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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오피니언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7> 대동아의 신화 ①~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7> 대동아의 신화 ①

[중앙일보]입력 2009.05.26 01:37 / 수정 2009.05.26 08:17

폭력으로도 지울 수 없는 한자의 문화유전자
‘대동아공영권’서 가장 많이 쓴 한자는 ‘비 ’
‘비 + 심’은 슬플 ‘비’ … 반대편엔 웃음 ‘소’가

 작은 탱자 하나가 멀고 먼 시간을 눈뜨게 하듯이 작은 한자 하나가 천만리 멀고 먼 공간을 향한 바람이 된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아무리 진군나팔을 불고 총검을 높이 세워도 마음의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집단 기억을 틀어막을 수 없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한자가 그랬다. 그것은 여남은 살 어린이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한자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불렀던 시절, ‘전쟁’을 수식하는 말로 늘 이 여섯 글자가 따라다녔다. 그러기에 어느 한자보다도 낯이 익다. 더구나 처음 ‘입춘대길(立春大吉)’의 한자를 쓰면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이 한가운데가 대칭형으로 갈라지는 한자가 길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동아공영권’이야말로 맨 끝의 ‘권(圈)’자만 빼면 모든 글자가 좌우대칭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나라 ‘국(國)’자만 배우다가 그보다 더 크고 더 넓은 뜻의 ‘권’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눈으로 봐도 이상한 것이 있었다. 일본이란 나라 이름에도, 동아시아라고 할 때에도 큰 대(大)자가 붙어 있는데 막상 제일 큰 아세아(亞細亞)에는 어째서 ‘세(細)’자가 들어 있는가. 일본말로 무엇을 만드는 것을 ‘사이쿠’라고 하는데 그것을 한자로 쓰면 ‘세공(細工)’이 된다. 그러니 ‘세’자는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 때에나 쓰는 별 볼일 없는 글자가 아닌가.

사실 그랬다. ‘亞細亞’라는 한자어는 중국에 선교하러 온 마테오 리치(1552~1610)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한자어다. 그런데 그가 ‘ASIA’를 음역해 한자로 옮길 때 만약 대명제국이 자기네도 그 아세아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면 거기에 ‘세’자를 붙이려 했겠는가. 마찬가지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선언한 일본인들 역시 자신들은 항상 아시아 밖에 있는 특수한 나라로 인식해 왔다. 쇼토쿠다이시(聖徳太子)가 수양제에게 국서를 보내면서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 보낸다”고 한 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이란 말이 국가 기밀과 전쟁 첩보를 다루던 이와구라 히데오(岩畔豪雄)라는 군인에 의해 만들어지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0년에 마쓰오카(松岡洋右) 외무대신의 입을 통해 널리 퍼진 말이라는 것을 알면 처음부터 아시아의 번영이 아니라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구호임을 알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대동아공영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한자는 영화 ‘영(榮)’자가 아니라 ‘비(非)’자였다. 건듯하면 ‘비상시(非常時)’라는 말을 내세워 남자들의 머리카락을 깎고 여성들의 긴 옷고름을 가위로 잘라 리본처럼 만들어 놓았다. 남자들은 군민복을 입어야 하고 여성들은 ‘몸뻬’(순우리말로 ‘허드렛바지’ ‘일바지’라 한다)를 입어야 한다. 몸뻬는 옛날 일본의 동북지방 사람들이 일할 때 입었던 옷인데 정부(후생성)에서 디자인해 보급운동을 통해 식민지까지 강제로 착용케 했던 것이다. 어머니도 누이도 몸뻬를 입은 모습으로 바뀐다. 그것이 대동아공영권의 이미지였다. 가수 아와타니(淡谷) 노리코가 전시 위문 연주 때 몸뻬가 아니라 무대의상 차림으로 출연했다고 해서 군 당국의 미움을 샀다는 이야기 하나로 그 억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된다. 비상시국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비국민(非國民)’이라는 딱지가 붙어 비상미(非常米) 배급도 어렵게 된다. 매일같이 비상령이고 비상 경계령이다.

폭격에 대비한다고 웬만한 문에는 모두 ‘비상구(非常口)’라고 표시돼 있었다. ‘대동아’란 말과 함께 한국인에게는 늘 이 ‘비’라는 한자가 따라다녔기에 우리는 일제에서 해방된 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상구’ ‘비상문’이란 글씨를 볼 수 있었다. 영자로는 그냥 ‘EXIT’이고, 한자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태평문(太平門)’이라고 부르는데 말이다. 같은 한자, 같은 문인데 한쪽은 비상이고 한쪽은 태평이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여섯 자는 뜻하지 않게 내 작은 영혼을 만주 벌판으로, 그리고 공초(空超) 오상순 시인(1894~1963)처럼 아시아의 밤으로 향하게 했다. “고량바다케와 히로이나!(수수밭은 정말 넓구나)” 언뜻 들은 이 한 대목이 나의 먼 조상이 달렸던 만주 벌판의 바람소리를 듣게 한 것이다. 금지의 문자 ‘비’에 마음 ‘심’을 붙이면 정말 눈을 감고 울고 있는 슬플 비(悲) 자가 되고, 그 반대편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닮은 웃음 소(笑)자가 보인다. 한자는 어떤 폭력으로도 지울 수 없는 문화유전자였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서당의 민들레 학교의 벚꽃’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8> 대동아의 신화 ②

[중앙일보]입력 2009.05.27 02:38 / 수정 2009.05.27 08:19

서당에는 민들레가 학교에는 벚꽃이

 만약 대동아 전쟁 때 가모 마부치(賀茂眞淵·1697~1769)의 벚꽃 노래를 알았더라면 어린 마음속에 품었던 의문이 풀렸을지 모른다. “중국 사람들에 보이고 싶구려/미요시노(吉野)의 요시노의 산에 핀 야마 사쿠라의 꽃들이여.” 만약 가모 마부치가 요시노 산에 핀 산벚꽃나무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 감동을 중국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그 노래를 지은 것이라면 대동아 전쟁은 말 그대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것이라고 믿어도 좋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에게 일본인만이 즐길 수 있는 벚꽃을 뽐내려는 우월의식에서 나온 노래라 한다면 그것은 아시아를 벚꽃으로 뒤덮으려는 침략의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이 불행하게도 후자라는 것은 후타가와 스케지카(二川相近·1767~1836)가 그 뒤에 쓴 벚꽃 노래에서 엿들을 수 있다.

“벚꽃으로 밝아지는 미요시노(三芳野)의 봄날 새벽 경치 바라다보면/ 중국 사람도 고려 사람도 야마토 고코로(大和心·일본인의 마음)를 알게 되리라.” 요시노의 벚꽃을 일본 고유의 무사도 정신과 결합시켜 중국과 한국을 지배하려는 대륙 콤플렉스를 드러낸 노래다. 그가 말하는 ‘야마토 고코로’야말로 수업 때마다 귀따갑게 들어온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와 같은 말이다. 해방 후의 아이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했지만 식민지의 아이들은 학교 마당에서 놀 때에도 “사이타 사이타 사쿠라노 하나가 사이타 (피었다 피었다 벚꽃이 피었다)”를 불렀다.

앞서 말한 가모 마부치에게 영향을 받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40년이나 걸려 일본의 『고사기전(古事記傳)』을 완성해 ‘야마토 고코로’의 국학을 세웠다. 유교나 불교의 대륙 사상에 물들지 않은 일본 고유의 신도(神道) 이론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야마토 고코로, 즉 황국심(皇國心)은 ‘나오비노미타마노가미(直毘<970A>神)’의 선신(善神)에서 나오는 것으로, 솔직하고 진심 그대로 행동하려는 마음이다. 그 반대의 신이 화를 가져다주는 악신(惡神) ‘마가쓰비노가미(禍津日神)’인데 일본 땅에서 살지 못하고 대륙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심을 현혹시키고 권력을 찬탈하고 그것이 마치 영웅적인 행동인 것처럼 미화하고 합리화했다. 요순(堯舜)·주공(周公)을 비롯한 성인들이 모두 그러했다는 것이다. 특히 내놓고 모반을 선동한 맹자(孟子)가 그렇다고 했다(기억해 주기 바란다. 앞글에서 나는 학교란 말이 『맹자』에서 나온 말임을 밝힌 적이 있다).

악신의 농간으로 대륙의 사상들이 일본 땅에 들어와 단순소박한 일본인의 마음을 속이고 오염시켜 천황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를 근본적으로 뒤엎고 말았다. 그 탓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천황을 능멸하는 무리들이 권세를 장악하게 되었다는 논지다. 그래서 대륙 사상들을 몰아내 옛날의 ‘야마토 고코로’를 되찾아 황도(皇道)를 바로 일으켜야 한다는 게 그의 국학이요,‘고신토(古神道)’의 부흥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국수주의는 명치유신의 개국을 타고 야마토 고코로의 사쿠라 꽃이 되어 식민지 학교 마당에도 만발하게 되었다. 유불신(儒佛神) 삼교를 습합(習合)해온 오랜 일본의 전통은 무너지고 황실의 조상신(天照國大神) 하나만을 믿는 일신교 같은 체제로 바뀌면서 일본의 군국주의는 결국 대동아 전쟁이 된다.

그러나 형님들이 다니던 한국의 서당에는 벚꽃이 아니라 민들레가 심어져 있었다고 했다. 벚꽃처럼 요란스럽게 일시에 폈다 지는 그런 꽃이 아니라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은 잡초와 다름없는 꽃. 일본 사람의 야마토 고코로를 만든 것이 벚꽃이라면, 한국인의 서당 아이들의 마음을 키운 것은 아홉 개의 덕을 가진 민들레꽃이었다고 한다. 길가에 피어나 수레가 지나고 사람들에게 짓밟혀도 끈질기게 피어나고 그 뿌리를 캐내어 버려도 다시 움이 난다는 민들레는 인(忍)과 강(剛), 벚꽃처럼 한꺼번에 피는 집단적인 꽃이 아니라 한 대공이씩 기다렸다 차례대로 피는 예(禮), 어두워지거나 비가 오려 하면 꽃잎을 닫는 선악의 분별력, 또한 새벽에 먼동이 트면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근면의 덕이 있다. 자르면 어머니 젖처럼 하얀 진액이 나오는 자(慈)요, 이파리에서 뿌리까지 나물을 무쳐 먹을 수 있으니 용(用)이다. 종기에 붙이면 치료가 되니 어진 인(仁)이며 무엇보다 그 씨앗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스스로 번식하여 융성하게 자라니 용(勇)이라 할 수 있다. 사당이 문을 닫고 아이들은 학교 마당으로 몰려간다. 민들레가 시든 서당의 자리에는 어느새 요시노의 벚꽃이 만발한다. 대동아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매화는 어느 골짜기에 피었는가’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9> 대동아의 신화 ③

[중앙일보]입력 2009.05.28 02:39 / 수정 2009.05.28 02:41

매화는 어느 골짜기에 피었는가

 내 기억 속의 서당은 기왓골과 허물어진 돌담 틈 사이에 잡초들이 많이 자라 있던 김 학사 댁 집이다. 기와집이래야 반은 허물어져 있고 당집처럼 조금 외진 곳에 있어서 늘 인적이 뜸했다. 서당 문을 닫은 뒤부터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옷은 남루했지만 언제나 단정한 의관을 한 김 학사는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김홍도의 풍속도에 나오는 서당 선생 그대로였지만 몸만은 대추씨처럼 작고 야무져 보였다. 무엇보다 이 서당 선생은 내가 아는 한 유성기와 라디오에서 나는 소리를 죽을 때까지 믿지 않았던 이 세상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소리 나는 그 상자들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김 학사의 고집에 대해 수군거렸고 그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유성기나 라디오 앞에 이상(李箱)의 표현대로 펭귄 새처럼 모여 앉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동네 사람들보다는 김 학사의 모습이 훨씬 당당하고 숭고하고 장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교실 뒷벽의 대동아 지도에는 매일 황군(皇軍)의 점령지에 빨간색이 칠해지고 히노마루의 일장기 표시가 찍혀 가고 있었다. 그리고 김 학사가 그렇게 믿으려 하지 않았던 라디오에서는 싱거포루(싱가포르) 함락, 랑군(양곤) 진격 등 연일 낯선 아시아의 나라와 도시 이름들이 다이홍에이(大本營) 발표로 시끄럽게 울려 나오고 있을 때였다. 그런 전쟁 속에서도 봄은 오고 있었다. 먼 친척이 와서 혼자 남은 김 학사를 데려간 것인지 아니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것인지 기억이 헷갈리기는 하지만 빈집 허물어진 담 너머로 흘낏 들여다본 마당에 피어 있던 것은 분명 민들레 꽃이 아니라 백매화(白梅花) 꽃이었다.

뒷날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한중일 비교문화사전』을 편찬할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리고 그중에서도 ‘매화’부터 발간하게 된 것도 아마 그때의 내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던 매화꽃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뜰에서는 아이들이 천자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고목 그늘에서는 김 학사가 가래침을 뱉는 소리가 들려온다. 생전의 김 학사도 다른 선비들처럼 늘 가난하고 추워 보이는 매화나무 같은 한사(寒士)의 한 분이었다. 그리고 다른 선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 학사도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를 그리며 추운 겨울을 나려 했을 것이다. 동지가 되면 바람이 들어오는 영창을 백지로 봉하고 그 위에 여든한 송이의 흰 매화꽃을 그린다. 그리고 하루에 한 송이씩 붉은 칠을 해 가면, 그러다 마지막 백매가 홍매로 바뀌면 소한도로 봉했던 영창 문이 열리고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마당에는 정말 매화가 피어나 암향부동한다.

새것이라고 주눅 들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김 학사는 바로 이 몇 송이의 매화꽃을 위해서였던가. 남들이 다 떠나가고 기왓골에 잡초가 나는 가난과 외로움이 눈 속에서 핀다는 이 매화의 전설 때문이었는가. 김 학사는 어디엔가 눈 속에 핀 설중매를 찾으러 방금 집을 비우고 떠난 것일까. 아마 지금의 나라면 대동아 지도에 꽂혀 가는 일장기가 아니라 매화가 피어 있는 김 학사의 빈집 뜰에서 아시아의 대륙을 보았을 것이다. ‘구구소한도’의 매화 한 송이에서 아시아의 작은 뜰을 보았을 것이다.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아 일생을 살았다는 북송 때의 시인 임포(林逋), 도산서당의 마당 절우사(節友社)에 매화를 심고 그 제재로 시첩을 만든 이퇴계 선생 그리고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따라 천 리를 날아온 일본의 비매(飛梅) 설화. 『만요슈(萬葉集)』에서 벚꽃보다 더 많이 읊어진 노래 매화. 이렇게 중국의 대륙과 한국의 반도와 일본의 섬을 하나로 묶은 동북아시아의 신화를 만든 것은 그 서당 집 마당에 핀 매화였다.

그러나 매화에서는 천자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고 벚꽃에서는 “이로하니호에도”를 암송하는 일본 가나의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가갸거겨”가 들리는 꽃은 어디에 피었는가. 매화가 피어 있는 골짜기를 찾다가 민들레에서 그 소리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아스팔트의 틈 사이에서도 피는 민들레 꽃이다. 굳이 심지 않아도 글방 마당에 저절로 피었을 꽃이다. 중국·일본의 인터넷 검색에서도, 한·중·일 그 어느 사전에서도 민들레의 구덕(九德)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이규태의 칼럼집 이외의 어떤 전거에서도 그런 민들레 이야기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오직 한국의 인터넷 블로그에서만 민들레의 구덕 찬미를 여러 가지 버전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민초들이 밟혀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민들레 신화를 만든 집단지(集團智)의 산물로 볼 수밖에 없다. “가갸거겨” 소리를 내는 한국 내셔널리즘의 꽃이 얼마나 아쉬웠으면 그 아홉 개나 되는 꽃말을 한꺼번에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 속에 담으려 했겠는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소나무 뿌리를 캐내라’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0> 대동아의 신화 ④

[중앙일보]입력 2009.05.29 02:03 / 수정 2009.05.29 02:10

소나무 뿌리를 캐내라

 동방의 아시아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준 것은 총칼의 힘도 물질의 풍요도 아니었다. 눈서리 차가운 추위를 이기는 미학이요, 그 우정이다.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하나인 소나무가 바로 그러한 일을 했다. 추위 속에서 따뜻한 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소나무지만 그 추위의 특성이나 차이에 따라 중국의 송(松), 한국의 솔, 그리고 일본의 마쓰(まつ)가 제각기 다르다.

무엇보다 소나무와 한국인의 관계가 그렇다. 소나무를 보면 울음이 나온다고 쓴 적이 있지만 소나무만큼 한국인을 닮은 나무도 이 세상에 없다. 태어날 때는 솔잎을 매단 금줄을 띄우고 죽을 때에는 소나무의 칠성판에 눕는 것이 한국인의 일생이다. 하지만 그 쓰임새보다도 소나무의 생태와 형상 그 자체가 한국인에 더욱 가깝다. 풍상에 시달릴수록 그 수형은 아름다워지고 척박한 땅일수록 그 높고 푸른 기상을 보여준다.

기암창송(奇巖蒼松)이니 백사청송(白沙靑松)이니 하는 말 그대로 다른 식물들이 살지 못하는 바위와 모래땅에서 소나무는 자란다. 삭풍 속에서 모든 나무가 떨고 있을 때 소나무만은 거문고 같은 소리를 낸다고 하여 옛 시인들은 ‘송뢰(松籟)’요, ‘송운(松韻)’이라 불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 기억 속의 소나무는 거문고 소리가 아니라 아이들의 비명과 비행기의 폭음 소리를 냈다. 비행기 연료가 되는 쇼콩유(松根油)를 채취하기 위해 소나무 뿌리를 캐 오라는 동원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200그루 소나무면 비행기는 한 시간 난다”는 구호 속에서 아이들은 책을 덮고 송진을 따러, 소나무 뿌리를 캐러 산으로 갔다.

바위를 굴려 산꼭대기에 오르는 시시포스의 노동보다 더 무익하고 힘든 노동이었다. 그래도 시시포스의 노동은 산정에서 아래로 내려갈 때에는 빈손이 아니었는가. 그때가 더 괴로운 시간이라고 말한 소설가 카뮈는 솔뿌리를 캐는 노동을 해본 적이 없어서 하는 소리다. 소나무 뿌리는 시시포스의 바위만큼 무겁다. 그것을 캐내는 어려운 작업이 끝나면 이제는 휴식이 아니라 그 무거운 바위 솔뿌리를 안고 내려가는 가혹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고 시를 읊던 풍류객들을 위해 술 심부름을 하던 동자(童子)들은 지금 ‘대동아공영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그 노송의 밑뿌리를 캐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멀리에서 라디오로 청취하고 있던 미 제20항공대는 시저의 승첩문처럼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Dig and Steam and Send(캐내라, 쪄내라, 보내라).” ‘일본에 있어 솔뿌리는 석유의 귀중한 대체연료지만 그것을 캐고 가공해 기름으로 만들기까지는 그 불행한 나라의 대중을 더욱 분발시키기 위한 계획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황당무계한 에너지 기획이라는 것이었다. 전후에 미군이 계산한 것을 보면 솔뿌리 기름(쇼콩유) 1.5L를 생산하려면 한 사람이 온종일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기획량대로 기름을 얻고자 할 때 일인당 약 2000kL의 조유(粗油)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하루에 125만 명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시 증류 가마로는 한 번에 300㎏ 정도의 솔뿌리를 처리하는 데 하루를 소요한다. 이 계획대로라면 약 3만7000개의 증류 가마는 하루에 약 1만t의 소나무 뿌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소나무 뿌리 매장량은 770만t 정도였으므로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일본 전국의 소나무는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고 모두 캐내야 한다. 산에서 소나무가 전멸한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는 어땠는가. 『일본해국연료사』에는 “20만kL”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정제된 송근유를 완성한 것은 1945년 5월 14일에 도쿠야마에서 처음 생산한 500kL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어떤 공식 기록에도 쇼콩유를 사용한 비행기는 나오지 않는다. 미군이 진주하여 그 기름을 지프에 넣고 시험운전을 한 결과 며칠 뒤에 엔진이 망가져 못 쓰게 되었다는 거다.

어떻게 이런 만화 같은 계획이 일본인·한국인 모두의 힘을 빼고 바보로 만들어 놓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닫힌 사회에서는 언제나 머리 나쁜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과 사람을 들볶는 것을 일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윗사람으로 앉아 있다는 점이다. 그 전형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본 육군이 제시한 병사의 값은 2전5리로 당시의 엽서 한 장 값이었고 소총이나 군마를 구입하는 데는 약 500엔으로 인명의 2만 배에 해당했다. 이런 계산법에서 나온 것이 돈 한 푼 안 들이고 동원할 수 있는 후방의 노동력이었으며, 그 안에는 잠자리나 잡으러 다니는 아이들의 젖 먹은 힘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북아시아를 하나로 만든 것이 세한삼우의 ‘소나무’였다면 그 아시아를 산산조각 낸 것은 소나무 뿌리를 캐낸 대동아전쟁이었다. 우리는 우리 땅을 지키지 못했기에 이 땅에 뿌리박은 소나무도 지킬 수 없었다. 소나무야, 세한삼우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구나.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양과 조개가 만난 한자의 나라’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1> 대동아의 신화 ⑤

[중앙일보]입력 2009.06.01 02:42 / 수정 2009.06.01 13:38

양과 조개가 만난 한자의 나라

암향부동(暗香浮動)하는 매화의 향기처럼 한자(漢字)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게 모르게 동북아시아를 하나로 이어 준 문화유전자 역할을 해 왔다. 알다시피 한자는 뜻글이어서 글자만 알면 말을 잘 몰라도 의사를 나눌 수 있다. 그러기에 본바닥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들도 “높은 봉우리의 후지산(孵士山)”이냐 “1만2000봉의 금강산”이냐를 놓고 토론을 벌일 수 있었다.

한자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문자 이상의 것이었다. 마치 그것은 생물의 DNA처럼 복제되고 증식되고 전파되면서 동아시아인의 문화유전자로서 작용해 왔다. 특히 일본의 가토 도루 교수의 새로운 한자 해석을 문화유전자 ‘밈’으로 대체해 보면 그 DNA의 지도까지 그릴 수 있다. 맨 꼭대기에 올라가면 3000년 전의 은(殷)나라가 만들어 낸 조개 ‘패(貝)’ 자와 주(周)나라에서 형성된 양 ‘양(羊)’ 자를 추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은나라 사람들은 중국의 풍요한 동방 지역에서 살던 농경족이어서 유형의 재화(財貨)를 중심으로 삶을 영위해 왔다. 우리는 이미 재화라고 할 때의 그 재(財)와 화(貨) 자에 모두 조개 패(貝) 자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조개 패 자는 고대의 화폐로 사용된 ‘자안패(子安貝)’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조개 패 변에 쓰는 한자들은 모두 돈과 관계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물건을 매매(賣買)하고 무역(貿易)을 하여 보물(寶物)을 얻는 그 모든 한자 말에는 조개 ‘貝’가 따라다닌다. 심지어 내가 학교에서 처음 받은 공책 표지 위에 커다랗게 찍힌 고무도장도 바로 이 ‘賞(상)’자였다.

한편 주나라 사람들의 조상은 중국 서북부의 유목민족으로 불모의 스텝(steppe) 지방이나 사막을 이동하며 살던 노마드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땅보다는 항상 ‘하늘에서 큰 힘이 내려오는’ 보편적인 일신교를 숭상하며 살았다. 자연히 양을 잡아 제례를 올리는 그 생활 풍습에서 양의 제물을 통해 선악(善惡)을 나누고, 의(義)와 불의(不義)를 가리고, 미운 것과 추한 것의 의미를 분별했다. 그러니까 은나라와는 대조적으로 주나라 사람들은 무형의 이념을 추구하는 데서 삶의 가치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의로울 ‘의(義)’, 아름다울 ‘미(美)’, 착할 선‘(善)’처럼 무형의 가치를 담은 ‘양’ 자의 문화유전자다. 식민지 아이들이 수백 번 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일본 육군의 노래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친다(天に代わりて不義を討つ)”에도 그 이데올로기의 한자 유전자의 흔적이 숨어 있었다.

동방계 농경집단인 은나라의 조개 ‘패’ 자가 만들어 낸 것은 현실주의적인 물질문화이고, 서방계 유목집단인 주나라의 양 ‘양’ 자가 구축한 것은 관념주의적 정신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이 충돌하고 혼합된 은주혁명(殷周革命)에서 오늘의 그 거대한 중국 문화의 틀(祖型)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래서 밖으로는 예의와 신의를 따지고 안으로는 실리를 계산하는 한족들은 조개와 양이 만난 문자의 나라에서 수천 년 동안 두 얼굴을 지니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인(商人)’이라는 말도 은인(殷人)에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은을 ‘商(상)’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이며, 나라를 잃고 물재를 거래하는 은나라 백성들이 생업을 일삼은 데서 오늘의 ‘상업’ ‘상인’이란 말이 생겨났다는 설이다.

그러고 보면 가토 교수의 그 조개와 양의 문화 읽기는 한족이나 중국 문화에서 그쳐서는 안 될 것 같다. 한국으로 그리고 왕인(王仁)을 통해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그 한자의 조형인 ‘패’와 ‘양’의 두 나선형 문화유전자가 우리의 머리와 가슴속으로도 복제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과 ‘패’의 한자 ‘밈’이 한국에 오면, ‘양’은 ‘이(理)’가 되고 ‘패’는 ‘기(氣)’가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거기에서 행인지 불행인지 ‘이’가 ‘기’를 누르면서 ‘양’이 조개 ‘패’를 압도한 조선조 500년의 역사가 전개된다.

한편 ‘양’이 일본 땅으로 건너가면 에도시대의 ‘부시도(武士道)’가 되고 ‘패’는 조닝(町人)의 상인문화로 변한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통신사를 비롯, 한국의 주자학을 들여옴으로써 병마(兵馬)를 충효(忠孝)로 바꾸는 통치를 폈다. 그래서 300년 가까운 칼싸움 없는 평화를 유지해 왔다. 탈아주의의 주역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아버지만 해도 일본의 서당인 데라코야(寺子屋)에서 아이들이 주판과 산수를 배우는 것을 분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자사(自死)의 일본사』를 쓴 모리스 방게의 증언대로 하녀가 없는 가난한 사무라이들은 밤에 몰래 얼굴을 가리고 가게에서 물건을 사 왔다는 것이다. 무사(武士)에도 ‘사(士)’자가 붙어 있으니 그들도 한국의 선비와 비슷한 ‘양’의 문화유전자를 지니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한자를 버리지 않는 한 일본의 내셔널리즘도 대동아도 모순에 빠진다. 그리고 식민지 아이들은 한(韓)·왜(倭)·양(洋), 세 한자 말을 알고 있어서 청요리는 물론이고 한식·왜식·양식을 혼돈하지 않고 가려 먹을 줄 알았으니까.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반도인(半島人)’입니다 joins.com/leeo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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