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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오피니언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2> 아버지의 이름으로 ①~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2> 아버지의 이름으로 ①

[중앙일보]입력 2009.05.19 02:34 / 수정 2009.05.19 08:35

한국의 아버지들은 수탉처럼 울었는가
닭 이미지 거슬러 올라가면 단정학·봉황·계룡…
일제 때 아버지들, 어둠서 빛을 토할 줄 알았다

 유행어에 나타난 아버지의 유형은 세 가지다. 기러기 아빠, 펭귄 아빠, 그리고 독수리 아빠다. 기러기 아빠에 펭귄 아빠가 추가된 것은 그보다 더 슬프고 외로운 아버지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러기 아빠는 그래도 이따금 날아가 아내와 아이를 보고 온다. 하지만 금융위기의 아빠는 비행기표 살 돈이 없어 썰렁한 빙산 같은 집에서 혼자 갇혀 사는 펭귄새가 된 것이다. 말만 새지 날 수 없는 펭귄처럼 말만 아빠지 아빠 노릇 못 하는 아버지의 출현이다.

그러나 독수리 아빠는 펭귄은 물론이고 기러기 아빠보다도 행복하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어 아무 때나 날아가 떨어져 사는 가족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아내와 자식이 없기에 높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면서 먹잇감을 사냥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자기는 어떤 새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안심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아버지 없는 가족’ ‘아버지 부재의 사회’가 되어 간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런 농담도 생겨나고 있다. 유학 간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받기가 무섭게 “아, 너냐. 엄마 바꿔줄게.” 늘 그랬듯이 교환수 노릇을 하려고 한다. “아니에요. 아버지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왜? 할 말이 뭔데. 니 돈 떨어졌나.” 그러자 아들은 또 “아니에요. 돈이 아니라요, 절 보내시고 외롭게 사시는 것 같아서 아버지와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요.” 그 말을 듣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니 술 먹었나.”

이것이 기러기·펭귄·독수리 아빠보다도 더 심각한 오늘의 우리 아버지들 모습이다. 한국인 이야기가 뭐 별거냐. 아무리 심각하게 써봤자 이런 농담만큼도 제대로 우리의 얼굴을 그려내기 힘들다. 그래, 그러면 옛날 아버지는 어땠는가. 한마디로 새는 새지만 그냥 새가 아니라 수탉이다. 암컷이 수컷 발등에 알을 낳으면 털로 품어 부화시키는 진짜 펭귄새를 제외하고는 모든 새는 모성의 메타포다. 알을 품고 병아리를 달고 다니는 것은 오로지 암탉의 일이기에 수탉은 원래부터 펭귄이니, 기러기니, 독수리니 견줄 필요가 없다.

암탉은 알을 낳지만 귀신과 도깨비가 판치는 어둠을 내몰고 광명을 부르는 것은 언제나 수탉의 몫이다. 그래서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닭에는 다섯 가지 덕이 있다고 예찬한다. “머리에 관을 쓴 것은 문(文)이요, 발에 갈퀴(距)를 가진 것은 무(武)요, 적에 맞서서 감투하는 것은 용(勇)이요, 먹을 것을 보고 서로 부르는 것은 인(仁)이요, 밤을 지켜 때를 잃지 않고 알리는 것은 신(信)이다.” 이러한 오덕(五德)은 주로 수탉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닭의 이미지를 한층 더 거슬러 올라가면 천년 사는 단정학(丹頂鶴)이 될 것이고, 더 올라가 오동나무에 오르면 봉황(鳳凰)이 될 수도 있다. 신라 때까지 올라가 신성한 숲을 만나면 계룡(鷄龍)까지 나타난다.

암흑기라고 부르는 일제 36년 그때의 아버지들은 비록 날개가 퇴화하고 깃이 뽑혀 나가 가축처럼 길들여졌어도 각혈처럼 어둠 속에도 빛을 토할 줄 알았다. 대낮에도 높은 장대 위에 올라 홰를 치며 우는 장닭들도 있었다. 다만 발갈퀴의 ‘무’와 적에 맞서 싸우는 ‘용’이 일본에 꺾여 그 자랑스럽고 아름답던 닭 볏마저 쓸모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먹이를 나누던 ‘인’과 시를 알리는 ‘신’의 목소리도 변성돼 갔다.

일제 강점 시대의 한국인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 문화인류학은 일종의 조류학(鳥類學)과 같은 것이 되고 아버지에 대한 새 이미지는 식민지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해방 뒤에서 오늘에 이르는 부권상실의 추적도 용이하게 한다. 가령 관세음보살은 고통받는 인간을 보호하고 구제하는 ‘정’과 ‘자비’의 상징으로 인도의 교리에서는 모두가 남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동아시아)으로 들어오면 모두가 여성으로 바뀐다. 마치 서양의 천사가 남성적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는데 한국에 오면 선녀처럼 여성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미국의 소설을 대표하는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허먼 멜빌의 『모비딕』, 또한 헤밍웨이의 소설이 모두 여자 없는 남성들의 세계로 꾸며져 있고 그 유명한 제임스 딘 주연의 ‘이유 없는 반항’이란 영화도 부성애가 중심이다. 그리고 식민지 아이들이 따라 부른 일본의 군가(軍歌)들은 모두가 ‘니혼단지(일본남아·日本男兒)’의 이미지로 “지지요 아나타와 스요갔다(아버지여 당신은 강했습니다)”란 노래를 원형으로 삼은 것이다. 그때 우리 아버지들은 수탉처럼 울었는가. 이야기해 보자.

중앙일보 고문 이어령

※ 다음 회는 ‘동요가 아니다. 군가를 불러라’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3> 아버지의 이름으로 ②

[중앙일보]입력 2009.05.20 02:42 / 수정 2009.05.20 08:29

동요가 아니다, 군가를 불러라

 자장가를 들으며 자란 아이들은 문자와 말을 알기 전에 벌써 노랫소리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말더듬이도 노래를 부를 때만은 신기하게도 말을 더듬지 않는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의 내셔널리즘이 ‘출판 자본주의’에 의한 것이라고 했지만 말을 문자로 옮긴 것과 그것을 노래에 담은 것이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보기 드물게 군가를 대량생산해 그것으로 지배의 도구를 삼은 일본군국주의 밑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에서 ‘젊은 독수리(소년 항공 예비훈련병)’까지 『그리운 군가집』에 200곡이 넘는 군가(軍歌)를 출판할 수 있는 나라가 이 지상에 일본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글자대로 읽으면 군가는 행진곡처럼 군인들이 부르는 노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말하는 ‘제이국민’과 ‘소국민’들의 일반사람들에게 전투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내셔널리즘의 ‘소리 텍스트’다. “빵을 달라는 아이에게 누가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는 아이에게 누가 뱀을 줄 것이냐”는 성서의 말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꽃을 달라는 아이에게 총을 주고, 사랑의 동요를 들려달라는 아이에게 죽음의 군가를 가르쳐 준 것이다.

군가의 어느 한 대목 치고 ‘죽음’을 노래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군가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기미가요’ 국가(國歌)보다 더 많이 부른 ‘우미유카바(海ゆかば·바다에 가면)’였다. “바다에 가면 물먹은 시체가 되고 산에 가면 잡초에 덮인 시체가 되리라. 님(大君·천황) 곁에서 죽으니 무슨 아쉬움이 있으랴….” 바다와 산은 전쟁터의 주검(屍)이요, 묘지라는 이야기다. 천황은 우리를 황국신민으로 낳아주신 아버지요, 우리는 그 생명을 주신 천황의 ‘아카고(赤子·갓난아이)’다. 그러니 천황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곧 효의 길이요, 충의 길이다. 이것이 열 살배기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 논리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천 년 가까이 우리는 충효의 사상 속에서 살아왔다. 그 대상을 일본의 천황으로 바꾸려 한 것이 식민지 아이들이 아침· 저녁으로 부른 동요 아닌 군가였다.

천황제 군민국가가 생긴 지는 불과 100년도 채 안 되었는데도 마치 그러한 천황 숭배와 황국사상은 태고적부터 있어 온 것처럼 허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우미유카바’의 가사 역시 1300년 전으로 올라가 『만엽집』(萬葉集4094番 大伴家持)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만엽집』이란 이름부터가 그렇듯 글자는 왕인(王仁)이 갖다 준 이두식 한자요, 말은 소위 도래인들이 주류를 이룬 한국말과 깊은 연관을 지닌 혼합체들이다. 거기에 가사 내용은 임을 떠내보낸 한 여인이 “아침 바닷가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시거든 님이여 그대 그리워 한숨짓는 내 입김으로 아옵소서”와 같은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임을 천황으로, 바다 위의 안개를 물먹은 시체로 그 이미지를 바꿔놓은 것이 ‘우미유카바’다. 작곡자 자신(信時潔)이 기독교의 찬송가를 듣고 자란 독일 고전음악의 애호가로 학도병 출정 때 자신의 곡이 불리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자장가는 어머니가 부르고, 군가는 아버지가 부른다. 어머니는 평화로운 잠 속에서 생명을 노래 부르고,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죽음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 노래가 진짜 우리 아버지들의 노래가 아니다. ‘근대화는 부권의 상실과 함께 시작했다’고 말하는 정치사회학자들의 지적대로 우리의 아버지들은 거세되고 추방됐다. 단지 실체 아닌 허구의 ‘무서운 아버지’가 부권을 부활시키려 우리에게 군가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깃발을 나부끼고 군가를 부르며 어린 가슴으로 다가오는 ‘무서운 아버지’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문서에 기록된 문자에만 의지하는 버릇이 있어서 히노마루(일장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군가였다는 것을 잘 모른다. 식민지 아이들이 불렀던 ‘소리의 텍스트’에 대해서는 한낱 문맹자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깃발은 눈으로 보고 노래는 귀로 듣는다. 눈은 앞에 있는 것을 보지만 소리는 앞에서도 오고 뒤에서도 온다. 전 방향에서 우리를 에워싼다.

그러나 식민지 아이들은 천황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냥 군가만 불렀는가. 아니다. 일본 군대의 나팔소리에 이상한 가사를 붙여 노래 불렀다. “야마네코가 보쿠노 긴타마 돗데 있다. 이스고로가 반노 쥬니지고로다요.” 이 가사의 뜻이 무엇인지 70대 중반의 할아버지들에게 물어보라. 할아버지는 멋쩍게, 그러나 조금은 통쾌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선뜻 대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너만 알거라. ‘야마네코’는 살쾡이고. ‘보쿠’는 나, 그리고 ‘긴타마’는 남자의 소중한 그 불의 상징물이지. 그래, 그것을 밤 열두 시에 살쾡이 녀석들이 떼어갔다는구나. 생각해 보라. 야마네코의 살쾡이가 누구였겠니.  

중앙일보 고문 이어령

※ 다음 회는 ‘모모타로는 소금장수가 아니다’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4> 아버지의 이름으로 ③

[중앙일보]입력 2009.05.21 02:38 / 수정 2009.05.21 08:07

모모타로는 소금장수가 아니다

<34> 아버지의 이름으로 ③


군가는 재미없다. 군가에 나오는 사쿠라(벚꽃)는 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지는 꽃이다. “하나토 지레”, 벚꽃처럼 지거라. 전쟁터에서 깨끗이 죽으라는 뜻이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는 산화(散華)라고 한다. 죽는 이야기가 아니면 이번에는 달력에서 반공일과 공일을 지우고 “월월화수목금금(月月火水木金金)”으로 죽도록 일하자는 노래다.

그런데 딱 군가가 아닌 재미있는 노래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제일 인기가 높은 모모타로(桃太郎) 노래다. 복숭아 속에서 나온 모모타로는 허리에는 칼과 수수경단을 차고 도깨비(오니·鬼)들이 사는 섬을 정벌하러 출정을 한다. “소라 스스메, 소라 스스메” 작대기를 들고 진격의 추임새를 하며 걸어가면 정말 수수경단 하나씩 주고 부하를 만든 개, 원숭이, 그리고 꿩이 내 뒤를 쫓아오는 것만 같다. 드디어 도깨비 나라에 당도하자 꿩은 날아서, 원숭이는 성벽을 넘어서, 모모타로와 개는 열어준 성문 안으로 돌격해 도깨비들을 모두 퇴치한다. 항복을 받은 모모타로는 빼앗은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엥야라야, 엥야라야” 수레를 끌며 할아버지 할머니 집으로 돌아온다.

모모타로는 늘 마음을 졸이게 하는 소금장수가 아니다. 여우와 도깨비들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모타로는 거꾸로 그들을 정벌해 보물을 빼앗아 온다. 일본 노래를 부르면 시끄럽다고 소리를 지르는 어른들도 모모타로의 노래를 부를 때만은 따라 부른다. 언젠가는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수레를 몰고 고향에 돌아오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어린애였지만 왜 나는, 그리고 주변의 많은 어른들은 모모타로를 우리를 괴롭힌 침략의 상징으로 생각지 못했을까. 탈아론(脫亞論)을 주창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인이면서도 모모타로를 침략자로 규정했다. 가훈을 통해서까지 자기 아이들에게 “모모타로가 도깨비섬으로 간 것은 보물을 빼앗으러 간 것이니 도둑이나 진배없다”고 가르쳤다. 설령 도깨비들이 세상을 해치는 악한자라고 해도 이들을 응징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보물을 약탈해 오는 것은 사욕에서 나온 비열한 행위라고 했다.

왜 내가 모모타로 노래를 하고 놀 때 그와 같은 가르침을 준 어른들은 없었는가. 내게 더욱 충격을 준 것은 한국에도 팬이 많은 아쿠타가와(芥川龍之介)가 쓴 모모타로의 패러디를 읽었을 때였다. 아무 때고 인터넷을 열어 검색을 하면 읽을 수 있는 그 소설에서 도깨비섬은 야자수가 우거진 극락조가 우는 아름다운 낙원으로 설정돼 있다. 도깨비들은 거문고를 켜고 춤을 추면서 옛날 시를 읊기도 하고 여자들은 아이를 품에 안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겨운 모습으로 묘사돼 있다. 높은 문화와 평화의 섬에 부하들을 이끌고 침입한 모모타로는 모든 것을 부수고 살육하고 평화롭던 섬을 초토화한다. 그리고 보물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항복을 한 대장은 간직한 보물을 내주면서 이렇게 묻는다. “혹시 우리가 댁들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일이 있었나요.” 그러나 모모타로는 자기가 일본 제일의 무사라는 것과 자기에게는 세 부하가 있기 때문에 이 섬에 쳐들어 온 것이라고 말한다. 명분도 논리도 없는 말을 하고는 인질까지 잡아 가지고 보물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도깨비들은 평화주의자로, 모모타로는 침략자로 그려졌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열광하는 모모타로를 패러디한 아쿠타가와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중국에 갔을 때 청말의 대 국학자요 노신의 스승이기도 한 장빙린(章炳麟) 선생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자리에서 아쿠타가와는 “내가 가장 혐오하는 일본인은 모모타로”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아쿠타가와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그 모모타로가 침략의 캐릭터라는 것을 깨닫는다. 동시에 실제 인물, 살아 있는 일본 사람보다도 가공의 설화적 인물인 모모타로를 더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을 것이다. 실체보다도 허구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 그리고 그 속에서 창조된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현실.

우리 지식인들은 왜 아쿠타가와의 모모타로와 같은 텍스트를 창조하지 못했는가. 우리 어른들은 왜 장빙린 국학자처럼 모모타로가 살아 있는 일본인들보다도 더 무섭고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깨우쳐 주지 않았을까. 이것이 커서도 내가 잊지 못하는 모모타로 콤플렉스다.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이다.

중앙일보 고문 이어령

※ 다음 회는 ‘어디엔가 역사의 블랙박스가 있다’ 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5> 아버지의 이름으로 ④

[중앙일보]입력 2009.05.22 02:46 / 수정 2009.05.22 11:45

역사의 블랙박스를 읽는 법

 귤은 추억이다. 감처럼 자기 집 마당에서 자라는 게 아니라서 더욱 그 냄새는 향기롭다. 반도의 땅에는 탱자밖에 자라지 않지만 내지(內地)에 가면, 그것이 맛있고 큰 감귤이 되어 아무 데서나 열린다고 했다. 식민지의 아이들이 일본을 ‘내지(內地)’라 하고 내 나라 땅을 ‘반도(半島)’라고 불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귤을 일본에 가져다준 사람이 신라의 왕손 다지마모리(田道間守)였다는 것이다. 한국말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못하게 하던 선생님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옛날 일본에서는 귤나무나 꽃을 ‘다치바나(橘)’라 했는데 그것은 ‘다지마모리의 하나(꽃)’가 준 말이라는 것이다. 요새 쓰는 ‘미캉’이라는 말도 그것이 삼한(三韓)시대에 들어왔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도 했다. 일본말로 읽으면 ‘삼한’은 ‘미강’이 된다.

그래서 창가(唱歌) 시간에는 군가 대신 ‘다지마모리의 노래’를 배웠다. 풍금소리에 맞춰 “가오리모 다카이 다치바나오….” 향기로운 귤을 가득 실은 배가 만 리의 먼 바다에서 돌아온다는 뜻이다. 그리고 2절은 돌아와 보니 귤을 구해 오라고 한 수인천황(垂仁天皇)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이 다지마모리에 집착했던 것은 단 한 가지, ‘신라의 왕손이 일본 천황의 명을 받들어 충성을 다했고 생전에 그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자 한을 품고 슬피 울다가 그 능 앞에서 순사(殉死)를 했다’는 스토리텔링을 이용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선전하려 한 것이다.

창가 시간에 다지마모리를 노래한 아이들은 극장의 단체관람 시간에는 ‘기미토 보쿠(너와 나)’라는 리진샤쿠(李仁錫) 상등병의 영화를 보았다. 조선인 1호 지원병으로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다지마모리의 이야기에서 신라의 역사가 강조되는 것처럼, 그 영화에서는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의 백제 역사가 부가된다. 실제로 그 영화는 부여에서 촬영됐고, 평소에는 잘 부를 수 없었던 한국 대중가요들도 들려온다. 1300년 전 옛날이나 오늘 전쟁터에서 일어난 이야기나 일본의 역사에는 시차(時差)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쓴 당시의 역사는 단 두 마디로 줄일 수 있다. “천황폐하 만세!”다.

그런데 이따금 자랑스러운 ‘야스쿠니’ 신사의 영령들 유품에서 이상한 편지가 나온다. 그것은 여러 가족이 굶어죽게 생겼다는 생활고 이야기 끝에 네가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명예롭게 전사하기를 원한다는 사연이 적혀 있다. 그래야 그냥 죽는 것보다 은사금을 많이 받고 일가족을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코앞에 일어난 일도 우리는 모른다. 매일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도 우리는 그 속에 어떤 장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예 반도체의 그 복잡한 회로는 들여다볼 수도 없게 만들어져 있다. 모르며 사용하고, 몰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전자제품들이다. 그것을 ‘블랙박스’라고 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 속을 모르는 사람들과 직장에서 일을 하고 친구를 사귀고 결혼을 한다. 우리 운명을 좌우하는 지도자들을 뽑는다. 날이 갈수록 기계도 사람도 복잡해져서 블랙박스 효과는 점점 더 커진다.

역사는 블랙박스의 블랙박스다. 일본의 역사가 특히 그렇다. 일본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다지마모리의 역사 추리소설은 천일창의 신라 왕족과 일본의 수인천황 사이에 보물 칼을 둘러싼 원한관계가 그려져 있다. 다지마모리는 순사를 한 것이 아니라 복수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너의 죽음은 순사가 아니라 미담으로 왜곡 이용될 것이다.” 이것이 소설의 마지막 대화다. 리진샤쿠 아니 이인석은 왜 지원병이 되었는가. 왜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죽었는가. 진짜 동기도, 전사 장면도 깜깜한 역사의 블랙박스 안에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죽음의 이야기가 누구를 이롭게 하는지는 불을 보듯이 환하다. 항공기의 블랙박스는 그 말 때문에 검은색인 줄 아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색은 찾기 쉬운 오렌지색 아니면 붉은색이다. 지원병이라는 말도 그렇지 않은가. 귤도, 다지마모리도, 리진샤쿠도, 그 많은 친일파 이야기도 역사의 블랙박스 안에 갇혀 있다. 친일을 단죄하는 것 이상으로, 그 친일의 허구를 만들어낸 일본 역사의 블랙박스를 깰 수 있는 추리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만약 추리소설을 덜 읽는 한국의 젊은이들이라면 앞으로 누가 이 블랙박스를 부숴 해독할 수 있을 것인가.

중앙일보 고문 이어령

※ 다음 회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6> 아버지의 이름으로 ⑤

[중앙일보]입력 2009.05.25 00:30 / 수정 2009.05.25 10:17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누가 일제시대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의 느낌과 그 상황을 시로 써보라고 한다면 아마 나는 이상(李箱)의 연작시 ‘오감도(烏瞰圖)’ 시제1호와 시제2호를 표절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때의 음산하고 어두운 장면들을 조감(鳥瞰)하려고 할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솔개나 학이 아니라 한 마리 까마귀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별수 없이 이상처럼 조감도를 오감도(烏瞰圖)로 고쳐 쓸 수밖에 없다.

또 지성보다 ‘오감’으로 역사의 가도를 달리는 오감도(五感圖)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 아이들의 모습은 “13인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하는” 이상의 ‘오감도’ 시제1호를 그대로 닮게 된다. 역시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할 것이고 “아이들은 무섭다고 그럴” 것이다.

시의 형태도 마찬가지다. 제1에서 제13까지의 아이들을 매스게임을 하듯 순서대로 줄지어 놓은 그 시 1호의 도형은 우리 아이들이 매일 아침 교정에 도열하여 규조요하(宮城遙拜)를 하며 ‘황국신민의 선서(皇國臣民の誓い)’를 외치던 것과 다를 게 없다. 13이란 숫자가 조선 13도를 가리킨 것인지, 최후 만찬의 예수와 제자가 모인 서양의 13수인지는 몰라도 그 질주하는 집단이 무서워하는 아이와 무서운 아이의 혼합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애들에게 가르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동조론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정말 그들과 우리가 한 몸뚱이(一體)라면 왜 황국신민을 매일 아침 맹서를 해야만 하는가. 진짜 아버지가 친자식에게 매일 아침 밥 먹기 전에 “나는 아버지 아들입니다”를 외치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자기들은 내(內)를 차지하고 한국인은 비하할 때 부르는 센진(鮮人)의 선(鮮)으로 부르는 내선일체란 구호 자체가 모순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일합병 후 한국을 여행한 일본의 시인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는 그의 글 ‘조선(朝鮮)’에서 조선 아이와 일본 아이가 섞여 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한국인 동네에서 가게를 열고 있는 일본 부인을 보면서, 조선 사람이 일본화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람이 조선화”하는 것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큰 충격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시제1호가 ‘아이’라는 말을 횡으로 집단화한 도형 형태의 시라고 한다면, 시제2호는 ‘아버지’라는 말을 종으로 이어놓은 선형 모양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아이의 시가 사회의 집단성을 보여준 ‘공간축 오감도’라면, 아버지의 시는 역사의 지속성을 나타내는 ‘시간축의 오감도’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그들이 동조론을 펴면 펼수록 아이들은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개인이나 만세 일계라는 천황가나 아버지의 아버지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그 결과는 아주 수상해진다.

왜냐하면 일본 왕실의 상징으로 늘 정청(시신덴)의 오른편에 심는 다치바나(귤·橘)가 신라의 왕손 다지마모리가 구해다 준 것이고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인이 신으로 모시는 아메노히보코(天日槍)로 일본에 철과 병기 등의 기술을 전파한 통치자였다. 메이지시대의 사학자 구메(久米邦武) 교수가 일본의 신도는 ‘제천의 고속(古俗)’이라는 글을 썼다가 도쿄대에서 파면당한 일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두려워한 고대사의 블랙박스 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일본 왕실에서 갈라진 헤이게(平家)와 겐지(源氏)의 두 무사집단이 바로 백제계와 신라계의 후예들이라는 문제 제기는 일본의 저명한 역사 소설가이며 추리작가인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만의 생각이 아니다. 일본의 인터넷 블로그에서는 금기시하던 그런 논의들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헤이게’가 모셔온 교토의 히라노 신사(神社)가 비류와 온조 그리고 성왕 등 백제의 다섯 임금을 모시는 곳이라는 것은 간무덴노의 황후가 백제인이라는 것처럼 공개된 사실이다. ‘겐지’가를 이끈 주역의 이름에도 신라자가 붙어 있는 경우가 있는 것도 그 X파일의 하나다(新羅三郞義光).

내선일체를 배우면서 오히려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국의 민족과 일본 고대의 블랙박스를 통해 잃어버린 아버지들의 탱자나무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대동아의 신화’입니다. joins.com/leeoyoung

 

 

병꽃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