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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오피니언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7> 언 강의 겨울 낚시 ①~④/‘시즌Ⅰ’을 마치며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7> 언 강의 겨울 낚시 ①

[중앙일보]입력 2009.06.09 02:10 / 수정 2009.06.09 08:19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강

군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아이들이 열심히 불렀던 색다른 창가(唱歌)가 있었다. “♪나무베고 새끼꼬고 짚신을 삼아서 부모님 공양하고 아우를 돌보고 형제 사이좋게 효행을 다하니 우리가 배울 것은 니노미야 긴지로(二宮金次郞)….”

전시의 기름을 보급하기 위해 운동장을 모두 아주까리 밭으로 만든 교정 한구석에 그 노래의 주인공 니노미야 긴지로의 동상이 서 있었다. 등에는 나뭇짐을 지고 손에는 책을 들고 읽는 모습이 우리 또래 아이라고 하는데도 늙어 보였다.

‘바쿠단 상요시(爆彈三勇士)’, 구군신(九軍神) 그리고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처럼 천황을 위해 죽자는 세상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우애 있게 자라면서 열심히 책을 읽는 니노미야 긴지로는 분명 일본 사람인데도 이웃 동네 할아버지쯤으로 보였다. 더구나 그는 짚신과 관계가 깊다. 밤마다 짚신을 삼고 아침 일찍 그것을 팔아 푼돈을 모은다. 그렇게 시작해 몰락한 집안을 살리고 물건을 아껴 쓰는 법과 농사짓는 법을 개량하여 나중에는 기근으로 죽어가는 마을 전체를 일으켜 세웠다. ‘사쿠라마치’를 필두로 수십, 수백의 농촌을 빈곤과 게으름과 기근에서 구해낸 ‘니노미야’는 총칼이 아니고서도 영웅이 될 수 있는 길을 걸었다.

그의 농사법 개량과 수차(水車)와 제방을 쌓는 신기술, 그리고 고리대금을 하지 않고서도 돈을 당당하게 증식하는 그 모든 놀라운 절학들은 한 켤레 짚신, 한 권의 책에서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길가에서 다 해어진 짚신을 가슴에 안고 기도하는 할머니의 짚신 공양(供養)에서 큰 감명을 받는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네 몸을 해칠 때까지 나에게 바쳤으니 이제는 네가 나온 곳으로 돌아가거라. 그 논에서 퇴비가 되어 새 볏짚으로 자랐다가 다시 짚신이 되거든 또 함께 살자.” 할머니의 기원대로 짚신은 순환한다. 논에 버린 짚신은 다시 벼가 되어 자라고 그 벼는 짚을 남기고 죽는다. 짚은 새 신발로 태어났다가 닳게 되면 다시 죽어 논바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끝없는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발견하고 그 소모와 재생산의 되풀이에서 부를 얻는 니노미야의 마을 부흥의 정신이 생겨난다.

그리고 나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한 권의 책이 무엇인지 늘 궁금해 했지만 책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어린 나이에도 잘 알고 있었다.

뜰아랫방에는 신조사(新潮社)판 ‘세계 문학전집’ 36권 한 세트가 고스란히 서가 속에 꽂혀 있었고 형님들이 방학 때 읽다가 두고 간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등화관제 속에서 나는 전구에 검은 갓을 씌워놓고 몰래 그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일장기와 군가와 노기다이쇼(乃木大將)와는 다른 이야기들 그리고 일본 신들과는 또 다른 신들의 신화가 펼쳐진다. 그러다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나는 고본 책갈피 속에서 찢긴 노트장에 쓴 시 한 편을 발견했다.

“아 내 동생아 너를 운다/너 부디 죽지 말거라/ 막내둥이로 태어나 부모 정을 독차지한 너/ 부모님이 너에게 칼날 쥐어주고 사람 죽이라고 가르쳤으리요 /사람을 죽이고 죽으라고 스무 네 해 동안 너를 키웠으리요.” 좀 어려운 고전체로 쓴 시였지만 아들을 징용 보내고, 딸을 정신대에 보내고 장독대에서 몰래 숨어서 우는 여인네들과 같은 목소리였다. 교정을 아주까리 밭으로 갈아 엎어도 니노미야 긴지로의 동상이 서 있는 공터가 남듯이 아무리 등화관제로 칠흑 같은 어둠을 만들어도 찢어진 노트장 위의 시를 읽는 빛을 가리지 못하듯이(뒷날 나는 그것이 러일전쟁 때 쓴 여류시인 요사노 아키고의 반전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강은 얼어도 그 얼음장 밑으로는 따뜻한 물이 흐른다. 식민지 교실에서도 그렇게 배웠다. 간물의 비중은 섭씨 4도일 경우 제일 무겁다. 이 때문에 윗물은 빙점 하에서 쉽게 얼지만 그 바닥에 가라앉은 물은 얼지 않고 흐른다고. 겨울 낚시꾼처럼 식민지의 얼음장을 조금 뚫고 들여다보면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헤엄치고 있는 고기 떼들의 아가미가 보인다. 고기만이 아니라 숨 쉬고 움직이고 번식하는 작은 생물들이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문 채 초승달처럼 자라고 있다. 섭씨 4도 생명의 강바닥에는 한국인만이 아니라 “미나 미나 고로세(모두모두 죽여라)”라고 노래했던 짱꼴라 시나징(중국)도 있었고 고무나무가 있다는 열대의 남방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기치구 베이에이(鬼畜米英)”라고 불렀던 서양 사람들도 살고 있다. 알고 보면 일본 사람들도 니노미야 긴지로처럼 요사노 아키고처럼 얼음장 밑의 강물처럼 함께 흐르고 있었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세 가지 파랑새’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8> 언 강의 겨울 낚시 ②

[중앙일보]입력 2009.06.10 01:55 / 수정 2009.06.10 08:07

세 가지 파랑새를 찾아서

사람들은 한평생 같은 동화를 세 번 읽는다고 한다. 한 번은 어려서 어머니가 읽어주는 동화이고 두 번째는 자기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려고 읽는 동화다. 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는 늙어서 자기 자신의 추억을 위해서 다시 읽는 동화다. 첫 번째는 배우는 동화, 두 번째는 가르치는 동화, 세 번째에 와서 비로소 그 동화는 생각하는 동화가 되는 것이다. 동화뿐인가. 모든 삶의 이야기는 이와 같은 세 가지 단계로 끝이 나는 법이다.

문제는 일생 동안 세 번씩이나 듣고 읽을 만한 행복한 동화(동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제 식민지 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이 갖고 있는 ‘파랑새’ 이야기다. 내가 맨 먼저 들은 파랑새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그 민요였다. 그다음 파랑새는 총독부 교과서에 실린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동시 ‘아카이 도리 고토리(赤い鳥小鳥)’ 속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내가 스스로 찾아 읽은 마테를링크의 동극(童劇) ‘파랑새’다. 국적도 다 다르고 양식도 동화가 아닌 민요와 창작 동요와 동극이었지만 이 세 가지 파랑새는 어느 동화보다도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찍혀 있다. 제 아무리 크고 강한 나라에 태어난 행복한 아이라도 나처럼 한·일(韓·日)과 서양의 세 파랑새 이야기를 글로벌하게 간직하며 자란 경우란 없을 것이다.

내가 맨 처음 만난 파랑새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전래 민요로서 자장가로도 불렀다 하니 어쩌면 나는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동네 아이들은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그 민요를 자주 불렀지만 나에게는 울고 가는 청포장수나 사사조(四四調)의 느린 가락이나 모두가 구슬프게 들렸다. 콩밭은 알아도 녹두밭은 모르고 도토리묵은 알아도 청포묵은 몰랐던 아이. 더구나 녹두를 갈아 청포묵을 쑨다는 것을 알지 못해 왜 녹두밭에 파랑새가 앉으면 청포장수가 울고 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 그리고 또 파랑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아이는 그냥 논에 앉는 참새들처럼 상상 속의 파랑새를 쫓아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그 노래는 내 머리에 그런 못을 박았다. 더 큰 못이 박혔었더라면 그 파랑새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 파랑새는 치루치루와 미치루(일본어로 번역된 책에는 ‘칠칠’과 ‘미칠’이 그렇게 표기되어 있었다)가 찾아다닌 행복의 ‘파랑새’와는 정반대였다. 하나는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끝없이 쫓아다녀야 할 파랑새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와 앉지 못하도록 쫓아내야만 하는 파랑새였다. 녹두꽃이 지고 청포장수가 울고 가는 불행한 풍경, 슬픈 이야기에서는 미움과 부정의 힘이 생산된다.

그리고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는 기억의 나라, 밤의 나라, 숲과 행복과 미래의 나라를 차례차례 순례하면서 먼 나라 낯선 나라들을 찾아 모험을 한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처마 밑 새장 안의 비둘기가 바로 자기네들이 찾아다녔던 파랑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떠날 때는 몰랐는데도 자기 집 새가 더 파랗게 변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집에서 멀리 떠나면 떠날수록 현실에서 먼 꿈을 꿀수록 가까이에 다가오는 행복의 새 그리고 그것이 칠칠과 미칠 그리고 병든 이웃소녀를 행복하게 하는 긍정의 힘을 낳는다. 그래서 이 두 파랑새는 역사를 움직이는 부정과 긍정의 두 둥지를 내 가슴에 틀었다.

그런데 불행과 행복의 파랑새의 텍스트 읽기는 세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변하게 된다. 어른들은 녹두밭은 그냥 녹두밭이 아니라 동학군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봉준(全琫準)은 어릴 때 몸집이 작아 녹두라는 별명이 붙어서 녹두장군이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포장수는 동학군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민중이라고 했다. 물론 녹두꽃을 떨어뜨리는 파랑새는 동학군을 멸하는 푸른 제복의 일본군이다. 그런데 어디에서 들었는지 다른 아이들은 전봉준의 성 전(全)자에는 팔(八)과 왕(王)자가 들어 있어서 팔왕이라고 읽혀진다며 그래서 파랑새는 팔왕의 전봉준이 된다는 것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는 어이 널라왔니/ 솔잎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널라왔지”의 가사는 시대를 잘못 알고 거사를 했다 실패한 전봉준을 한탄하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되었다가 일순간에 녹두장군이 되는 파랑새. 이 현기증에 또 하나의 일본 텍스트 기타하라 하쿠슈의 동시 ‘파랑새’를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 제목은 ‘파랑새 작은새 어째어째 파랗지’입니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9> 언 강의 겨울낚시 ③

[중앙일보]입력 2009.06.11 02:22 / 수정 2009.06.11 15:38

파랑새 작은 새 어째어째 파랗지

빨간새 작은새 /어째어째 빨개/ 빨간 열매 따먹었지.

하얀새 작은 새/ 어째어째 하얘/하얀 열매 따먹었지.

파란새 작은 새 /어째어째 파란가/ 파란열매 따먹었지.

내가 만약 식민지 교실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요즘 아이들처럼 영원히 기타하라 하쿠슈의 이 동요를 모르고 자랐을지 모른다. 그리고 한두 살만 더 나이가 많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는 아이였더라면 하쿠슈의 ‘파랑새’는 물론이고 녹두밭에 앉는 ‘파랑새’ 칠칠과 미칠의 ‘파랑새’가 아니라 서왕모의 전설의 중국 ‘청조(靑鳥)’밖에 몰랐을 것이다.

신화시대부터 새는 언제나 인간의 영혼(관념)이나 마음을 담은 상징물로 노래되어 왔다. 그런데 이 동요의 파랑새에는 어떤 의미도 느낌도 담겨 있지 않다. 파란 새는 파랗고 빨간 새는 빨갛고 하얀 새는 그저 하얗다. 어느 것이 더 아름답고 어느 것이 더 선하고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색깔만 다를 뿐 모두가 그냥 ‘작은 새’일 뿐이다. 이런 동요 속에서 색깔 논쟁은 무의미하다.

파랑새가 파란 열매를 따 먹어 파랗다는 것은 전연 과학적인 인과관계를 무시한 것이다. 단지 이미지의 현상적 연관성이 있을 뿐, “파랑새가 녹두밭에 앉으면 청포장수가 울고 간다”와 같은 어떤 논리적 인과의 사슬도 발견할 수 없다. 일본말의 ‘나제(なぜ)’는 원인을 캐고 결과를 따질 때 쓰는 ‘왜’ ‘어째서’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두 번이나 겹친 ‘なぜなぜ’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답하는 말은 너무나 싱겁고 엉뚱한 선문답으로 되어 있다. 과학적 인과관계가 전연 소거돼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듣고 자란 나에게는, 군가를 부르며 학교에 다닌 나에게는 참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동요일 수밖에 없었다.

이 동요는 1918년 아동문학지 ‘빨간새(赤い鳥)’의 창간호에 게재된 것이다. 작자인 하쿠슈는 “이 작품이야말로 내 동요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그 근원이란 바로 일본의 전통적 동요인 ‘와라베 우타(わらべ歌)’를 살려 당시의 독자에 대응하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려는 정신이다. 실제로 그는 홋카이도(北海道) 오비히로 지방의 자장가에서 이 동요의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떡을 쪄 빨간 산에 올라가면 빨간 새가 쪼아 먹고 /파란 산에 올라가면 파란 새가 쪼아먹고 하얀 산에 올라가면 하얀 새가 쪼아먹는다”는 내용이다.

아동문학지를 직접 창간한 작가 스즈키(鈴木三重吉)의 말을 들어보면 그 뜻이 더욱 명확해진다. 그는 “저급하고 어리석은 정부가 주도하는 창가나 설화에 맞서 아이들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이야기와 노래를 창작해 세상에 전파하는 운동을 벌이기” 위해 아동잡지 ‘빨간새’를 창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대동아 전쟁이 일어나 동요를 압살하고 군가 일색으로 아이들을 세뇌하게 될 날이 올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일본의 영웅인 모모타로를 남의 나라의 보물을 빼앗아온 침략자로 그린 아쿠타가와가 이 운동에 가담해 있었던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일본을 군국화한 천황 원리주의자들이 군가를 낳았다면, 에도 때의 와라베 우타(동요)를 되살려 ‘사물을 나타나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이른바 사생파(寫生派) 문인들은 하쿠슈 같은 탈이데올로기와 탈원리주의 창가와 동요를 창조해 낸 것이다. 36년 동안 식민체제 밑에서 시달린 한국인들은 군국주의 일본 천황 원리주의에 가린 일본의 또 다른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일본의 판화 우키요에, 에즈라 파운드 같은 20세기 초 이미지스트들에게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하이쿠 문학 등을 우리는 제대로 읽지 못했다. 파랑새에 단지 파랗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탈이데올로기의 즉물적 파랑새는 나에게 파란 지우개를 주었다. “아가야 울지 마라 잘 자라 우리 아기. 아빠는 씩씩한 힘센 군인 그 아이가 왜 울어… 먼 만주 벌판 비족 토벌하고 개선하는 아빠의 선물은 귀여운 우리 아기의 데쓰가부토(鐵帽).”

갓난아기에게 피비린내 나는 철모를 선물하겠다는 이 끔찍한 ‘군국 자장가’를 지울 수 있는 파란 지우개가 다름 아닌 이 하쿠슈의 ‘파랑새’였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바다를 발견한 한국인은 무섭다’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50·최종회> 언 강의 겨울낚시 ④

[중앙일보]입력 2009.06.12 01:42 / 수정 2009.06.12 08:12

바다를 발견한 한국인은 무섭다

우리는 열 달 동안 어머니 태내에서 20억~30억 년의 생명 진화과정을 겪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한국인 이야기를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내 또래 닭띠(계유생) 아이들은 6년 동안 ‘국민학교’ 공간에서 36년 동안의 식민지 상황과 그 역사를 치르고 해방된 한국 땅에 태어났다. 요즘 아이들이 잘 본다는 미국 드라마처럼 내 한국인 이야기 ‘시즌 원’은 그렇게 끝난다.

태내는 어두웠다. 그러나 알고 보면 폐쇄적인 공간에서도 탯줄을 통해 바깥과 교신하고 태어난 뒤에 홀로 서는 연습도 했다. 식민지 교실도 깜깜했다. 하지만 아무리 학교 담이 높아도 후문이 있고 몰래 드나들 수 있는 개구멍이 있다.

그곳을 통해 세 가지 파랑새들이 아이들의 가슴으로 날아와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일장기가 걸린 교문이 활짝 열리고 우리가 독립 공간으로 향해 날아갈 때 그 파랑새들은 우리의 깃이 되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칠칠과 미칠의 파랑새는 수천 년 대륙만 보고 살아온 한국인에게 바다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사학자들은 그것을 ‘한국의 근대화’라고 부르고 있지만 겨우 열 살을 넘긴 아이들은 그저 ‘양(洋)’이라고 불렀다. 남자는 쓰메에리의 제복과 여자는 몸뻬를 입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왜복(倭服)’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한복 옆에 있는 것은 ‘양복’이었다. 한식에는 양식이, 한옥에는 양옥이 있었다. ‘한(韓)’자에 대응하는 말은 ‘왜’가 아니라 바다 ‘양(洋)’자였던 것이다. 모든 물건이 ‘양품(洋品)’으로 변하면서 바가지까지 양재기가 된다. 신작로의 양버들(포플러), 돼지 우리의 양돼지 등 모두가 바뀌어갔다.

어머니도 이제는 양산을 쓰고 집안에서는 인장표 싱어 미싱을 돌린다. 아버지는 개화경(開化鏡·안경)에 개화장(開化杖)이다.

시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문단은 지난해에 근대시 100년을 맞이했다. 육당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제목 그대로 한국 최초의 신체시는 바다를 예찬하는 노래였다. “철썩 철썩 우르르쾅” 아직 바다가 ‘해(海)’로 표기돼 있었지만 분명 그 시는 파도가 바위와 뭍을 치면서 “네까지게 뭐야”라고 바다의 힘을 과시한다.

육당이 창간한 ‘소년’지의 내용은 더욱 확실하다. 번역 소설들은 『로빈슨 크루소』 같은 표류기이고, 시는 바이런의 『오션(大洋)』 등이다. 그리고 역사는 대한제국의 해양사(海洋史)다.

하지만 육당은 아직은 영국 시인 바이런처럼은 아니었다. 바이런의 『대양』은 젊은이가 바다를 향해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육당은 거꾸로 바다가 소년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시를 썼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대륙문화에서 해양문화로 시선을 돌렸지만 불행하게도 그 바다에는 일본이 있었다. 우리가 방방곡곡(坊坊曲曲)이라고 할 때 그들은 “쓰쓰우라우라(津津浦浦)”라고 한다. 그 ‘진’은 주문진의 진이요, 목포라고 할 때의 그 ‘포’다. 나라 전체를 바다와의 접속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다와 면해 있는 지명에도 진이나 포보다 ‘산’ 자가 붙어 있는 곳이 많다. 부산(釜山)이 그렇고 원산(元山)이 그렇고 군산(群山)과 서산(瑞山)이 모두 그렇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구문처럼 육지에서 바다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올 때 보이는 산을 랜드마크로 삼은 것이다. 노래도 떠나는 부산항이 아니라 돌아오는 부산항인 것이다.

수동적이기는 해도 한국인은 지정학자 매킨다의 ‘랜드 파워’와 ‘시 파워’의 흐름을 알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장보고처럼 이순신 장군처럼 바다를 향해 슬기와 용기의 돛을 올린 것이다. 바다를 알고 양(서양)을 알게 된 한국인은 ‘은자’로 불린 옛날의 한국인이 아니었다.

식민지 교실에서 읽던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를 다시 읽는다. 그 무대가 열릴 때 “돌이라는 것은 다 같은 거야. 돌은 전부가 다 보석인 거지. 그런데 인간의 눈에는 그중 몇 개만 귀중한 돌(보석)로 보일 뿐이란다”라고 말하는 대사의 뜻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꿈에서 깬 아이가 바로 자기 집 처마 밑 새장 안의 파랑새를 보고 이렇게 외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먼 데까지 찾아다닌 것이 여기 이 파랑새였단 말야.” 그러나 겨우 찾은 파랑새는 달아나고 그 아이들은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그 새를 찾으면 우리에게 돌려주세요. 어쨌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꼭 파랑새가 있어야 하니까요.” 한국인의 파랑새는 한국의 집 안에 있었는데 날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파랑새의 동극이 막을 내린 그 자리에서 ‘시즌 Ⅱ’ 한국인의 이야기는 시작될 것이다. 파랑새와 바다를 찾은 무서운 아이, 한국인의 이야기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다음 회는 ‘한국인 이야기 시즌 Ⅰ 을 마치고’입니다 joins.com/leeoyoung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시즌Ⅰ’을 마치며

[중앙일보]입력 2009.06.15 03:05 / 수정 2009.06.15 03:56

50회로 일단 ‘한국인 이야기’를 끝마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치는 것이 아니라 쉬는 것이다. ‘시즌 원’이라고 한 것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미드(미국 드라마의 준말)’의 양식에서 따온 것이지만 이야기에는 춘하추동의 계절처럼 전환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대로 모든 이야기는 시작-중간-종말의 선형구조로 되어 있는 데 비해 한자 문화권에서는 그 사이에 ‘전(轉)’이라는 마디 하나가 더 들어간다. 그래서 ‘새옹지마 효과’처럼 길이 흉이 되고 흉이 길로 반전하는 기승전결(起承轉結)로 우연과 노이즈가 많이 작용한다. 특히 한국의 이야기에는 행이 불행을 낳는 비극보다는 불행이 행으로 변하는 반전 드라마가 많다.

조센고(한국어)를 전면 금지한 식민지 교육은 분명 역사상 드물게 보는 불행한 이야기지만 오히려 그런 체험 때문에 해방 뒤에는 ‘공처가’를 ‘아내 무섬쟁이’로 고치자는 주장처럼 지나치리만큼 국어에 대한 애정이 높아지게 된다. 이야기는 다르지만 나 개인의 경우를 놓고 볼 때에도 혹독한 일본어 상용정책의 ‘불행’은 그 뒤 초등학교 6학년의 일본어 실력으로도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행’을 맞게 된다. 지금도 그 글은 일본의 대학입시 국어문제로 매년 출제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 이야기는 늘 어둡고 부정적이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밝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일상적인 말에서도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한다. 한자말로 해도 ‘생사결단’이 아니라 ‘사생결단’이라고 한다. 언제나 죽음이 먼저 오고 사는 것이 뒤에 온다. 햄릿이 말한 “투 비 오어 낫 투 비(to be or not to be)”도 한국 땅에 오면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로 뒤바뀐다. 중국에서도 사생유명(死生有命) 같은 예가 없지 않다. 하지만 ‘주야(晝夜)’의 경우처럼 대개는 긍정적인 것이 먼저 오고 부정적인 것이 다음에 온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한자로 쓸 때에는 ‘주야’라고 하지만 토박이 우리말로 할 때에는 ‘밤낮’이라고 뒤집어서 말한다. 희랍 철학자들은 밤이 먼저냐 낮이 먼저냐의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고 하지만 요즘 서양에서도 한국의 경우처럼 ‘시행착오(trial and error)’를 ‘착오시행(error and trial)’으로 뒤바꿔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한자가 아무리 우리 정신을 지배하던 옛날이라 해도 생사(生死)만은 토박이말로 ‘죽살이’라고 해왔던 우리 선조들은 기독교를 알기 이전부터 ‘거듭나기’의 서사원형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서리가 내린 뒤에야 비로소 피어나는 국화의 아름다움이다.

‘시즌 원’도 그와 같은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탄생 전후의 ‘배꼽 이야기’, 세 살에서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소금장수 이야기’, 그리고 일본 강점하의 ‘국민학교’ 시절에서 얻은 ‘세 파랑새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50가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하찮아 보이는 화소(話素)들이 실은 서로 결합·증식·변종이 되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이야기 바이러스 혹은 이야기 DNA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입춘대길의 한자 이야기는 뒤에 나오는 대동아 공영권의 한자 이야기와 맞물리고 그것은 다시 은나라의 패(貝), 주나라의 양(羊)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마지막에 오면 그 양(羊)이 근대문명의 양(洋)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연결이 지면 제약이 있는 신문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컷(no cut)판 한국인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다시 재독할 기회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물론 ‘시즌 투’는 시월에 다시 열 계획이다. 기억력이 더 쇠퇴하기 전에, 나라가 더 어려워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들을 들려줘야 하는데 시간과 건강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세헤라자데 왕비는 하룻밤 이야기로 하루치의 생명을 연장해 갔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생명을 부지해 오다가 드디어 왕이 회심을 하여 천하루 밤 만에 이야기는 끝이 난다. 거기에서 『아라비안 나이트』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의 ‘코리안 나이트’는 얼마나 많은 밤을 두고 이야기를 해야 끝나게 될 것인지 나도 잘 모른다.

현대인은 많은 것을 얻고 그 대신 또 많은 것을 잃었다. 그것을 ‘트레이드 오프(trade off)’라고 하는데 그중 잃어버린 목록의 하나가 바로 ‘이야기’일 것이다. 옛날에는 ‘이야기 자루’라고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이야기 보따리’가 되고 다시 줄어 이제는 ‘이야기 주머니’라고 한다. 자루에서 주머니로 말이다. 나의 한국인 이야기도 그렇게 될까 봐 겁이 난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모든 분께 거듭 감사드리면서 몇 달 뒤에 다시 만나게 되기를 빈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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