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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오피니언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7> 달래 마늘의 향기 ①~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7> 달래 마늘의 향기 ①

[중앙일보]입력 2009.04.28 02:18 / 수정 2009.05.04 10:12

‘나들이’ 길에서부터 시작되는 한국인 삶

 “병아리 떼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들은 어미 닭을 좇아서 바깥세상으로 나간다. 우리도 그랬다. 한국인의 삶은 노란 햇병아리들처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 바깥세상과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나들이’라고 불렀다. 이 말 역시 나가고 들어오는 반대어가 하나로 융합된, 한국 아니면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신비한 토박이 말이다.

‘일어서다’와 ‘나가다’의 두 동사가 합쳐서 ‘일어나다’가 되고 ‘들어오다’와 ‘눕다’가 결합하여 ‘드러눕다’라는 말이 됐는데, 그것을 모두 합쳐 하나의 말로 만든 것이 바로 ‘나들이’라는 말이다.

나의 삶도 예외 없이 그랬다. 어머니는 나의 작은 손을 잡으신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몸에서는 레몬 파파야나 박하분 냄새가 났다. 나들이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보리밭 사이 길과 산모롱이 마차 길, 신작로 이렇게 작은 길에서 점점 나들이 길은 넓어진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다 주신 작은 가죽 구두를 신고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면 이상한 소리가 난다. 그것은 가죽구두가 구겨지는 소리가 아니라 눈부신 바깥 공간으로 나가는 내 작은 심장이 뛰는 소리다. 길가의 뱀풀을 본 것도 땅개비가 뛰는 것도, 하늘에 높이 떠서 원을 그리는 솔개도 모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 본 풍경들이다.

역시 나들이의 절정은 십 리쯤 떨어진 외갓집을 찾아갈 때다. 그곳으로 가려면 장승이 서 있는 서낭당 고개를 넘어야 한다. 설화산 뒤쪽에 자리한 작은 그 골짜기에는 유난히 대추나무와 감나무가 많았고 그 나무가 우거진 곳에 외가가 있었다.

긴 돌담을 돌아 솟을대문과 십장생이 그려진 어머니의 장롱 속 같은 안채로 들어가면 정말 믿기지 않도록 늙으신 외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미숫가루도 외가에서 타 주는 맛은 달랐다. 사랑채를 지나 일각대문 너머에는 인기척이 없는 남새밭이 있었고 한 구석 빈터에는 양 모양을 새긴 이상한 돌들이 널려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무덤에 쓸 석물이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의 어머니가 외할머니라는 것, 그리고 외할머니만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외갓집 사람들에게는 할아버지도 삼촌도 사촌누이와 동생도 모두 다 ‘외’자가 붙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외갓집은 시간도 달랐다. 벽시계의 모양이 그렇고 시간마다 치는 종소리도 다른 소리를 냈다. 종소리는 깊은 우물물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고 문자판에는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십이지의 동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외갓집 시간은 기왓골의 이끼처럼 훨씬 오래된 시간이라 이곳에 오면 어머니도 나처럼 작은 신발을 신은 아이가 되는 것 같았다.

떠날 때가 되면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우신다. 외할머니는 긴 돌담을 돌아 서낭당 고개를 넘어갈 때까지 서 계시고 뒤돌아볼 때마다 빨리 가라고 손짓을 하신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이별한다.

늦은 날에는 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그림책에서 본 것 같은 큰 달이 뜨고 나들이로 나의 장딴지에는 조금 알이 밴다. 키도 한 치가 더 자랐으리라.

나들이에서는 떠나는 것과 돌아오는 것, 만나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다 같다. 번쩍이는 비늘을 세우고 먼바다로 헤엄쳐 나갔다가 다시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는 연어 떼처럼 외갓집 나들이는 가는 것이 곧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가는 나들이는 달랐다. 그것은 어른들이 기침을 하며 가래침을 뱉는 사랑채의 연장인 아버지의 공간이다. 온주 아문과 향교와 앞으로 혼자서 다니게 될 학교가 있는 구 읍내의 청당이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맨 첫 장에 나오는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고갯길의 의미를 알 것이다. 차를 비킬 줄 모르는 시골 노부부가 지프의 경적 소리에 놀라 오리들처럼 앞만 보고 달리던 모습, 위급한 상황에서도 서로 놓치지 않으려고 꼭 움켜잡은 손, 천 년을 그렇게 쫓기며 살아온 한국인의 뒷모습을 보았다고 한, 바로 그 고갯길이다.

외갓집이 끝없이 과거로 향해 가는 나들이 길의 종착지였다면, 지금은 서낭당 부적 대신 ‘주의 ! 광케이블 매몰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청당이 고개는 한없이 미래로 뻗어 있는 역 철길이었다.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8> 달래 마늘의 향기 ②

[중앙일보]입력 2009.04.29 01:58 / 수정 2009.05.04 10:12

달래 마늘처럼 피어오른 채집시대의 노래

 중국 사람은 네 다리 달린 것이면 책상만 빼놓고 무엇이든 요리할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은 이파리와 줄기 그리고 뿌리가 달려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나물로 무쳐 먹을 수 있는 요리사다. 그냥 먹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제상에 오르면 뿌리 나물은 과거를 나타내고 줄기 나물은 현세, 이파리 나물은 내세의 손자들 세상을 뜻하는 삼세(三世)의 의미가 된다.

서양에서는 독초로 분류되는 고사리까지도 한국에 오면 명품 산나물이 되고, 콩도 시루에 물을 주어 키우면 훌륭한 콩나물이 된다. 그래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나물’ 자가 붙은 낱말을 찾아보면 무려 273개나 등장한다. 그중에는 못 먹는 독초도 섞여 있지만 이만하면 우리를 ‘나물 민족’이라고 해도 시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산과 들에서 캐 오는 나물들은 사람이 가꾼 재배 식물이 아니다. 야생의 자연 그대로의 식물로 우리가 지금도 나물을 즐겨 먹는다는 것은 몇만 년 전 농사를 짓기 이전의 채집 시대의 입맛과 그 추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누이의 나물 바구니를 잡고 봄나들이를 갔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우리 민족의 기원인 단군신화 때의 광경을 본 것이나 다름없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들판을 울긋불긋한 원색 치마 저고리로 수놓은 누이들이야말로 다름 아닌 웅녀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바깥출입이 부자유했던 누이들에게 있어 겨우내 갇혀 있던 그 골방은 바로 그 곰의 어두운 동굴이 아니었겠는가. 눈부신 봄 들판으로 뛰쳐나온 우리 아리따운 누이들이 웅녀가 아니라면 대체 어느 나라의 여인들을 그렇게 부를 수 있겠는가.

정말이다. 누이의 몸과 바구니에서는 온통 쑥과 달래 마늘의 향내가 났다. 그리고 누님의 달래 마늘 향내가 바로 밥상의 냄새가 되는 그것이 나물 나라에 태어난 한국인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왜 마늘을 달래 마늘이라고 하는가?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인터넷 지식인을 검색해 보라고 권하면 된다. 사람이 재배한 그냥 마늘이 아니라 누이가 캐온 나물 바구니 속 쑥과 함께 들어 있는 야생의 달래 마늘이라야 하늘이 주신 것이다. 그래야 짝이 어울린다. 쓴 것을 좋아하는 쑥, 씀바귀 그리고 매운 것을 좋아하는 달래 마늘, 이 야생의 나물 맛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다. 과연 유사의 그 대목에도 곰이 먹은 것은 애(艾)와 산(蒜)이라고 되어 있는데, 자전을 찾아보면 애는 쑥이라 되어 있고, 산은 달래, 작은 마늘, 냄새 나는 나물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동물의 상태에 있던 인간들이 돌멩이를 들어 도구로 사용하는 순간 그 돌은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돌도끼라는 문화의 의미로 탄생한다. 그것처럼 야생의 풀을 뜯어 나물로 무치는 순간 그 야생의 식물은 문화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때가 곰이 달래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는 순간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날것으로 먹는 생식은 ‘자연’을 의미하고, 불로 익혀 먹는 것은 ‘문명(문화)’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나물은 무치면 생식이요, 삭히면 발효식이요, 데치면 화식의 문명이 된다. 어찌 레비스트로스가 한국의 무치고 삭히고 데치는 나물 문화를 알았겠는가.

마늘이냐 달래 마늘이냐. 나는 이 논쟁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 단군신화의 곰이 그러했듯이 나물이 있기에 우리는 한국인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입춘을 맞이하는 오훈채 문화가 있었기에 “숙아! 달래마늘같이 쬐그만 숙아”라고 오늘의 시인은 노래 부를 수 있었다. 한마디로 나물이 있었기에 오늘의 비빔밥 문화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물 바구니에 매달려 봄 들판으로 나들이를 갈 수 있었기에 나는 줄곧 구석기 시대의 채집문화에서부터 농경 시대와 산업 시대, 그리고 정보문명 시대의 인류의 전 문명 과정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석학 토인비와 드러커, 『제3의 물결』에서 채집 시대를 제외하고 문명을 논한 토플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나물 맛을 알고 문명을 논했느냐? 그래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이 땅에 태어났으면서도 가난의 산물로 주신 나물 캐며 살아온 문화에 감사하고 있다.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9> 달래 마늘의 향기 ③

[중앙일보]입력 2009.04.30 02:15 / 수정 2009.05.04 10:12

나물 바구니 속의 격물치지 사상

 어린애들의 울음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아직 말을 모르는 아이에게는 ‘에비’란 말이 있었다. 누구도 에비를 본 적은 없지만 그것은 철없는 애의 울음을 멈추게 할 만한 위력이 있었다. 호환(虎患)이 많았던 시절에는 ‘호랑이’가 에비였고, 엄격한 가부장 시대에는 ‘아버지’가 에비였다. 무서울 것이 없는 요즘 아이들에겐 에비나 애비 대신 ‘곶감’이겠지만(호랑이도 무서워 도망치게 했다는) 내가 자라던 일제 때만 해도 단연 ‘순사’란 말이었다. 나물 캐러 가는 누이를 따라가려고 떼를 쓰던 내 기(氣)를 무참히 꺾어 버린 것도 그 공포의 에비 “순사 온다”란 말이었다. 순사는 언제나 까만 옷에 가죽 차양 달린 모자를 쓰고 사베르(‘칼’을 뜻하는 프랑스 말 ‘사브르’의 일본식 발음) 소리를 내며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하지만 대갓집 막내아들의 기가 그 정도로 꺾인 것은 아니다. “캐지 마. 그것은 자운영(紫雲英)이란 말야. 그걸 캐면 간난이처럼 경찰서에 잡혀 가.” 다급한 누나의 소리 때문이었다. 녹비를 권장해 농작물 증산을 독려하던 제국주의 관리들은 자운영의 채취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고, 나는 실제로 순사가 간난이를 잡아가는 광경을 보고 떤 적이 있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아니라 이미 잡초와 나물 한 포기에도 일본 관헌의 권력이 배어 있었다.

이 들판은 화담 서경덕(1489~1546) 선생이 나물을 캐다 종달새를 보고 자연의 기(氣) 이론을 발견한 곳이 아닌가. 그렇다. 융희 3년에 나온 초등 수신(修身)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 태어난 화담 선생은 매일같이 나물을 캐러 다녔다는 것이다. 그런데 늘 바구니를 채우지 못하고 늦게 집에 돌아오는 바람에 부모님으로부터 추궁을 받고 이런 말을 한다. “들판에 새들이 있어 보았는데 하루는 일촌, 이 일에는 이촌, 삼 일에는 삼촌으로 점차 나는 높이가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보고 그 이치를 알려고 궁리하느라 나물 바구니를 다 채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과서에는 그 새가 종달새였다는 것과 그것들이 점점 높이 날아다닌 것은 봄의 땅기운(地氣)이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의 반응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다만 이야기의 제목에 격물(格物)이라는 말만 달아 놓았다. 이야기 속의 부모님도, 구한말의 선생님들도 서경덕 선생의 나물 바구니에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위대한 사상이 들어 있었음을 안 것이다. 요즘 가난한 부모였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새가 밥 먹여 주느냐. 나물 캐다 말고 왜 한눈을 팔아. 높이 날면 어떻고 주저앉으면 어때?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그런데 상관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앎(知)’은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는 데서 나온다는 격물치지의 사상이 그것이고, 후일 개성삼절로 숭앙받는 대학자, 그것도 독창적인 한국 지식인을 탄생시킨 힘이었다. 주자학에서 말하는 것이 다르고 양명학에서 풀이하는 것이 달라 사람마다 구구한 설을 늘어놓은 말이지만 화담 선생의 나물 바구니로 풀면 아주 쉽게 뚫린다. 나물 캐다 말고 한눈을 판 것을 성경 구절을 활용해 표현하자면 “사람은 나물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앎(知)을 통해 살아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종달새를 자세히 관찰하는 게 격물(格物)이라는 것이고, 그것으로 점점 높이 나는 종달새의 이치를 알아내려고 궁리하는 게 바로 치지(致知)다. 그래서 뉴턴은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지만, 화담 선생은 거꾸로 종달새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자연의 기(氣)에 대한 변화를 발견한 것이다.

나물 캐던 서경덕처럼 아이들은 누구나 자연의 사물을 호기심으로 바라본다. “엄마 저게 뭐야”라고 물을 때는 격물의 단계이고, 그것이 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새는 왜 울어”라고 묻는 것이 치지의 단계다. 이렇게 자연을 관찰해 궁극의 지(知)에 이르는 격물치지. 의리(義理) 아닌 수리(數理)로 세상 일을 풀어 가려던 서화담파의 기(물질) 중심 이론이 수신(도덕)책이 아니라 과학책에 수록됐더라면, 사람들이 황진이와 얽힌 야담책에만 정신을 팔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무렵 그와 거의 동시대인이었던 콜럼버스·코페르니쿠스·다빈치의 꿈을 꾸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꿈은 슬프게도 에비의 꿈이었다. 밤마다 자운영이 빨갛게 피어 있는 들판 저편에서 까만 옷을 입고 일본 순사가 쩔그럭쩔그럭 칼자루의 쇳소리를 울리며 나를 잡으러 오는, 식은땀 나는 꿈이었다.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0> 달래 마늘의 향기 ④

[중앙일보]입력 2009.05.01 02:37 / 수정 2009.05.04 10:11

바람과 물로 지은 강변의 집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노래 30자엔
우리가 살고 싶은 욕망의 공간 다 있어

 사주는 태어난 날의 시까지 따지면서 태어난 장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인에게 사주보다 더 무서운 것이 풍수(風水)인 까닭이다. 사주는 바꿀 수 없지만 장소는 옮길 수 있고, 사주는 살아있을 때만의 일이지만 풍수는 죽어서도 후손에 영향을 미친다. 풍수사상이 아니라도 살아있는 것은 모두 거처하는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여우는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사자성어가 생긴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캐나다의 중국계 인문지리학자 이후퉝은 ‘토포필리아’라는 말을 만들어 학계에 큰 관심을 일으켰다. 토포필리아는 희랍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Topo)’와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를 합쳐서 만든 조어로 ‘장소애(場所愛)’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자연환경과 인간존재를 이어주는 정서적 관계를 나타낸 이론인데 풍수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도 서양에서는 그 말을 영국 시인 W H 오든이 먼저 썼다느니, 또 누구는 ‘통섭’으로 유명해진 에드먼드 O 윌슨의 ‘바이오필리아(生命愛)’가 토포필리아를 원용한 것이라느니 꽤나 시끄럽다.

하지만 한국의 시인 김소월은 그들보다 반세기도 전에 몇 줄의 시로 토포필리아와 바이오필리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후렴을 빼면 다 합쳐도 30자밖에 안 되는 시지만 그 속에는 한국인이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의 공간이 숨은그림찾기처럼 감추어져 있다.

“강변 살자”고 한 자연공간은 직접적으로 표현돼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전의 “엄마야 누나야”는 그게 “아빠야 형님아”와 대립하는 여성 공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과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에서 우리는 앞뜰과 뒷문의 전후 공간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앞 공간에는 반짝이는 빛의 시각공간이 있고 뒷문의 후방공간에는 갈잎의 노래가 들려오는 청각공간이 대칭을 이룬다. 금모래는 무기물의 입자요, 갈잎은 황금색과 대조를 이루는 초록색 유기물의 평면성이다. 빛과 바람소리로 진동하는 이 방향, 감각, 물질로 이루어진 공간은 뜰 앞에 흐르는 강물과 뒷문 밖을 에워싼 산의 전체적 경관을 보여준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는, 어디에서 많이 보고 들어본 경관 같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 먼 조상에서부터 오늘의 부동산 업자까지 목마르게 추구해온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집터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고향에 살고 있는 사람도, 타향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지용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노래 부른 그 공간이다. 그게 기와집인지, 초가집인지, 하얀 집인지, 푸른 집인지는 몰라도 산과 강 사이의 경계에 있는 집터의 경관만은 산수화처럼 분명하게 떠오른다.

그것이 달래 마늘의 향내가 나는 한국인의 ‘토포필리아’다. 우리가 어릴 적에 “엄마야 누나야”라고 부르던 여성 공간이다. 우리가 ‘모국(母國)’이라고 부르는 곳이지만 ‘디아스포라(실향민)’로서의 한국인에게는 다만 가슴속에만 존재하는 ‘부재의 공간’이다. “아빠야 형님아”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현존하는 그 장소는 적어도 그 아이가 살고 싶다고 노래한 그 강변은 아닐 것이다. 반짝이는 금모래가 아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아니다. 아스팔트의 길에서 위급한 구급차의 경보음처럼 외치며 경쟁하고 투쟁하고 땀 흘리면서 살아가는 남들(他者)의 공간, 디아스포라의 이국땅이다.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고/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노래를 시키면 나는 으레 이 노래를 불렀다. 손뼉을 치면서도 왠지 쓸쓸한 표정을 짓는 손님들 앞에서, 한국인들 앞에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고 노래한 그 시 속의 아이처럼, 나는 가사의 뜻도 모르면서 구성지게, 아주 구성지게 노래를 부른다. 그래야 칭찬을 많이 받는다.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1> 달래 마늘의 향기 ⑤

[중앙일보]입력 2009.05.04 02:07 / 수정 2009.05.05 10:47

우리 아버지들은 어디로 갔나

 “애 아빠 어디 가셨대유 !” 어렸을 때 너무나 많이 들었던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버지들은 지금 출타 중이시다. 충청도 사투리로 길게 늘어뜨린 여인네들의 이 말의 여운 속에는 동정과 원망과 자탄과 그리고 회한의 모든 감정이 들어 있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와 같은 미당의 ‘자화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저마다의 사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사내와 시국을 원망하며 아낙네들이 모여 울고 짜는 일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인정 많은 마을, 한(恨) 공동체의 일상적 라이브 쇼라고 생각하면 된다. 주역이 된 아기 엄마가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며 “이루 말로는 다 못혀”라고 목메어 대사를 잇지 못하면 청중들은 “사람 사는 일 다 그런 겨. 우리라고 속 편해서 사는 거 아녀”라고 추임새를 보낸다. 그러는 사이 뒷마당의 앵두는 빨갛게 익어가고 맨드라미꽃은 닭 벼슬처럼 홰를 치며 피어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텅 빈 집에서 혼자서 큰다. 이런 때 부르는 노래가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어머니는 건넛마을 아저씨댁에/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이다. 아파트의 ‘빈 둥지 증후군’은 나귀 타고 다니던 꽤 먼 시절부터의 내력이었던 것 같다. 나귀를 타고 가는 거리면 결코 가까운 장터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한 사흘 장 본다는 핑계로 집을 비울 수도 있다. 그런데 또 어머니는 왜 이웃마을도 아닌 건넛마을로 그것도 아주머니·할머니댁이 아닌 아저씨댁으로 간 것일까. 이 대목이 수상해서인지 요즘 부르는 노랫말에는 ‘어머니’가 ‘할머니’로, ‘담배’가 ‘달래’로 바뀐 것 같다.

근거 없는 억측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아이들이 빈집에서 어른들이 없는 사이에 담배와 고추를 먹고 맴맴하는 고통이다. 이러한 빈 둥지 현상은 식민지의 불행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같은 시기의 일본의 동요 ‘금붕어를 죽이는 아이’의 노래는 그보다 몇 배나 잔인하고 어둡다.

“엄마야 엄마야 어디로 갔나/빨간 금붕어하고 놀아야지 / 엄마는 왜 안 오나 쓸쓸하구나 /금붕어 한 마리를 찔러 죽인다.” 엄마를 기다리다 쓸쓸하고 화나고 배가 고파 아이는 한 마리 두 마리 금붕어를 죽여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맴맴이 아니라 뻔득뻔득이라고 외친다. “눈물이 진다 / 해가 진다/ 빨간 금붕어도 죽고 죽는다// 엄마 나 무서워/눈이 뻔득여 /뻔득뻔득 금붕어의 눈이 뻔득여 ”

하지만 빈집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며 고추 먹고 우는 아이, 금붕어를 죽이며 공포에 떠는 아이는 예외다. 문제는 “아빠야 아빠야 어디로 갔나”라고 찾는 애들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현상이다. 인간의 가정에는 동물사회에는 볼 수 없는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자의 지아비 ‘부(父)’는 두 손에 도끼(斧)를 들고 있는 현상을 본 뜬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술 마시고 놀음하고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처럼 허황한 꿈을 따라 떠도는 사람들의 손에는 도끼가 없다. 한자의 경우만이 아니라 영어로 읽어도 역사는 남자들의 것이다. 역사를 뜻하는 영어의 ‘History’를 파자(破字) 하면 ‘His Story’가 된다. 그래서 여성사학자들은 ‘Herstory’라고 적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한 나라의 역사가 남성들의 도끼(전쟁무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 그것처럼 개인 가족사인 my story도 아버지의 도끼에 의해 좌우된다.

나라를 잃었다는 것은 우리 아버지들이 도끼를 잃었다는 뜻이다. 구석기의 수렵채집 시대부터 사용해 오던 돌도끼, 그 부권을 잃은 히스토리요, 마이스토리다.

외갓집이든 달래를 캐는 들판이든 아이들이 부르는 “엄마야 누나야”의 모성공간은 수많은 역사의 높은 파도에도 한국 아이들의 정체성을 붙잡는 든든한 닻이었지만, 부성공간(父性空間)의 도낏자루는 부러지고 녹슬고 이가 빠져 더는 휘두를 수 없게 된 것이다. 1939년 내 나이 일곱 살, 2차대전이 일어나고 중일 전면전으로 일손이 부족했던 일본은 국민 징용령을 공포한다. 조선인 강제 동원의 징용으로 우리 아버지들이 일본 탄광으로, 공장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들은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애 아빠 어디 가셨대유.”

이어령

 

산수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