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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펜화 에세이

중앙[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1~11/ 아그나타 2장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 인생 5단계

[중앙일보]입력 2006.09.03 19:19 / 수정 2006.09.04 06:31

1973년 서방 기자론 처음 북한 취재
'내셔널 지오그래픽'
첫 유색인 편집팀장

북한 인부들이 김일성 얼굴이 새겨진 대형 부조물을 청소하고 있다. 필자가 찍은 북한 사진 중 당시의 북한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사진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1974년 8월호에 실려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잠시 뒤면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북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스크바를 거쳐야 한다. 파리에서 이곳까지 오는 다섯 시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과연 북한대사관 측에서 마중을 나왔을까? 안내인 없이는 잠시도 머물 수 없는 곳이 소련이라는데. 북한을 취재하고 싶다고 했을 때 북한 당국은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된다는 것인지, 안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대로 일단 부딪쳐보기로 했다.

나는 많은 기자들이 선망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부장급 기자다. 사진기자로서, 편집기자로서 얼마간 명성도 얻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회사에서 유색인 기자는 내가 유일하다. 성공하려면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른 기자가 못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북한 취재뿐이다. 지금까지 북한에 들어가 취재한 서방 기자는 없었다. 나는 지금 '김일성의 나라' 북한으로 가고 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들은 김일성을 '장군'이라 불렀다.

1973년 9월 하순, 나는 이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에서 28일 동안 머물며 '장군의 나라'를 취재할 수 있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재직 중 가장 극적인 취재였다. 이 기사로 나는 퓰리처상에 버금가는 미국 해외취재기자단(Overseas Press Club) 최우수 취재상을 받았다. 몇 년 뒤에는 이 회사 편집팀장에 올랐다. 보수성향이 강한 미국 언론사에서 유색인이 그런 고위직에 오른 것은 내가 최초였다.

북한을 방문한 이듬해에 취재차 한국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4.19 직후 유학을 위해 떠났으니 14년 만의 귀국이었다. 다시 본 조국의 모습에 놀랐다. 역경을 딛고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광화문에서 행인들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진취적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에 너무 좋았다.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은 티 없이 해맑았다. 그때 언젠가는 조국에 돌아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85년 이 같은 마음을 실행에 옮겼다. 영구 귀국한 것이다.

60 중반인 요즘에도 난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은 자지 않는다. 하고 있는 일에 정성을 쏟고 완벽을 기하다 보면 충분한 수면은 불가능하다. 사진을 찍을 때 '결정적 찬스'가 한 번뿐인 것처럼 모든 일에도 '다음 기회'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 대학에서 포토저널리즘을 강의하고 있다. 74년 일시 귀국했을 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평생 다섯 단계를 넘어가며 산다. 태어나서 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단계, 20대 중반까지는 배우는 단계, 30대 중반까지는 배운 것을 검증받고 사회에 적응하는 단계, 40 ~ 50대는 노력이 열매를 맺는 단계, 그리고 60대 이후 노년기 단계는 평생 쌓은 지식과 경험.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시기다.

나는 마지막 5단계에 와있다.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내 능력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 지식과 경험을 나누어 주고 싶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면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세상이 보인다. 난 그런 눈으로 반세기를 살아왔다. 이제 인생 5단계에 이르러 지난 일을 회고하려 한다.

한국전쟁 직후 우리의 모습, 60 ~ 70년대 미국 생활, 살얼음판을 걷던 70년대 남북한, 그리고 8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사회의 숨가빴던 모습을 돌아본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필자 약력>

1940년=서울 출생

57년=경기고 재학 중 개인 사진전

65년=미 텍사스주립대 신문학과 졸업

66년=미주리대 대학원 최우수학생 공로상 수상

67년=내셔널 지오그래픽 입사

71년=미주리대 최우수 사진편집인상 수상

1974년=해외취재기자단 최우수 취재상 수상

85년=귀국, 국가 해외홍보에 주력

87 ~ 93년=TIME 서울특파원(사진담당)

94년=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2000 ~ 03년=이화여대 초빙교수

 

2003년 ~ 현재=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 부모님

[중앙일보]입력 2006.09.04 18:26 / 수정 2006.09.05 06:13

군대식 생활 가르친 아버지
아들·딸 차별 않고 공부시켜

엄한 아버지(左)와 자애로운 어머니. 두 분은 금슬이 좋았다.
아버지(김용택)는 잘생긴 분이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풍채가 좋았고 콧날이 우뚝했다. 평생 카이저 수염을 길러 사람들로부터 멋지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다.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하지만 교양은 충분했다. 박학다식하고, 붓글씨 잘 쓰고, 고전음악 좋아하고, 카메라를 만질 줄 알았다. 어떻게 그런 소양을 갖추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어머니(유창희)는 무려 8남매를 낳았다. 아들 둘, 딸 여섯이다. 둘째인 형 김일중과 다섯째인 내가 아들이다.

아버지는 엄했다. 자녀 교육열이 남달라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혼을 냈다. 가훈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이었다. 대청마루에 한자로 쓴 가훈 현판을 걸어놓고 하나하나 뜻을 설명하고는 "너희에게 줄 것은 교육밖에 없다. 공부를 마칠 때까지 부모의 책임을 다할 것이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아들.딸 차별은 전혀 없었다. 딸들에게 "앞으로 세상에서는 남편이 없어도 스스로 살 수 있는 능력이나 기술이 있어야 여자도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들이라고 세뱃돈을 더 많이 주지도 않았고 과자도 똑같이 나누어 주었다.

이런 교육방침으로 자식들을 키웠으니 결과가 나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 "1등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뭐가 부족해 1등을 못 한단 말이냐? 운동을 한다면 선수가 되어야 하고, 대회에 나가면 우승을 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최고여야 한다" 고 가르쳤다. 부모가 원한다고 자식이 반드시 그렇게 자라주는 것은 아닌데, 우리 남매 여덟은 모두 명문학교에 진학했다. 이것 역시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한 친구가 부러워하며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껄껄 웃기만 했다. 형과 나는 경기고에, 누나 셋은 경기여고에 들어갔다. 하루는 이화여고 교장이 찾아와 "김 선생님은 딸들을 왜 경기여고에만 보내십니까? 이화여고도 좋으니 우리 학교에도 아이를 보내 주세요"라며 부탁했다. 그래서 여동생 셋은 모두 이화여고를 거쳐 이화여대에 들어갔다.

생활도 거의 군대식이었다. 이부자리 정리는 각자의 몫이었다. 아들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교복을 직접 다려 입었다. 이웃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학업성적만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신사'가 되라고 했다. 아버지가 생각한 신사는 교양 있고, 지식이 풍부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도시 남성들이 신사복을 입기 시작한 때였다. 아버지가 보기에 그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이었던가 보다.

엄한 아버지였지만 어머니와는 금실이 좋았다. 어머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에 전문학교까지 나온 인텔리였으며, 남편을 공경하고 자식을 사랑으로 기르며 일생을 보낸 분이다. 아버지는 가끔 시내에 나갔다 오면서 땅콩 한 줌이나 군밤 몇 개를 사와 어머니에게 쥐여주곤 했다. 어머니는 "뭘 이런 걸 다…"하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나는 무드를 깨지 않으려고 일부러 잠든 척을 하기도 했다. 온 식구가 한 방에서 살던 시절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 '매직 박스'

[중앙일보]입력 2006.09.05 20:28 / 수정 2006.09.06 06:24

"카메라가 부리는 마술 알아내라"
부친이 내준 중2 여름방학 숙제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생산됐던 독일제 박스형 카메라 롤라이코드.
"희중아, 이리 와 보거라."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직전에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잔뜩 긴장하고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아버지는 방학 동안에도 자식들의 생활 태도가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 남매들은 학교 숙제 외에 '아버지 숙제'를 별도로 해야 했다.

아버지 앞에는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평소 사용하시던 롤라이코드(Rolleicord)였다. 독일제로 전면에 렌즈가 두 개 달려있는 이안반사식(二眼反射式) 박스형 카메라다. 우리가 손도 대지 못하던 카메라를 왜 꺼내놓으신 걸까?

"이게 뭔지 아느냐?"

내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아버지는 그 카메라로 가족사진을 수시로 찍으셨다. 생일이나 졸업식.명절 때면 우리는 어김없이 그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해야 했다. 아버지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기대했지만, 어머니와 우리 남매들은 무서운 아버지 앞에서 '차려!' 자세로 사진을 찍곤 했다. 아버지는 그 카메라를 두고 뭔지 아느냐고 물은 것이다. 나는 "사진을 만드는 기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맞다. 하지만 이것은 사진만 만드는 기계가 아니다. 이건 바로 '매직 박스'다. 이것이 무슨 마술을 부리는지 방학 동안에 알아내라."

'아버지 숙제'로 카메라 공부가 떨어진 것이다. 처음엔 긴장했다. 고장이라도 내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숙제니까 해야만 했다. 우선 친구들을 찍었다. 만지다 보니 재미도 있었다. 다음에는 가족에게 들이댔다. 누나도 찍고 동생도 찍었다. 워낙 많다 보니 가족을 다 모아놓고 찍을 기회는 없었다. 가족 중 유일하게 찍지 못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무서운 아버지에게 모델이 돼 달라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싫증이 났다. 친구들과 가족을 다 찍고 나니 더 이상 찍을 게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장면을 봤다. 새댁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었다. 좀 떨어진 곳이었지만 내 눈에는 그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이 클로즈업돼 보였다. 카메라를 들었지만 셔터를 누르지는 못했다. 사춘기 소년이 하얀 젖가슴에 렌즈를 들이댈 용기가 없었다.

그 아름다운 정경은 내가 카메라를 통해 사물을 보기 시작한 최초의 모습이었다. 방학이 끝날 무렵 나는 카메라 공부의 결과를 보고 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니까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젖을 먹이는 새댁의 모습을 비롯해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새로 발견한 세상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으니 카메라가 바로 마술 상자 아니냐?"라며 껄껄 웃으셨다.

아버지는 사진을 찍는 행위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 분은 평생 가족사진만 찍었다. 파인더를 통해 보면서 "웃어라" "옆으로 조금 움직여라" 하면서 자식들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관찰했다. 그렇게 자식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버지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셨던 것 같다. 카메라 렌즈로 관찰하면 피사체(被寫體)에 관심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고 말씀드렸을 때 아들이 숙제를 제대로 해냈다는 만족감에 호탕하게 웃으신 것일게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 아버지의 하동관 창업

[중앙일보]입력 2006.09.06 18:07 / 수정 2006.09.07 05:18

자식들 반대에도 곰탕집 개업
점심시간만 하루 300그릇 팔아

1958년 경기고 3학년이었던 필자(앞줄 오른쪽에서 둘째)의 사진 개인전 때 찍은 가족사진. 원래 2남6녀였지만 형은 전사했고 누이 한 명이 빠져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은 서울 을지로 수하동에 있었다. 현재의 외환은행 본점 맞은편 골목길, SK텔레콤 사옥 뒤쯤이다. 마당이 깊고 예쁜 한옥이었다. 아버지는 집에서 멀지 않은 청계천에서 인쇄소를 운영했다.

난 틈만 나면 인쇄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군것질거리를 해결해주던 노다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쇄소에서는 활자를 직접 만들었다. 크고 작은 활자를 만들고 나면 납덩이 찌꺼기가 남았다. 채 식지도 않아 따끈따끈한 납덩이를 들고 엿장수한테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는 전쟁 직전에 인쇄소 일을 접었다. 그리고는 생계를 걱정하다가 식당을 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가족회의를 소집해 당신의 결심을 밝혔다. "인쇄소를 계속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대식구를 먹여 살릴 방도를 찾다가 식당을 하기로 결정했다. 밥장사를 하면 너희들이 굶지는 않을 것 아니냐."

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가족의 반대에 부딪쳤다. 먼저 큰누나가 반대하고 나섰다. 먹는 장사를 하더라도 밥장사가 뭐냐는 것이다. 누나는 제과점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사춘기 여고생 생각에 밥장사는 너무 초라했고 제과점은 그나마 보기에는 예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형도 나섰다. 친구 보기 창피하다고 했다. 식당하는 집에 친구를 어떻게 데려오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경기중학교(5년제)는 고관대작들의 자식들이 많이 다니던 학교였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밥은 항상 먹을 수 있는 것이지만 빵이나 과자를 먹고 살수는 없다. 그리고 하는 일이 떳떳한데 뭐가 창피하단 말이냐. 다만 식당 일은 너희들이 학교 가고 난 뒤에 시작해 돌아오기 전에 끝내겠다." 그러나 형은 끝내 아버지의 결정에 반발해 개업하던 날 아버지의 문패를 떼버렸고, 그 일로 해서 죽지 않을 만큼 혼이 났다.

이렇게 해서 곰탕집 '하동관'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주방에 들어갔다. 뒷마당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밤새 참나무로 불을 땠다. 물을 부어 양을 늘리지도 않았고 쌀뜨물로 색을 내지도 않았다. 오직 정직하게 진국 곰탕을 끓여냈다. 손님에게 내놓기 전에는 꼭 시식을 해 합격, 불합격 판정을 했다.

깍두기도 하동관의 명물이었다. 아버지는 한입에 먹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깍두기를 만들기 위해 무를 여러 가지 크기로 잘라 직접 입에 넣어보는 실험을 거쳐 알맞은 크기를 결정했다.

이런 노력을 했으니 유명해지지 않을 리 없었다. 좁은 골목길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우리 집의 방과 마루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점심시간에만 영업을 했는데도 하루에 300그릇을 팔았다. 종일 영업하면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약속대로 오전 11시에 시작해 오후 3시 이전에 일을 끝냈고, 우리가 귀가할 무렵에는 여염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그 어려운 시절을 배고프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뜻한 바였다. 하동관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무슨 일이든지 성의를 다하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 내가 겪은 전쟁

[중앙일보]입력 2006.09.07 18:06 / 수정 2006.09.08 05:11

대문에 '반동의 집' 딱지 붙어
꽈배기 행상 하다 부산 피란길

1·4 후퇴 때 화물열차를 타고 피란을 떠나는 사람들.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피란민이 희생됐다. [미군 사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1950년 6월 25일은 유난히 화창한 초여름 날이었다. 일요일이었던 그날 난 친구들과 골목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군용차가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다급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모든 장병들은 부대로 복귀하라.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궁금한 마음에 집으로 달려가 보니 전쟁이 났다고 했다. 어른들이 전차(戰車.탱크) 운운했지만 열 살이었던 내가 아는 전차는 시내를 땡땡거리며 달리는 전차(電車)뿐이었다.

집에는 장독대로 쓰던 좁은 반지하 공간이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을 모두 그곳으로 모았다. 식량 사정이 나빠지자 어머니는 시루에 콩나물을 키웠다. 콩나물 비린내가 코를 찔렀고, '쪼르르' 물 붓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이웃 사람 몇몇은 전쟁 초기부터 붉은 완장을 찼다. 공산당원이 돼야 살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았다. 의용군으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큰아들을 멀리 있는 친척집으로 피신시키고 당신은 복구 사업에 나가지 않겠다며 다리를 저는 시늉을 했다. 우리 집 대문에는 '반동의 집'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반지하실 생활은 답답했지만 우리는 '쌕쌕이'가 서울 상공을 날아다니면 장독대에 뛰어올라가 태극기를 흔들곤 했다. 인민군이 그 모습을 봤다면 우리 가족은 성치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시내에 나가보니 내 또래들이 모두 뭔가를 팔거나 구두닦이를 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나도 장사에 나섰다. 현재의 중국대사관 부근에 있던 차이나타운에서 산 꽈배기를 담은 좌판을 목에 걸고 다니며 팔았다.

그 시절에 과자를 사 먹을 여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앳된 인민군들이 사 먹곤 했다. 그들은 어린 나를 세워 놓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다" "남조선 동포들을 해방시키러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들의 특이한 억양이 신기할 뿐이었다.

1.4 후퇴가 시작되자 아버지는 트럭을 구해 왔다. 다시는 인민군 치하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트럭에 짐을 가득 싣고 몇 가족이 그 위에 올라탔다. 찬바람 부는 겨울에 우리 남매들은 밧줄을 부여잡고 길을 떠났다.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린 한강변은 지옥이었다. 사람과 차가 한데 엉겨 목숨을 건 탈출을 하고 있었다. 차가 덜컹거리면 내 곁에 있던 사람이 추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는 멈춰 설 수 없었다. 떨어진 사람은 이내 인파 속으로 사라졌고 차에 남은 가족은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눈뜨고 가족과 생이별하는 순간이었다. 부산까지는 1주일이 넘게 걸렸다. 먹을 것이라곤 꽁꽁 언 주먹밥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제과점을 시작했다. 전에 큰딸이 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실패했다. 전쟁 통에 누가 비싼 과자를 사 먹을 수 있었겠는가.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모든 가족이 거리에 나가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았다. 53년 초 서울로 돌아왔을 때 집은 불타버렸다. 우리는 빈 집에 들어가 살았다. 집을 고치고 나서 아버지는 다시 하동관을 열어 영업한 뒤 63년에 폐업했다. 자식들 교육을 마쳤기 때문이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6. 그리운 형

[중앙일보]입력 2006.09.10 18:48 / 수정 2006.09.11 06:27

17세에 나이 속여 장교로 참전…전방 자원해 인제전투서 산화

아들이 좋아하던 과일을 무덤 앞에 놓고 어린 영혼을 위로하는 나의 어머니.
나의 형(김일중)은 팔방미인이었다. 공부 잘 하고 운동 잘 하고 친구들 사이에 인기도 좋았다. 내성적이고 얌전한 나와는 많이 달랐다. 아버지는 그런 장남을 미더워했다. 형은 일곱 살 터울의 나를 잘 데리고 놀았다. 학교 운동장에서 같이 손 야구도 했고, 공을 차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나중에 군대에 가서는 '걸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활달하고 특이한 성격 덕분이었다.

사춘기 소년이었던 형은 어린 동생을 앉혀 놓고 눈을 빛내며 여자에 대한 호기심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결혼할 때는 어떤 여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마음이 착한 여자, 얼굴이 예쁜 여자, 가정이 좋은 여자 중 너는 어떤 사람이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한 여자"라고 대답했다.

그런 형한테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9.28 수복 직후였다. 중학교 4학년 이상은 전부 동원 대상이었다. 형은 경기중학교 5학년으로 열일곱 살이었다. 아버지는 사병보다야 낫지 않겠냐며 장교 입대를 권했다. 장교는 열여덟 살 이상이 돼야 지원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나이를 한살 높여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게 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니 후방에서 근무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왕 군대를 간다면 전방에 가서 싸워야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후방에서 편히 지낸다면 입대할 가치가 있느냐"고 했다. 형도 전방에 가서 싸우겠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의 인맥이나 실정 등으로 봐서 마음만 먹으면 형을 후방으로 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전쟁이 계속되고 부산에서 힘겹게 살던 52년 봄 어느 날, 집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형의 전사통지서였다. 그 날 저녁 우리 집은 초상집이었다. 모든 식구들이 목 놓아 울었다. 어린 나는 형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현실인지 꿈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비통한 중에도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아들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음날부터 형이 근무하던 부대서 싸우다 부상당해 부산으로 후송된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확인 결과 형은 3사단 18연대 백골부대 소대장으로 중부전선에 투입되었는데 51년 겨울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인해전술 때 강원도 인제지역 전투에서 사망했다. '걸작' 소대장이었으니 목숨을 아끼지 않고 최전선에 나섰을 것이다. 아버지는 전방에 가서 싸우라고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장교로 가면 좀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대장이란 전투 현장에서 가장 희생 가능성이 많은 위치다. 형의 전사 후 아버지는 가끔 "나이까지 속이면서 내 자식을 죽였네…"하며 한탄했다.

전쟁이 끝난 1955년, 서울 동작동에 국립묘지가 조성됐다. 가족은 형의 무덤을 찾아갔다. 아버지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급조된 묘지는 황량했다. 잔디가 미처 자라지 않아 붉은 흙이 드러나 있었고 묘비도 돌이 아니라 나무였다. 하얀 묘비에 붓글씨로 '육군중위 김일중의 묘'라고 쓰여 있었다. 어머니는 형이 좋아하는 과일을 한 바구니 놓고 묘비를 쓰다듬으며 흐느꼈다. 나는 우리 가족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이 장면을 한 장의 사진으로 기록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7.'여장부'

[중앙일보]입력 2006.09.11 19:55 / 수정 2006.09.12 06:31

중3 때 신문 독자사진전에 출품
대상 받고 스승 이명동 선생 만나

신촌 들판에서 일하는 아낙을 촬영한 사진 '여장부'. 이를 계기로 나는 사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54년 여름, 아버지와 나는 대청마루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신문에는 독자사진 수상작들이 실려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현재의 중앙일보와는 다른 신문)는 독자가 찍은 사진을 공모해 우수작들을 선정, 신문에 싣고 시상했다.

아버지가 "사진들이 어떠냐?"고 물었다. 내가 보기에 수상작들엔 '느낌'이 없었다. 평범하고 밋밋한 인물과 풍경 사진이었다. 자신있게 대답했다. "이런 사진은 눈감고도 찍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날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찍어서 한번 내보렴." 농담처럼 한 이야기 끝에 신문사에 낼 사진을 '취재'하게 됐다.

일요일 아침, 카메라를 메고 신촌으로 갔다. 당시 신촌은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연세대와 이화여대 건물들이 덩그러니 서 있고, 논밭 사이로 경의선이 지나는 시골이었다. 밭에서는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둑에 앉아 그들의 몸짓을 관찰했다. 아름다웠다. 한 아낙네가 특히 보기 좋았다.

다가가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내 사진은 뭘 하러…" 하고 쑥스러워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일어선 그녀의 상반신을 찍었다. 대나무 갈퀴를 어께에 메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사진은 노출과 초점이 정확했고, 구도도 좋았다. 아버지는 "훌륭하다. 신문에 낼 만하다"고 칭찬해주셨다.

사진을 보냈더니 며칠 뒤 상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 응모한 사람들 중에는 기성 작가도 많았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교복을 다려 입고 혼자 갔다. 식장에는 꽃다발을 든 가족이 많았고 수상자들은 맨 앞에 앉아 있었다. 구석자리에 앉아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몇몇 사람이 격려사를 하더니 시상이 시작됐다. 사회자가 "대상부터 발표하겠습니다"고 하더니 "대상작 '여장부(女丈夫)', 수상자 김희중씨!" 하고 외쳤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사회자는 두 번이나 더 내 이름을 불렀다. 중학생이 대상 수상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단상 앞으로 나가자 그는 교복에 단 내 명찰을 확인하고서야 안내했다.

나보다 아버지가 더 좋아하셨다. 며칠 지난 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중앙일보로 가서 사진부장이던 이명동(86)씨를 만났다. 그리고는 부탁을 했다.

"내 자식이 사진에 관심이 많고, 이번에 중앙일보 주최 콘테스트에서 대상도 받았습니다. 데리고 다니면서 좀 더 가르쳐 주십시요."

그날 이후 틈만 나면 이명동 선생을 쫓아다니며 사진을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사진 공부보다 세상 구경을 하면서 강한 남자로 단련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외아들이 여자가 많은 집에서 자라는 모습을 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 선생은 아버지의 뜻을 알았는지 나를 산으로 들로 끌고 다녔다. 30대 중반의 건장했던 그를 따라다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밥도 거른 채 쏘다니다 남의 밭에서 설익은 오이와 토마토를 따 먹고 설사를 한 적도 있었다.

독자사진 대상 수상은 사진의 세계에 한 발짝 다가가고 스승인 이명동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8. 경주 여행

[중앙일보]입력 2006.09.12 21:31 / 수정 2006.09.13 06:16

고1 때 아버지와 단 둘이 첫 관광
74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특집 취재

필자가 고1 때 아버지와 함께 간 경주에서 찍은 사진. 썩은 고목으로 멸망한 신라 왕국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아버지는 사냥을 즐겼다. 1950년대만 해도 서울 근교에서 꿩이나 산토끼 같은 야생동물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눈도 많이 내렸다. 겨울이 되면 아버지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산과 들을 누볐다. 나도 따라다녔다. "탕!" 소리가 난 뒤 아버지를 쫓아가 보면 하얀 눈 위에 새빨간 피를 흘리는 꿩이 떨어져 있곤 했다. 꿩을 여러 마리 잡으면 동네 중국집에 부탁해 탕수육과 만두를 만들어 먹었다. 아버지는 나한테도 콩알만한 납탄이 발사되는 공기총을 마련해 주었다. 전깃줄에 앉아 있는 참새들이 주 표적이었다.

고교 1학년 여름,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경주로 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둘이서만 떠나는 여행이었다. 카메라를 챙기며 마음이 한껏 설렜다. 하지만 엄한 아버지와 단 둘이서 며칠 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두렵기도 했다.

당시 경주는 서울에서 가기엔 너무나 먼 관광지였다. 기차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기관차가 내뿜는 연기가 객실로 밀려들어 사람들의 얼굴은 점점 까매졌다.

처음 본 경주는 황량했다. 가장 유명한 유적이라는 불국사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석탑들도 무너진 채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천년 도읍지의 영광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쓸쓸한 정경이 오히려 표현하기 힘든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 포석정,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첨성대는 강렬한 느낌으로 어린 나의 감성을 뒤흔들었다.

저녁을 먹고 불국사역 앞 가게의 마루에 앉았다. 참외를 깎아 먹으며 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백제의 석공 아사달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화랑을 거쳐 이차돈의 순교에까지 이어졌다. 현장교육이었다.

아버지를 바라봤다. 집에서는 그렇게 무섭기만 했는데 멀리 나오니 정이 많고 따뜻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우리 부자(父子)의 머리 위에는 별이 쏟아질 듯 빛났고 은하수가 하늘 길게 흘렀다. 찬란했던 그 밤하늘은 경주 여행에서 본 어떤 모습보다 뚜렷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74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특집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시 경주를 찾았다. 그 사이 경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로 지은 시멘트 한옥 건물들이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베이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대통령의 취향이라고 했다. 참담하고 실망스러웠다. 아버지와 같이 다니면서 본 내 마음속의 고색창연한 경주는 사라지고 없었다.

첫 여행으로부터 30년이 지난 85년, 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경주를 소개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본 경주의 그 매혹적인 모습을 세계인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나는 가끔 경주에 간다. 추운 겨울이나 비 오는 날이면 무엇에 끌린 듯 기차에 오른다. 갈 때마다 경주는 세상 어느 곳보다 따뜻하게 날 맞아준다. 아버지의 추억과 함께.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9. 집 뒷마당 암실

[중앙일보]입력 2006.09.13 19:45 / 수정 2006.09.14 06:12

교복 입은 채 경찰서장 찾아가
"한옥 증축 허가해 달라" 간청

1990년대 중앙일보 사진부 암실에서 기자들이 작업하는 모습. 필자의 암실은 이런 풍경과 거리가 멀었다.
신문 독자사진 공모전 대상을 받고서 나는 차츰 사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보니 사진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다. 셔터를 누르는 것은 시작 단계에 불과했다. 사진을 완성하려면 필름을 현상(現像)하고, 인화(印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명동 선생이 일하는 신문사 암실에 찾아가 기자들이 작업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현상된 필름을 확대기에 걸고 빛을 통과시켜 하얀 인화지에 흑백이 바뀐 이미지를 비췄다. 그리고 인화지를 현상액에 담그면 붉은 전등 아래에서 서서히 형상이 떠올랐다. 신비로웠다. 기자들은 필름 현상 시간을 조절하거나 성질이 다른 인화지를 사용해 분위기가 다른 사진을 만들기도 했고, 네거티브 필름과 포지티브 필름을 겹쳐 인화해 입체 느낌이 나는 사진도 제작했다. 나도 해보고 싶었다. 그때까지는 미도파백화점(현재의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부근에 있던 '쓰리 세븐' 현상소에 현상과 인화를 부탁했다. 사진을 직접 만들려면 암실(暗室)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사진을 제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암실을 지어주세요." "있으면 좋겠지만 한옥에 암실을 어떻게 만드느냐?" "뒷마당 구석에 지으면 될 것 같은데요." "한옥을 증축하려면 경찰서장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네가 허가를 받아오면 지어주마."

내가 경찰서장의 허가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아버지가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중부경찰서로 달려갔다. 고교 1학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고교생이 경찰서장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문에서부터 서장실 입구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제지를 당했다. 어렵사리 서장과 마주앉을 수 있었다. 그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찾아간 이유를 또박또박 설명했다. 신문사에서 상도 받았고, 직접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암실이 필요한데 허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서장은 암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내 교복을 살펴보더니 공부하기 어렵지는 않으냐, 나도 아들이 있다, 경기고에 보내고 싶은데 실력이 모자란다는 등의 딴 이야기만 했다. 한참 이야기 끝에 그는 아버지 성함과 주소를 적어놓고 돌아가라고 했다. 며칠 뒤 경찰관이 와서 아버지에게 해준 이야기는 '정식 허가는 내 줄 수 없지만 암실 건축을 묵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집 뒷마당에 두 평 남짓한 암실이 세워졌다. 아버지는 현상용 릴과 확대기.탱크.바트 등 도구 일체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암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상.인화 작업을 하려면 따뜻한 물과 찬물이 나오는 수도 시설이 있어야 하고, 배수가 되어야 하며, 독한 약품 냄새를 뽑아내는 환풍기도 필요했다. 내 암실은 이런 설비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말 그대로 '어두운 공간'에 불과했다.

춥고 더운 계절에는 사용할 수도 없었다. 오래 작업하다 보면 약품 냄새 때문에 머리가 띵했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것은 나보다 아버지가 더 자주 암실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가족사진을 열심히 찍던 아버지는 수시로 암실에서 사진을 만들며 동트는 줄 몰랐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0. 첫 개인전

[중앙일보]입력 2006.09.14 20:24 / 수정 2006.09.15 05:06

거리 담벼락에 안내 포스터 붙여
경기고 학보에 '관객 15만' 기사

필자가 직접 만든 첫 개인전 팸플릿. 카메라 위에 병아리를 그려넣었다.
암실 작업에 몰두하면서 서서히 사진에 미쳐갔다. 주말마다 서울 근교뿐 아니라 경기도 일대를 헤매고 다녔다.

그 무렵 또 한 분의 스승으로 정도선(1917~2002) 선생을 모셨다. 당시 한국 사진계는 임응식(1912 ~ 2001).임석제(1918 ~ 94).정도선.이명동 선생이 이끌고 있었다.

고교 2학년 때쯤, 나는 사진가들 사이에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학생인 데다 일간지 사진전에 응모해 몇 차례 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개인전을 열어보는 것이 어떠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정도선.이명동 선생님이 함께 우리 집에 오셨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희중이 작품이 좋으니까 전시회를 한번 열어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버지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학생이 공부에 힘써야지 전시회에 신경 쓰면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사진은 어디까지나 여가 활용이었고, '신사'가 갖춰야 할 교양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며칠 곰곰이 생각하더니 전시회를 허락했다.

고2 겨울방학이던 1957년 2월, 동화백화점(현재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화랑에서 나의 첫 개인 사진전이 열렸다. 나는 직접 팸플릿과 포스터를 도안했다. 카메라 위에 병아리를 그려넣은 팸플릿에 초청의 말씀을 넣었다.

"제가 무슨 사진예술을 이해하고 벌써 작가가 되어 보겠다는 야심에서 시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앞으로 좀 더 철저히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의욕에서 여러 선생님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고견을 들어 지도를 받겠다는 일념이 있을 뿐입니다."

풀통을 들고 을지로와 종로를 돌아다니며 담벼락에 포스터를 붙였다. 강추위에 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몸도 고달펐지만 마음이 더 불안했다. 과연 사람들이 전시회에 와 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개막일이 점점 다가오자 불안한 마음에 잠도 오지 않았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관람했다. 몇 명이나 왔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경기고 학보(學報)는 "하루에 2만명씩 8일간이니 15만명 정도로 추산한다"고 보도했다. 다소 과장됐다고 여겨지지만 수만 명이 전시회를 보러 온 건 사실이다.

최초의 고등학생 사진전에 언론도 흥분했다. "특출한 기교는 선진 대가들을 능가한다. 연일 대성황을 이루고 있다" "젊은 지성과 예리한 조형감각으로 처리된 작품들은 감동적이다"고 보도했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내 사진에 확신이 없었다. 스승들은 칭찬했지만 일반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작품 소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나는 관객들 사이에 섞여 평가를 들어봤다. "멋있다" "훌륭하다"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나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학생잡지의 표지모델로도 등장했다. 거리에서 날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첫 전시회의 성공에 힘입어 다음해에도 개인전을 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1. 낙제생

[중앙일보]입력 2006.09.17 18:22 / 수정 2006.09.18 03:31

전시회 준비하느라 자주 결석
평균 성적 미달로 고2 재수

첫 개인전 때 일간지에 난 인터뷰 기사. 사진에 몰두하고 전시회를 준비하다 낙제를 하고 말았다.
개인전이 크게 성공하자 학교에서도 유명해졌다. "공부는 하지 않고 사진기만 들고 다니느냐"고 말하는 친구도 몇몇 있었지만 대다수는 "장하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특히 선생님들은 모두 자랑스러워하며 격려해 주었다.

그렇게 들떠서 2학년을 마무리하던 어느 날, 아버지가 학교로 불려갔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내가 낙제했다는 것이다. 전 과목 평균이 60점이 안 된다고 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출석 일수가 많이 모자랐단다. 사진 찍으러 다니랴, 전시회 준비하랴 하면서 결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담임은 낙제 사실을 통보하며 "책임을 통감합니다.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낙제시킬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세요"라고 했단다.

아버지는 무섭게 화를 냈다. 얼굴엔 실망감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했다. 사진을 가르쳐 준 것이 근본 이유 아니냐고 따졌다. 아버지는 들은 체도 안했다. 사진 때문에 공부를 못했다는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고 했다. 누이들은 친구들을 어떻게 보느냐며 울먹였다. 그런 분위기가 며칠간 계속됐다. 초상집과 다름없었다. 가족은 형이 전사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죽고 싶었다. 사진전을 멋지게 열어 장안의 유명인사가 되고 나서 당한 일이라 더욱 그랬다. 무엇보다 누이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세 누나와 세 여동생은 모두 모범생이었다. 선생님들이 원망스러웠다. 낙제를 시킬 거면 왜 그렇게 귀여워하고 칭찬했던가, 좀 봐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사실 사진전을 준비하는 동안 자주 학교에 못 가면서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낙제를 시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낙제를 하면 대개 전학을 했다. 창피해서 학교를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전학을 하겠느냐, 계속 다니겠느냐?"고 물었다. 점심시간이면 고전음악이 잔잔히 울려 퍼지고, 서울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화동(花洞) 언덕을 떠날 수는 없었다. 계속 다니겠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도 집에 찾아와 전학하지 말라고 했다. 훌륭한 재주를 가진 인재를 다른 학교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3월에 다시 2학년이 됐다. 아버지 걱정대로 친구들의 눈초리가 달라졌다. 수치스러웠다. 그제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공부도 좀 더 열심히 할 걸'. 하지만 머리가 나빠 공부를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졸업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교직원회의.동창회.학생회가 공동으로 주는 상이었다. 두 차례의 개인전으로 학교를 빛냈다는 것이 수상 이유였다. 경기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상이었다. 하지만 난 상을 받으면서도 '이런 상을 줄 거면 왜 낙제를 시켰나'하는 응어리를 풀 수 없었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생을 돌아봐도 특별히 후회되는 일은 없다. 다만 고교 시절의 낙제는 아직까지도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다.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절대로 반복하고 싶지 않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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