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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펜화 에세이

중앙[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34~44./쎈더소니 2장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4. 전쟁의 먹구름

[중앙일보]입력 2006.10.19 20:29 / 수정 2006.10.19 20:31

금강산행 기차에 무장 군인 가득
"김 선생, 사흘 내 북한 떠나세요"

1973년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학생들을 격려하는 취주악대 소녀들.
남북한은 1991년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나란히 회원국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진통이 있었다. 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외교정책'을 발표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같은 날 김일성은 기다렸다는 듯 '조국통일 오대 강령'을 발표했다. '고려연방공화국 단일 국호에 의한 유엔가입'을 주장했다. 남한은 분리 가입, 북한은 동반 가입을 주장한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해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남북한 분리 가입 안건에 대한 찬반 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북한은 분리 가입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족이 영원히 갈라지고 분단이 고착화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이런 문제로 남북 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북한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통일'을 입에 달고 있었다. 공장 근로자도, 들판의 농부도, 유치원생조차도 통일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그들은 곧 통일이 된다고 확신했다.

"'곧'이 언제냐, 10년이면 되느냐?"고 물어봤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못 한다"고 했다. "그러면 5년?" "그것도 길다. 1년 안에 된다"고 말했다. "1년 안에 된다면 전쟁이라도 하자는 말이냐?"고 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전쟁이 아니라 남쪽에서 고통 받는 부모.형제를 해방시키러 내려가는 것"이라고 했다.

기차를 타고 금강산으로 가면서 가슴 철렁한 장면을 봤다. 한국전쟁 때 본 모습이었다.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객차에 가득하고, 화물차에는 위장망으로 가린 대포와 탱크가 칸마다 실려 있었다. 그런 기차가 한 둘이 아니었다. 모두 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박오태 조평통 부장은 "작전 중"이라고 간단히 말했지만 작전과 실전은 분위기가 다르다. 내 직감엔 전쟁 준비를 위한 이동이 분명했다.

금강산에서의 마지막 날 밤, 박오태가 말했다.

"김 선생, 사흘 안으로 떠나셔야겠습니다." 어느 정도 취재는 됐지만 못 본 곳이 많았다. 특히 백두산은 꼭 가보고 싶었다. "아직 취재할 것이 많습니다. 사흘은 너무 짧아요." 평소 온화하던 박오태가 정색을 했다.

"김 선생, 사흘 안에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못 떠날 수도 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남쪽으로 향하던 군인들, 몇 달 안에 통일이 된다는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더 묻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나의 북한 취재는 28일 만에 끝났다.

북한은 그때 전쟁 준비를 끝내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 같다.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월했고,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패한 뒤 막 철수해 넋이 빠진 상태였다. 남한은 '10월 유신'으로 혼란스러웠던 반면 북한은 안정적 체제 아래 통일에의 열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게다가 북한이 극력 반대하는 남북한 유엔 분리 가입이 논의되고 있었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북한은 휴전선 밑에 땅굴도 파고 있었다.

그해 11월 유엔 총회는 남북한 문제 논의를 일단 연기했다. 그뒤 흐지부지 됐지만 만약 분리 가입안이 통과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북한이 밀고내려왔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남한과 미국이 발등의 불을 끄느라 정신없던 73년, 한반도에는 전쟁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5. 죽(竹)의 장막

[중앙일보]입력 2006.10.22 18:25 / 수정 2006.10.23 04:51

북한당국에 부탁해 비자 받아
한나라 묘 취재하러 중국으로

1973년 가을의 천안문 광장. 중국은 북한과 마찬가지로 접근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세계 각국에서 출판되는 잡지와 화보를 구독했다. 어느 나라에 어떤 취재거리가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북한으로 출장을 떠날 무렵 회사는 한(漢)나라 시대 묘(墓)에 관심이 있었다. 중국 정부 홍보지 '인민화보'에 2000년 전 한나라 여인의 시신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의상과 패물 등 부장품도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중국은 '죽의 장막'이 둘러쳐진 나라였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어떤 서방 기자의 취재도 허락하지 않았다.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소련에 이어 중국을 방문해 데탕트(긴장완화)를 실현했지만, 민간 차원의 교류는 아직 없었다.

북한을 떠나며 중국에 가기로 했다. 한나라 묘를 취재할 수만 있다면 또 하나의 히트작이 될 것이었다. 박오태에게 비자를 받아 달라고 했다. 중국은 미국과 국교를 맺지 않았지만 북한의 부탁은 쉽게 들어줬다.

중국은 큰 나라였다. 모든 점에서 스케일이 대단했다. 자금성의 규모는 충격적이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이 넘쳐났다. 어쩌다 행인이 오가는 평양에 비하면 베이징은 말 그대로 인해(人海)였다. 당연히 먹을 것도 많아야 했다. 마을 입구마다 배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렇게 거대한 중국이 바깥 세계엔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한적한 길에서 카메라를 메고 두리번거리면 곧 공안(경찰)이 따라붙었다. 골목마다 '외국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을 느꼈다. 호텔 종업원은 틈나는 대로 영어회화 교재를 보며 중얼거렸다. 북한에선 영어를 공부하는 젊은이를 본 적이 없었다.

'인민화보'의 편집장을 만나야 했다. 호텔 프런트에 전화 연결을 부탁했다. 여직원은 "전화번호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번호를 모르면 전화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직접 '인민화보'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경찰이 못 들어가게 막았다.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서 수위실에 전달했다. 한국어도 가물가물한 마당에 한자를 기억해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쓴 메모는 이랬다. '我 美國 National Geographic 記者, 人民畵報 編輯長 面談 要請(나는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입니다. 인민화보 편집장 면담을 요청합니다)'.

표의문자(表意文字)의 장점은 문법이 틀려도 뜻이 대강 통한다는 점이다. 이틀 뒤 연락이 와 편집 책임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인민복 차림에 인상이 좋은 그는 베이징 한복판에 나타난 '미국 기자'를 신기해 했다. 북한에서 한 달간 취재하고 왔다고 하니 더욱 놀랐다. "그 어려운 곳을 다녀왔느냐"고 했다. 하지만 한나라 묘 취재는 도와주기 힘들다고 했다. 사진 자료를 줄 수는 있지만 직접 촬영하는 건 힘들다는 것이다. 사정을 들으니 그의 권한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인민화보' 책임자를 사귄 것만으로도 중국 방문의 성과는 충분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6. 객관성 시비

[중앙일보]입력 2006.10.23 20:20 / 수정 2006.10.24 04:56

회사 간부들 "편파적인 기사를 썼다"
회장에게 "내 이름 빼 주세요" 항의

북한 당국은 내 앞에서 ‘지상낙원’을 연출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꾸며진 표정에서 북한의 치부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북한 취재를 마치고 남은 건 28일 동안 듣고 본 것과 36통의 필름이었다. 필름의 양이 너무 적어 불안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들은 한 차례 취재에 500통 정도의 필름을 사용했다. 1000통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필름을 적게 쓴 것은 제한도 많았고, 마찰을 피하기 위해 자제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원산 송도원 해수욕장의 '남자''여자' 팻말은 재미있는 사진거리였지만 박오태는 군사시설이 있다며 해변에서는 카메라도 못 꺼내게 했다.

현상한 사진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 문제는 기사였다. 혼자 다녀왔으니 당연히 내가 써야 했다. 미주리대학원에서 실습도 해봤고, 미국 생활도 13년이 넘었다. 자신있었다. 회사에서는 2주 만에 써내라고 했다. 긴 기사의 경우 보통 두 달을 주는데 비해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만큼 회사는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했다.

모두 들떠 있는 연말에 나만 집에 틀어박혀 기사 작성에 몰두했다. 듣고 본 것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 A4 용지 36매에 달하는 초고가 완성됐다. 일주일 만에 초췌한 얼굴로 나타난 내가 두툼한 기사 뭉치를 건네자 편집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사이 이 많은 걸 썼단 말이오?"

하지만 기사를 돌려 본 간부들의 반응은 기대와는 달랐다. "선전 공작에 넘어가 편파적인 기사를 썼다"고 했다. 북한 측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줬을 게고, 나는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그대로 옮겼다는 것이다.

편집부에서도 같은 반응이 나왔다. 황당하고 억울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들의 선전만 가지고 기사를 썼겠느냐"고 따졌지만 회사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북한에서 취재하는 동안 선입견 없이 보고 들으려고 노력했다. 민감할 수밖에 없는 북한 기사의 생명은 객관성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열린 마음으로 보면 보여주지 않는 실상도 파악할 수 있고, 과장해서 보여주는 것은 알맹이만 보이는 법이다. 그런 자세로 취재하고 기사를 썼다. 그런데 회사가 가장 중요한 객관성을 문제 삼고 나온 것이다.

회사는 북한 실정을 전혀 모르는 편집부 고참기자에게 기사를 고치도록 했다. 내용은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지만 단어 선택과 표현을 달리해 진지한 맛이 사라진 우스꽝스러운 글이 돼버렸다. 젊은 혈기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회사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결심을 하고 회장에게 '메모'를 보냈다.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이런 기사를 내보내려면 내 이름을 빼 주세요."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보수적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역사상 기자가 회장에게 항의성 메모를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문제가 커지자 회사는 나와 편집부 기자가 머리를 맞대고 기사를 수정하기를 원했다. 난 고치든 줄이든 직접 하겠다고 버텼다.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이냐가 회사 내 톱뉴스가 됐다.

부사장이 나서 중재한 끝에 기사는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분량을 좀 줄여 제출하자 간부회의에서도 통과됐다. 그러나 이 일로 회사와 나는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다. 한번 옳다고 믿으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내 성격 탓이기도 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7. 해외기자단 취재상

[중앙일보]입력 2006.10.24 20:07 / 수정 2006.10.25 05:36

유엔에 파견된 북한 외교관들
취재기사·사진 확인하며 트집

정면에 보이는 김일성 초상화의 ‘빛 반사’는 유엔 주재 북한외교관들의 요구로 제거된 뒤 잡지에 게재됐다.
간부회의에서 기사가 통과됐다고 끝이 아니었다. 조사부(Research Department)를 거쳐야 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조사부는 '성경 다음으로 신뢰할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최후의 관문 역할을 하는 부서였다.

기자가 아프리카 취재기사를 제출했을 경우, 조사부는 그 기사를 아프리카에 있는 미국의 대사관과 현지 전문가들, 국내 학자들에게 보내 검증까지 했다. 필요하면 조사부 직원이 직접 현장도 간다. 기사의 정확성을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다시 찾아가 확인했다.

그런데 내 기사는 확인해 줄 곳이 없었다. 북한으로 사람을 보낼 수도 없고, 미국에는 북한 전문가도 별로 없었다. 고심 끝에 유엔에 파견돼 있던 북한 참관인들에게 기사와 사진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들의 첫마디는 "실망했다"는 것이었다. 믿었기 때문에 편의를 봐줬는데 기사를 이렇게 썼느냐, 조선 사람이라 서방기자들 보다 잘 이해할 줄 알았는데 실망했다고 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따졌다. 어차피 그들의 요구를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통계 수치 등 객관적 사실들만 확인했다.

하지만 그들이 끝내 물러서지 않는 것이 있었다. 한국전쟁의 발발 책임에 대한 부분이었다. 원래 기사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도발했다"고 되어 있었다. 남침이냐, 북침이냐 공방을 벌이다가 결국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전쟁을 벌였다(at war with the communist of North)"는 모호한 표현으로 바뀌고 말았다. 또 한 가지는 김일성의 얼굴이었다. 초등학교 교실을 찍은 내 사진에 김일성 초상화가 빛의 반사로 얼룩져 있었다. '수령님' 얼굴이 잘 안 보이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반사된 부분을 제거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 기사가 실린 '내셔널 지오그래픽' 1974년 8월호가 출간됐다. 유서를 써 놓고 북한으로 떠난 지 거의 1년 만이었다. 회사의 평가는 좋았다.

회장이 메모를 보내왔다. "어려운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당신의 기사와 사진은 탁월합니다. 축하합니다."

회장이 기사 하나로 기자에게 축하 메모를 보낸 것 역시 회사 역사에 없던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북한의 박오태에게서 온 편지는 나를 울적하게 했다. 왜곡되고 편파적이어서 실망스럽다고 했다. 한 달간 같이 지내며 인간적으로 친밀해진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아팠다. 같은 내용을 두고 미국과 북한 양쪽 모두가 '편파적'이라고 하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박오태가 당을 떠나 개인적으로 마주 앉으면 나를 비판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기사로 그해 미국 해외기자단(Overseas Press Club) 최우수 취재상을 받았다. 퓰리처상에 버금가는 권위 있는 상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100년 역사에서 사진으로는 수차례 여러가지 상을 받았지만 취재상은 처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진과 편집에 이어 기사에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때까지 회사에서 세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은 윌버 개러트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나중에 사장에 올랐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8. 14년 만의 귀향

[중앙일보]입력 2006.10.25 22:30

부친이 받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엔
내가 쓴 북한 기사 부분은 찢겨나가

1974년 한국 특집을 준비하던 필자가 미국 포드 대통령 방한을 취재하고 있다.
북한 취재를 마치고 바로 한국 취재계획을 세웠다. 남북한을 연이어 소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진과 글을 혼자 맡겠다는 계획서를 작성해 회사에 제출했다.

하지만 회사는 말렸다. "북한을 다녀온 사람이 한국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아느냐"는 걱정이 이유였다.

미국이 본 1970년대 한국은 북한 못지않은 독재국가였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나라였다. TV의 한국뉴스는 데모장면만 보여줬다. 동료들이 "왜 저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물을 땐 창피했다.

하지만 한국은 나의 조국 아닌가. 부모.형제가 살고 있고,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직접 취재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허락했지만 혼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글 쓰는 기자와 같이 가라고 했다. 그에게는 나의 '신변보호' 임무도 맡겨졌다.

74년 가을, 14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조국의 발전 속도에 놀랐다. 거리는 활기가 넘치고, 곳곳에 고층건물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외형적 발전보다 훨씬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절망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50년대의 표정이 진취적이고 희망적인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온 나라에 에너지가 충만한 듯했다.

하지만 한국은 힘든 고비를 넘고 있었다. 10월 유신 반대 데모가 연일 이어졌다. 남북 경색은 숨막힐 정도였다. 아버지에게 배달된 '내셔널 지오그래픽'엔 나의 북한 기사가 찢겨나가 있었다.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지만 풍요를 피부로 느끼기에는 일렀다. '공돌이''공순이'들이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눈물겨운 나날이었다.

하늘도 무심했는지 몇 년째 흉작이 계속됐다. 급기야 식량이 모자라는 사태가 발생하자 혼.분식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장학관이 점심시간마다 학교를 돌며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했다. 30% 이상 혼식이 아닌 학생은 반성문을 써야 했다.

외국기자가 취재차 입국하면 문화공보부는 직원을 동행시켰다. 하지만 나를 맡은 사람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 북한을 다녀왔다는 특수성 때문인 것 같았다. 꺼림칙했지만 편리한 점도 있었다. 당시는 정보부 세상이라 안 되는 일이 없었다. 혼자 다녔다면 접근이 불가능했을 정부기관이나 산업시설도 제한 없이 취재할 수 있었다.

70년대 중반의 남북한을 나만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외국에서 살다가 거의 같은 시기에 양쪽을 자세히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이 자기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아이들은 북한 사람들 머리에는 뿔이 있고, 하늘은 빨갛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남북은 쌍둥이였다. 북측 안내인은 신발 벗고 노는 아이 사진을 못 찍게 했고, 남측 요원은 때 묻은 옷을 입은 근로자를 찍지 못하게 했다. 체제는 달랐지만 생각도, 가치관도, 서로에 대한 인식도 비슷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9. 박정희 대통령

[중앙일보]입력 2006.10.26 21:23

육 여사 서거 석달 뒤 청와대 방문
"많은 국민이 원하면 물러날 겁니까"

1974년 가을의 박정희 대통령. 석달 전에 아내를 잃은 그는 외로워보였다.
대통령은 국화로 덮인 운구차를 밀듯이 두 손으로 짚고 천천히 따라갔다. 아내를 실은 차가 청와대 정문을 나섰다. 대통령은 발길을 멈췄다. 남편은 지어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풍속이었다. 그는 청와대 정문을 붙들고 아내와 작별했다. 운구차가 경복궁 돌담을 돌아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1974년 8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육영수 여사를 떠나보냈다.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이 쏜 총탄을 맞고 육 여사가 숨진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11월, 나는 청와대를 방문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특집 취재가 마무리 될 무렵이었다. 청와대의 거부로 취재기자는 동행하지 못했다.

현관에 나와 있던 김정렴 비서실장이 접견실로 안내했다. 청와대는 아직도 상가(喪家)였다. 침통하고 적막했다. 대낮인데도 창문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실내는 침침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대통령은 어둠 속에서 슬픔을 삭이고 있는 걸까.

잠시 기다리자 대통령이 들어왔다. 작고, 까맣고, 강인한 인상이었다. 김성진 공보수석이 배석한 가운데 면담이 시작됐다.

"14년 만에야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고요? 부모님이 서울에 계신데 좀 더 자주 찾아뵙도록 하세요. 오랜만에 본 조국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많이 발전했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망설이다 마음먹었던 말을 했다. "…하지만 사회가 혼란스럽습니다. 국민이 유신에 저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 수석의 안색이 변했다. 대통령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유신에 반대하는 사람은 소수지요. 다수 국민은 찬성합니다. 계속 발전하려면 유신은 불가피합니다."

시국에 대해 제대로 보고받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용기를 내 물었다. "많은 국민이 대통령이 물러나기를 원하면 그렇게 할 의향이 있습니까?" 공보수석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대통령이 가장 궁금해 했던 것은 역시 북한 실정이었다. 나를 부른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게다. 남한 경제가 북한을 막 따라잡고 있을 때였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던가요?" "통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합니다. 하지만 사회는 안정되어 있고 '세계 최고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곧 통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접견실 구석을 가리켰다. 최근 발견된 남침용 땅굴 모형이었다.

"북한은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러니 유신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외로워 보였다. 아내를 잃은 절대 권력자는 편안하게 대화할 상대조차 없는 듯했다. 남북한을 여행하며 듣고 본 것을 있는 대로 이야기했고 대통령은 경청했다. 15분으로 예정됐던 면담이 한 시간을 넘겼다. 대통령은 현관까지 나와 배웅해 주었다. 광복절 기념식에서 총성으로 중단됐던 기념사의 바로 다음 문장을 정확하게 짚어내 읽어 내려갔을 때 미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본 박 대통령은 섬세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0. '해결사'

[중앙일보]입력 2006.10.29 18:21 / 수정 2006.10.30 03:19

2년반 취재한 기획물 마감 사흘 전
"남태평양 가서 표지사진 찍어 오라"

남태평양에서 사흘 만에 표지 사진의 모델을 찾아냈다. 1970년대 중반은 필자의 전성기였다.
1974년 가을, 회사는 '남태평양의 인종 형성과 이주의 역사'에 대한 특집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2년 반에 걸쳐 여덟 명의 기자가 동원된 대규모 기획물이었다. 그런데 마감 직전에 문제가 발생했다. 마땅한 표지 사진이 없었던 것이다.

표지 사진은 단순하면서도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야 하며 독자를 감동시켜야 한다. 제호와 목차가 들어갈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네 명의 사진기자가 몇 년간 찍은 수만 장 가운데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진이 없다고 결론이 난 것이다.

사장은 나에게 다시 찍어올 것을 명령했다. 간부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표지만을 위해 기자가 출장간 적도, 취재 건과 무관한 기자가 대신 간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입장이 난처해 동료들 얼굴 보기조차 민망했다. 주어진 시간은 단 사흘. 어떻게 그 시간 안에 대규모 기획의 표지 사진을 촬영해 낸단 말인가? 하지만 못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단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한 출장이었기 때문에 장비를 간단하게 꾸려 워싱턴에서 LA와 하와이를 거쳐 타히티로 날아갔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여정이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열이 나고 식은땀이 온 몸을 적셨다. 태산 같은 부담으로 몸살을 앓은 것이다.

핼쑥해진 얼굴로 타히티에 내렸는데 공항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불어권이라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데다 카메라 장비가 세관에 묶여버렸다. 고가 장비는 입국할 때 수입 절차를 밟고, 출국 할 때 다시 수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빈손으로 호텔로 가 뜬눈으로 밤을 샜다.

다음날 아침 장비를 찾자마자 바로 옆의 모레아 섬으로 갔다. 조용하고 아름다웠지만 바쁜 마음에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를 빌려 섬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특집의 성격상 표지는 폴리네시아 원주민의 순수한 혈통을 간직한 인물 사진이 적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보이는 사람은 모두 혼혈이었다. 동료들이 표지감을 찾지 못한 것이 비로소 이해됐다. 나 역시 빈손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흘째 날 타히티 서북쪽 보라보라 섬으로 갔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하루. 섬은 지상낙원이었다. 고교 시절 서울에서 본 영화 '남태평양'이 생각났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섬을 돌아다녔다. 오후 네 시쯤, 야자수 우거진 바닷가 마을을 지나갈 때 섬광처럼 내 눈을 찌르는 장면을 봤다. 열두 살쯤의 원주민 소녀가 강아지와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차를 세우고 지켜봤다. 표정이 순수하고 눈이 빛났다. 머리에 열대의 꽃을 꽂은 그녀는 낯선 사람을 보고도 경계하지 않고 예쁘게 미소 지었다. 세계 곳곳을 다녔지만 그렇게 순수하고 밝은 아이는 보지 못했다. 속으로 외쳤다. '표지를 찾았다!' 소녀는 카메라 앞에서도 자연스러웠다. 광선을 보며 재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여객기 조종사를 통해 회사로 필름을 보냈다. 단 일곱 통이었다. 이틀 후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You did! Congratulations(당신이 해냈소! 축하합니다)." 극적인 성공이었다. 70년대 중반, 난 회사에서 종종 '해결사' 역할을 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1. 선인장 도둑

[중앙일보]입력 2006.10.30 17:51 / 수정 2006.10.31 04:40

애리조나 선인장 도난 현장 취재
도둑의 애인 호감 사 촬영 성공

회사는 선인장 도둑 사진을 폐기했지만, 나는 몇 커트 남겨두었다. 도둑들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게 촬영했다.
1976년, 애리조나주 특집을 맡았는데 사장이 특별 주문을 했다. 애리조나에서는 선인장 도난이 큰 문제인데 누가 어떻게 그 큰 선인장을 캐가고 유통시키는지 알 수 없으니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자고 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던 '해결사' 시절이었으니 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선벨트(Sun Belt)에 속한 애리조나에는 건축 붐이 일고 있었다. 거대한 선인장인 사와로 캑터스(Saguaro Cactus)는 정원수로 인기가 있어 좋은 것은 2000달러를 호가했다. 그런 것들이 사막에 널려 있으니 절도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했다. 주 경찰은 특수수사대를 만들어 범인 검거에 나섰지만 현장을 덮치는 데는 번번이 실패했다.

사진을 찍자면 정면 돌파 밖에 없었다. 경찰에서 용의자 명단을 구해 가장 '활발히' 활동한다는 인물을 직접 찾아갔다. 피닉스 외곽의 슬럼가, 담배 연기 자욱하고 구석에 낡은 당구장이 있는 침침한 살롱에서 로이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큰 덩치에 머리는 빡빡 민 데다 팔뚝에는 요란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멍했다.

그에게는 사업 파트너가 있었다. 타이너라는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사막의 야생화처럼 강렬한 매력을 풍겼다. 눈치를 보니 여자가 왕초였고, 로이는 행동대원이었다. 둘은 금방 선인장을 팔아 돈이라도 챙겼는지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듣자하니 당신이 최고의 선인장 도둑이라던데…." "암, 날 따라올 선인장 도둑은 세상에 없지. 하하하…" 로이는 나의 '칭찬'에 큰 소리로 웃었다. 묘한 도둑 커플과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며 어떻게 그들이 선인장 훔치는 모습을 찍을 것인지 고민했다.

"난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잔데 애리조나주를 취재하는 중이라오." "사막은 손금 보듯 알고 있으니 내가 안내하지." 로이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첫 날은 같이 술 마시며 놀았고, 다음날 차를 타고 사막을 달렸다. 로이는 선인장들을 가리키며 "내 돈 나무들"이라고 했다. 며칠 지나자 타이너가 나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싫지 않았다. 하지만 이럴 경우 여자의 정열을 받아들여서도, 결정적으로 실망시켜서도 뜻을 이루기 힘들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로이는 펄쩍 뛰었지만 나에게 마음이 기운 타이너가 허락했다. 사막에 해가 질 무렵 로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선인장 밑둥치를 묶은 체인을 차에 연결했다. 그리고 차가 조금 움직이자 거대한 선인장이 뿌리째 적재함에 누웠다. 나는 도둑들이 아름다운 선인장을 훔치는 진기한 장면을 빠짐없이 촬영했다.

작업을 마친 그들에게 각서를 내밀었다. "로이와 타이너는 본인들의 의지에 따라 선인장을 채취했고 사진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사용할 것을 허락한다." 연출 의혹에 대비한 것이었다. 로이는 죽어도 못 한다고 버텼지만, 타이너의 고함 한 번에 순순히 사인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2. 취재원 보호

[중앙일보]입력 2006.10.31 17:56 / 수정 2006.11.01 05:34

회사 신참이 사진 진위 문의하자
애리조나 경찰 "범인 밝히라" 종용

서부영화에 자주 나왔던 애리조나주 모뉴먼트 밸리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부부. 미국인의 국기 사랑은 각별해 전국 어디서나 성조기가 펄럭인다.
'절도 현장 촬영'이라는 희귀한 취재를 하며 신경 썼던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취재원 보호였다. 비록 절도범이지만 취재를 도와줬으니 끝까지 그들을 보호해야 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나를 믿어도 좋다고 말했고, 촬영 때는 경찰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도록 배려했다.

또 하나는 연출 의혹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로이와 타이너에게 "나는 제3자로 따라갈 뿐이다. 당신들 의지대로 훔치는 것이지, 내가 시킨 게 아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살롱에서 같이 술을 마실 때도 내가 술값을 내지 않았다. 돈을 주고 시켰다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범행을 방조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감옥까지 갈 각오를 했다.

회사로 돌아가자 칭찬이 자자했다. "무슨 수로 이런 사진을 찍었느냐?" "절도 현장 사진은 난생 처음 본다"고들 했다.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했다. 조사부 신참직원이 사진을 애리조나 경찰에 보내 "사막에서 선인장 절도를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느냐?"고 문의한 것이다. 애리조나 경찰청이 발칵 뒤집혔다. 그렇게 애써도 확인할 수 없었던 범행 순간이 사진으로 찍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범인들의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경찰은 회사로 공문을 보내 나의 증언을 요청했다. 범인이 누군지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난 당연히 취재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회사는 난처해했다. 경찰의 협조 요청이 계속되자 회사는 태도를 바꿔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현장에 있을 수 있었느냐?"고 캐물었다. 연출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출장비 사용 영수증도 꼼꼼히 감사했다. 도둑들에게 돈을 주거나 선물을 사 준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받아놓긴 했지만 쓸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로이와 타이너의 각서를 내놓았다. 자기 의지로 도둑질을 했다는 문서였다. 회사는 그것을 애리조나 경찰에 보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두 사람은 즉시 경찰에 체포될 것이었다. 난 그것도 못한다고 했다.

사진을 찍어왔을 때 칭찬 일색이던 회사 분위기가 돌변했다. 당분간 집에서 쉬라고 했다. 입사 이래 처음으로 회사에 실망했다. 목숨 바쳐 일했는데 사정이 어렵다고 등을 돌리다니. 더군다나 날 의심하다니…. 동료들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네 일은 네가 처리하라'고 했다. 잘나가는 동료에 대한 질시도 느껴졌다. 허망하고 고독했다. 꿈을 깬 듯 삭막한 현실이 보였다.

그런 가운데 로이와 타이너한테서 협박 전화가 왔다. "경찰관들이 설치고 다니는데 어떻게 된 거냐? 이따위로 하면 성치 못할 줄 알아!" 보호하려 애쓴 그들이 나를 배신자로 취급했다.

결국 사진은 게재하지 않기로 했다. 문제가 커지는 걸 회사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필름도 모두 압수해 폐기했다.

사건이 진정되는 데는 거의 1년이 걸렸다. 어느 날 사장이 불러서 갔더니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애리조나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말게. 로이가 죽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건강하던 로이가 왜 갑자기 죽었단 말인가? 사장은 또 그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3. 새마을 운동

[중앙일보]입력 2006.11.01 17:33 / 수정 2006.11.02 04:33

"화보집 맡아달라" 박대통령이 부탁
10·26 겪으며 착수 1년만에 완성

1980년 5월, 경남 진주. 아낙들이 새마을 깃발을 들고 밭으로 들어가고 있다.
1978년, 워싱턴의 내 사무실로 편지 한통이 배달됐다. 대한민국의 구자춘 내무장관이 보낸 것이었다. 새마을 운동 10년을 앞두고 화보집을 낼 계획인데 내가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부탁했다고 했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화보를 제작하자면 최소한 1년은 필요한데 회사에는 휴직제도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했다. '애리조나 사건'으로 마음의 상처도 있고, 내 기여에 비해 회사에서의 지위도 만족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늦기 전에 조국으로 돌아가 무엇인가를 기여하고 싶었다. 74년 귀국 때 본 역동적인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표를 냈다. 사장은 깜짝 놀랐다. 대뜸 애리조나 때문에 그러느냐고 했다. 사정을 이야기 하자 사장은 일을 끝내고 돌아오라고 했다. 회사 규정에도 없는 휴직을 허락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1년 간 회사를 쉬게 되었지만 사장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동료들이 "왜 저 친구는 되고 우리는 안 되느냐"고 따졌기 때문이다. 기자들의 공통된 바람은 휴직을 하며 재충전하는 것이다.

79년 8월 서울에 도착해 9월부터 전국을 다니며 취재를 시작했다. 한민족은 단군 이래 5천년의 궁핍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70년 박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진행돼 국토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장마 때면 떠내려가던 다리가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고, 오솔길 같던 마을 진입로가 곧고 넓게 뚫렸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었다. '하면 된다'는 생각이 모두의 마음에 뿌리 내렸다.

하지만 급히 추진하는 일에 부작용이 없을 수 없었다. 천편일률적으로 개조된 농가는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박 대통령은 '정신계발'을 강조했지만 아래 사람들이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대통령이 등산을 하다 휴지를 주우면 다음날 장관부터 초등학생까지 온 국민이 휴지만 주웠다. 심지어 대통령이 순시하는 지방 도로에 뿌리조차 없는 나무를 심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해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서거했다. 그 시간에 난 경주에서 공무원들과 화보 기획회의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회혼란이 걱정됐다. 서울에 가보니 다행히 질서는 잘 유지되고 경건한 가운데 장례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화보 작업을 하면서 만난 김준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장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 정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열성을 다해 새마을 지도자를 교육했다. 이 분은 다음해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난 다음에도 연수원 사무실의 박 대통령 사진을 떼지 않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새마을 운동 창시자의 사진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준 원장은 화보제작의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10.26 후 작업을 계속할 것인지 그에게 물었다.

"당연히 그대로 추진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도 새마을 운동은 계속돼야 합니다."

80년 9월에 화보가 완성되었다. 새마을 운동 10년의 역사와 성과가 고스란히 담겼다. 한글과 영문 판으로 발간되었는데 한글판 제목은 '민주 복지의 길'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4. 편집팀장

[중앙일보]입력 2006.11.02 17:55 / 수정 2006.11.03 04:44

부사장이 서울까지 찾아와 복직 요청
임원으로 승진해 '별들의 모임' 합류

‘내셔널 지오그래픽’ 편집팀장 시절의 필자가 저녁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예복차림으로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윌버 개러트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인재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사람이었다. 사진과 글뿐만 아니라 편집에서도 발군의 솜씨를 보였다. 취미생활도 다양했다. 자동차 경주를 즐겨 차를 몰고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기도 하고, 수천 평이나 되는 자기 집 마당에 포도 농사를 지어 와인을 직접 담그기도 했다. 그는 미주리대 이덤 교수의 제자로 나와는 동문이었는데 회사 동료들은 우리를 '미주리 마피아'라 불렀다.

새마을 운동 화보 제작으로 분주하던 1980년 봄, 그가 서울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부사장이었는데 사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에드,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사로 돌아갑시다. 편집을 맡아주시오." 그의 지원을 받으며 일하는 것은 나에게도 기회였다. 주요 보직에 대한 인사 문제 등 회사 운영에 대해 의견을 나눈 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10월 말 회사에 복귀했다. 기획위원 겸 편집팀장(Senior Editor)으로 승진했다. 임원이 된 것이다. 기획회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제작 방향을 정하고 기획안의 승인과 진행을 총괄하는 곳으로 회사에서는 '별들의 모임'으로 불린다. 난 그 중에서도 권한이 가장 광범위한 편집팀장이 되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사진과 편집이 중요한 잡지라 편집팀장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기획 단계부터 제작의 전 과정을 관장했다. 사진 선택, 기사 분량 조절, 지도 제작, 미술 파트까지 내 손길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내가 마무리한 편집안은 회장과 사장이 참석한 자리에서 최종 심의를 받았다. 산고를 겪으며 옥동자를 낳듯이 최선을 다해 내 색깔을 가진 책을 만들었다.

회사를 위해 공헌한 것을 생각한다면 사장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유색인인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은 기획위원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미국에서 꿈을 이룬 셈이었다.

사옥 10층에 일급 웨이터들이 서빙하는 임원용 식당이 있는데 그곳엔 화려하게 꾸며진 별실도 있었다. 회사를 방문하는 유력 인사들에게 워싱턴 최고 수준의 음식을 내놓는 곳이었다. 나는 미국 상류사회 인사들과 교류했다. 사무실에는 땀에 젖은 취재복 대신 예복이 늘 준비돼 있었다. 외국 대사관에서 수시로 파티에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힘있고, 명예롭고, 화려한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허망했다. 그 자리를 꿈꾸고 노력하던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간절히 원하던 것을 얻으면 허탈해지는 것이 인간인지….

편집팀장으로 4년 8개월 동안 일했다. 처음 맡았을 때 900만 부였던 구독부수가 1200만 부까지 늘어났다. 1200만부라는 것이 도대체 얼마만큼일까? 책 한 권의 두께를 1cm라고 할 때 일렬로 책꽂이에 꽂으면 그 길이가 120km에 달하는 양이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에서 대전까지 가는 거리다. 미시시피의 전용 인쇄공장을 방문했을 때 화물기차가 공장 안까지 들어가 책을 실어내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만든 책은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해졌고 서울의 아버지께도 한 부씩 배달되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벌레잡이꽃 쎈더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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