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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오피니언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7> 히노마루 교실과 풍금소리 ①~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한 달

[중앙일보]입력 2009.05.12 02:57 / 수정 2009.05.12 05:32

“히스토리와 마이 스토리 합친 얘기 아하! 그렇구나 무릎치게 하고 싶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태고의 바다를 만났습니다. 나물 바구니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 사상을 깨달았고,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에 숨은그림찾기처럼 간직된 한국인의 욕망의 공간을 읽었습니다. 지난달 6일 연재를 시작한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가 11일 26회로 ‘첫 장’을 마쳤습니다. 이제 겨우 문턱 앞에 서니 앞으로 펼쳐질 한국인 이야기가 더 궁금해집니다. 희수(喜壽·77세)의 나이에도 매일 원고를 10장씩 쓰고 있는 그를 7일 오후 본사 14층 사무실에서 2시간 동안 인터뷰했습니다.

■ 이어령은 누구

1934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이화여대 문리대 교수. 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등 역임. 현재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이자 본사 상임고문. 대표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숨쉬고 부르짖는 생명의 역사 쓰고 싶어

#1. 나는 평생 고독한 사람


-얼마 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고, 저널리스트 오효진씨는 ‘5000년 역사상 이렇게 괴물 같은 창조적 인물은 없었다’고 했는데, 천재라는 칭송을 들으면 기분이 어떠십니까.

“고맙고 과분합니다. 하지만 제가 받고 싶었던 것은 찬사보다는 감동이었지요. 군대가 사기를 먹고 산다고 하듯이 글 쓰는 사람은 감동을 먹고 삽니다. 저에게 독자란 함께 공감을 나누는 동반자지요. ‘감동’을 한자로 써보세요. 사람은 느껴야 (感) 움직(動)입니다. 그 에너지가 부족해서 저는 언제나 배가 고프고 그래서 또 이렇게 글을 씁니다.

-한 인터뷰에서 평생 왕따로 살았다고 고백하셨죠. 또 ‘이어령을 존경하는 사람은 많지만 좋아하는 이는 드물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한평생 고독하신 겁니까.

“맞아요. 나는 친구나 동료도 별로 없고 사교성이 부족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외로웠거든. 여섯 살 때쯤 아무도 없는 한여름에 햇빛이 쏟아지는 보리밭에서 혼자 굴렁쇠를 굴리고 가다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어요. 나중에 그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를 경험한 것인 줄 알게 됐죠.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혼자니까, 또 아무것도 빛나는 것이 없으니까 친구를 만들고, 죽자 사자 연애를 하고, 어느 조직에 들어가서 충성하고 그럴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절대고독을 예닐곱 살 때 느끼셨다면 조숙하셨네요.

“오히려 철이 안 들었던 것이지요. 철이 일찍 들었더라면 권력이나 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런 터무니없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을 겁니다. 피란 시절에 2~3일 굶은 적이 있었는데 배고픈 것보다 인간이 배고프면 짐승처럼 된다는 게 더 슬펐어요. 아무리 거룩한 체해도 굶으면 쥐나 돼지나 똑같아진다는 그 모멸감, 그걸 알았죠.”

-참여문학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 참여문학의 문제점을 비판하셨죠. 정보사회를 찬미했지만 요즘은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고요. 남보다 먼저 뭔가를 찾아내고 그걸 긍정하지만 이내 그 문제점도 먼저 발견해 고뇌하는 게 선생의 원래 모습입니까.

“내가 움직여야 그림자도 움직이지요. 참치는 헤엄을 치는 것이 숨을 쉬는 것이라고 해요. 잠잘 때에도 헤엄을 치다가 죽는 불쌍한 생물이지요. 저만이 아니라 글쓰는 사람, 지식인은 그렇게 운명지어진 존재지요. 창조적 사고의 바닥에는 비판적 사고가 있기 때문에 끝없이 부정·긍정, 긍정·부정을 되풀이합니다. 저는 하나의 신념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이 제일 두려워요. 그들에게는 벽이 보호장치로 보이겠지만 저는 벽이 장애물로 보이거든요. 벽은 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것이 제 신념이었지만 신체성을 상실한, 눈과 귀와 머리만 갖고 살아가는 사이버 세계의 허상을 경험하면서 ‘디지로그’의 세계를 주장하게 된 것이지요.”



#2. 돌고 돌아보니 결국 생명

- 그럼 요즘의 화두는 뭘 잡고 계십니까.

“맥 빠진다고 할지 모르지만 ‘창조적 생명’입니다. 생명의 시대를 창조하는 시대지요. ‘에코’라는 말보다 더 근본적인 생각. 한 마리 곤충이나 나나 우주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말할 수 있는 게 뭐냐, 생명이다. 30억 년 전 태고의 바다에서 시작되었다는 DNA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 나와 우주와 맞닿아 있다는 것, 그런 것을 되돌아봐야 할 만큼 현대문명은 병들고 기계처럼 공전하고 있는 상태지요.”

- 그래서 ‘한국인 이야기’도 모태의 생명부터 시작한 겁니까.

“그래요. 두고 보면 알겠지만 한국인 이야기는 수단으로서의 삶인 ‘리빙(Living)’이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삶인 ‘라이프(Life)’를 찾아가는 길고 긴 기행문의 한 토막이라고 할 수 있지요. 숨은 그림 찾기처럼 사물과 사물, 사건과 사건 사이에 숨어 있는 감춰진 삶의 의미들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쓰려고 하는 것은 개인의 전기도,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도 아닌 ‘생명의 역사’지요.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숨쉬고 외치고 살고 싶다고 부르짖는 그 진짜 목소리의 역사.”

- 1963년에 연재하신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 전통가치에 대한 비판이었죠. 지금 연재하는 한국인 이야기에서는 긍정과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쓰실 겁니까.

“긍정도 부정도 아닙니다. 한국인 이야기는 역사책에 나오는 왕들이나 위대한 영웅들이 아니라 그냥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지요. 하지만 개인사는 보편성이 없어요. 소설이 그런 걸 하지만 너무 개인만 있으니까. 나는 ‘히스토리(History)’와 ‘마이 스토리(My story)’의 접합, 주인공이 없는 소설, 역사가 있는 서정시, 머리로 느끼고 가슴으로 생각하는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이지요. 한국인 이야기는 내 개인사나 가족사가 아니라 내 시점을 통해서 본 한국인들이 겪었던 일제 식민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쟁·경제·정치·이념들이 지층을 이루는 정신과 문화의 지질학 혹은 실내악으로 편성된 교향곡 같은 그런 역사를 쓰겠다는 겁니다.”

-역사도, 소설도, 전기도, 회고록도 아니지만 그걸 모두 아우르는 거군요.

“역사만이 아니라 평생 써온 한국어의 기동훈련도 해보는 것이죠. 한국어로 글을 쓸 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모든 문장이 ‘다’자로 끝난다는 거죠. 기관총 쏘는 것 같이 다다다다 소리가 나요. 박목월 선생의 ‘나그네’란 시는 ‘다’자를 한 자도 쓰지 않고 마무리해 ‘다’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지요. 저 역시 한국어의 한계에서 벗어나 밀도 높은 산문을 써보려고 모험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한국인 이야기는 때로는 소설 같고 때로는 논문 같고 혹은 시 같기도 한 글이 매회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고 있지요. 주위에선 에세이 대신 논문 같은 ‘본격적인 글’을 쓰라고 해요. 하지만 제 관심은 격이 아니라 질이지요. 본격이 아니라 본질을 쓰는 것.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찢는 글을 써야 하는데 우리는 겉모양의 옷 무늬에만 매달리는 일이 많아요. 작은 것들 속에 잠자고 있는 것들, 묻혀 있는 사건이 아니라 묻혀 있는 생각,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았던 것들 말입니다. 양말을 뒤집어보세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겉무늬에 속고 살았는지. 무늬가 아니라 양말을 짠 실들의 숨은 구조가 보일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인간의 무의식을 드러내 치료한다던데 한국인의 무의식을 끄집어내려는 겁니까.

“무의식까지 갈 것도 없어요. 손전등을 갖고 깜깜한 방을 비추면 그 빛이 비춰지는 데만 보이잖아요. 각도를 틀면 전혀 다른 것, 안 보이던 곳이 보이죠. 기차 타고 갈 때 우측에 앉으면 우측만 보이고 좌측에 앉으면 좌측만 보여요.”

-읽고 나면 치유되는 게 있나요.

“치유된다, 안 된다는 읽는 사람에 달렸지만 적어도 ‘아하 그랬구나’ 하는 ‘아하 체험’을 주고 싶어요.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던 냇물 속에서 고기를 낚는 것 같은 거 말이지요. 명연주가는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라 피아노에서 음을 끌어낸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국인 이야기를 썼으면 합니다. 아직 사용하지 못한 한국인의 잠재력을 꺼내서 우리 손자들이 연주하도록 말이지요.”



#3. 평생 글쟁이가 드리는 글의 종합선물

-신문 연재라는 형식이 괜찮습니까.

“수백 장에 쓸 수도 있는 내용을 원고지 열 장으로 줄이는 제약이 고통스럽지만 그러한 제약에 도전하는 것이 글쓰는 재미지요. 넓은 마루 두고 왜 좁은 평형대에 올라가 체조를 하겠어요. 그래야 상상할 수 없는 기량이 나오지요. 그런데 꼭 필요한 주석이나 인용문에 대한 출전을 일일이 밝힐 수 없는 것, 자세히 소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난처함을 매일 겪어요. 나중에 책으로 묶어 낼 때 반드시 명기하고 보충할 터이니 독자들이 이해해 주길 바라요. 신문 독자들은 마켓 용어로 얼리 어답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다른 지면에서보다 신문에서 만나는 독자들이 더 고맙고 정이 가고 동행자로 느껴져요.”

-연재가 끝나면 여러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죠.

“여름 이전에 제1권이 나올 겁니다. 특히 온라인 댓글에 익숙한 젊은 독자들에게 한국어가 뭐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오프라인에서 함께 나누고 싶거든. 둥지를 가진 새만이 멀리 날아갈 수 있어요. 사이버 공간에서 마음껏 뛰어놀려면 한국어를 품을 수 있는 둥지가 필요해요.”

-『로마인 이야기』랑 어떻게 다른 겁니까.

“접근법이 전혀 달라요. 『로마인 이야기』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쓴 거지만 ‘한국인 이야기’는 역사책에 오르지 못한, 하다못해 신문기사에도 오르내리지 않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것이지요. 신문에 게재되는 것은 그중 테마가 되는 에세이 부분인데 실제로 한 권의 책으로 나올 때는 시, 소설, 대화 그리고 작품 분석과 그 학문적 배경이 되는 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글이 포함될 겁니다. 평생 글을 써온 제가 독자에게 드리는 글의 종합선물 같은 거예요.”

-어린 시절의 묘사가 아주 생생한데 그런 기억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건 기억력이 아니라 레토릭이에요. 그때 그 장면을 그대로 쓴 게 아니라 이미지로 변형된 느낌을 재현한 것이지요.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한 것처럼 말이지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인데 그럴 때는 기억의 정확성보다 상상력과 문체의 힘이 중요해요.”

-앞으로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전체 윤곽은 12개로 잡혀 있어요. 이제부터 내가 식민지 때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이 나오고, 해방공간, 전쟁, 대학 다닐 때, 문학평론가로 데뷔하던 문단 생활, 올림픽, 산업화, 정보화시대, 디지로그, 창조력의 시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몰락 과정 그리고 오늘의 세계 불황과 오바마의 미국까지…. 제일 마지막 권은 지성에서 영성에 이르는 미래의 문제에 대해 쓸 예정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케케묵은 질문을 다시 하자는 겁니다. 그것이 틀린 해답이라고 해도 중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니까요. 그리고 미래는 오는 것도, 예측하는 것도, 그냥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창조하는 것이라는 걸 함께 나누고 싶은 거지요. 중앙일보 독자들과 함께 난파하지 않고 항해하다 보면, 우리 전체가 살 만한 넉넉한 육지가 나타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 목격자가 되어 주세요.”

대담=김종혁 문화스포츠 에디터
정리=이은주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7> 히노마루 교실과 풍금소리 ①

[중앙일보]입력 2009.05.12 02:53 / 수정 2009.05.12 04:50

‘학교’란 말도 모르고 학교를 다닌 우리들

  “너 학교에 들어갔다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하루 사이에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학교’란 말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선생님까지도 “쓸데없는 거 알려고 하지 말고 가르치는 거나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씀하신다. 학교는 왜 ‘학교’라 부르고 서당은 왜 ‘서당’이라고 하는지 그 말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어째서 쓸데없는 짓이란 말인가. 아니 ‘공부(工夫)’란 말은 또 뭔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 알아서 뭐하느냐” “그게 밥 먹여주느냐”며 비웃는다.

어른들은 중요한 것을 묻지 않는다. 귀찮아서, 겁나서, 몰라서 그냥 피한다. 그것들과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밥만 먹고도 잘 사는 거다. 감동 없이도, 사랑 없이도, 나라 없이도 말이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나는 인기 없는 아이였다. 매사를 캐묻는 ‘질문대장’ 혹은 말다툼 잘하는 ‘겐카도리(싸움닭)’라는 별명이 붙어 다닌 걸 보면 안다. 하지만 무엇을 물어도 지적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시는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는 새 공책 겉장에 내 이름과 ‘온양 명륜 심상 소학교(溫陽明倫尋常小學校)’라고 입춘방을 쓰실 때처럼 한 자 한 자 글씨를 써 가시면서 토를 달아 읽어주신다. 그 가운데서도 ‘배울 학, 가르칠 교(校)’란 말은 분명히 기억할 수가 있었다. 새로 깎은 연필에서는 제사 지낼 때 나는 향불 같은 냄새가 풍겨 왔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타고 이 지식의 향기가 ‘온양’의 따스한 햇볕, ‘명륜’의 밝은 빛 무리에 섞여 내 가슴 안으로 번져 왔다. 아들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다녔다는 맹자의 어머니가 아니라도 좋다, 가르침을 위해서 불을 끄고 흰떡을 썰었다는 한석봉 어머니가 없어도 좋을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의 질문에 대해 짜증만 내지 않았어도 식민지 교실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라인골드의 『스마트 맙스』를 사서 첫 장을 펼쳤을 때 불현듯 쏟아진 내 몇 방울의 눈물은 그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색칠그림에 칠을 할 때 그 선을 멋대로 벗어나도 야단치지 않으셨던 어머니에게 이 책을 바친다. 어머니 감사합니다”라고 쓴 그 저자의 헌사를 보고 그때의 연필 향기를 맡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었기에 라인골드는 다른 지식인들처럼 그려준 선 안에서만 생각의 칠을 하지 않고 대담하게 휴대전화를 든 새로운 군중 속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모든 학교를 다 졸업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학교’란 말이 옛날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어의 ‘학교(school)’가 고대 희랍어의 ‘스콜레(schole)’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과, ‘논다’의 여가(餘暇)의 뜻과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것도 대학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학교’란 말을 토를 달아 읽어주시지 않았더라도 뒤늦게나마 학교란 명칭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 걸음 더 나가 ‘학교’란 말이 일본 사람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 『맹자』의 ‘등문공장구 상(滕文公章句 上)’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떠했을까. “다음에는 교육정책이 긴요합니다. 학교(學校)를 만들어 백성을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夏)의 시대에는 ‘교(校)’라 하고 은(殷)나라 때에는 ‘서(序)’라 하고 주(周)나라 때에는 ‘상(庠)’이라 하여 이름은 달랐지만 거기에서 배우는 내용은 모두 같았습니다. 이렇게 위에 서있는 자가 인간의 도를 밝혀 가르쳐 인도하면 백성들은 감화하여 크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지겹도록 들었던 그 ‘공부(工夫)’란 말이 중국에서는 희랍어의 경우처럼 노는 ‘여가’를 의미하고, 일본에서는 ‘생각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안 것도 훨씬 뒤의 일이다. 시간이 여유가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고, 공부를 해야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같은 한자인데도 한·중·일 뜻이 다 다른 것을 합치면 멋있는 학교교육론이 된다는 것을 어렸을 때 알았더라면 공부하는 태도도 달라졌을는지 모른다.

불행하게도 학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학교의 이름이 바뀐 것은 1940년 학교에 입학하던 그해의 일이다. ‘온양명륜소학교’가 ‘온양국민학교’로 바뀌었던 것이다. 왜 그 명칭이 바뀌었는가. 그것이 나에게, 한국인에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 주었는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왜 그들은 국민학교라고 이름을 바꿨는가’입니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8> 히노마루 교실과 풍금소리 ②

[중앙일보]입력 2009.05.13 02:12 / 수정 2009.05.13 08:18

그들은 왜 ‘국민학교’라고 했는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느닷없이 교명이 바뀌었다. ‘온양명륜심상소학교(溫陽明倫尋常小學校)’라고 써 붙였던 동판이 뜯겨 나가고 그 자리에 ‘온양국민학교’라고 쓴 큰 목간판이 나붙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간 것은 1940년이었는데 바로 다음 해 3월에 ‘국민학교령’이 칙령(勅令)으로 공포된 것이다. 동시에 조선총독부에서는 민족교육금지령을 내렸다. 아이들은 획수가 많고 까다롭던 ‘尋常’이란 한자가 사라졌다고 좋아했다. ‘심상’이란 말이 사라지면서 그야말로 ‘심상’찮은 일들이 생기리라는 것을 애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들도 알 턱이 없었다.

‘심상소학교’라는 말은 명치유신(明治維新) 때(19년) ‘소학교령’을 제정하면서 써온 말인데 그것을 바꾼 것은 곧 나라의 체제를 또 바꾼 것이나 다름없다. 두 법령을 비교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국민학교령’에서는 국가란 말이 ‘황국(皇國)’으로 변하고 아동(兒童)은 ‘소국민(小國民)’이 된다. 무엇보다 그 목적어가 다르다. 소학교령은 “아동의 신체 발달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국민학교령은 “국민의 기초적 연성(鍊成)을 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다. ‘연성’이란 말은 ‘연성도장’이나 ‘연성소’의 경우처럼 심신과 기예를 훈련하는, 일종의 군사용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국민학교’란 ‘황국신민’을 단련시키는 연성도장이었던 것이다.

명치시대에 만들어진 소학교령은 한 자도 고치지 않고 지금 우리가 써도 탈날 게 없다. 심상소학교의 ‘심상’은 보통이나 일상적인 것을 뜻하는 프랑스어의 ‘노르말’, 영어의 ‘오디너리’의 개념을 그대로 옮긴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이 개화의 모델 국가로 삼았던 영·불의 교육제도를 수입해 왔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벌어지고 중·일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군국주의 체제로 들어서면서 공포된 ‘국민학교령’은 영·불을 배척하고 나치의 교육법을 반영한 것이다. 일본의 은행법이 히틀러가 만든 도이치 은행법을 도입한 것처럼 ‘국민학교령’은 그 명칭부터가 나치가 마든 ‘폴크스 슐레(Volks Shule)’에서 가져온 말이다. 생각할수록 ‘언어는 생각의 집’이다

알다시피 히틀러의 국가주의·전체주의를 한마디로 응결시킨 것이 ‘폴크스(Volks)’라는 말이었다. 모든 국민을 똑같은 학교에서 똑같은 교육이념으로 훈련하고 똑같은 모양의 폴크스바겐(volkswagen)에 태우려고 했다. 그 ‘폴크스’가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 ‘국민학교’의 국민이요, ‘국민복’의 바로 국민이다. ‘국민학교’의 개칭만이 아니라 수신·국어·국사·지리의 네 과목을 ‘국민과(國民科)’라는 이름으로 묶은 것도 나치의 커리큘럼과 명칭을 그대로 따 쓴 것이다.

슬프게도 ‘민족(民族)’이라는 말이 그러했듯이 우리에게 그렇게도 익숙한 ‘국민’이란 말 역시 일본인들이 근대에 들어와 만든 말이다. 구한말 안중근 의사가 단지 장인을 찍은 족자만 해도 ‘국민’이 아니라 ‘대한국인(大韓國人)’이라고 선명하게 쓰인 문자를 읽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같은 식민지 시대에 살던 한국인들이라고 해도 심상소학교를 나온 사람과 국민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서로 다른 한국인이라 할 수 있고, ‘일제 36년’이라는 말도 국민학교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불러야 옳다.

수백 년 내려온 서당과 향교가 학교란 말로 바뀌었을 때에도, 그리고 심상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다시 바뀌던 때에도 한국인의 관심은, 역사는 그냥 강물처럼 흘러갔다. 아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뒤에도 우리는 ‘국민학교’라는 말을 그대로 썼다. 일본이 패전 후 민주화를 추진하며 맨 처음 한 일이 ‘국민학교’란 말을 버린 것이었는데도 우리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에서야 ‘초등학교’로 고쳤다. 그런데 왜 고쳐야 했는지 아는 학부모들은 많지 않다.

‘소학교 아동’으로 입학해 일 년 만에 그 신분이 ‘국민학교 소국민’으로 바뀌면서 한국인은 정말 일본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영어에서는 그냥 ‘피플’이고 ‘네이션’인데 한국인들에게 따라붙는 말은 많기도 하다. 창생(蒼生)이라는 말, 백성이라는 말, 국민·신민이라는 말, 공민과 시민이라는 말, 그리고 인민과 민중이라는 말…. 말이 바뀔 때마다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고 가위에 눌리면서 살아야 한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깃발이 된 태양은 암흑이다’입니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9> 히노마루 교실과 풍금소리 ③

[중앙일보]입력 2009.05.14 03:03 / 수정 2009.05.14 08:23

깃발 속으로 들어온 해는 암흑이었다

 말은 무섭다. 문자는 더욱 무섭다. 귀신이 어둠 속에서 통곡할 정도로 무섭다. 같은 사람인데도 ‘한국인’이라고 할 때와 ‘한국 사람’이라고 할 때 그 느낌은 달라진다. 한국인 이야기를 ‘한국 국민 이야기’라고 했다면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고, ‘국민’이란 말 대신 ‘시민’이나 ‘민중’이라고 했다면 ‘인민’이란 말처럼 혁명의 과격한 이야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국민 해방, 국민 혁명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더 이상 말하지 말자. 아직 나는 초등학교 단계에서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 눈높이에 맞춰 말과 문자가 얼마나 힘이 센가를 이야기하겠다.

내 바로 앞 세대만 해도 『천자문(千字文)』으로부터 일생을 시작했다. 서당에 들어가는 첫날 배우는 것이 ‘하늘 천 땅 지’다.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춘향전에 나오는 방자도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자문 첫 구절쯤은 외울 줄 안다.

그런데 국민학교에서 내가 배운 글자는 ‘가나’였다. “アカイ アカイ ヒノマルノ ハタ(아카이 아카이 히노마루노 하타)”. ‘아카이’는 붉은색이고 ‘히노마루’는 해의 동그란 모양을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천자문』과 별로 다를 게 없다. 하늘 대신 해가 있고, 검고 노란색이 붉은색으로 바뀐 정도다. 그런데 마지막 ‘하타’에서 모든 것이 뒤집힌다. ‘하타’는 ‘깃발(旗)’이란 뜻으로 붉은 해는 하늘이 아니라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양이었던 것이다.

붉은 해는 천황가의 원조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하늘을 비추는 태양의 여신)’다. 이 땅에서 제일 높은 것이 황제(皇帝)인데, 일본의 천황(天皇)은 하늘까지 다스리는 존재라 하여 ‘하늘 천(天)’자가 붙어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일장기로 하늘을 가려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식민지 교육이 아닌 것이다.

‘히노마루노 하타’를 배운 아이들에게 내일 뜨는 아침 해는 천황의 것, ‘아마데라스 오미카미’가 뜨는 것이다. 일본(日本)이란 나라 이름부터가 해(日)의 근본(本)에서 온 말이다. 말은 무섭다. 문자는 더 무섭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겠다. 대정 8년에 일본 문부성(文部省)에서 발행된 소학교 국어책 일 권에는 첫 장에 딱 두 글자 “ハナ(꽃)”다. 인류보다 먼저 지구에서 살았던 네안데르탈인들도 죽은 자에게 제물로 바쳤다는 그 꽃이다. 그런데 삽화는 그냥 꽃이 아니라 벚꽃이다. 일본말의 ‘하나(꽃)’는 그냥 꽃이 아니라 벚꽃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부시(武士)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요, 사쿠라(벚꽃)가 아니면 꽃이 아니라는 에도 시대의 관념을 강화해 ‘하나(花)’를 ‘하타(旗)’로 바꿔 놓은 것이 내가 처음 배운 글자요, 그 일장기였던 것이다.

천지현황을 외우는 서당 아이들이 중화(中華)의 이념을 일평생 몸에 달고 다니는 것처럼 ‘히노마루노 하타’를 외우는 ‘국민학교’ 아이들은 야마토(大和)의 천황주의에 못 박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자문』을 배운 아이들은 파란 하늘을 보고도 하늘을 검다(玄)고 하고, 초록색 초원을 보면서도 땅을 노랗다(黃)고 한다. 그리고 ‘아카이 히노마루(붉은 일장기)’를 배운 아이들은 해를 그리라고 하면 동그라미에 빨간 칠을 한다. 그걸 보면 서양 아이들은 기절을 한다. 예외 없이 주황색을 칠해 오던 아이들이니까.

일장기의 ‘붉은 해’와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의 ‘하얀 해’가 혈전을 벌인 것이 청일전쟁이다. 천지든, 태양이든 제 눈으로 보고도 그것이 딴 색으로 보이는 것은 그게 자연색이 아니라 이념의 색들이었기 때문이다. 천지현황의 검은색과 노란색은 음양오행의 이념에서 나온 색이고, 일장기의 붉은색과 청천백일기의 흰색은 근대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낳은 빛이었다. 여간 주의(注意)하지 않으면 주의(主義)의 이념 색에 가려 자연색을 볼 수 없는 눈뜬 장님이 된다.

금붕어는 노랗지 않은데도 귀한 물고기라는 뜻에서 황금자가 붙었다. 그래서 빨간 붕어를 보고서도 우리는 금붕어라고 한다. 삼학년 때였던가. 유리 조각에 그을음을 묻히고 개기 일식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념의 해가 아닌 물리적인 해를 볼 수 있었다. 조금씩 까맣게 침식되어 가며 죽어가는 태양…. 해가 이데올로기의 깃발 속으로 들어오면 일식처럼 암흑이 되어 죽는다는 슬픈 진리를 보았다. 물론 무의식 속에서 말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국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까닭’입니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0> 히노마루 교실과 풍금소리 ④

[중앙일보]입력 2009.05.15 03:06 / 수정 2009.05.22 11:44

국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까닭

히노마루(일장기)가 걸린 어두운 교실보다는 역시 환한 운동장이 좋았다. 햇빛이 쏟아지는 눈부신 마당에는 철봉대가 늘어서 있고 한구석에는 씨름할 수 있는 모래밭도 있었다. 몇 백 년 묵었다는 팽나무에는 아침저녁으로 새들이 모여와서 우짖는다. 하지만 운동장에 나가도 히노마루의 깃발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교정에서 제일 높은 것이 국기게양대의 황금빛 깃봉이었으니까.

담쟁이 너머로 보이는 설화산(雪華山) 봉우리도 일본의 후지산(孵뵨山)을 닮았다 했고, 참새들도 학교 마당에 들어오면 ‘스즈메(スズメ)’라고 한다. 스즈메는 일본말로 참새를 뜻하는 말이었지만 탁음 하나만 빼면 군대가 행진하는 ‘스스메(進め)’와 음이 같아진다. 그래서 ‘히노마루노 하타’를 배우고 나면 ‘반자이(만세)’라는 말과 “헤이타이상(병정님) 스스메 스스메 치테치테 타 토타 테테 타테 다( ヘイタイサン ススメ ススメ チテ チテ タ トタ テテ タテ タ)”의 주문 같은 말을 읊게 된다. 병정들이 나팔을 불며 행진하는 것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그래, 정말 군대의 행진곡 소리가 운동장에 울려퍼지면 운동회가 열린다. 뭐니뭐니해도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것은 역시 수백, 수천의 그 만국기였다. 빛깔과 모양이 제각기 다른 만국기는 어떤 하나의 깃발보다도 아름답게 휘날린다. 히노마루도 그 깃발의 물결 속에 파묻힌다.

세계에서 첫째 가는 국기가 ‘히노마루’라고 가르쳤다. 서양 사람들이 탐내어 많은 돈을 주고 사가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이다. 학교괴담이 아니라 이모토 준지의 『국기와 히노마루』란 책에도 수록된 국가급 괴담이다. ‘1874년 봄 영국이 당시 500만원을 주고 데라시마 외무장관에게 교섭을 해왔다’고 역사적 사건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국기는 배추장수처럼 사고파는 게 아니다. 못 생겨도 자기 자식처럼 끌어 안고 사는 것이 국기니까 .

운동회를 열띠게 하는 홍기와 백기를 보면 안다. 아무 무늬도 그림도 없는 단지 붉은색과 흰색으로 구분된 것인데도 아이들은 그 깃발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듯이 줄다리기를 하고, 달음박질을 하고, 기마싸움과 봉 쓰러뜨리기를 했다. 무엇보다 대표선수들이 나와 100m 릴레이 경주를 할 때는 자기편 응원을 하느라 목이 터진다.

자기편이라고 하지만 갑자기, 그리고 우연히 홍군·백군으로 나뉘어진 집단일 뿐이다. 그렇지만 일단 홍군이 되거나 백군이 되면 저마다 머리에 그 색깔에 맞는 하지마키(머리띠)를 두르고 무한질주를 시작한다. 운동장은 미치고, 관전하는 학부모까지도 깃발 속으로 휘말린다. “홍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 그것을 일본말로는 “아카 가테, 시로 가테”라고 한다.

형이 홍군이고 아우가 백군이면 형제인데도 결사적으로 싸운다. 조금 전까지 어깨동무를 하던 단짝이라도 기의 색깔이 다르면 적이 된다. 반대로 낯선 얼굴이라도 색깔이 같으면 손에 손잡고 힘을 합친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랬다. 마을이 동서로 나뉘어 석전을 벌이고 있을 때 아들은 반대 마을의 아버지를 향해 돌을 던졌다. 노인이 그 광경을 보고 패륜이라고 꾸짖자 청년은 대답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돌을 던진 것이 아니라 싸워 이겨야 하는 반대편 사람에게 돌을 던진 것뿐”이라고.

축제 공간에서 벌어지는 홍군·백군의 놀이 원리를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국가의 이익으로 이용한 것이 바로 일본의 히노마루며, 소비에트의 붉은 깃발이다. “전체주의 국가 소비에트는 신문 보도나 교육이나 정치선전의 관리를 통해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을 바꾸려 했다. 소비에트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스탈린 경찰에 자기 부모를 고발한 소년 바빌 모로조프는 오랫동안 정부로부터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게 됐다.” 이 인용문을 그대로 일장기가 걸린 교실에 가져와도 누가 부정할 것인가. 히노마루가 걸려 있는 교실에서, 그리고 만국기가 걸려 있는 운동회 마당에서 나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불렀던 내셔널리즘의 꼬리를 밟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가. 애국가가 연주되고 태극기가 게양될 때 시상대 위에서 눈물을 흘리는 우리 자랑스러운 금메달리스트를 보면서 함께 눈물을 짓다가도 섬뜩한 생각이 스친다. 히노마루 교실의 트라우마가 덴 살을 건드리는 것처럼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고쿠고조요(國語常用) ‘아이구’는 한국말인가입니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1> 히노마루 교실과 풍금소리 ⑤

[중앙일보]입력 2009.05.18 03:27 / 수정 2009.05.18 08:07

고쿠고조요 ‘아이구머니’는 한국말인가

국민학교 2학년이 되던 해였다. 미나미 일본 총독은 황민화(皇民化) 교육을 강화하라는 훈시를 내렸다. 한반도를 중·일 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쿠고조요’의 강력한 정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말로 ‘고쿠고’는 국어(國語), ‘조요’는 상용(常用)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미 ‘국어’는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를 가리키는 말이 된 지 오래였다.

천방지축이던 아이들이 무엇을 알았겠는가. ‘고쿠고조요’의 바람은 오히려 히노마루 교실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선생님은 도장이 찍힌 우표 크기만 한 딱지를 열 장씩 나눠 주시며 말했다. “오늘부터 고쿠고조요 운동을 실시한다. ‘조센고(한국말)’를 쓰면 무조건 ‘후타(딱지)’라고 말하고 표를 빼앗아라. 표를 많이 빼앗은 사람에겐 토요일마다 상을 주고 잃은 애들은 변소 청소를 한다. 그리고 꼴찌는 ‘노코리벤쿄(방과후 수업)’로 집에 보내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 말이 끝나자 환성과 비명소리가 엇갈렸다.

처음엔 서로 쉽게 빼앗고 쉽게 빼앗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쟁은 힘겨워졌다. 조센고를 쓰는 애들은 차차 줄어들고 일본말이 서툰 애들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대일본 제국이 코흘리개 애들을 상대로 펼친 상호 감시와 당근·채찍의 잔꾀는 들어맞는 듯했다.

이윽고 “야!”라고만 해도 후타를 빼앗겼다. 일본말로는 “오이!”라고 해야 한다. 애들은 똥침을 먹여 “아얏!” 소리를 내게 하고는 후타를 빼앗기도 했다. 혹은 화장실 뒤에 숨어 있다가 소리를 질러 놀란 아이들이 “아이구머니” 소리를 내도록 하는 전략도 썼다. “아이구머니”는 조센고가 아니라고 하면 선생님에게 심판을 받으러 간다. “센세이 아이구머니가 니혼고데스카, 조센고 데스카?(선생님, 아이구머니가 일본말입니까, 한국말입니까?)”

아이들은 위급할 때 외치는 소리도 일본말과 한국말이 다르다는 것과 “아이구머니”라는 아무 뜻도 없는 비명 소리가 어머니를 찾는 말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고쿠고조요’의 역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강요해도 비명 소리까지 일본말로 할 수 없다는 것과 세 살 때 배운 배꼽말은 결코 어떤 힘으로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아무리 일본말을 잘해도 양호실에 가서 “배가 쌀쌀 아프다”는 말은 죽었다 깨어도 일본말로는 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래서 “쌀쌀”이라는 말을 일본말로 “고메고메”라고 한다는 조롱 섞인 농담도 유행했다. 일본말로 쌀(米)은 ‘고메’니까 “쌀쌀 아프다”를 “고메고메 이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난도아이나 푸이푸이푸이토 창고수”라는 아무 의미 없는 해리포터 같은 주문들이 아이들 입을 타고 삽시간에 전국으로 나돌았다. 고쿠고조요의 후타는 일본말도 한국말도 아닌 그 주문 앞에서는 한낱 휴지로 바뀌고 만 것이다.

후타가 모자라는 아이들은 필통을 열어 연필·삼각자·고무 같은 것과 거래를 했다. 표가 남는 아이들은 어느새 고쿠고조요의 상으로 받는 병뚜껑 같은 별 볼일 없는 배지보다는 몽당연필이 낫다는 실리주의를 알게 된 것이다. 약발이 끊어지자 선생들의 탄압도 거세져 매일 교무실에서 호출이 떨어졌고 당시 시오이(鹽井) 일본 교장은 전교생 앞에서 고쿠고조요 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토요일 방과 후 담임선생은 나와 ‘구마’(‘곰’이란 뜻)를 교실에 남으라고 했다. 담임선생은 파랗게 질려 있던 나에게는 시험지 답안을 꺼내 주고는 채점을 하라고 했고 구마에게는 또 꼴찌를 했으니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나보고 잘 감시하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원래 구마의 별명은 ‘곰퉁이’였지만 고쿠고조요가 실시된 뒤부터 별명도 ‘구마(곰)’로 바뀐 것이다. 덩치는 우리 반에서 제일 컸지만 하는 일이 둔해 일본말도 가장 서툴렀다. 아이들은 표를 빼앗으려고 늘 상어 떼처럼 이 아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집에는 할아버지만 있어서 빨리 돌아가야 하니까 제발 표를 뺏지 말라고 조센고로 애걸하다가 다시 또 표를 빼앗기는 아이였다.

한참 동안 빈 교실에서 나는 채점을 하고 있었고, 구마는 선생님이 나가셨는데도 두 손을 든 채 천장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마야! ‘후타’라고 말하지 않을 테니 손 내리고 한국말을 해도 돼.” 그러자 덩치만큼이나 큰 구마의 눈물방울이 마룻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때 갑자기 어느 교실에선가 풍금 소리가 들려왔다.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집에서는 한국말로 불렀고 학교에서는 일본 가사로 노래했던 바로 도나부강(다뉴브강)의 왈츠 곡이었다.

풍금 소리는 마치 구마의 허파 속에서 울려오는 것처럼 먼 데서 들렸다. 우리는 풍금을 ‘오르강’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일본말도 한국말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풍금 소리는 가사가 없이도 혼자 울릴 수 있으니까 일본말이든 한국말이든 상관할 게 없다. 풍금 소리는 바람 소리처럼 자유롭게 히노마루 교실의 창문을 넘어 긴 복도를 지나 나무들의 긴 그림자가 드리운 텅 빈 교정을 가로질러 날아다닌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구마가 아무리 조센고를 써도 절대로 절대로 ‘후타’란 말을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 표만 빼앗기지 않는다면 ‘곰’은 다시 우리 학급에서 제일 기운이 센 아이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당시 총독부 발표에 따르면 ‘고쿠고조요’의 실시로 일반 수강자 수는 21만374명이라고 했다. 그 성과로 간단한 회화 가능자 9만2564명(44%), 가타가나 해득자 15만3572명(73%), 히라가나 해득자 5만8875명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제79회 제국의회(1942년 12월)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실시한 청문회의 기록은 이렇다. “고쿠고조요 실시 후 일부 민족적 편견을 지닌 자들은 조선어는 머지않아 이 지상에서 말살될 것이고 4000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민족의 문화는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언사를 농하면서 저항하고 있다.”

우리가 식민지 교실에서 배운 것은 히노마루(일장기)가 아니라 우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흙으로 된 국토’와 ‘언어로 된 국어’의 두 ‘국(國)’자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중앙일보 고문 이어령


※ 다음 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입니다. joins.com/leeoyoung

 

 

붉은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