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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오피니언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2> 반도인 ①~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2> 반도인 ①

[중앙일보]입력 2009.06.02 02:05 / 수정 2009.06.02 08:10

외쳐라 토끼야, 토끼야 달려라

일본 사람들은 한국인을 비하할 때 ‘한토진(반도인·半島人)’이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자신들의 ‘시마구니 곤조(섬나라 근성)’를 깨닫게 되고 한국인들은 거꾸로 대륙의 중국, 일본의 섬과도 다른 반도인의 자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반도인’이라는 차별어에서 오히려 “금수강산 반도 삼천리”의 국토의식과 민족의식이 싹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요 패러독스다.

나라를 빼앗겼어도 아름다운 반도의 지형은 뚜렷하게 아주 분명하게 그 어린 멍든 가슴에 찍혔다. 그것이 토끼 모양으로 때로는 꽃이 만발한 무궁화 나무로, 혹은 육당의 ‘소년’지(誌)에서처럼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반도 지형은 로샤하의 잉크 자국 테스트 (Rorschach inkblot test)처럼 관찰자의 성격과 마음에 따라 제가끔 달리 보인다.

왕년의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한반도의 지형을 주먹을 쥔 팔뚝으로 보았다. 중국대륙에서 불쑥 튀어나온 한반도가 일본열도를 공격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征韓論)이요, 러일전쟁 때 참모총장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일본생명선(生命線)으로서의 한반도론이었다. 그리고 대동아 전쟁 때의 생존권 이론이었다. ‘생존권(生存圈)’이란 말은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사용한 지정학 용어 ‘레벤스라움(Lebensraum)’의 번역어다. 하지만 최근 일본판 위키피디아에 오른 자료를 보면 주일 독일대사관 주재무관이었던 하우즈호파가 한국을 합방한 일본의 팽창주의의 성공을 보고 착안해낸 용어라는 것이다.

한 국가가 자급자족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영토는 인구가 불고 그 능력이 증대되면 자연히 늘어갈 수밖에 없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생존권은 확장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확장은 국가의 권리이기도 하다는 침략주의의 정당성을 내포하고 있는 무서운 말이다.

유럽의 후진국가로 출발한 독일은 외침과 분할 점거된 경험이 있기에 영미세력과 대결 생존권을 확보하겠다고 나선 것은 일종의 지정학적 운명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은 대륙국가인 독일과는 다르다. 해양국가의 바다 덕분에 늘 그랬던 것처럼 일본은 세계를 제패한 몽골 대군의 침공에서도 비켜날 수 있었다. 생존권 이론을 들고 나와야 할 나라는 한국이면 몰라도 결코 일본은 아니다.

그래서 지각 있는 일본의 지식인들은 한반도의 지형을 주먹이 아니라 대륙의 앞가슴에서 나온 유두(乳頭)로 보았다. 일본열도는 그 한반도의 젖꼭지에서 흘러나오는 젖을 받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는 아기의 형상으로 보고 그 주변의 ‘이끼’와 같은 작은 섬들을 그 젖 방울들로 본 것이다.

식민지 아이들은 황국화의 교육만을 받은 것은 아니다. 더러는 ‘토끼’를 기르는 법도 배웠다. 학교 뒷마당은 늘 조용했고 토끼장의 토끼들도 언제나 소리가 없었다. 토끼 당번이 되면 나는 구호도 군가도 들리지 않는 이 토끼사육장에서 조용히 명상할 수 있었다. 토끼똥을 치우는 사육장 청소만 빼고는 토끼풀을 뜯어 오는 것이나 토끼에게 풀을 먹이는 것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토끼 눈은 언제나 울고 난 것처럼 빨갛고 입은 찢겨 있는데도 소리를 낼 수 없다. 달 속에서 떡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침략자의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기에 두 귀가 많이 커지고 공격자의 이빨에서 도망쳐야 하는 뒷다리만 발달한 토끼였다. 새끼를 낳아도 자기 냄새를 맡고 포식자들이 찾아올까봐 떨어진 곳에서 혼자 잠자는 것이 토끼의 모정이라고 했다.

훨씬 뒤에 안 이론이지만 산업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늑대처럼 눈이 정면에 달린 짐승들이라고 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 형의 독재자들은 먹이를 좇아 오직 한 방향으로만 달리는 ‘파라노이어’(편집광, 집중형인간)형 인간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지식 정보시대는 토끼나 사슴처럼 눈이 양옆에 달려 사방을 보면서 도주할 수 있는 ‘스키조프레니어’(분열증, 멀티 분산형)의 인간형이 주도권을 잡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토끼 당번을 하던 심심한 오후, 나는 토끼를 철사로 찔렀다. 소리라도 질러야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도 알 것이 아닌가. “외쳐라 토끼야, 토끼야 달려라.” 아마 나는 속으로 그때 그렇게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장독대와 툇마루’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3> 반도인 ②

[중앙일보]입력 2009.06.03 02:31 / 수정 2009.06.03 08:33

역사의 뒤꼍 한국의 장독대와 툇마루에 있는 것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손때 찌든 곳
한반도의 삶과 문화를 숙성시킨 생명 공간

“나라가 패망하니 남은 것은 산과 강뿐이요 / 성 안에 봄은 와도 풀과 나무만이 푸르렀구나(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나라 잃은 아버지들이 늘 마음속에서 외우고 다녔다는 두보의 시 한 구절이다. 나라 국(國)자에서 네모난 테두리 ‘口’를 빼보면 더욱 그 뜻이 명확해진다. 국경을 잃은 나라는 ‘혹(或)’자가 되는데 옛날에는 나라 국자를 그렇게 썼다. 다시 그 글자에서 성곽의 ‘口’를 빼면 병기(兵器)를 의미하는 ‘과(戈)’자만 남는다. 하지만 성을 잃으면 무기의 의미도 없어진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것들을 받쳐주고 있는 ‘한 일(一)’자의 땅이다. 그것이 산하며 초목인 자연이다.

그런데 반도가 바다와 대륙 사이에 있는 것처럼 그 반도의 문화에는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중간 공간이 존재한다. 그것이 툇마루와 장독대가 있는 한국의 뒤울안 공간이다. 군화 소리가 아무리 크게 울려도, 대문 빗장이 벗겨져 바깥바람이 세게 몰아쳐도 그것은 집안 앞뜰에서 멈춘다.

놋주발과 놋대야, 모든 쇠붙이를 공출로 걷어가던 날, 손때 묻은 그 살림 도구를 망치로 조각을 내던 날, 어머니가 그 아픔을 견뎌내신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인기척이 없는 뒤꼍 툇마루와 장독대에서는 장들처럼 조용히 아주 조용히 부글대는 생명들이 발효되고 있었다. 분을 삭이고 오랜 소망의 기도가 숙성되어 간다.

그것이 외적들이 침략하기 훨씬 그 이전부터 한반도의 삶과 문화를 숙성시킨 생명 공간이었다. 모진 시집살이를 견뎌낸 곳도, 남편의 구박을 이겨낸 곳도 바로 눈물방울과 손때로 찌든 그 툇마루였다. 어떤 역사도 범하지 못하는 그 집안 장맛을 담은 장독대였다. 정말인가. 미당 서정주 시인이 쓴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란 시 한 편을 읽어보면 알 것이다.

“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 한 먹 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 날마다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로 거슬러 올라가는 ‘툇마루’는 이미 우리가 읽었던 이상(李箱)의 연작시 ‘오감도 시제2호’에 나오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장소다. 아버지 손에 든 도끼와 무기(戈)를 빼앗겨도 천기에 따라서 장독 뚜껑을 열고 닫는 어머니의 손은 묶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라를 떠나 뿔뿔이 흩어져도 우리는 그 땅을 모국(母國)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기억할 것이다. “어머니 속에 바다가 있었네”라는 그 글에서 우리는 20억~30억 년 전에 모태에서 겪었던 생명의 역사. 그까짓 36년은 불똥만도 못한 그 왕양한 자궁 속의 바다 말이다. 그런데 바다와 육지를 이어주는 매개 공간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바다의 생명체들이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겠는가. 그 매개 공간이 반도이고 그 반도를 집으로 옮겨 온 것이 우리의 툇마루요, 장독대다.

과장이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툇마루 공간은 건축적으로 볼 때 안도 아니요, 바깥도 아니다. 그리고 장독대 역시 지붕이 있는 내부 공간도 아니면서 비와 이슬에 그냥 노출된 한데 공간도 아니다. 장(醬) 문화 자체가 화식과 생식 사이에 존재하는 발효식품이다.

의지할 곳 없을 때 뒤울안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따주신 오디를 약처럼 먹고 숨을 돌리는 아이. 오디는 선악과처럼 산고의 고통 없이는 생명을 낳지 못하는 이브의 혈액을 가장 많이 닮은 열매다. 붉다 못해 까매진 오디 물을 입술에 묻히고 외할머니 얼굴과 하나가 되는 툇마루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모계로만 이어져 내려온다는 DNA의 ‘미토콘드리아’가 보인다. 우리의 몸, 우리의 피, 그리고 모든 흙 속에 내재해 있는 반도의 미토콘드리아를 찾아가 보자.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보자기로 싸는 지구와 우주’입니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4> 반도인 ③

[중앙일보]입력 2009.06.04 02:16 / 수정 2009.07.06 14:10

보자기를 버리고 란도세르를 멘 아이들

놀랍다. TV에 나와 어린 학생들이 퀴즈 문제를 푸는 것을 보면 교수 생활 50년 넘게 한 나도 풀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 그리 신통하게 잘 맞히는지 얼굴이 뜨거워질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게 물어보자. “란도세르가 뭐니?” 골든벨 장학생이라도 입을 다물 것 같다.

눈을 떠 보니 그렇게 갖고 싶었던 란도세르가 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밤차를 타고 오신 아버지의 선물이었다. 가슴에 끌어안는 순간 그윽한 가죽 냄새가 났다. 분명 그것은 시골 아이들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무명 책보에 밴 김치 국물 냄새가 아니다. 책보를 풀고 매는 번거로움도 이제는 끝이었다. 상자에 뚜껑을 단 것 같은 란도세르 안에는 책·필통·도시락을 넣어 두는 칸들이 있어서 아주 편리했다. 두 손은 자유로울 것이고 등 뒤의 가방은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할 것이다. 나는 도회지 아이처럼 뻐기고 걸으면 된다.

그러나 그 기쁨과 행복은 날이 갈수록 거품처럼 꺼져 가기 시작했다. 책보는 풀면 그만이다. 자리를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책상 서랍에 보자기를 접어 넣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가방은 책과 필통을 꺼내도 모양은 그대로다. 의자에 걸어 놔야 하는데 아이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걸린다. 툭툭 칠 때마다 내 가슴이 얻어맞는 것 같다. 흠집이라도 났는지 신경이 쓰인다.

그 “걸리적거리는 물건”을 메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쩌다 어른들한테 살구나 옥수수 같은 것을 얻게 되어도 들어갈 곳이 없다. 둥근 수박도, 길쭉한 병, 네모난 각도 무엇이나 다 쌀 수가 있었던 책보가 아니다. 크기와 모양만이 아니다. 창에서 햇빛이 들어오면 아이들은 책보로 가릴 수 있었지만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는 란도세르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다.

보자기는 싸는 것만이 아니라 깔고 가리고 매고 덮고, 요술보자기처럼 필요에 따라 변하고 상황에 따라 적응한다. 신축자재, 원융회통하는 것이 보자기의 생리요, 철학이다. 그래서 도둑이 담 넘어 들어올 때는 얼굴에 쓰고 들어오고 담 넘어 나갈 때는 싸 가지고 나가는 것이 바로 그 보자기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의 초기능 007가방을 만들어 낸 서양 사람이지만 굴뚝으로 들락날락하는 산타 할아버지만은 보따리를 메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가방 든 산타클로스를 생각할 수 없듯이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제임스 본드를 상상할 수 없다. 문화와 문명의 차이 때문이다.

책보와 책가방은 도시와 시골, 부와 빈, 근대와 전통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젠더를 나누는 문명의 대위법이요, 그 기호(記號)였다. 자랑스럽게 메고 다닌 란도세르가 그저 책가방이 아니요, 동서양 100년 근대사의 폭약을 등에 메고 다녔다는 것을 어떻게 코흘리개 아이가 눈치챌 수 있었겠는가.

광활한 육지와 왕양한 바다에서 몰아닥치는 그 이질적인 많은 문화를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싸려면, 그리고 그것을 상황에 따라 싸고 풀려면 보자기 이상의 것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칼 차고 총 들고 싸우는 남자들에게는 란도세르 같은 배낭이, 갑옷같이 튼튼한 가죽가방이 필요하지만 쫓기는 아녀자들의 피란 보따리는 천으로 된 보자기 같은 것이어야 한다. 반짇고리 같은 것에 담겨 있는 일상의 자잘한 생활용품들은 란도세르 같은 칸막이가 필요 없다. 서로 어울리고 혼재하면서 쌈을 싸 먹듯이 그렇게 섞어서 지내는 거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한국 여인의 뒷모습, 긁어 놓은 것 같은 회색 페인트의 흔적 너머로 어슴푸레 떠오르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란도세르가 어떻게 내 등 뒤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 그 퀴즈 문제를 풀지 못하면 한국인이 무엇인지, 일본인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아시아와 서양이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란도세르라는 말 자체가 일어인지 영어인지 어느 우주인의 말인지 정체불명의 말부터 찾아가 보는 책가방 작은 여행을 떠나 보자.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서양 문명 상자 속의 집단기억’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5> 반도인 ④

[중앙일보]입력 2009.06.05 02:24 / 수정 2009.06.05 11:57

서양문명 상자 속의 집단기억을 넘어

내가 어릴 적 메고 다니던 란도세르(ランドセル)가 일본어도 영어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5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아직도 그 원적이 불분명하지만 네덜란드 말의 ‘란셀(Ransel)’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원래는 통학용 책가방이 아니라 일본의 에도 말경 서구의 군사제도와 장비를 들여올 때의 군인 배낭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충격을 받은 것은 자랑스럽게 메고 다녔던 그 란도세르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바로 그 이등박문(伊藤博文)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대정천황(大正天皇)이 황태자 시절 학습원 초등과에 입학했을 때 이등박문이 축하선물로 바친 게 그 란도세르였다는 것이다. 그 뒤 학습원에서는 학생들의 마차· 인력거의 통학을 금지하면서 정식으로 통학용 가방이 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것이 일반에게 보급되어 21세기의 오늘날에도 아이들은 그와 똑같은 란도세르를 메고 학교에 다닌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초 일본의 월간 종합지 ‘중앙공론’에 ‘보자기 문화론’을 연재하면서였다. 그리고 그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이 보자기가 일본 고유의 생활문화라 믿고 있었으며 영문 표기 자체를 ‘래핑 클로즈’가 아닌 일본어에서 딴 ‘HUROSHIKI’로 세계 브랜드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누가 먼저 만들었느냐를 놓고 미국과 프랑스가 실랑이를 벌이는 것처럼 보자기의 원조 다툼을 벌이자는 것은 아니었다. 매화가 ‘재패니즈 플럼(japanese plum)’, 은행이 ‘긴고(Ginko)’, 그리고 단정학이 ‘그루스 자포넨시스(Grus japonensis)’로 알려진 것처럼 보자기마저 일본의 ‘후로시키’로 알려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서였다. 아니 그보다도 네모난 천만 있으면 보자기가 되는 것인데도 그것을 일본 고유의 것이라고 믿고 있는지 007 가방밖에 모르는 서양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통해 보자기 문화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였다.

어렸을 적에 나를 매혹시킨 란도세르, 그러나 실제 메고 다녀 보면 거추장스럽고 융통성 없는 딱딱한 가죽 상자에 지나지 않은 란도세르 속에 서구문명의 비밀이 숨어 있을는지 모른다.

연재 테마가 ‘보자기문화론’이라고 하자 편집부장은 “아니 한국에도 보자기가 있습니까?”라고 어이없는 질문을 한다. “물론이지요. 네모난 천이면 다 보자기지 그것도 없는 나라가 있나요. 다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소프트웨어에서 문화가 생기는 것이지요.” “하긴 그렇군요.” 그는 한참을 볼펜을 돌리고 있더니 “좋아요.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라 ! 그렇다 쳐도 일본의 보자기가 한국보다….” 나는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일본에도 야키니쿠(불고기)집 많잖아요. 거기에서 쌈 싸먹은 적 없어요. 한국 사람들은 물건만 아니고 음식도 보자기처럼 싸서 먹는답니다.” 차마 ‘야키니쿠’까지 일본 것이라고 우길 용기가 없었던지 그는 피식 웃으면서 “그건 그렇다 쳐도 보자기 하나 가지고 어떻게 일 년치를 연재하실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서양의 트렁크와 비교하는 것이지요. 태초의 인간들이 무얼 보관하거나 옮길 때 두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겠죠. 나뭇잎으로 싸거나 나뭇등걸 안에 넣거나. 그렇지요. 싸는 쪽이 아시아형 보자기 문화고, 나뭇등걸을 파고 넣는 것이 서양형 가방문화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제야 편집부장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트렁크와 보자기를 비교한다?”라고 혼잣말처럼 말하면서 또 볼펜을 돌리려 하기에 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영어 사전 열어 봐요. 트렁크는 분명히 나뭇등걸로 나와 있을 겁니다. 수트케이스란 말이 거기에서 생긴 것이지요. 롤랑 바르트가 뭐라 했는지 아세요? 노아의 방주를 바다 위에 뜬 커다란 트렁크라고 했지요 . 하하. 그렇지, 동물들을 원형별로 분류해서 칸막이에 집어넣은 거대한 상자. 그것이 서양 사람들이 만들어낸 세계 시스템이라는 것이지요. 그 근대 산업주의에 일본식 군국주의를 가미해서 만든 것이 란도세르 문화고요. 양복을 보세요. 그게 어디 옷입니까. 갑옷이지. 단추와 허리춤은 한 치의 에누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한국의 바지와 치마, 그리고 옷고름을 보세요. 몸을 갑옷에 넣는 것이 아니라 보자기처럼 쌉니다. 바지 끈이나 옷고름으로 얼마든지 풀었다 조였다 하지요. 서양에서는 도시도 미리 상자처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들어가지만 한국이나 일본은 사람이 살면서 길이 생기고 블록이 만들어지지요. 어느 쪽이 좋고 나쁘다가 아니라 ‘넣는 문화’와 ‘싸는 문화’를 비교해 그 특성을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연재는 그렇게 시작돼 책으로 출간되었다. 21세기가 되자 아스만 부부가 쓴 『문화의 기억』이라는 책이 화제를 낳았는데 내 말처럼 서구문명을 ‘상자’ 속에 든 집단기억으로 풀어낸 내용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국립민족학박물관에서는 세계 보자기 대전시회가 열렸다. 한국의 보자기는 그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는 서서히 가방에서 보자기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짚신과 고무신을 신고 싸울 수 있을까’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6> 반도인 ⑤

[중앙일보]입력 2009.06.08 02:49 / 수정 2009.06.08 08:17

짚신과 고무신을 죽인 것은 군화다

보자기의 ‘싸는(包) 문화’와 가방의 ‘넣는 문화’는 신발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구두는 좌우가 다르고 치수에도 한 치의 에누리가 없다. 자기 것이 아니면 들어가질 않는다. 그래서 원래는 다람쥐 가죽이었던 것이 유리 구두로 바뀌게 된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단순한 오역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유리 구두이기에 이 세상에서 오직 꼭 들어맞는 한 사람의 신발 주인을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이 왼쪽· 오른쪽 구분도 없고 발에 따라서 늘었다 줄었다 하는 짚신이었다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나와 우리의 구분이 확실치 않아서 때로는 ‘우리 마누라’라고 말하는 한국인에게는 꽉 맞는 유리 구두가 아니라 오른발이든 왼발이든, 큰 발이든 작은 발이든 웬만하면 넉넉하게 포용하는 짚신이 편하다. 그것도 성에 안 차서 알에서 벌레들이 나오는 철에는 밟혀도 죽지 않게 느슨하게 만든 오합혜(五合鞋)를 신고 다닌 한국인들이다.

그리고 ‘유리 구두의 나라’ 서양문명이 몰아닥쳤을 때에도 한국인이 창안한 것은 군화가 아니라 독창적인 고무신이었다. 짚신보다 훨씬 더 신축자재의 신발로 역주행한 것이다. 동이든 서든 신발처럼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적 동질성을 상징하는 물건도 없다. 방금 나는 ‘신발’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이라고 했어야 옳다. 신발은 맨발과 반대되는 것으로 “신을 신은 발”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신’을 벗는다고 하지 않고 ‘신발’을 벗는다고 한다.

맨발이 자연이라면 신발은 문명이요 문화다. 흙과 인간을 분리하면서 동시에 연결해 놓는 아슬아슬한 그 경계선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그 문화의 동질성을 확인한다. 한국인을 비하할 때 일본인들이 “반도인”이라고 하는 것이나 한국인이 일본인을 “쪽발이”라고 하는 것은 말 자체를 놓고 보면 욕이 아니다. 단순히 지리적 특성과 신발을 신는 문화적 특성의 차이를 지적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다만 인터넷상에서 유포되고 있는 “지정학의 정의 제4조-인접하는 나라는 적국이다”라는 낡은 개념 때문이다. 그러나 지정학(geopolitics)적 관점을 요즘 조금씩 유행하기 시작한 지리문화(geoculture)적 소통원리의 입장에서 보면 “반도인” “쪽발이”는 새로운 창조적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다.

이 지상에서 ‘보자기 문화’를 가장 많이 공유하고 그것을 발전시켜온 나라는 한국과 일본이다. 도토리를 따먹고 살던 채집시대의 조문인(繩文人)들이 유라시아 대륙-한반도에서 야요이들(生人)이 들어와 쌀농사(稻作)를 짓는 농경시대를 연다. 그래서 헤이안(平安朝) 때의 황실이나 귀족들이 신던 ‘구쓰(沓)’는 그들도 인정하고 있듯이 한국의 ‘구두’란 말에서 비롯된 것처럼 발을 통째로 싸는 형태였다 .

육식 생활을 하는 서구 사람들이 고기를 먹고 난 뒤 그 동물 가죽으로 ‘구두(靴)’를 만들어 신었던 것처럼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벼를 털고 남은 짚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다. 그러나 짚으로 만드는 신은 한국과 같았지만 고온다습의 기후에 맞도록 일본 사람들은 엄지발에 끈을 끼고 발을 전부 노출시키는 쪽발이 모양의 ‘조리(草鞋)’와 ‘게다(下)’를 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고무신을 만들 때 그들은 다비(足袋)의 천을 고무로 개량한 ‘지까다비’를 만들었다. 엄지발가락과 다른 발가락이 갈라진 모양으로 발 전체를 감싸기 때문에 발의 치수가 조금만 틀려도 들어가지 않는 신발이 되었다. 개화기에 와서 고무신과 정반대의 신발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운명을 갈라놓았다.

개화기 때 서양사람들이 지까다비를 보고 공장에 투자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쪽발의 신발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한국과 공유하고 있던 보자기의 ‘싸기’ 문화가 서구적인 ‘넣기’ 문화로 변질되어 간 것이다. 신발만이 아닐 모든 사고체계도.

게다를 보라. 고온다습의 동남아 지방에도 일본과 똑같은 게다가 있다. 그런데 엄지발을 꿰는 구멍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각기 치우쳐 있다. 좌우가 다르게 디자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 게다는 한국의 짚신처럼 오른발·왼발을 가리지 않고 어느 발에나 신을 수 있도록 한가운데 구멍을 뚫어 좌우 개념을 하나로 어우른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서양의 구두와 달리 한국인들은 좌우가 없는 융통성과 신축성이 있는 신발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반도적 특성이다. 이 정신은 일본 문화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이웃 나라인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보면 이해가 충돌하는 적국이지만 지리문화적 소통관례를 통해서 보면 이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보자기형 짚신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제(師弟)요 친구다. 그러고 보면 한국과 일본의 보자기 문화, 짚신 문화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의 군국주의 군화였다. 왜냐하면 한국의 짚신과 고무신, 그리고 일본의 조리·게다처럼 전쟁을 하기에 불편한 신발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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