은 아무에게나 옛날 얘기를 음식 조르듯 한다. 호미처럼 이야기에도 자루가 달려 있는가. 그것을 잡고 상상의 밭고랑을 매면 우렁각시가 나오고 선녀가 내려오고, 도깨비와 옆구리에 비늘 돋친 장수가 나타난다. “옛날 옛적 어느 곳에…”라고 말문만 열리면 불가능은 없다. 따분한 일상(日常)이 하늘 옷을 입고 이야기 나라로 들어간다.

땅에서는 기차가,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나는 시대였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는 콜 사인은 여전히 소금장수였다. 아무리 옹색해도 소금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아무리 쫓겨도 ‘이야깃거리(정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산동네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소금만 아니라 이야깃거리도 한 가마니씩 지고 오는 소금장수들은 멀리 떨어진 바다와 두메산골을 이어주는 신문이요, 라디오요, 영화다.

소금장수가 아니면 누가 이 높은 고개를 넘어오고 으슥한 산길을 지나 오두막 외딴집까지 찾아 오겠는가. 온몸에 바닷바람을 묻히고 걸어오는 소금장수가 아니면 누가 그 환상적인 이야기판을 꾸며주고 떠나겠는가. 더구나 소금장수는 일방적으로 정보를 뿌리는 보통 미디어가 아니다. 그들 자신이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구미호에게 홀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산동네 사람들은 그냥 이야기의 소비자들이 아니었다.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탁월한 이야기꾼들이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소금장수 이야기도 라디오와 TV의 전파를 타고 인터넷의 네트워크와 연결된다. 그것이 ‘전설의 고향’이요, ‘인터넷 괴담’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한국적 패턴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궁금하면 안동시 북후면에 있다는 400년 묵은 노송을 찾아가면 된다. 높이 10여m, 나무둘레 4m가 넘는다는 소나무가 눈을 끌지만 우리 관심을 돋우는 것은 ‘김삿갓 소나무’라는 그 이름과 그에 얽힌 이야기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이곳 신전리 석탑사에 들렀다가 지나는 길에 이 소나무 아래에서 쉬어 갔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그 소나무 가지가 삿갓 모양으로 변했다는 것인데 놀라운 건 옛날 삿갓을 쓴 소금장수들도 이 소나무 밑에서 쉬어 갔다는 이야기다. 김삿갓과 소금장수가 한 소나무 밑에서 쉬어 갔다는 말은 한국의 옛날 얘기 공간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보여주는 것이고, 400년 묵은 그 소나무가 두 삿갓의 비밀을 증언해 주고 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규태 칼럼’에서도 보듯이 소금장수를 김삿갓과는 반대의 극에 존재하는 물질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았다. 옛날 기방(妓房)에서 기생들이 반기는 인기 손님 순위 1위는 소금(鹽) 자루를 메고 오는 염서방으로, 은이나 곡식 자루를 메고 오는 은서방·복서방을 따돌렸다. 그만큼 소금은 곡식이나 돈보다 얻기 어려운 귀물이었다는 것이다. 가뭄에 콩 나듯 나타나는 소금장수는 가장 기다려지고 선망받는 직업이어서 ‘평양감사보다 소금장수’라는 속담이 생겨나고 괜히 히죽거리면 ‘소금장수 사위 보았나’라는 속담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금장수의 삿갓이 김삿갓이 머물던 같은 소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을 모르면 한국인 이야기도, 한국인의 정보공간의 특성도, 오늘날의 인터넷 공간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소금장수와 김삿갓이 동행할 때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장돌뱅이 나귀가 등장하는 중대한 의미도 놓치게 된다. 낮에는 장터에서 물건을 팔고 달밤에는 산길에서 사랑 이야기를 늘어놓는 허생원의 나귀 등에는 장 보따리만이 아닌 이야기 보따리도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끝날 것 같지 않은 장마, 날 샐 줄 모르는 겨울밤에 아이들이 조르던 ‘이야기 한 자루’의 그 자루는 호미자루가 아니라 소금을 담았던 ‘이야기 자루’였던가 보다.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3> 소금장수 이야기 ②

[중앙일보]입력 2009.05.06 03:53 / 수정 2009.05.06 09:38

약장수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소문만 무성히 남기고 사라져버린 약장수
그와 함께 내 이야기의 공간도 좁아들었다

 내 유년시절의 소금장수와 장돌뱅이는 약장수였다. 수상쩍기는 했어도 만병통치약을 가지고 산골 장터까지 나타나는 약장수들은 옛날 소금장수와 다를 게 없었다. 더구나 낡은 바이올린이라 해도 신식 악기를 가지고 다녔기에 약장수 몸에서는 장꾼들과 다른 도회지 냄새가 났다. 그러던 어느 날 황혼 녘에 장꾼들에 섞여 마을로 흘러 들어온 한 약장수가 우리 집 바깥채에서 머물게 됐다. 다른 약장수와는 달리 그가 들고다니는 악기는 바이올린이 아니라 양철북이었다. “아저씨는 빠이롱 없어요?”(시골아이들은 ‘바이올린’을 그렇게 불렀다)라고 묻자 “왜 이 북이 어때서”라고 드럼을 두어 번 치고는 멋쩍게 웃었다. 약장수는 못 보던 상표의 껌을 주기도 하고 임꺽정 같은 이야기도 들려줬지만, 나는 집채만 한 전차가 길 위로 다닌다는 서울을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툇마루에 북을 남겨둔 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어른들은 시국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입에 손을 대고 쉬쉬했지만 어느새 약장수 소문은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는 약장수가 아니라 ‘이인’이라고 했다. 시골에서는 독립지사나 혁명가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이인(異人)’인지 ‘위인(偉人)’의 사투리인지 풀지 못하고 있다. 읍내에서 순사에게 잡혀가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고, 군자금을 구하러 온 독립군이라고 귀띔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동경 유학을 한 사상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가 안경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며, 어느 갑부의 친척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마 그의 금이빨을 보고 한 소리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들로 잠자던 동네는 갑자기 소낙비를 만난 푸성귀 밭처럼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거기에 흥분까지 하게 된 것은 누군가 밀고자가 있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처음엔 면서기와 노름빚을 진 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 무렵 부쩍 싸움이 많아졌던 것을 보면 평소 눈을 흘기며 지내던 사람들을 입방아에 올렸던 것 같다.

그러다 감꽃이 지는 초여름 어느 날 갑자기 울리는 양철북 소리를 듣고 나는 “아저씨다!”라고 외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약장수 북을 치고 있는 것은 동네 개구쟁이들이었다. 그 애들은 약장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나게 치는 양철북 소리가 울릴 때마다 감꽃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고, 그 너머로 “왜 이 북이 어때서”라고 북을 몇 번 두드리다 멋쩍게 웃던 아저씨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어쩌면 가짜 약을 팔러 다니는 사기꾼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이인들의 이야기가 소금처럼 필요했던 것이다.

“눈을 뜨면 그때는 대낮이리라”고 한 시구가 떠오른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이미 그 아이는 식민지의 대낮 속에 있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보가 채마밭에서 가꾼 무·배추라면, 약장수와 소금장수 이야기는 야생의 잡초 사이에서 캐낸 나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읍내에는 이미 일본 집 가게가 있었고 누나와 형은 학교에서 일본말을 배우고 있었으니 애라도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남의 양철북을 치고 다니던 애들에 대한 미움 이상의 분노가, 약장수 아저씨에 대한 연민이나 슬픔 이상의 외로움이 어디에서 오고 있는지를 그때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소금장수는 늘 밤길을 헤매다가 여우에게 속는다. 불빛이 반짝거려도 절대 오두막집 문을 두드리지 마라, 아무리 울음소리가 처량해도 색시(靑孀)의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 늘 내 마음을 졸이고 나서야 소금장수는 번번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망친다. 그 이야기를 입 밖에 내면 약장수 아저씨가 정말 구미호에게 간을 파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30년이 지난 뒤에야 나는 자전적 에세이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에 그때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날부터 김삿갓과 소금장수와 장돌뱅이와 그리고 약장수들은 우리 곁을 떠나고 있었고, 내 이야기의 공간도 점점 좁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다음 회는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입니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4> 소금장수 이야기 ③ 질화로에 재가 식으면

[중앙일보]입력 2009.05.07 02:14 / 수정 2009.05.08 09:25

말 달리던 사냥꾼, 농사꾼으로 변해
짚으로 새끼 꼬고 짚신 짜며
질화로 식을 때까지 이야기로 지새

 낯선 사람이 오면 나는 으레 엄마·아빠의 뒤에 숨었다. 그러면 손님은 “이 녀석 낯가림하네”라고 서운해하고, 어른들은 “괜찮아. 인사드려라” 하고 말씀하신다. 우리 아저씨, 우리 아주머니, 우리 동네분…. 무엇이든 ‘우리’란 말만 붙으면 낯선 것은 사라진다. 그때 나는 ‘우리’라는 말이 ‘울타리’라는 말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정말 낯선 사람이면 울타리 밖으로 내쫓고 그 자리에 소금을 뿌렸으니까. 밤에 오줌을 싸면 아침에 키를 뒤집어 쓰고 동네방네 얻으러 다녀야 하는 것도 바로 그 소금이었다. 그게 설탕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던 시절에도 소금은 항상 불가사의한 힘을 갖고 우리를 따라다녔다.

약장수 아저씨가 일본 순사들에게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난 것도 소금장수 이야기였으며, 일본 순사는 인간의 간을 빼먹는다는 구미호고, 아저씨는 불쌍한 그 소금장수였다. 민족이니, 공동체니 하는 거창한 역사책에서가 아니라 그 뒤에도 내내 소금장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욕망이 없으면 결핍도 없다(want not lack not)”는 말로 구석기시대의 경제학을 찬미한 마셜 샐린즈와 같은 석학이 만약 소금장수 이야기의 원리를 알았더라면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한국인의 그 자족적 삶 속에서도 결핍이란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소금이다. 그것이 먼바다로부터 소금장수가 산골로 들어오게 된 이유며, 또 산골 사람들이 낯선 떠돌이를 반갑게 맞이해야만 했던 이유다. 그리고 그들은 한 울타리를 만들어 이계(異界)의 낯선 요괴들에게 소금을 뿌렸다. 그것이 선녀 얘기든, 도깨비 얘기든 옛날이야기들은 소금을 구하고 소금을 뿌리는 동일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핍이 있다. 나물을 익혀 먹으려고 할 때의 욕망인 그 ‘불’이다. 나물을 무쳐 먹고, 삭혀 먹고, 익혀 먹었던 한국인들은 화롯불에 둘러앉는다. 소금장수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한 노변정담(爐邊情談)이다.

감히 정지용의 시 ‘향수’를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히리야….” 이 시 구절 속에는 채집시대에서 농경시대로 바뀐 한국인 전체의 아버지 모습이 담겨 있다. 팔베개가 ‘짚벼게’로 바뀐 것이 그것이다. 한국 농경문화를 상징하는 짚으로 새끼를 꼬며 짚신을 짜면서 질화로에 재가 식을 때까지 이야기로 지새우는 사람들이다. 질화로 옆에서 잠자는 농부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아니다. 도끼를 든 구석기시대의 아버지며 대초원에서 말을 달리며 사슴을 잡던 수렵민, 그것도 말 위에서 90도로 돌아 등 뒤의 사슴을 쏘는 고구려 벽화의 그 사냥꾼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작물을 거둔 빈 밭에 부는 밤바람 소리를 들으면 평원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를 연상하는 사람들이다. ‘뷘’ ‘밭’ ‘밤’ ‘바람’의 ‘ㅂ’음이 네 개나 겹쳐 두운(頭韻)을 이루고 있는 그 아름다운 시 구절의 ‘ㅂ’음은 이미 앞 글에서 지적한 대로 아버지와 불을 상징하는 배꼽말의 유아어로 되어 있다. 어머니와 물을 상징하는 ‘ㅁ’과 대응되는 그 ‘ㅂ’음은 말이 되고, 활이 되고, 벌판에서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이 되었다가 이윽고 질화로의 불이 되고, 그 불은 재가 된다.

지용 자신이 그 시에서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이라고 말한다. ‘파아란 하늘빛’을 ‘초록빛 넓은 초원’으로 고치면 금세 그 장면은 고구려 벽화의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벌판에 불을 피워놓고 사슴 고기를 먹으며 이야기하던 그 이야기꾼들은 어느새 질화로에 밤이나 콩을 구워 먹으면서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농사꾼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말과 사슴이 뛰던 초원은 황소가 게으르게 우는 실개천이 흐르는 들판이 되고, 나물 캐던 여인네들은 벼 이삭을 줍는 아내와 누이로 그려진다.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을 줍던 곳….” 같은 곡식이라도 이삭은 흘린 것, 버려진 것으로 소유자가 없다. 룻기에 쓰인 것처럼 줍는 사람이 임자다. 옛날의 그 나물이 아닌가. 농경시대에는 장돌뱅이, 산업시대에는 약장수가 소금장수를 대신해도 한국인의 옛날이야기는 똑같지 않은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구들이 식으면 한국이야기도 식는다’입니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5> 소금장수 이야기 ④

[중앙일보]입력 2009.05.08 02:38 / 수정 2009.05.11 09:09

구들 식으면 한국의 이야기도 식는다

 ‘화롯불 이야기’가 한국인의 것이라고 하면 발끈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공자·석가모니를 한국인이라고 왜곡했다 해서 우리를 역사의 좀도둑으로 모는 중국·대만의 네티즌들이 아닌가. 그런 소리야말로 왜곡 전달된 것이니 맞서 싸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노변한담(爐邊閑談)’이란 사자숙어는 엄연히 중국에서 온 한자말이다. 더구나 일본의 ‘고타쓰’, 서양의 ‘벽난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세계 대공황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매주 대국민 라디오 방송을 해서 유명해진 프로그램 이름 역시 ‘노변담화(fireside chats)’였다. 그것이 최근 금융위기의 여파로 러시아에서 원유가가 급락하면서 수십만의 실업자들이 생겨나자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TV 앞에 나타나 그 ‘노변담화’를 재생하고 있다.

그런데 왜 ‘화롯불 이야기’를 한국 고유의 문화유전자로 고집하려 드는가. 그 이유를 알려면 앤드루 토머스가 『우리가 처음이 아니라네』(원제는 ‘We are not the first’)라는 책을 어째서 쓰게 됐는지, 그리고 왜 오늘의 센트럴 히팅 시스템이 서구의 발명품이 아니라 수천 년 전 한국의 온돌이라고 못 박아야 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러면 당연히 지금 세계의 화두가 된 에너지 재활용의 원조가 한국의 화롯불이라는 것에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온돌의 구들을 덥히기 위해 불을 때고 난 뒤 타고 남은 그 불똥과 재를 다시 주워 담아 재활용한 것이 다름 아닌 한국의 화롯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한국을 소개하는 글에서 그 화롯불을 ‘불들의 납골당(納骨堂)’이라고 불렀다. 에너지의 재활용 단계를 넘어 “질화로에 재가 식으면”이라는 말은 한국의 소금장수 이야기와 그 정서를 담은 문화 유전자로 남게 된 것이다.

사학자들은 『후한서(後漢書)』를 인용해 한국의 온돌문화가 고구려 때 생긴 것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보다 오래된 북방지역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도 온돌 모양의 구조와 구들이 발굴되고 있다. 누가 뭐래도 온돌문화는 추운 북쪽에서 살던 한국의 조상이 남쪽으로 가지고 내려온 문화유전자의 하나다. 지금까지 내 글을 읽은 사람은 생물이 바다에서 처음 육지로 올라올 때 자기 몸 안에 바닷물과 그 생명 유지 장치를 그대로 가지고 왔으며, 그것이 우리를 키운 어머니 배 안의 양수였다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자궁 속에만 태고의 바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피와 뼈 속에도 바다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소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이 글을 탄생 이전의 태아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해 소금장수의 이야기로 유아 시절을 마무리 짓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낯선 외지로 떠날 때 우리는 여행 가방을 들고 나온다. 평소 집에서 생활하던 물건들을 챙겨 배낭에 담아 짊어진다. 어디를 가도 집에서 살던 것처럼 그 환경을 운반해 가는 것이다. 생물적 유전자가 바다를 떠날 때 바닷물을 가져왔듯이 북방의 겨울 나라를 떠날 때 우리가 가지고 온 것이 바로 ‘온돌’이라는 구들장이었고, 그 구들을 덥히던 아궁이의 불과 재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 질화로의 불이다. 로켓을 타고 외계로 가는 우주 비행사의 캡슐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정지용의 ‘향수’의 근원점인 화로를 에워싸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는 지붕 밑 정경이다.

지루한 겨울이 가고 여름이 오면 화롯가 이야기는 돗자리 위에 모여 앉은 마루방 이야기가 된다. 높은 서까래가 그대로 보이는 바람의 집 원두막 같은 남방의 주거공간이다. 그렇구나. 북에서 내려온 온돌이 남에서 올라온 마루방과 만나 삼세동당(三世同堂)의 초가삼간을 만든 것이 한국인의 집이구나. 다 쓰러져 가는 움막 같은 집일망정 남과 북의 주거 양식을 동시에 한 지붕 안에 담은 주거문화가 어디에 있는지 애들 말대로 나와 보라고 하라. 구들장이 식지 않는 한, 마루방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한, 그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남북을 통일한 것이다. 겨울에는 화롯가에서, 여름에는 돗자리 펴놓은 마루방 위에서 오순도순 둘러앉아 소금장수 이야기를 한다. 싸움하지 말라. 남북을 통일한 기막힌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아직 이 땅에 살아있다.

이어령 본사 고문


※ 다음 회는 눈이 네 개 달린 ‘창힐’을 보다입니다.

※ 다음 회는 ‘구들이 식으면 한국이야기도 식는다’입니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6> 소금장수 이야기⑤

[중앙일보]입력 2009.05.11 03:46 / 수정 2009.05.11 09:09

한자 쓰면서 네 눈 달린 ‘창힐’과 만나다
한자 만들어 어둠 밝힌 창힐 눈은 네 개라는데
한글 만든 세종대왕의 눈은 몇이라고 해야 하나

 이야기책을 읽어주시던 평소의 어머니와는 달랐다. 방바닥에 벼루와 먹, 그리고 신문지를 깔아놓으시고는 “너도 이젠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글씨 연습도 할 겸 입춘방을 써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입춘방이 뭔데요?”라는 말에 “그래, 입춘은 한문으로 ‘봄이 온다’는 뜻이지. 그리고 방은 말이야, 이런 방이 아니고 글을 써 붙이는 종이를 ‘방’이라고 하는 거란다”라고 말씀하셨다.

밖에는 아직 고드름이 그대로인데 왜 봄이 온다고 야단인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신문지 위에 연필로 글씨본을 만들어 놓으시고 따라 쓰라고 하신다. “설 립(立), 봄 춘(春), 큰 대(大), 길할 길(吉)….” 큰 소리로 한 자 한 자 읽으시면서 또박또박 내 손을 잡고 써내려 가신다. 정성껏 이렇게 써서 기둥이나 대문에 붙이면 귀신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일년 내내 좋은 일만 생긴단다. 옛날얘기를 많이 들어서 귀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어도 처음 쓰는 붓글씨에 정신이 쏠렸다.

종이 위에 설 ‘립(立)’자의 꼭짓점을 찍는다. 먹물이 까맣게 번진다. 그 순간 한국인들의 운명을 가르는 문자의 세계, 이천 년도 넘게 지배해온 한자의 그 역사 속으로 첫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것을 그때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새 옷에 먹물을 묻히면서 백지장 위에 ‘입춘대길’ 넉 자를 겨우 완성시키자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셨다. ‘옛날 같았으면 지금쯤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을 다 떼고 ‘동몽선습’을 읽는 신동(神童)이 됐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크면 장원급제해 어사화를 모자에 달고 금의환향했을 것’이라고도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런 환상은 아버지가 방 안에 들어오시자마자 곧 깨지고 만다.

“처음 쓴 글씬데 보세요. 조금만 더 연습하면 대문에다 붙여도 되겠지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시고도 아버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입춘방이란 이렇게 쓰는 게 아녀.” 어머니 눈을 피하시고는 입춘방을 뒤집어 비춰 보신다. “봐라. 거울에 대고 비춰 봐도 이 네 글자는 똑같아 보여야 한다. 좌우가 다르면 안 되는 거다.” 원래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네 글자는 좌우가 모두 대칭형으로 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재수가 좋은 글자가 된 것이란다. 그래서 귀신이 들어와 뒤에서 봐도 똑같은 글씨로 보이니까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들어온 문으로 다시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또 한자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새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처음 만든 사람은 눈이 네 개나 달려 있었다고 한다. 황제(黃帝)의 사관이었던 ‘창힐(蒼頡)의 전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글자를 다 만들고 났더니 하늘에서는 좁쌀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또 어둠 속에서는 귀신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창힐이 ‘누가 울고 있느냐’고 묻자 귀신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둠을 지배하는 귀신이오. 그런데 당신이 글자를 만들어 빛이 환한 세상을 만들어 놨으니 내 있을 곳을 잃어 슬퍼서 우는 거요.”

나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서야 한자가 귀신을 이긴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한자를 만든 사람보다 그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아버지가 더 존경스러웠다. 칭찬 한마디 없는 아버지가 섭섭했지만 그것은 분명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과는 또 다른 아버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한참 뒤에야 안 것이지만 ‘광화문’이라고 이름을 지으신 세종대왕께서도 창힐의 그 빛으로 세상을 밝혀(光化) 백성들을 귀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창힐의 눈이 네 개였다면,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의 눈은 여섯 개쯤 되었을 것이다. 한자 속에서 나의 유년도, 소금장수 이야기도 귀신의 울음소리처럼 끝나가고 있었다. 정말 학교 갈 나이가 되었나 보다.

입춘대길, 입춘대길, 입춘대길…. 아버지 말씀을 듣고 귀신도 몰라보게 다시 대칭형으로 고쳐 쓴 입춘방 하나가 뜰 아랫방 기둥에 붙여졌다. 여인네들은 모두 다 칭찬했지만 웬일로 남자들은 내 글씨를 비웃었다. 특히 몇 살 터울밖에 안 되는 형이 놀려댔다. “지렁이다 지렁이. 지렁이가 기어간다!” 내가 약이 올라 “그래, 지렁이다. 어쩔래. 봄이 오니까 지렁이가 나오지.” 형제가 싸우는데도 이날만은 온 식구가 말리지 않고 그냥 웃는다. 그래, 묵향(墨香) 같은 향기로운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입춘방을 쓰니 정말 봄이 왔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26회로 탄생의 비밀로 본 한국인 이야기를 마칩니다.

27회 ‘시노마루 교실과 풍금소리’부터 일제 식민지 교육으로 본 한국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명자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