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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펜화 에세이

중앙[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23~33 /레미포미스 2장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3. 대학원 진학

[중앙일보]입력 2006.10.03 18:10 / 수정 2006.10.04 17:31

텍사스주 최대 신문사 기자 포기
조교·장학금 보장받고 미주리로

미국에서 유색인(有色人)이 번듯한 직업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종차별이란 보이지 않는 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직종이 기자다. 언론사에서 기자를 뽑을 때 다른 직종보다 까다롭게 구는 이유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회사를 대표하는 일의 성격 때문인 것같다. 외국인이나 유색인에게 그런 일을 맡기려고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면서 깊게 고민했던 것도 바로 이 문제였다. 공부를 하긴 하지만 '과연 기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마음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졸업은 다가왔고 취직을 해야 했다. 더 이상의 궁핍은 견디기 힘들었다. 마지막 학기에 텍사스주 신문사마다 일자리를 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작은 시골 신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대학생 때 학생회관에서 조그만 사진 전시회를 연 적이 있었다. 고교 시절 개인전에 출품했던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댈러스 현대미술관 큐레이터(전시기획자)가 우연히 그 사진들을 보고 전시회를 주선해 댈러스 현대미술관에서 다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그 전시회가 경력으로 인정되었는지 '댈러스 모닝 뉴스'로부터 졸업 후 사진기자로 일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지방 신문이지만 텍사스주에서는 가장 큰 신문이었다.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직장을 얻어 가난에서 벗어날 발판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펜서 교수는 나의 취직에 반대했다.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 그보다 훨씬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속이 탔다. 도박장에서 오물을 만지며 돈을 벌어 겨우 졸업하고, 마침내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대학원에 가라니….

당시 미국에서는 대학만 졸업해도 학력은 충분했다. 언론사 채용 기준에서도 학력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경력과 실무능력이 더욱 중요했다. 그런데도 스펜서 교수는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네 같은 사람은 미주리 대학원의 이덤 교수에게 가서 더 배우는 것이 좋겠어. 꾸준히 성장하자면 대학 졸업만으로는 부족해."

충고에 따르기로 했다. 재학 중 그는 나의 솔직함과 순수함.열정을 눈여겨보고 아껴주었다. 그가 가라는 길이라면 힘들어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능력은 아직 미완성 상태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영어도 일상생활에는 불편이 없었지만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영어로 글을 쓰자면 미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분석능력이 필요했다. 결국 시간이 흘러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스펜서 교수는 나의 주머니 사정을 듣고 미주리 언론대학원의 장학금과 조교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미주리 대학원을 다니면서 경험한 세상에 비하면 '댈러스 모닝 뉴스'는 시골 신문에 불과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고비마다 항상 은인들이 나타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부모님과 이명동.정도선 선생, 다우링 대사, 레스터 편집인, 스펜서.이덤 교수 그리고 도박장의 프랭크까지….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4. 포토저널리즘

[중앙일보]입력 2006.10.04 17:34 / 수정 2006.10.05 01:12

대학서 공부한 과목 수강신청 안하자
담당 교수 "나한테 안 배우면 무효야"

미주리대는 언론학 분야에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였다. 그 중에서도 이덤 교수의 포토저널리즘 강의는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유명한 책을 저술하지도 않았고 두드러지는 업적을 남기지도 없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뉴욕 타임스''라이프''내셔널 지오그래픽'같은 세계적 언론사에서 맹활약하고 있었다. 텍사스주립대의 스펜서 교수도 그의 제자였다.

1965년 미주리대 언론대학원에 입학했다. 이덤 교수가 강의하는 포토저널리즘이 전공이었다. 그는 작은 체구에 짧은 백발이었다. 스펜서 교수의 추천으로 왔다고 인사했지만 말없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까다롭고 고집 센 인상이었다.

수강 신청을 할 때 그의 면모가 확인되었다. 대학원 필수과목을 신청하면서 대학에서 배운 과목들을 제외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밑에서 사진을 배우려면 기초부터 다시 배우게." 그는 텍사스에서 배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제자 스펜서에게 배웠는데도 그랬다. "과목 명칭이 같아도 나한테 배우지 않은 것은 무효야."

강의를 들어보니 과연 달랐다. 텍사스에서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론을 가르치는 걸로 끝났다. 그런데 이덤은 문제를 제시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학생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각자의 답을 발표해야 강의는 끝났다. 비로소 진정한 공부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덤 교수는 '포토저널리즘'이라는 분야를 학문적으로, 또 실질적으로 개척하고 이끌었다. 그의 견해는 참신한 것이었다. 지금도 포토저널리즘 강의는 이덤의 이론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사진은 글과 마찬가지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사진과 글이 결합해 하나의 매체를 완성하는 것이 포토저널리즘이다. 사진만으로도 안 되고, 글만 가지고도 부족하다. 사진이 아무리 좋아도 글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글을 아무리 잘 써도 모호한 부분이 있다. 둘이 결합해야 완벽한 매체가 된다."

"독자가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는 포토저널리즘은 일방적.동시적으로 시청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동영상과는 큰 차이가 있다. 독자는 사진을 본 뒤 글을 읽거나 글을 읽고나서 사진을 본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요소다."

미주리대에서는 매년 4월 '저널리즘 위크'축제를 열었다. 전국신문협회.전국방송협회 후원으로 '올해의 사진기자''올해의 편집인''올해의 앵커맨'을 뽑는 행사였다.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유명 인사들이 행사장에 나타났다. 그들은 세련된 신사였으며 부와 명성까지 얻은 미국 최고의 명사들이었다. 시상식 날 좌석이 모자라 복도 바닥에 앉아 식을 지켜보며 막연한 꿈을 꾸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저 자리에 올라가 상을 받아보았으면 좋겠다'.

이덤 교수를 만난 것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요일에는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는 그의 집에 가 잔디를 깎았다. 일이 끝나면 세상 이야기와 포토저널리즘에 대해 대화했다. 그 시간은 나에게 귀중한 특별과외가 되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김희중 갤러리

밤새 눈이 내린 뒤 맑게 갠 겨울 아침, 뚝섬에서 조심조심 한강을 건넜다. 외딴집과 나룻배, 눈꽃 핀 수양버들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지금 뚝섬 맞은편 한강변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대한 올림픽 주경기장이 있다. 1950년대 중반 서울 잠실은 이런 모습이었다.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5. 내셔널 지오그래픽

[중앙일보]입력 2006.10.08 19:21 / 수정 2006.10.09 00:22

교수 추천에 직접 본사 가서 지원
신참이 이례적으로 채용되는 행운

좋은 학교, 훌륭한 교수님 아래서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가슴속에서 희망이 자라났다. 텍사스 주립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직장을 구해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미주리 대학원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나의 꿈은 구체적인 방향과 목표를 갖기 시작했다.

이제 영어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미주리 대학 언론학과는 '컬럼비아 미주리안(Columbia Missourian)'이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행했다. 교수들이 편집장.부서장을 맡고 학생들이 취재를 담당했다. 유료 신문이었고, 다른 일간신문과 경쟁했다. 나는 이런 활동을 통해 일간지 기자들과 같은 수준의 경험을 쌓았다.

재학 중 최우수학생 공로상도 받았다. 나의 존재를 알리고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외부 공모전에 여러 차례 응모.수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졸업 무렵 나는 꽤 유망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라이프'나 '룩' 같은 유수한 잡지사에도 입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덤 교수에게 진로를 상의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으로 가게." 내 취향에는 뉴스를 주로 다루는 '라이프'나 인물 이야기를 중시하는'룩'보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맞는다는 조언도 해줬다.

1888년 과학자와 탐험가, 교육자들로 이루어진 33인의 창립회원들이 '인류의 지리지식 확장을 위하여'라는 기치를 내걸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National Geographic Society)를 설립했다. 비영리 과학교육 기구였다. 협회는 그 해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창간했다. 이 잡지는 자연, 인류, 문화, 역사, 생태, 우주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종합 교양지였다. 협회 지원으로 피어리(Peary, 1856~1920)가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했으며, 아폴로 11호가 협회의 깃발을 달에 가지고 가기도 했다.

기사와 사진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독자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구독료는 선불이었으며 무가지는 단 한 부도 없었다. 1967년의 발행부수는 세계적으로 800만 부에 달했다. 잡지 판매 수익만으로도 극지 탐험과 고대 유적발굴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 수천 건을 지원할 수 있었다. 기자에게는 최고의 무대임이 분명했다.

워싱턴 백악관 앞, 하얀 대리석 건물의 협회를 직접 찾아가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자리가 없으니 다른 회사에서 일하다 준비가 되면 다시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준비된 프로만 썼다. 나 같은 애송이를 뽑을 리 없었다.

석사논문을 쓰며 졸업을 준비할 무렵,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나를 신입 기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다. 꿈같은 현실이었다. 알고 보니 이번에는 젊고 패기 있는 신참 기자를 선발하기로 결정하고 이미 지원서를 제출한 나를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1967년 10월 세계적인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기자로 입사하게 되었다. 서울을 떠난 지 7년 만이었다.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김희중 갤러리


고교 2학년 때인 1957년 성탄절 아침, 카메라를 메고 명동성당으로 올라갔다. 나무 살에 창호지를 발라 만든 별 장식 아래 성당 마당에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역광을 받고 있는 성당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 댄 순간, 하얀 모자를 쓴 수녀 두 분이 앵글에 들어왔다.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6. 첫 취재

[중앙일보]입력 2006.10.09 19:58 / 수정 2006.10.10 01:36

6개월 동안 일거리 안줘 불안
창간호부터 다 읽고 기획안 내

필자의 첫 취재 사진이 실린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지면.
지금도 대단하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내가 입사할 무렵이 전성기였다. 자부심 강한 기자들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기사를 쓰고, 사진을 찍고, 밤이 되면 청바지 대신 연미복을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기자들은 비행기 1등석을 이용하고 특급호텔에 묵었다.

회사는 취재를 위해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막을 취재하기 위해 벤츠 자동차에 특수 차량을 주문했고, 항공 촬영이 필요하면 세계 어디서나 비행기를 빌렸다. 임대가 불가능하면 임시로 구입하기도 했다.

장비도 최신 제품을 사용했다. 구할 수 없는 장비는 사내 제작팀이 직접 만들어 제공했다. 그들은 특수 카메라나 렌즈도 만들어 냈다. 007영화에서 제임스 본드가 특수 장비를 사용하듯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들은 세상에 하나뿐인 장비로 자신만의 사진을 촬영했다.

회사는 독자의 신뢰를 생명처럼 여겼다. 완성된 기사는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 철저한 검증을 거쳤다. 조사부 직원이 취재원을 다시 만나 확인하고, 사진은 조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성경 다음으로 믿을 만하다"는 평가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취재 활동을 무한정 지원하고 기사의 내용을 철저히 검증하는 것은 모두 독자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입사했는데, 나한테는 도무지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러려니 했는데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흘러도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이었다. 사진부장한테 이야기했더니 기다리라고만 했다. 지루하고 불안했다. 일다운 일을 해보지도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돌아가는 걸 관찰했더니 '기획회의(Planning Council)'라는 것이 있었다. 기획위원들은 기사와 사진의 취재.편집.탐사기획 등 주요 파트의 베테랑이었으며 세상 돌아가는 걸 손금 보듯 하는 사람들이었다. 기획회의는 기사 소재를 선정하고 할당하는 기구였고 기자가 취재를 하려면 그곳에서 기획안이 통과돼야 했다. 회의실에는 한쪽 벽면을 완전히 덮는 대형 세계지도가 있었는데 진행 중인 주요 취재의 내용.담당자.진행과정 등이 표시되어 있었다.

기획회의에 기획안을 제출하기 위해 소재를 찾기에 몰두했다. 먼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경향을 파악하기 위해 1888년 창간 이후 출판된 잡지를 모두 탐독했다. 다 보고나니 걱정이 앞섰다. 엄청난 사진과 기사들이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과연 내가 이런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용기를 내 기획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겁고 거창한 주제를 다뤘다. 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신참인 나는 부담 없고 간단한 기획안을 내야 했다. 그래야 회사에서 일을 맡길 것이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쿠즈타운의 '아미시 피플(Amish People)' 축제는 그런 기준에 맞는 기획안이었다. 그들은 독일 이민자 종교집단으로 자신들만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살았다. 기획안은 통과되었고 의욕적으로 취재를 마쳤다. 사진은 '시적이고 정감 어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데뷔작으로 나는 6개월 만에 신참의 미칠듯한 지루함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7. 사진편집인상

[중앙일보]입력 2006.10.10 18:01 / 수정 2006.10.11 04:04

취재 않고 3년간 편집에 열정 쏟아
아버지 "박사학위 딴 자식보다 대견"

미주리대에서 받은 올해의 사진편집인상.
첫 취재 이후 열심히 일했다. 사진이야 10대 시절부터 미쳤던 것 아니던가. 독창적이면서 느낌이 있는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했다. 시사잡지의 사진들은 대체로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운이 좋으면 아마추어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은 창의력이 더 중요한 요소였다. 소재의 의미를 최상의 영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두뇌가 필요했다. 바쁘게 움직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진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좋은 사진 덕분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사진기자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촬영하는 것으로 임무는 끝이었다. 지면 제작에는 사진 촬영보다 편집이 더 중요했다. 편집자는 어떤 사진을, 어느 정도 크기로, 몇 매를 사용할 것인지 결정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어느 매체보다 사진기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었지만 최종 결정은 편집자 몫이었다.

어떤 사진을 취재할 것인가는 기획회의에서 결정됐다. 나는 그런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싶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편집부장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자 나에게 편집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전부터 편집에 특별한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편집이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구성해 함축적.미적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시각적 요소만 중시해서는 안 된다. 내용이 더 중요하며 제대로 된 편집을 하기 위해서는 주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야 했다.

3년 동안 열심히 편집 일을 했다. 기사를 거듭 정독하고 수많은 사진을 보고 또 봤다. 취재기자와 함께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사진기자로부터 취재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사무실에 혼자 남아 새벽까지 일에 몰두한 날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힘들었지만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1970년 미주리대 저널리즘 위크 축제에서 '올해의 사진편집인상'을 받았다. 그 상이 어떤 상인가? 저널리즘 학문 분야에서 미국 최고 권위의 미주리대가 한 해 동안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편집자에게 주는 상이다. 불과 몇 년 전 차가운 복도에 앉아 단상의 수상자들을 보며 막연하게 꿈꾸던 바로 그 상이었다.

한국으로 전보를 쳐 부모님을 시상식에 초대했다. 입사 때는 부모님께 연락도 하지 않았었다. 교수나 박사가 아니면 이해해 주실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답장을 보냈다. "네가 한국 실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외국 여행은 불가능하고, 더구나 부부가 같이 나갈 수는 없다."

궁리 끝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써 선처를 부탁했다. 청와대의 조사가 시작됐고, 비서실 직원이 우리 부모님을 방문한 지 사흘 뒤에 여권이 발급됐다. 시일이 촉박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시상식엔 참석하지 못했지만 얼마 뒤 워싱턴에 도착했다. 한복 차림으로 회사에 들른 아버지는 내가 받은 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박사학위 두세 개 딴 자식보다 대견하다"고 칭찬해 주셨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8. 북한 취재 추진

[중앙일보]입력 2006.10.11 22:23

사내 경쟁서 살아남는 법 궁리하다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에 편지

평양 조선혁명박물관 앞의 거대한 김일성 동상. 필자가 북한 취재 중에 찍은 사진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픽’ 1974년 8월호에 실렸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재능이 특출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모두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며 치열하게 경쟁했다. 나도 열심히 일했지만 항상 불안했다. 최악의 경우 쫓겨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편집을 열심히 해 큰 상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이 나의 장래를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십여 년 전, 경기고 졸업식 때 김원규 교장선생님이 당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가슴 깊이 새겼던 교훈이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있으나마나한 사람, 꼭 있어야 할 사람이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돼야 한다."

그 가르침을 떠올리자 고민은 끝났다.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면 된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북한 취재였다.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회사는 북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취재를 성사시키기 위해 정부 인맥을 동원하고 제3세계 국가들과 접촉도 했다. 하지만 북한은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었다. 서방의 어떤 언론사도 그 때까지 북한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북한 취재는 내 목표가 되었다. 스스로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같은 민족 아닌가. 우선 북한과 접촉해야 했다. 이리저리 알아본 끝에 해외의 북한 기관에 연락해보기로 했다. 가장 유력한 곳으로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이 떠올랐다.

편지를 누구에게 쓸까 고민하다가 최고위 인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김일성이었다. 하지만 '김일성…'이라고 쓰고 나니 호칭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통령도 아니고, 왕도 아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그 노래의 제목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였다. '김일성 장군' 앞으로 편지를 썼다. 내가 누구며,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어떤 회사이고, 북한을 소개하는 기사를 취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을 모스크바의 북한 대사관으로 보냈다. '이 편지를 평양의 김일성 장군에게 전해 달라'는 메모도 함께 넣었다. 1972년 가을의 일이었다.

해가 바뀌어 73년 봄에야 답장이 왔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 허정이 보낸 것이었다. 취재 허락은 아니었지만 내 인적 사항을 자세히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가능성이 생기자 회사는 흥분했다. 즉시 나와 부편집인으로 일하는 고참 기자의 이력서 두 통과 취재계획서를 발송했다. 답장은 7월에야 왔다. '혼자 오라'는 내용이었다. 사진과 글을 혼자 담당하는 문제에 대해 회사는 회의적이었다. 사장은 "아무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글을 쓸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기회를 달라고 끈질기게 졸라 결국 승낙을 받았다.

당시 미국인이 생각한 북한은 머리에 뿔이 달린 사람들이 사는 나라였다. 국무부에서도 "문제가 생겨도 손을 쓸 수 없으니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다. 출국에 앞서 유서를 작성했다. 회장과 사장이 참관하고 사인했다. 모두 걱정했지만, 내 가슴은 고동쳤다.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드디어 내가 하게 되었으니까.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9. 호텔 '연금'

[중앙일보]입력 2006.10.12 22:22 / 수정 2006.10.13 05:09

'오지 말라'는 북측 전보 무시하고
1973년 9월 모스크바공항에 내려

1973년 가을의 모스크바 붉은 광장과 바실리 성당. 필자가 일주일간의 호텔 ‘연금’에서 풀려난 날 촬영했다.
1973년 9월 중순, 텅 빈 모스크바공항 대합실에 혼자 서 있었다. 같이 내린 승객들은 모두 빠져나갔다. 막 해가 진 창 밖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미국을 떠날 때 북한 측에 9월 중순 모스크바에 도착하겠다고 연락했고, 파리를 떠날 땐 며칠 몇 시에 공항에 내릴 것이라고 다시 알렸었다. 하지만 내가 출발한 것을 안 북측은 "시기적으로 안 좋으니 여행을 중단하라"고 연락했었다. 난 그 연락을 못 들은 척하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이다.

창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파리를 떠날 때부터 불안했는데 막상 공항에 혼자 남게 되자 후회감이 밀려왔다. '내가 너무 무모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가. 이런 꼴로 회사에 돌아가게 되면 내 체면은 뭐가 되지'. 경유비자라서 혼자서는 공항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내 주위에는 취재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10여 개의 크고 작은 알루미늄 가방이 놓여있었다. 카메라와 렌즈, 필름과 옷가지가 가득 든 것들이었다. 30분쯤 그렇게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춘듯 했다. 그때, 멀리 있는 기둥들 사이로 서성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동양인들이었다. 한동안 나를 살펴보더니 서서히 다가왔다. 한 사람이 말했다.

"혹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오신 김 선생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조선대사관에서 나왔습니다. 오지 말라는 전보를 받지 못했습니까?" "유럽 취재 다니느라 못 받았습니다."

일단 안도했다. 국제 미아는 면했기 때문이다. "숙소는 정했습니까?" "아뇨." 그는 한참 망설이다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로시아호텔로 나를 데려갔다. 호텔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컸다. 객실이 무려 3200개였다.

방을 나가며 그가 말했다. "푹 주무시고 내일 떠나십시오. 평양에서는 선생을 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를 붙들고 사정했다.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그냥 갑니까? 편지를 써줄테니 평양에 전해만 주세요." 그는 마지못해 다음날 와서 밤새 쓴 편지를 가져갔다.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외출도 못하고 밤낮을 기다렸다. 그런 감옥이 없었다. 창문을 열면 붉은 광장과 예쁜 바실리성당이 보였다.

사흘 만에 나타난 그는 "가망성이 없으니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 더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내가 딱해 보였는지 그는 "마지막으로 전해 주겠다"고 했다. 다시 밤새 편지를 썼다. 불안하고 짜증스러운 나흘이 또 흘렀다.

호텔방에 갇혀 지낸 지 일주일째 되던 날, 마침내 대사관 간부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나를 옆방으로 안내했다. 그 곳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그들은 내가 호텔에 도착할 때부터 옆방에서 대책반을 가동한 게 분명했다. 책임자가 말했다.

"아무리 가라고 해도 안 가시니 평양에서도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구경이나 하자고 합니다. 평양에 이틀간 머물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속으로 환호했다. 이틀이 될지, 두 달이 될지는 가봐야 아는 일이었다. 그들은 내 행색을 살피며 수군거리더니 이발을 하라고 했다. 나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장발을 하고 있었다. 머리야 다시 기르면 된다. 다음날 모스크바 시내에 나가 북한 사람들처럼 머리를 짧게 깎았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0 '수령님'의 나라

[중앙일보]입력 2006.10.15 22:15 / 수정 2006.10.16 07:52

인적 없는 평양 외곽 초대소서 묵어
취재 나가려 하자 "낮잠 시간이라…"

불가리아 대통령의 방북 환영행사에 동원된 평양 시민 1만여 명이 꽃술을 흔들고 있다. 멀리 천리마동상과 모란봉극장이 보인다.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소련 국영항공사 아에로플로트의 여객기는 소형 프로펠러기였다. 내부는 좁고 불편했으며, 승객의 행색이나 짐칸 분위기가 시골버스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오랫동안 마음 졸이며 추진하던 북한 취재가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어두운 시베리아를 밤새 날았다. 다음날 낮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북한 산하가 보이기 시작했다. 북녘 땅이지만 13년 만에 다시 보는 조국이었다. 어린 시절 카메라를 메고 뛰어다니던 바로 그 들판과 동산이 눈 아래 펼쳐졌다. 콧날이 시큰했다.

평양 순안공항은 작고 한산했다. 청사에 걸려 있는 대형 김일성 초상화 아래엔 '김일성 수령님 만수무강하십시요'라는 붉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수령'이라는 호칭을 처음 알았다. 붉은 스카프를 두른 남녀 어린이들이 꽃다발을 주며 북한식으로 경례했다. 담당 안내원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박오태 부장이었다. 마음씨 좋은 시골아저씨 인상의 그는 "평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하고 인사했다.

그가 날 데려간 곳은 시내 호텔이 아니라 평양 외곽의 초대소였다. 경치는 좋았지만 인적조차 없는 곳이었다. 박 부장은 "여행으로 피곤하실 테니 쉬시라"고 했다. 북한 당국은 아직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방침을 못 정한 것 같았다. 이틀간 바깥 구경을 할 수 없었다. '수령님'의 초상화가 붙어 있는 방에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사흘째 되는 날, 드디어 취재가 허락됐다. 박 부장과 검은색 벤츠를 타고 길을 나섰다. 평양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철저히 파괴돼 휴전 당시 성한 건물이라고는 달랑 두 채만 남아있던 도시가 인구 100만의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해 있었다. 버드나무가 늘어선 넓은 길, 고층 아파트와 웅장한 기념탑들, 하늘을 찌를 듯한 텔레비전 송신탑과 아름다운 대동강….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95개의 대형 전시실을 갖춘 조선혁명박물관에는 군인과 학생.근로자들이 무리 지어 관람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카메라를 멘 나를 외계인 보듯하며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도시 전체는 연극무대요, 주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취재를 나가자고 하니 박 부장이 말렸다. 오침(午寢) 시간이라 나가봐야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거였다. 오침이 뭐냐고 물으니 점심을 먹고 낮잠을 두세 시간 자는 것이라고 했다. 남유럽도 아니고 중남미도 아닌데 무슨 오침이란 말인가. 조바심이 난 김에 비웃듯 투덜거렸다.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면서요. 몇 시간씩 낮잠을 자며 어떻게 그런 꿈을 이룰 수 있습니까?" 박 부장은 내 말을 듣고는 잠시 밖에 나갔다 오더니 "갑시다. 공장의 오침시간이 끝났습니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잠자는 공장 사람들을 다 깨웠을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의 이런 건설적 비판은 그들에게 신선한 것이었고, 덕분에 취재 기간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 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1. 뒤로 가는 트랙터

[중앙일보]입력 2006.10.16 19:48 / 수정 2006.10.17 05:27

외제 트랙터 한 대 들여와 분해
모든 부품 복제해 북한산 만들어

1970년대 북한산 트랙터. 외국 제품을 분해한 뒤 모든 부품을 복제해 만든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방문하니 교문에서 운동장을 거쳐 현관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이 두 줄로 도열해 있었다. 밴드가 쿵작거리고, 학생이 꽃다발을 선사했다. 학생들 사이를 교장과 나란히 걷는데 너무 부담스러웠다. 기자에 불과한 나한테 왜 이렇게 하는 걸까. 불편한 기색을 눈치 챈 교장이 말했다.

"김 선생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손님입니다." 그래도 공부하는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더니 그는 "공화국이니까 이런 일도 가능하다"며 껄껄 웃었다. 공부 내용은 실용적이었다. 아이들이 재봉틀을 직접 돌리며 바느질을 배웠다. 문제는 이념교육이었다. 코가 뾰족한 서양사람에다 '미국 놈'이라고 써 놓고 어린이가 총을 겨누고 있는 그림이 복도에 걸려 있었다. 교장은 미국 국적을 가진 나에게 학생들이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오후에 김일성대학을 방문했다. 환영행사는 없었다. 학생들을 동원하면 안 된다는 내 뜻이 즉각 반영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총장의 인상은 학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검게 탄 얼굴에 고생을 많이 한 흔적이 역력했다. 노동자나 농민 출신을 김일성대학 총장이라는 상징적인 자리에 앉혀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가장 큰 방으로 갔다. 세계 각국 신문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내용이 전부 '위대한 수령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모두 '전면광고'였다. 영자(英字)지 상단에 'ADVERTISEMENT'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성 안내원이 "외국 귀빈이 오면 이 방으로 안내해 세계 만방이 김일성 수령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것들은 기사가 아니라 광고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총장은 확신에 찬 어조로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내 곁에 있던 조평통의 박오태 부장은 광고가 뭔지는 아는 것 같았으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용은 실용적이지만, 이념은 '미제(美帝)에 대한 증오' '김일성 우상화'에 매몰돼 있는 게 북한 교육의 실상이었다. 그것 들은 북한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처럼 보였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트랙터 공장을 방문했을 때 공장장이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1958년에 김일성 수령께서는 농업을 기계화 해야 농촌이 잘 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트랙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해 외국에서 설계 도면을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완성품은 팔아도 설계도를 파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트랙터 한 대를 사서 분해한 다음, 모든 부품을 복제해 드디어 완성품을 조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 트랙터가 시동을 걸자 뒤로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공장장의 비장한 표정을 보고는 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가슴이 아팠다. 공장장의 설명이 계속됐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친 지 2년 만에 이 공장에서는 연간 3000대의 트랙터를 생산했습니다."

지금의 북한 경제는 비참한 지경이지만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2. "같이 혁명합시다"

[중앙일보]입력 2006.10.17 20:50 / 수정 2006.10.18 05:45

사흘간 북한 역사·사상 가르친 뒤
"김 선생은 혁명정신이 있는 사람"

북한 시범 집단농장의 휴식시간. 김일성은 이곳을 62차례나 찾았다고 한다.
취재는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언제 북한을 떠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 허락된 이틀은 벌써 넘겼지만 내가 요구한대로 두 달간 머물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주제별로 취재를 했다. 교육 현장을 둘러보고, 다음에는 산업계를 훑어본다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야 언제 떠나더라도 최소한 '북한 교육'이나 '북한 산업현황' 같은 제목으로 기사를 작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사회과학부 소속 인사가 숙소로 찾아왔다. 공화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을 알아야 한다며 강의를 들으라고 했다. 가급적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순순히 응했다. 강사는 일제시대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장황하게 찬양하고, 자본주의는 빈부의 격차로 인해 인간이 대접받지 못하는 제도라고 강조했다. 교육은 사흘간이나 계속됐다.

마지막 날, 교육을 끝낸 강사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김 선생은 혁명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와 같이 혁명 과업을 완수합시다."

깜짝 놀랐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구나'.

사실 북한에는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침이나 학생들을 환영행사에 동원하는 것이 그랬다. 특히 김일성 광고를 외국 귀빈에게 보여준다는 이야기에는 민족적 수치심을 느꼈다.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난 한민족이었다. 눈치 보지 않고 거침없이 내 생각을 말했다.

북한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지적한 것들이 다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그들은 그런 나를 혁명 동지로 포섭하려 한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것도 좋겠지요. 하지만 난 이미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강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사가 다시 물었다. "긴 여행을 하자면 돈이 많이 들 텐데 회사에서 어떻게 해 줍니까?" 돈으로 회유를 시도한다는 걸 직감했다. 쐐기를 박아야 했다. "회사에서 월급을 충분히 주고 출장비도 무제한 지원합니다. 돈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비로소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입바른 소리는 가급적 자제했다. 오해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북한에 있는 동안 회사로 엽서를 몇 차례 보냈다. 별 내용이 없는 듯했지만 짧은 글 안에는 회사와 정해둔 암호가 숨어 있었다. 첫 글자가 S.A.F.E로 시작되는 단어들이 문장 속에 있으면 '안전하다(SAFE)'는 뜻이었다. 그런 방법으로 '취재는 원활하다(GOING WELL)'는 소식도 전했다. 혁명 동참 권유를 어렵게 뿌리친 뒤 'SAFE' 신호를 보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3. 푸에블로 호

[중앙일보]입력 2006.10.18 18:05 / 수정 2006.10.19 04:49

나포된 배 촬영 거듭해 요청하자
"공화국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푸에블로 호는 현재 평양 대동강 변에 전시돼 ‘북한 안보교육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태성 기자
1968년 1월 23일 낮, 미 해군의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USS Pueblo) 호는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하늘엔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 함장이 비상벨을 눌렀다. 정체불명의 함정이 고속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온 배는 북한 해군의 반 잠수정이었다. 그들은 푸에블로 호의 국적을 물었고 함장은 성조기를 게양하는 걸로 대답했다.

곧이어 세척의 북한 어뢰정이 도착해 나포를 시도했다. 미그기 두 대도 굉음을 내며 푸에블로 호를 스칠 듯 비행했다. 상황을 파악한 일본 도쿄의 미 5공군 사령부는 한국 공군의 즉각 출격을 요청했다. 이에 3개 전투기 편대가 출격했다. 불과 40시간 전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한국 전투기는 미사일과 실탄을 가득 실고 있었다. 하지만 푸에블로 호는 이미 북한의 방공망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미 해군 역사상 자국 함정이 외국군에 의해 나포된 것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푸에블로 호는 첩보함이었다. 핵 항모 엔터프라이즈 호가 원산 앞바다로 급파되었고 동북아의 미군 기지들은 전시상황에 돌입했다. 그러나 승무원들의 목숨이 북한 손아귀에 있었다. 미국은 북한의 요구대로 영해 침범 사실을 시인하고 공식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승무원 82명은 그해 크리스마스 직전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의 대북 감정은 크게 악화되었다. 하지만 기자인 나한테는 기회이기도 했다. 취재할 수만 있다면 세계적 특종이 되기 때문이다.

금강산 가는 길에 원산을 들렀을 때 박오태에게 슬쩍 물었다. "원산에 아직 푸에블로 호가 있습니까?" 그는 "…있습니다. 아니, 없을 수도 있습니다"하고 얼버무렸다.

있는 게 분명했다.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했다. 박오태는 내 부탁을 못들은 체 하다 줄기차게 요구하자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국 놈들은 치사하게 간첩 활동을 벌였습니다. 우리를 얕잡아 본 것 아닙니까? 공화국은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는 "정부 방침 상 불가능 합니다"하고 잘라 말했다. 특종 거리가 눈앞에 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송도원해수욕장 백사장을 걸었다. 유명한 곳이라고 박오태가 자랑했지만 푸에블로 호에 미련이 남은 내 눈에는 그저 그랬다. 한참 걷다보니 '남자'라고 쓴 커다란 팻말이 보였다. 다시 몇 백 미터 가니 이번에는 '여자'라고 쓴 팻말이 서 있었다. 저것들이 뭐냐고 물었다.

"남자는 남자들끼리, 여자는 여자들끼리 수영합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박오태는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수욕장을 남녀가 따로 사용하다니…. 세상 어디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가족끼리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박오태는 잠시 생각하더니 "중간에서 놀지요" 했다. 그는 그렇게 말해놓고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했는지 픽 웃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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