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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펜화 에세이

중앙[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12.~22 /토종끈끈이귀개 2장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2. '인간가족'전

[중앙일보]입력 2006.09.18 20:28 / 수정 2006.09.19 05:21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춘기 고민 풀어준 사진전

‘인간가족’전의 대미를 장식한 유진 스미스의 작품 ‘낙원에 이르는 길’.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사춘기를 겪었다. 하지만 친구들과는 좀 달랐다. 이성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대신'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

'이방인' '죄와 벌' 같은 두껍고 난해한 책들과 씨름했다. 뭔가 대답이 있을 것 같았다.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삶에서 배울 점이 있는지 관찰했다. 하지만 그런 책들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공상에 잠기면 행복했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었다. 내가 원하고 꿈꾸는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였다. 눈을 뜨면 고통과 좌절과 비극만이 나를 둘러쌌다. 낙제 또한 비참한 현실 가운데 하나였다. 수업시간에도 천당과 지옥을 오간 나의 상상은 교과서에 새까만 낙서로 남았다.

그 무렵 방황하는 내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 일이 있었다. 1957년 경복궁에서 열린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이라는 제목의 사진 전시회였다. 내용도 모른 채 보러 간 그 전시회는 나를 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감동적이었다.

'인간가족'은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55년 뉴욕 현대미술관 개관 25주년을 맞아 기획한 전시회였다. 3년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200만여 장의 사진을 받아 503장을 추려냈다. 주제는 '인간은 하나'였다. 두 차례나 참혹한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진전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세계 순회 전시가 이루어졌고,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한국에선 무려 30만여 명이 사진전을 관람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소년은 전시회에서 다양한 인생을 봤다. 공장 노동자의 강인한 팔뚝, 피리 부는 목동의 순수한 얼굴, 탯줄을 몸에 감고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 남자의 등을 파고드는 여자의 손톱…. 사진들은 인간이라면 겪지 않을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파노라마를 보여주었다.

나는 홀린 듯 전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이 모두 경이롭고 신비했다. 사랑은 한 가지 감정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름다운 사랑, 질투, 정열, 연민, 육체적 몰입…. 난해한 책과 씨름하면서 알고자 했던 답을 사진들은 쉽고도 명쾌하게 알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다양함'과 '가능성'이었다.

'인간가족'전을 보기 전까지는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해답을 한 가지만 찾아 헤맸다. 하지만 삶은 다채로웠고, 가치관은 다양했다. 답은 한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비로소 나의 삶도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건 '사진의 힘' 덕분이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의 힘. 사진은 마술 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가족'전을 본 뒤 더욱 사진에 몰두했다. 물론 공부도 슬슬 시작했다. 두 번 낙제하면 퇴학이었으니까.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3. 봉은사 가는 길

[중앙일보]입력 2006.09.19 21:52 / 수정 2006.09.20 05:02

여배우 모델 촬영대회 갔다가
밭일 하고 귀가하는 모자 찍어

나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에 사진에 입문했다. 10대 소년의 시선은 순수했다.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래서 이야기의 진행을 잠시 멈추고 그 시절 사진을 몇 장 보여드리고자 한다. 50년대는 어쩌면 우리에겐 잊어버리고 싶은 세월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봐야 현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미래도 내다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진들은 모두 고교 재학 시절 개인전에 발표했던 작품들이다.

대한사진예술연구회는 55년 7월 10일 야외 촬영대회를 열었다. 틈만 나면 카메라를 메고 다닐 때였으니 그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장소는 뚝섬 백사장. 처음 참가하는 촬영대회라 마음이 설렜다.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왕십리를 거쳐 뚝섬으로 향했다. 뚝섬은 머나먼 '시외'였다.

주최 측은 여자 배우 서너 명을 모델로 동원했고, 강사를 초빙해 사진촬영 실기를 강의하기도 했다. 수백 명의 사진작가들이 모델 주변에 몰려 촬영 경쟁을 벌였다. 교복 입은 학생은 나 혼자였다.

오후가 되자 맑았던 날씨가 서서히 흐려지더니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백사장의 나룻배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여자 모델은 별로 신통해 보이질 않았다. 다른 사진거리를 찾아봤지만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나룻배를 타고 강남으로 넘어 갔다. 백사장을 가로지르고 산을 넘어 봉은사를 찾았다. 그 때의 봉은사는 고요한 산사(山寺)였다.

절을 한 바퀴 돌며 사진을 찍고는 다시 배를 타기 위해 산을 넘는 중이었다. 그때 마침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낙과 아이가 눈에 띄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카메라를 들고 그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셔터를 눌러댔다. 비탈엔 소나무가 서 있고 멀리 강변에는 포플러나무가 강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귀로(歸路.아래사진)'라는 제목으로 출품한 이 사진은 290여 점의 작품 중에서 특선으로 뽑혔다. 언론은 "독특한 모티브의 발견이며, 그 내용이 생생하고 노련하다"고 과분한 평가를 해줬다.

이 사진을 찍은 장소는 어디쯤 될까. 곰곰 생각해보니 지금의 서울 삼성동 경기고 교문 부근이었다. 50년 전 서울 강남은 이런 모습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4. 잔칫집 가는 길

[중앙일보]입력 2006.09.20 17:56 / 수정 2006.09.20 17:56

농부 찍으려 안양 들판 헤메다
의관 갖춘 어르신들 행렬 포착

초여름의 어느 일요일, 나는 집 툇마루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맑고 파랗고 높았다. 집에서 보내기에는 날씨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판에는 빛의 향연이 펼쳐져 있을 것이고, 좋은 사진거리가 널려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도시락을 부탁했다. 한 달이면 두세 번씩 카메라를 메고 들판을 헤매는 아들을 어머니는 말리지 않았다. "몸조심 하고, 깡패 조심하고,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너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도시보다 자연 속에서 사진 찍는 것이 좋았다. 50년대는 서울 근교가 전부 시골이었다. 영등포만 벗어나도, 신촌만 벗어나도 인적조차 드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근교를 벗어나서 멀리 나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멀다고 해 봐야 수원, 오산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날도 멀리까지 나갔다. 영등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안양까지 가서 들판을 가로지르는 신작로를 걸었다.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햇살이 점점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몇 장 찍다보니 어느 듯 점심시간이 되었다. 개울에 손을 씻고 그늘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그 때 신작로 저 멀리 두루마기에 갓을 쓴 어른들이 나타났다. 열 분이 넘어보였다. 의관을 갖춰 입은 걸로 봐서 이웃마을 잔치에 가는 것이 분명했다. 서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도시락을 덮고, 카메라를 들었다. 신작로 한복판에 서서 어른들을 향해 거리를 측정했다. 하지만 앵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찍으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아까 신작로를 걷다가 고장 나서 서 있던 트럭이 생각났다. 어른들을 뒤로하고 1km쯤 되는 그 곳까지 내달렸다. 다행히 트럭은 아직 그대로 있었다. 땀을 훔치고 숨을 고르며 트럭 위로 올라갔다. 앵글이 훨씬 좋았다.

카메라 파인더를 들여다봤다. 녹색 들판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신작로가 곧게 뚫려 있고, 포플러 이파리가 햇살에 반짝였다. 이윽고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어른들이 장중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잘 연출된 연극의 한 장면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맨 앞에 선 어른이 트럭 아래까지 접근했을 때 셔터를 눌렀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5. 첫사랑

[중앙일보]입력 2006.09.21 21:36 / 수정 2006.09.21 21:37

두 살 많은 불문학도에 반해
14년 지나서야 "사랑했어요"

필자(左)가 1958년 11월에 연 두 번째 개인전에 찾아온 그녀.
고교 시절, 나는 친구들처럼 여학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지는 않았다. 하지만 첫사랑은 찾아왔다.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들른 서울 종로의 빵집 고려당에서 그녀를 처음 봤다. 그녀는 여동생 친구의 언니였다.

첫눈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 이화여대 불문과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큰 병원을 하는 집안의 딸이었고, 승마와 무용을 즐기는 멋쟁이였다.

다시 만날 기회를 엿보던 중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를 초청하기로 했다. 여동생을 구슬려 초청장을 보냈다. 전시회를 준비하는 동안 그녀가 과연 와 줄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을 졸였다. 나는 아직 고교생이었고, 그녀는 장안에서 인기 있는 여대생이었다.

그녀가 왔다. 나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차분하게 전시장으로 안내했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보던 그녀는 "사진이 좋다. 고등학생 사진 같지가 않다"고 평가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광릉으로 같이 나들이를 가고, 그녀 집에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동생으로 취급했다.

어느 날 영화를 보러 갔다.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극장)에서 상영하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우리가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영이 시작됐다. 어둠 속에서 자리를 찾다가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잡은 내가 더 놀랐다. 그녀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네 시간이 넘는 긴 영화를 보는 내내 손끝에 남은 온기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손을 씻지 않았다.

1960년 내가 유학을 떠나며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14년이나 흐른 74년이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그녀를 찾았다. 그런데 그녀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67년 '동백림(東伯林)사건'이라는 간첩단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서유럽에 거주하는 194명의 예술가와 교수.유학생이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건은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에 의해 간첩단 사건이 아니라는 쪽으로 결론이 났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정치적.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녀는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생과 결혼했다. 남자는 "신혼여행을 어디로 가고 싶으냐. 세상 어디나 가게 해 주겠다"고 했고, 그녀는 농담 삼아 "북한"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소원대로 북한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가난한 유학생이던 남자가 북한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동백림 사건이 터지자 남자뿐 아니라 그녀도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대단하던 그녀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다시 만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남편은 아직 복역 중이었다. 서울에 머물던 어느 날 옛사랑을 고백했다. "옛날에, 내가 당신을 사랑한 거 아나요?"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처량한 고백이요, 쓸쓸한 회고였다. 사춘기 시절 내 가슴을 불태웠던 그녀가 분단의 희생양이 되어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6. 유학을 떠나다

[중앙일보]입력 2006.09.24 18:08 / 수정 2006.09.26 09:50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데다
대학 졸업해도 할일 없을 것 같아

1960년 6월 김포공항을 떠나기 전 어머니와 기념촬영을 했다.
1960년 4월 19일, 나는 서울 세종로에 있었다. 데모대가 넓은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자유당 정권 때려 부수자" "이승만.이기붕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쳐댔다. 사거리에 있는 동아일보 건물로 들어갔다.

이명동 선생은 취재를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이 선생은 55년 동아일보로 옮겼다). 편집국은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기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최경덕 사진부장은 "위험하니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다시 거리로 나왔다. 학생.시민들이 떼를 지어 중앙청(옛 국립중앙박물관) 방향으로 몰려갔다. 중앙분리대의 은행나무 사이에서 데모 현장을 지켜봤다. 경찰이 경무대(현 청와대)로 들어가는 길목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탕, 탕" 총소리가 났다. 위협용 공포같았다. 다시 총소리가 났다. 내 곁의 은행나무 껍질이 총알에 맞아 찢겨져 나갔다. 몇몇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데모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공포탄이 아니라 실탄 사격이라는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나도 현장의 사진기자 선배들과 허둥지둥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59년에 연세대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부모님은 판.검사나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나는 그런 직업이 싫었다. 고교 시절부터 인간 심리에 관심이 많았고 외국에서는 아동.범죄 심리학이 중요한 학문야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심리학을 공부하더라도 최소한 교수가 되라며 입학을 허락했다.

연세대 캠퍼스는 작고 아담했다. 오래된 석조건물이 영화에서나 봤던 미국의 사립학교 같은 분위기였다. 나비넥타이를 맨 김동길 교수는 신입생들에게 미국 유학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도로가에 주차할 때 파킹미터에 동전을 넣고 태엽을 돌린다는 이야기, 고속도로에 진입하려면 통행료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도무지 무슨 이야긴지 알 수 없었다. 길을 막아놓고 돈을 받는다면 봉이 김선달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문명국가 미국에서 왜 그런 일이 벌어지지?

당초 나는 한국에서 대학을 오래 다닐 생각은 없었다. 고교 시절부터 유학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대학을 졸업해도 국내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고급인력들이 당구장이나 다방에 죽치고 앉아 소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 저렇게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또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였지만 나는 성인이 되었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4.19는 결정타가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주한 미국대사인 다우링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내 사진전을 관람한 게 인연이 됐다. 뉴욕대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해 줬고, 에드워드(Edward)라는 미국식 이름도 지어 주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세상에 나가 혼자 힘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으냐"며 반대했지만 결국 허락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일단 집을 떠나면 일체 돈을 보내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60년 6월 말, 나는 여의도 비행장에서 노스웨스트 프로펠러기를 타고 한국 땅을 떠났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 바로잡습니다

9월 25일자 31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기사 중 '여의도 비행장'은 '김포공항'의 잘못이므로 바로잡습니다. 여의도 비행장은 1958년 김포공항에 민간 공항의 기능을 넘겨주고 군용 비행장으로 사용되다 71년 폐쇄됐습니다.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7. 뉴욕의 노숙자

[중앙일보]입력 2006.09.25 22:04 / 수정 2006.09.26 06:40

큰누이 집이나 대학서 늘 외톨이
워싱턴광장서 밤새워 놀고 자고

맨해튼 남쪽 그리니치 빌리지의 워싱턴광장.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명소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미국 유학이지만 막상 비행기를 타는 순간에는 가슴이 떨렸다. 전 재산은 외환 보유 한도액인 200달러였고, 짐도 조그만 가방 두 개가 전부였다. 가방에는 옷가지와 영어사전, 고교 시절 찍은 사진들과 카메라 한 대가 들어있었다.

뉴욕까지 2박3일이 걸렸다. 하와이에서 1박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1박하며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 하와이에서는 항공사가 제공해 준 고급호텔에서 묵었다. 하지만 밤에 도착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혼자서 호텔을 찾아야 했다. 생소함과 막막함에 외계인 같다는 느낌이었다.

택시를 타고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가자(Nearest hotel, Please)"고 했다. 기사는 몇 번을 말해도 내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힘들게 찾은 호텔은 3류 여관 수준이었다. 침대는 낡았고, 방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 미국은 모든 게 멋있고, 편리하고, 세련됐을 것이라는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뉴욕에 도착해 브루클린의 큰누이 집으로 갔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유학 중이던 누이는 미국에서 결혼해 대학병원 인턴으로 있었다. 자형은 레지던트였다. 난 항상 혼자였다. 누이 부부가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1960년 9월 대학에 등록해 심리학 과목과 어학 과정을 수강했다. 환상 속에 동경했던 미국은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았고, 거구의 백인들은 날 친구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동양인 유학생은 거의 없었다. 정서적으로 불안하다보니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집에 가서는 TV 채널만 이리저리 돌려댔다.

맨해튼 남쪽 그리니치 빌리지에 워싱턴광장이 있다. 저녁이 되면 화가.시인 등 예술가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반(反)문화 인간들이었다. 사회 부적응자, 유랑자, 신비주의자, 전위예술가,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비트닉(beatnik)이라 불렸다. 몇 년 후 등장하는 히피(hippie)의 원조격이었다.

그들과 가까워졌다. 미국 사회에서 비트닉만이 인종차별을 하지 않고 나를 편견 없이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따라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았다. 밤샘 파티 후 잠은 아무데서나 잤다. 세수는 공원 수도시설에서 해결했다. 자유로웠지만 비참했고, 심신은 황폐해져 갔다. 큰 뜻을 품고 간 미국 유학이 지독한 방황으로 이어졌다.

그해 11월 23일, 첫눈이 내렸다. 이례적으로 이른 첫눈이라 아직도 날짜를 기억한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하얀 눈이 천지를 덮고 있었다. 워싱턴광장으로 갔다. 아무도 없었다. 브루클린의 누이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눈을 맞으며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넜다. 다리 가운데쯤에 있는 난간 전망대에서 맨해튼을 돌아봤다. 그때 본 뉴욕의 야경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안개 낀 이스트강 위에 떠 있던 마천루. 몇 달째 살았지만 그때 뉴욕의 진면목을 처음 봤다.

바람이 차가웠다. 온 몸이 떨렸지만 마음은 더 추웠다. 저 거대한 도시에서 과연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 생존이나 할 수 있을까. 나의 무기력과 무능을 새삼 사무치게 느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8. 자살 기도

[중앙일보]입력 2006.09.26 19:58 / 수정 2006.09.27 06:14

잠깐 집에 들른 큰누이가 목격
'죽을 각오면 못할 일 없다' 다짐

뉴욕 유학 시절,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 뒤에 선 필자가 왜소해 보인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최고가 되라고 가르쳤다. 나는 대체로 그 요구에 따랐다. 공부든 운동이든 마음만 먹으면 최고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최고는커녕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 대접을 받고 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절망했다. 최고를 지향하고 살았기 때문에 좌절감은 더 컸다.

워싱턴광장에서 비트닉들과 함께 노숙자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나는 고심하던 일을 결행키로 했다. 더 이상 사는 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자살하기로 한 것이다.

브루클린의 큰누이 집으로 갔다.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왼쪽 손목을 면도칼로 그었다. 차가운 느낌과 예리한 통증에 진저리를 쳤다. 뜻밖에 피는 그리 많이 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계속 그었다. 차츰 피가 많이 흐르기 시작했다. 흥분해서인지 처음에는 따뜻한 느낌이 들었으나 차츰 추워졌다.

피가 흘러내렸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아버지.어머니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잠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30분쯤 지났을까. 몽롱한 상태로 앉아 있는데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이가 옷가지를 챙기러 집에 들렀다가 나를 발견한 것이다.

즉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출혈량이 치명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아홉 살 많은 누이는 병실에 누워있는 나를 기가 막힌 듯 바라봤다."미쳤다"고 했다. "외국에서 살자면 그만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한데 그걸 못 참고 자살을 하느냐"고 나무랐다.

회복 후 정신과 의사와 면담을 했다. 자살을 기도한 환자는 정신과 의사와 면담을 해야 퇴원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했다.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뉴욕에서 살며 궁핍과 좌절감에 시달리고, 비트닉들과 무절제한 생활을 한 이야기. 그리고 도저히 꿈을 이루기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했다는 말을 했다. 내 얘기를 끝까지 들은 뒤 의사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으니 퇴원하세요"라고 했다. 진료실을 나서는 나에게 그는 충고의 말을 덧붙였다. "살다보면 죽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살기를 바랍니다."

자살 기도 사건은 나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20여 년 동안 미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면서 '죽을 각오를 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목숨과 바꿀 의지만 있다면 최고가 될 수 있고, 유명해 질 수도 있으며, 부자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요즘 성공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한국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고 꿈꾸지는 않는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는 것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능한 꿈이라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 각오하기에 따라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 자살 기도 사건이 내게 준 교훈이다. 나는 평생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9. 돌아오지 마라

[중앙일보]입력 2006.09.27 23:56 / 수정 2006.09.28 06:10

돈 떨어져 식빵 한 개로 며칠씩 버텨
아버지께 "한국 돌아가 공부 … " 편지

라이프 1952년 4월 7일자 표지에 당시 섹스 심벌인 마릴린 먼로가 등장했다
요즘은 동영상이 넘치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전철을 타고 가면서도 휴대전화로 스포츠 중계를 시청한다. 정지영상인 사진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진도 전성기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가 그때다. 매그넘(Magnum)이라는 자유 보도사진 그룹이 활발하게 활동했고, 미국 타임사는 사진잡지 '라이프'를 매주 수백만부씩 발행하며 세계 저널리즘을 이끌었다.

자살 기도 사건 얼마 뒤 나는 그 유명한 '라이프'사를 무작정 찾아갔다. 한국에서 갖고 온 200달러가 다 떨어져 빈털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에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라이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진 편집인 레스터를 만났다. 40대 중반 여성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그녀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세계의 쟁쟁한 사진가들이 그녀와 면담하기를 원했지만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녀의 책상 위에서 두 권의 앨범을 싼 보자기를 풀었다. 앨범에는 고교생 때 연 개인전에 출품한 사진들이 정리돼 있었다.

그녀는 사진보다 보자기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서는 물건을 운반할 때 이런 걸 쓰나요?" 보기에 따라 신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국에서는 '보자기'라고 부릅니다. 래핑 클로스(wrapping cloth)지요. 크게 만들면 이삿짐도 옮길 수 있고, 작게 만들면 책가방이 됩니다." 그녀는 착착 접혀 내 주머니로 사라지는 보자기에 감탄했다.

그녀가 사진을 다 보기를 기다렸다가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진 찍는 일이나 암실 작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무식한 탓에 용감했기 때문이었다. 세계 유수의 잡지인 '라이프'가 나에게 그런 일을 맡길 리 없었고, 레스터는 그런 일을 상의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잘 보았는지 이리저리 일자리를 알아봐줬다. 당장 일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 뒤 그녀를 가끔 찾아갔고, 연말에는 카드도 오갔다.

힘겨운 날이 계속됐다. 커다란 식빵을 사서 학교 사물함에 넣어두고 며칠씩 먹으며 버텼다. 빵엔 곧 곰팡이가 생겼다. 그 뒤로는 약간 비싸게 먹혔지만 작은 포장으로 샀다. 몸이 꼬챙이처럼 마르고 일주일씩 대변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 무렵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유학 자체에 극심한 회의가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에 다시 돌아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공부는 자세가 중요하지 어디서 하느냐가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석 달 뒤 답장이 왔다. "그곳은 누가 강제로 보낸 것이 아니다. 네가 선택한 길이니 네가 책임져야 한다. 죽어도 거기서 죽고, 돌아오지 마라."

편지를 쓰기 전까지만 해도 돌아갈 곳이 있었다. 이제 그것도 없어졌다. 죽든 살든 미국에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레스터를 만났다. 그녀는 진로를 바꿔 저널리즘을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사진 실력과 적극적인 자세로 볼 때 기자가 되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텍사스주립대를 추천해 주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0. 텍사스 카우보이

[중앙일보]입력 2006.09.28 21:38 / 수정 2006.09.29 05:01

주말엔 식당 문 닫아 끼니 걸러
허리 둘레 24인치 … 아동복 입어

웨스턴 위크 축제 기간 중 카우보이 복장으로 말을 타고 있는 필자.
레스터가 텍사스주립대(ETSU) 편입을 추천했을 때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뉴욕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방황은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공부도 할 수 없었고, 의욕도 잃었다. 마리화나를 입에 대 볼 정도였으니까….

자살 기도 사건 이후엔 부모님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텍사스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 서울에 있을 때 본 영화 '자이언트'는 사막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갖게 했다. 록 허드슨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딘이 주연한 그 영화는 텍사스 유전지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 허허벌판에 서 있는 몇 채의 건물이 내가 생활해야 할 대학이었다. '자이언트의 환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인구도 수천 명에 불과했다. 당연히 퇴폐나 타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약은커녕 술도 팔지 않았다. 술을 사려면 댈러스까지 나가야 했다.

편입 절차를 마친 것은 1963년 초여름이었다. 뉴욕대의 학점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저널리즘 강의를 들으며 영어 공부도 병행했다. 미국 생활 3년째였지만 영어가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스피치 교정과 영문법 강의는 졸업할 때까지 꾸준히 들었다. 저널리즘은 재미있었다. '알 권리'같은 주제를 두고 학생들은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나도 영어로 의견을 발표했다. "'알 권리'는 보장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개인 사생활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레스터가 소개해 준 교수는 오사 스펜서였다. 그는 사진저널리즘 분야에서 세계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인데 연구주제가 바로 '라이프'지 였다. 그는 논문 작성 과정에서 레스터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장학금을 받았고 무료로 기숙사 생활까지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도서관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면서 대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방황에서는 벗어났지만 텍사스는 외로웠다. 주말이면 교수.학생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 교정은 텅 비었다. 차가 없으니 어디를 가 볼 수도 없고, 식당이 문을 닫으니 끼니도 걸러야 했다. 많은 사람과 몸을 비비던 뉴욕에서는 혼자 떠돌아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는데, 텍사스에서는 뉴욕과는 또 다른 지독한 고독감에 몸을 떨어야했다.

먹는 게 부실하니 체중도 줄었다. 허리 사이즈가 24인치를 밑돌았다. 어른 옷은 맞는 것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동복을 사 입었다. 미국에는 나보다 덩치 큰 10대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같은 옷인데도 아동용은 훨씬 쌌다.

텍사스는 서부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학교는 매년 웨스턴 위크(Western Week)라는 전통축제를 열었다. 그 주간이 되면 전교생이 카우보이 차림으로 등교했다. 말을 타고 오는 학생도 있었다. 밤이 되면 댄스파티가 열렸고, 야외에서 카우보이들이 먹던 음식도 먹었다. 황폐했던 뉴욕생활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1. 도박장 청소부 <상>

[중앙일보]입력 2006.10.01 19:01 / 수정 2006.10.02 03:28

일자리 찾아 라스베이거스 행
하루만에 소지품 다 도둑맞아

텍사스 주립대학에서의 일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궁핍과 불안의 나날이었다. 레스터의 권유로 저널리즘 공부를 시작했지만 미국의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보수적인 언론사에 외국인들이 발붙이기는 거의 힘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한국인이었다. 당시 미국인에게 한국은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세계 최저 수준의 나라였다. 공부를 하면서도 끝없이 회의가 들 수밖에 없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문제가 발생했다. 장학금 수여 재심사에서 탈락한 것이다.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모든 과목이 A학점을 유지해야 하는데 성적이 모자랐다. 아직 영어 실력이 불완전했고, 저널리즘은 생소한 학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학교는 마치고 봐야 했다. 그러자면 돈이 필요했다. 다른 학생들도 방학이 되자 모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최저 일당은 10달러 정도였다. 그런데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들렸다. 도박장에서 딜러를 하면 20달러의 일당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미국 최대의 도박도시 라스베이거스로 갔다.

네바다 사막에 들어선 환락도시 라스베이거스는 이미 틀이 잡혀 있었다. 나 같은 신출내기가 일자리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룻밤 머물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네바다와 캘리포니아 경계에 있는 타오(Tahoe) 호숫가에 새로운 도박 타운이 들어서고 있다고 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타오 호수는 경관이 빼어났다. 아름다운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 곳에 도박장을 갖춘 대형 리조트 호텔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 사물함에 가방을 넣어두고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준비 없이 서둘렀는지 곧 알게됐다. 처음으로 들른 도박장에서 딜러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면허를 내 놓으라고 했다. 면허라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알고 보니 도박장 딜러는 6개월간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해야 면허를 딸 수 있는 일이었고, 도박장에서 일당 20달러를 받을 수 있는 일은 딜러뿐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천리나 떨어진 네바다주까지 무작정 달려간 것이다.

낙심천만이었지만 일단 타오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로 하고 허름한 숙소를 구한 다음날 아침에 정류장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날벼락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물함이 밤사이 모두 털려버린 것이었다. 바닥에 어지러이 널린 물건들 속에서 텅 빈 가방을 찾아냈다. 옷가지와 책들, 그리고 책갈피에 꽂아 둔 25달러가 사라져버렸다. 그 돈은 전 재산이었다. 나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당황스럽고, 어이없고, 화가 났다. 다리가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겨우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거렸고 시트는 더러웠다. '내가 왜 이런 지경에 처했을까.' 세상 물정 모르고, 어리석고, 운도 없었다.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차비조차 없으니 타오 호수에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앉은 채로 꼬박 밤을 새우며 어떻게 위기를 헤쳐 나갈 것인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2. 도박장 청소부 <하>

[중앙일보]입력 2006.10.02 17:54 / 수정 2006.10.03 01:18

밤새워 화장실 바닥 오물 치워
슬롯머신서 떨어진 동전 모아

하룻밤을 꼬박 새운 뒤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딜러는 포기했다. 뉴욕에서 식당일을 잠시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스테이크 하우스를 찾아갔다. 주방 청소를 맡았다. 기름기로 끈적이는 바닥을 말끔하게 청소해야 했다. 허접하기는 했지만 스테이크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일당은 10달러에 불과했다. 학비를 벌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식당일은 오후 5시면 끝났으니까 저녁시간에 일을 더 해야 했다. 도박장을 찾아다니며 밤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화장실 청소 일을 구할 수 있었다.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일하고 하루 10달러를 받았다. 수세식이니 일이 힘들 것 같지는 않았다.

출근 첫날, 고향에 계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큰 뜻을 품고 유학 와서 화장실 청소부가 되다니.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화장실 청소는 어렵고 더러운 일이었다. 초저녁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자 술에 취한 사람들이 화장실로 몰려들어 저녁 내내 먹은 것을 토하기 시작했다. 넓은 화장실 곳곳이 오물로 더러워졌고 시큼한 냄새가 진동했다.

울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자기 최면을 걸었다. '이런 일은 금세 끝나. 나에게는 꿈이 있잖아. 절망하지 마'. 며칠 지나자 그 일도 익숙해졌다. 기왕 하는 일 즐겁게 하기로 했다. 미소를 짓고 콧노래를 부르며 일했다. 동료 청소부들은 나를 '스마일'이라고 불렀다.

프랭크는 청소부 대장이었다. 대머리에 풍채가 좋고 교양도 있는 사내였다. 그는 내가 대학생이라는 걸 알고 관심을 보였다. 하루는 날 부르더니 "에드, 앞으로는 화장실 청소를 마치면 슬롯머신 구역도 청소하도록 해."

잘 봐준다고 생각했는데 일을 더 맡기는 것이 의아했다. 하지만 곧 그의 뜻을 알게 됐다. 슬롯머신 주변의 쓰레기를 빗자루로 쓸어 담자 쓰레받기에 동전이 모이는 것이었다. 기계에서 쏟아진 동전이 바닥에 떨어져도 취객들은 일일이 줍지 않았다. 그렇게 모은 돈이 많을 땐 하루에 10달러나 됐다. 일당과 비슷했다.

프랭크의 호의 덕분에 학비를 버는 기간이 대폭 단축되었다. 타오 호수의 도박장에서 8개월을 보냈다. 1년 학비를 버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김희중 갤러리]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풍물 사진이 아니다. 1950년대 중반,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의 삶은 헐벗은 산 만큼이나 궁핍했다. 사람들은 장작 한 짐, 닭 몇 마리를 지게에 얹고 장터로 향했다. 갓을 쓴 노인이 지게에 새끼를 가득 싣고 장터로 가고 있다. 새끼 위에 담뱃대가 점잖게 꽂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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