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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펜화 에세이

중앙[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45~55 /파리지옥 2장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5. "피라미드를 옮겨라"

[중앙일보]입력 2006.11.05 18:35 / 수정 2006.11.06 03:46

표지에 쓸 이집트 피라미드 사진
꼭대기 보이게 하려고 필름 조작

‘내셔널 지오그래픽’ 1982년 2월호 표지 사진. 앞에 있는 피라미드를 정상이 보이도록 필름 분해기를 이용, 왼쪽으로 몇 인치 옮겼다.
'사진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가? 요즘엔 많은 사진이 거짓말을 한다. 디지털 사진이 등장한 뒤 부쩍 잦아진 현상이다.

박지성 선수가 멋지게 슈팅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셔터가 약간 늦어 공이 발끝을 멀리 떠났다고 치자. 사진가는 공을 가까이 붙이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가능한 일이다. 디지털 사진의 출현으로 그런 작업은 '식은 죽 먹기'가 됐다. 숙련가라면 포토숍같은 도구를 이용해 발등에서 찌그러지는 축구공도 만들어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필름으로 촬영해 암실에서 인화하던 시절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확대기에 필름을 바꿔 걸어가며 한 장의 인화지에 두 번 이상 노광(露光)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숙련된 사람도 여러 장의 인화지를 버려야 했고, 사진에는 조작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이미지 조작은 새로운 시각의 창조로 독자에게 신선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몇 년 전 미국 대선 때 '뉴스위크'는 부시와 고어의 얼굴을 반씩 합성해 만든 사진을 표지로 사용했다. 예측할 수 없었던 개표 결과를 기발한 아이디어로 표현한 사진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합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세상을 속이는 경우다. 사실 보도를 해야 하는 신문이 조작된 사진을 싣는다면 독자는 그 신문을 불신할 것이다. '대한민국 사진대전'에서 합성과 조작으로 수상을 취소하는 사태가 연속적으로 벌어졌다.

'내셔널 지오그래픽'도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1982년 2월호 표지를 결정할 때 문제가 발생했다. 이집트 기자지구 피라미드 사진이 표지로 결정되었는데 표지 포맷에 맞게 사진을 세로로 자르다 보니 앞쪽에 있는 피라미드의 정상 부분이 잘리는 것이었다. 그래서는 뿔 모양의 피라미드 분위기가 살지 않았다.

사장이자 편집인인 윌버 개러트는 고심 끝에 피라미드를 '옮기기로' 했다. 앞쪽 피라미드를 왼쪽으로 몇 인치 옮기겠다는 것이다. 회사 내부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사진에 손대면 안 된다'는 쪽과 '그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었지만, 사장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장은 이랬다. "손을 안 대는 것이 좋지만 도의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기자가 몇 걸음만 오른쪽으로 옮겨서 찍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사진 아닌가?" 내 생각도 그와 같았다. 회사 기술진은 컴퓨터 기능이 있는 필름 분해기를 사용해 꼭대기가 보이도록 피라미드를 옮겼다.

그러나 이 사진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신뢰에 큰 상처를 남겼다. 오늘날까지도 '사진 조작의 역사'를 다루는 논의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잡지이기 때문에 더 가혹하게 비판당한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잘못은 잘못이다. 손을 대는 순간 보도 사진의 생명은 끝난다는 걸 알아야 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그 사건 후 사진의 수정.조작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해 왔다.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그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6. 불효자

[중앙일보]입력 2006.11.06 21:27 / 수정 2006.11.07 03:04

어머니 장례식 끝난 뒤 집에 도착
아버지 별세 소식은 전화로 들어

돌아가시기 1년 전인 1984년 건강한 모습으로 미국을 방문한 아버지와 필자가 볼티모어항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아버지는 항상 카메라를 메고 다니셨다.
애리조나 사막에서 도둑들이 선인장을 훔치는 모습을 찍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1976년 11월 어느 날 회사 여직원이 숙소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지금 서 있나요, 앉아 있나요?"라고 물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고 했더니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 목소리가 무슨 뜻인지 실감할 수 없었다. 여직원은 내가 충격으로 쓰러질까 걱정했지만 난 아무 느낌도 없었다. 예정대로 저녁에 사람을 만나 취재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피닉스 외곽 고속도로를 차로 달렸다. 마침 도로 끝에서 둥근 보름달이 떠올랐다. 그런데 달 속에서 어머니가 빙긋이 웃고 계신 것이 아닌가. 비로소 어머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실감이 들었다. 그제야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9년이 흐른 85년 5월, 서울의 누이가 워싱턴 사무실로 전화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빨리 들어오너라." 믿기 힘들었다. 지병도 없고 건강하던 분이 왜 갑자기 돌아가신단 말인가. 불과 몇 달 전 서울서 뵙고 "내년 여름쯤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에 와서 모시겠습니다" 했었는데…. 무한한 사랑으로 날 감싸주신 어머니에 이어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마저 허망하게 돌아가신 것이다.

최대한 서둘렀지만 발인 날짜에 대기는 힘들었다. 황망히 서울 집에 도착하니 관은 상주(喪主)인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느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가 끝난 뒤에야 도착했었다. 부모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자는 통곡했다.

스님이 조용히 목탁을 두드리는 가운데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의 '허밍 코러스'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상가에 그 음악을 틀어놓으라고 생전에 당부하셨다고 한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그런 음악을 어떻게 아셨을까? 남녀 간의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음악이지만 상가에 잘 어울렸다.

아버지는 음악만 준비한 게 아니었다. 당신의 장례 절차를 꼼꼼하게 글로 남겨놓았다. "시내에서는 자동차로 운구하되 남한산성 입구에서 장지까지는 꽃상여를 이용해라, 어머니와 합장해라, 상여꾼들에게 베옷을 입히고 운동화를 신겨라, 어디서 휴식하도록 해라…."

갑작스러운 일을 당한 자식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신 것이다. 나는 그저 돌아가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었다.

장례와 제사 비용도 남기셨다. 은행에 맡겨놓은 그 돈은 이자만 찾을 수 있었다. 장례와 매년 지내는 제사 때도 자식들에게 부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돈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둘째 누이가 관리하며 매년 제사 비용으로 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내가 번 돈으로 제사를 올리지 못했다.

부모님을 모신 산소에 비석을 세우고 짧은 글을 새겼다.

'하늘이 무심하랴 살아 생전 베푼 사랑/ 이 몸이 잊으리오 부모님의 그 은덕/ 비바람 몰아치는 어두운 밤에도 마지막 남긴 말씀 영원한 횃불 삼아/ 이 나라 일꾼 되어 그 뜻을 받드려니/ 부모님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내가 아버지에게 한 약속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7. 다시 한국으로

[중앙일보]입력 2006.11.07 22:08 / 수정 2006.11.08 04:57

한국 정부서 "해외홍보 맡아 달라" 요청
18년 몸담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떠나

[김희중 갤러리]1980년대 후반 경남 남해에서 촬영한 할아버지와 손자. 74년 일시 방한 이후 필자는 조국에서 일할 날을 꿈꾸고 있었다.
외국에 나가면 조국을 그리워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미국 생활 10여 년 동안 한국에 대해 내가 가졌던 감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태평양을 건너오는 소식이 예외 없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TV를 통해 가끔 듣는 소식은 독재와 부정부패, 전쟁 위기 같은 우울한 것 일색이었다. 서서히 잊혀지는 한국말마저 기억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1974년 귀국 때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정치.사회적 혼란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활기차게 살고 있었다. 외국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었던 한국인이 맨주먹으로 기적을 창조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런 모습이 왜 외국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 때부터 한국 사람과 부대끼며 정을 나누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지 전까지 나를 볼 때마다 점(点) 본 이야기를 하셨다. "희중이 너는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도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다. "네 몸 하나 편히 살자고 공부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기회가 되면 나라를 위해 봉사해라." 그런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며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전성기인 70년대를 보내고 80년 이후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편집팀장과 기획위원을 맡아 열심히 일했다. 일찍 입사한 덕분에 승진도 빨랐고 기획위원이 되었을 때는 불과 마흔 살이었다. 가장 나이 차이가 적은 위원도 나보다 열세 살이나 많았다. 편집팀장 5년차였던 85년, 이제 회사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목표한 바를 모두 이루었고, 한편으로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변신하지 못하는 회사가 답답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나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때 맞춰 한국 정부가 해외 홍보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해외 홍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돌아갈 거라면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직하고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내 회사'였다.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하고 같이 성장했다. 그런 회사에 사직서를 내려니 손이 떨렸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떠나도 될까? 내가 미처 덜 배운 것은 없는가?'

친구들이나 동료.이웃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미쳤다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회사의 핵심 자리에 있으면서 왜 그만두느냐는 것이었다. 사직서를 받은 회장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누구도 되돌릴 수 없었다.

회사에서 송별파티가 열렸다. 회장과 사장, 간부들이 모두 참석했다. 제 발로 회사를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례적인 자리였다. 동료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일할 수 있는 기회와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회사에 감사합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이곳에서 배웠습니다." 평소 개별적인 칭찬을 거의 하지 않던 회장이 말했다. "감사할 사람은 우리지요. 유능한 사람을 많이 봐 왔지만 당신처럼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회사 발전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25년 동안의 미국생활, 18년 간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근무는 그렇게 끝났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8. 한국화보 <상>

[중앙일보]입력 2006.11.08 18:30 / 수정 2006.11.09 04:19

1985년 국가 홍보책자 제작 맡아
당시 기자들 주 5일제 적응 못해

필자는 ‘한국화보’ 편집안 전체를 사무실 벽에 붙여놓고 수정 보완을 거듭했다.
1985년 6월 귀국해 가을부터 '한국화보' 편집을 맡았다. '한국화보'는 50년에 창간된 국가 홍보책자로 한글과 7개 외국어로 발간돼 세계 98개국에 배포되고 있었다. 영문 제호는 'SEOUL'이었다. 주 독자층이 재외동포와 한국에 관심 있는 외국인들이라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제대로 제작할 필요가 있었다.

잡지 편집이야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제작해 왔으니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한국화보' 제작은 개인사업이었다. 정부로부터 일정한 예산을 받아 기자들한테 월급을 주면서 책을 제작하고 이익이 남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예산은 기자들 월급 주기에도 빠듯했다. 추가 비용이 발생하면 다음에 반영하기로 문공부 측과 협의하고 일을 시작했다.

우선 사무실을 마련했다. 서울 퇴계로 '코리아 헤럴드' 빌딩 13층의 100평을 임대했다. 10여 명이 근무할 공간으로는 넓었지만 환경이야 쾌적할수록 좋지 않은가? 정부 예산에는 없는 항목이었지만 제대로 된 사무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부담했다.

집기를 마련하기 위해 가구시장을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쓸만한 것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책상.의자.소파.칸막이 등을 직접 디자인해 주문했다. 바닥에 카펫을 깔고 완성된 집기를 들여놓으니 드디어 제대로 된 잡지 편집실이 탄생했다. 사무실을 방문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예쁘고 쾌적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막상 멋진 공간의 주인인 직원들이 불편하다고 했다. 너무 깨끗하고 쾌적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이해할만 했다. 처음 귀국해 신문사와 잡지사를 돌아보고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다른 어떤 직종보다 기자들의 근무 모습은 '자유로웠다'. 벗어던진 양말이 책상 위에 나뒹굴고 있었으니…. 그런 곳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호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려니 불편하기도 했으리라.

직원들은 주 5일제로 근무하도록 했다. 근무시간에 제대로 일하면 5일만 근무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보편적이지만 20년 전 한국에서 주 5일제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일과 휴식을 구분하지 않았다.

기자들에게 주문한 것은 기사를 쓰거나 사진을 찍을 때 성심성의를 다하라는 것이었다. 능력을 100% 발휘하라고 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하는 생각은 통하지 않았다. 어떤 기자는 같은 취재 건을 가지고 지방 출장을 세 번이나 가야했다. 한 번으로 끝내면 비용이 절약돼 나한테 이득이겠지만 내 이름으로 내는 잡지를 부실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시원찮은 필름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청심환을 먹고 편집회의에 들어오는 기자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가혹한 편집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교육받은 기자들은 나중에 다른 회사에 쉽게 입사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9. 한국화보 <하>

[중앙일보]입력 2006.11.09 17:56 / 수정 2006.11.09 17:58

독자는 호평, 공무원은 불만
98년 정권 교체 때 사직 통보

그렇게 노력을 기울였으니 잡지의 질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화보(SEOUL)'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외국 독자들이었다. 그들이 보낸 편지가 내 책상에 수북이 쌓였다.

"SEOUL은 상투적이고 편파적인 일반 뉴스와 달리 진정한 한국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한국화보의 홍보 효과는 탁월하며 어느 매체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SEOUL은 대수롭지 않은 기사와 사진으로 발행되는 전 세계 대다수 출판물의 훌륭한 표상이 됩니다."

뿌듯했다. 힘들게 한 권, 또 한 권 발행했지만 독자들의 이런 반응을 접하면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감히 자신하건대 한국화보는 1980년대 중반 한국이 세계에 내놓은 명품이었다. 그때는 세계인이 감탄하는 한국의 휴대전화도 TV도 없던 시절 아닌가?

그러나 문공부 공무원들은 편집 방향에 불만이 많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홍보는 '좋은 것'들이었다. 즉 경제 발전상, 안정된 사회 등 깨끗하고 정돈된 것만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꾸밈 없고 진실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의 모습을 그들은 "볼품 없고 지저분하다"고 했다. 73년 북한을 취재할 때 신발 벗고 뛰노는 아이의 모습을 찍지 못하게 했던 북한 안내인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식의 요구를 계속한다면 더 이상 일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예산 문제도 쉽지 않았다. 감사원 공무원은 200자가 꽉 차지 않은 원고지는 한 매로 계산해 주지 않았다. 부족한 부분은 결국 내 주머니에서 나갔다. 정부 예산으로는 제대로 된 책 만들기 어렵고, 나랏돈을 쓰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 업자들이 나라 일을 맡으면 부실공사가 되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98년 봄 정권이 바뀌자 이곳저곳에서 간섭이 시작됐다. 왜 인터넷에 올리지 않느냐, 시대의 변화에 맞게 바꾸라는 등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 그만두라는 통보가 왔다.

정권 교체의 파급 효과는 공직사회 구석구석까지 미쳤다. 하지만 당장 그만둘 수 없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기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낸 마지막 책은 98년 12월호였다. 온 힘을 다해 자식을 낳듯이 만들던 한국화보와는 그렇게 이별했다.

김희중 갤러리 1990년대 초반 전남의 한 농촌 비닐하우스에서 겨울 들판을 내다보는 소녀를 만났다. 그 아이는 뽀얗게 김이 서린 비닐을 손으로 문질러 봄을 기다리는 창문을 냈다.
마지막 호를 인쇄소에 넘긴 날 서울엔 진눈깨비가 내렸다. 혼자 사무실을 빠져나와 을지로.종로를 거쳐 종묘공원까지 걸었다. 골목의 포장마차에서 카바이드 불빛이 새나왔다. 포장을 젖히고 들어갔다. 난생 처음 들어가본 포장마차였다.

차가운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60년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스무 살에 미국에 건너가 25년 동안 치열하게 살았고, 귀국해서도 14년간 일에 파묻혀 지냈다. 세계를 누볐고, 상도 받고 명성도 얻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놓친 것이 있었다. 내 곁에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것이었다. '이런 날 마음 터놓고 이야기 할 벗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고 또 아쉬웠다.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0 . 전두환 대통령<상>

[중앙일보]입력 2006.11.12 20:15 / 수정 2006.11.13 04:50

"차기 대통령이 되기로 했습니다"
동석했던 이순자 여사 깜짝 놀라

1980년 가을 전주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전국규모 행사에 참석했다.
1980년 6월 초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의 한 방. 나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만났다. 그는 현역 육군 중장으로 국군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도 겸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 실력자였다. 자리에는 이순자 여사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장 취임을 앞둔 윌버 개러트도 같이 있었다. 나는 79년 가을부터 한국에 머물며 새마을운동 화보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한 사업가의 소개로 전 위원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대화가 무르익자 전 위원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자리에서 내가 결심한 걸 이야기하고 싶은데…, 차기 대통령이 되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어요. 어젯밤에 최종적으로 결정했고 처음 공개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순자 여사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전 위원장을 돌아봤다. 그녀도 처음 듣는 이야기가 분명했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10.26 후 정국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전 위원장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지성.덕성 등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세계적인 언론인을 만나게 된 것이 마침 잘 됐다는 듯 개러트에게 물었다. "대통령 임기는 몇 년이 적당하다고 봅니까? 나는 7년 단임과 4년 중임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개러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5년 단임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나에게 물었다. "미스터 김은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까?" 막연한 질문이었지만 평소 생각하던 바를 이야기했다.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이 정당한 대우를 받는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주사태 직후인 80년 6월 초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 뒤 임기와 국가 운영방침 등을 고민하고 있었다.

80년 9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지방 순시를 떠났다. 청와대 공보팀은 나에게 대통령 밀착 취재를 부탁했다. 홍보 책자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움직이는 모든 곳에 동행했다. 비좁은 대통령 전용기도 취재 공간이었다.

군복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통령은 어색해 보였다. 내 카메라에 비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서툴렀다. 특히 사람을 만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의 모습은 권위적인 군 사령관과 신참 정치지도자 사이를 오락가락 했다. 기회가 생겼을 때 그에게 말했다. "홍보 책자 제작은 2년쯤 후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틀이 잡히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5공 정권 초창기, 내가 본 청와대 수석들은 나라를 위해 한 몸을 사심 없이 바치겠다는 자세로 일했다. 정권의 출발이 어두웠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특히 가깝게 지냈던 사람은 김재익 경제수석이었는데 그와는 74년 방한 때 인터뷰하며 얼굴을 익혔었다. 당시 그는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이었다. 유능한 인재였던 그는 안타깝게도 83년 버마의 아웅산에서 순직하고 말았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1. 전두환 대통령 <하>

[중앙일보]입력 2006.11.13 19:34

타임 한국특파원 자격으로
연희동서 백담사행 지켜봐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신발가게 주인이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회견을 시청하고 있다.
1981년 1월 한국에 왔을 때 문화공보부에 들른 나는 벽에 붙어 있는 전두환 대통령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새로 촬영한 공식 사진이었는데 대통령이 맨 넥타이가 문제였다. 화려한 꽃무늬를 즐겨 쓰는 프랑스 레오나드(Leonard) 제품이었다. 특징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패션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브랜드였다. 사진을 보고 있던 나에게 공보관이 물었다. "사진이 어떻습니까?" 그에게 되물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외국 브랜드 모델로 데뷔시킬 생각입니까?"

대통령은 개성이 강한 제품은 피하는 것이 좋다.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더라도 특정 상품을 홍보하는 결과를 빚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프랑스제 넥타이를 매고 전국의 관공서에 걸릴 사진을 찍은 것이다. 브랜드가 드러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넥타이는 그에게 어울리지도 않고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당황한 공보관이 말했다. "그런 줄 몰랐습니다. 즉시 바꾸지요. 그러면 김 선생께서 앞으로 대통령 의상 코디 좀 해 주세요." 80년대 초의 청와대는 그런 걸 세심하게 챙길 시스템이 없었다.

81년 1월 말 전두환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했다.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 4개월 만이었다. 미국 정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한국 대통령을 싸늘하게 맞았다. 국빈 방문은 고사하고 공식방문도 아닌 실무방문이었다. 공항에서는 아무런 환영행사도 없었다. 미국 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 일행이 머문 뉴욕 아스토리아호텔 앞에서는 교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쳤다. 플래카드는 '광주사태' '살인자'같은 글자로 도배돼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는 전 대통령은 무기력해 보였다. 눈빛과 몸짓 하나하나가 어색했다. 정통성 없는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 '추인'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85년 2차 미국 방문 때는 워싱턴에서 합류해 취재했다. 전 대통령은 4년 전과 달리 많이 당당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88년 임기가 끝나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 하겠다"는 약속을 미국 대통령에게 했다고 한다.

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대문 밖에는 그를 태우고 백담사로 갈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거실에는 '유배'를 떠나려는 전직 대통령을 취재하려는 내외신 기자들로 붐볐다. 나는 타임 한국특파원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8년 전 임기를 고민하던 그가 어느새 '7년 단임' 대통령 직을 끝내고 후임 노태우 대통령에게 떠밀려 강원도 산골짜기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

청와대 시절의 당당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회견 말미에서 "국민 여러분이 가라는 곳이라면 조국을 떠나는 것이 아닌 한 어디든 가겠다"고 할 때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는 대통령으로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세상과 정치권은 '5공 비리'를 용서하지 않았다. 기자회견을 끝낸 그와 마지막으로 악수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백담사로 떠났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2. 노태우 대통령

[중앙일보]입력 2006.11.14 20:57 / 수정 2006.11.15 04:14

90년 고르바초프와 회담 위해
호텔방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려

청와대 전속 사진사가 찍은 이 사진은 노태우.고르바초프의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기록한 유일한 영상 자료다.
1990년 6월 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노태우 대통령은 객실에서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회담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워싱턴에서 미.소 정상회담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를 방문 중이었다. 한.소 정상회담은 노태우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한 일이었지만 소련 입장에서는 가급적 감추고 싶은 회담이었다. 두 나라는 아직 수교 전이었다.

약속된 시간에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앞선 일정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대통령도 기자들도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소련 측에서 연락이 왔다. 노 대통령과 수행원.경호원 그리고 기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나갔다. 회담장으로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회담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대의 엘리베이터 중 한 대는 운행이 정지되어 있었고 나머지 한 대는 소련 측 경호원들이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네 명이 엘리베이터 안에, 두 명이 밖에 서 있었다. 경호원 외에 한국 대통령을 영접하러 나온 사람은 없었다.

많은 사람이 하나의 엘리베이터로 몰려들자 소련 경호원들이 당황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대통령도 덩치 큰 그들에게 막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누군가 소리쳤다. "He is president(그 분은 대통령이야)!" 대통령이 이리저리 떠밀리는 가운데 회담에 배석할 수행원.경호원과 기자들이 한꺼번에 엘리베이터에 탔다. 모두 양국 대통령이 만나는 순간, 현장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안 탈 수도 없었다. 물론 나도 필사적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겨우 문이 닫힐 무렵 대통령이 외쳤다. "잠깐, 저 사람은 같이 올라가야 해!" 회담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수행원이 그 난리 통에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밖에서 우왕좌왕 하는 걸 본 것이었다. 다시 문이 열리고 그 수행원을 태운 다음 엘리베이터는 회담장이 있는 23층에 도착했다. 소련 측 의전비서관은 그제야 나타나 한국 대통령을 안내했다.

대통령이 들어간 곳으로 기자들이 우르르 따라가자 소련 경호원이 큰 팔로 막아서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No Photo(사진은 안돼)!" 고르바초프는 한국 대통령 만나는 모습을 김일성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다. 소련 공보담당자와 오랜 시간 협의를 한 뒤 한국 공보수석이 합의내용을 발표했다.

"TV 카메라는 안됩니다. 사진기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딱 한 커트만 찍을 수 있습니다." 그 '역사적인' 사진을 청와대 전속 사진사 박금성씨가 찍었다.

그해 9월 한국과 소련은 수교했고, 12월엔 노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북방외교의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하지만 의전관례상 수모를 당한 샌프란시스코회담은 나라 망신을 톡톡히 시킨 사건이었다. 업적을 남기기 위해 원칙 없이 서둘다가 자초한 일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3. 서울의 이방인

[중앙일보]입력 2006.11.15 18:05 / 수정 2006.11.16 04:43

낮선 사고방식에 적응 애먹어
"조국을 이해하라"조언에 힘 내

89년 무렵의 필자.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마음 고생을 많이 하던 때였다.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것은 한국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그들과 부대끼며 살기 위해서였다. 조국을 선진국으로 이끄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겠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그래서 귀국을 준비하면서 기대로 가슴이 부풀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날 그리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봤다. '한국화보' 직원들에게 주 5일 근무를 시킨 것이나 사무실을 쾌적하게 꾸민 것도 시비 거리였다. 미국에서 25년 살다 들어온 내가 무심결에 영어를 쓰면 민망할 정도로 비판했다. 심지어 "한국X이 에드워드가 뭐냐?"는 사람도 있었다. 배타적인 분위기가 날 감쌌다.

나 또한 미처 보지 못했던 한국사회의 어두운 구석들을 발견했다. 우체국에서 줄서서 아무리 기다려도 내 차례가 오지 않았다. 택시를 탈 때도 마찬가지였다. 새치기 때문이었다. 내가 청와대를 출입하자 주변 사람들의 청탁이 이어졌다. 사업을 도와 달라, 아들의 승진에 힘써달라고 했다. 한 마디만 해 주면 평생 잊지 않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몹시 서운한 얼굴로 "남의 청탁을 받아들이는 법도 배우라"고 했다.

사람들은 내가 정(情)이 없다고 했다. "정이라는 것이 가족, 친구, 동창, 고향만 남보다 더 챙기는 거라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 그들은 "한국 실정을 너무 모른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순서를 기다리면 반드시 내 차례가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았다. 그렇게 악착스럽지도 않고 꿈도 소박했다. 중년이 되도록 그런 사람들과 살다 하루아침에 한국에 오니 적응하기 힘들었다.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서울에서도 이방인이 된 것 같았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지켜준 것은 '한국화보'였다. 열심히 만들어서 세계 사람들이 한국을 잘 알게 된다면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국적도 정리했다. 68년도에 취득한 미국 국적을 포기하기 위해 미 대사관에 들러 진술서를 쓰고 여권을 반납했다. 제 2의 고향 미국과 법적으로 결별하는 순간이었지만 담담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그 무렵 건축가 김수근 선생이 해 준 이야기는 큰 도움이 됐다. 서울 계동의 공간 (空間) 사옥으로 찾아갔을 때 김 선생은 갈등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곳 생활이 쉽지는 않을 걸세. 적당히 체념할 줄도 알아야 해. 자네는 지금까지 이 땅에서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지? 지금부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밀린 세금을 낸다고 생각하게."

조국을 배우고 이해하라는 말이었다. 옳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이웃을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적절히 체념하며 살아왔다.

지난 세대,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볼 때도 됐다. 원칙을 지키고 올바른 가치관을 교육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서점에 널린 자기 계발서는 그만 보고 공동체도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가 무시하지 않는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4. 김영삼 대통령

[중앙일보]입력 2006.11.16 19:53 / 수정 2006.11.17 04:57

당선자 때 비서 보내 사진촬영 요청
자연스러운 표정 찍으려 30분 진땀

필자는 18년 시차를 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촬영했다. 1974년 신민당 총재 때(左)와 92년 대통령 당선자 시절.
1974년 가을,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본관)에서 만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화가 나 있었다. 2년 전 공포된 유신헌법으로 야당 지도자였던 그의 입지가 크게 좁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신헌법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과 독재를 가능케 했다.

카메라 앞에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김 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국민은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이룬 번영이란 것도 별 것 아닙니다. 폐병을 가진 어린이가 키만 크면 뭐합니까? 어른이 되기 전에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한국이 그런 병에 걸려 있습니다."

18년이 지난 92년 겨울,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의 비서가 나를 찾아왔다. "'각하'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별로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하고 싶었다. "나는 그 분을 잘 모릅니다. 사진을 찍으려면 대상을 아는 게 중요하지요. 당선자의 업적이야 잘 알지만 인간적인 면모를 모르니 사진을 찍겠다고 하기 힘드네요." "그러면 프로필을 뽑아 드리면 될까요?" "프로필이야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전에 차라도 한 잔 하며 서로 얼굴을 익히면 사진 찍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비서는 난감한 얼굴로 돌아갔다.

사흘 후 비서가 전화했다. "당선자와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얼굴을 익혀야 한다는 것은 핑계였는데 다시 부탁하니 어쩔 수 없었다. 여의도 민자당사 내 당선자 사무실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정권을 차지했다는 기쁨과 흥분이 사람들 얼굴에 가득했다. 당선자를 만나 인사했다. "74년 국회 사무실에서 뵌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겠습니까?" 그는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다.

마주 앉았지만 김영삼 당선자는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듯했다. 번거로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언제 미국을 갔느냐?" "회사일은 재미있느냐?"고 물었지만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만남은 15분 만에 끝났다.

며칠 후 카메라를 들고 다시 당사를 찾아갔다. 태극기 앞에 선 그가 말했다. "사진을 잘 찍는다면서요. 어디 한번 찍어보세요." 머릿속에 복잡한 일이 가득 한 사람의 얼굴이 카메라에 비쳤다. 평생 갈망했던 대통령 자리에 드디어 올랐지만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감도 없어 보이고 미지의 세계에 첫 발을 들여놓는 사람의 불안감조차 드러났다. 야당 정치인으로 줄기차게 투쟁하는 인생을 살아온 그가 국가 운영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과연 준비는 되어 있는 것일까?

자연스러운 표정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도자의 얼굴이란 국민이 보고 편안해야 한다. 하지만 근심 어린 어색한 표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30분쯤 지나자 내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일에 몰두하다 보면 항상 그렇게 된다.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그의 부탁으로 며칠 후에는 상도동 자택을 방문해 손명순 여사 등과 함께 가족사진도 촬영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청와대와의 인연은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거쳐 김영삼 대통령까지 이어졌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55. 삼성 이건희 회장

[중앙일보]입력 2006.11.19 20:20 / 수정 2006.11.20 04:04

엉터리 계산기 만들던 삼성 변화에
리더의 비전과 열정 중요성 깨달아

삼성의 기업이미지를 생각하자면 파격적인 광고 사진이었지만, 이건희 회장은 “좋은 사진”이라며 직접 채택했다.
"에드, 아무래도 이상해. 계산이 자꾸 틀려." "그럴 리가 있나. 그 제품은 최첨단 전자계산기라고."

1974년 말, 워싱턴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무실. 내가 자랑스레 보여준 전자계산기를 조작해 보던 동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산기는 한국 취재 중 삼성전자에서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동료들은 처음엔 '자동으로 계산을 해주는 기계'라는 설명에 감탄했지만 계산이 자꾸 틀리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전자계산기가 계산을 못한다면 말이 되는가? 직접 버튼을 눌러 계산을 해봤다. 놀랍게도 답이 틀렸다. 버튼을 잘못 눌렀나 싶어 다시 같은 계산을 입력했지만 역시 엉뚱한 답이 나왔다. 동료들은 '머리 나쁜' 한국산 전자계산기에 폭소를 터뜨렸다.

90년 가을, 서울 한남동 이건희 삼성 회장 자택에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이 회장과 부인 홍라희 여사, 그리고 나였다. 87년부터 '타임' 한국특파원을 겸하던 나는 자매지 '포천'의 의뢰로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인들을 취재했는데 이 회장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는 삼성그룹을 해외에 알리는 잡지를 제작해 달라고 부탁했다.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는 세계 각지의 삼성사업장을 취재해 89년부터 '삼성의 세계(The world of Samsung)'라는 잡지를 제작했다. 세 사람이 보고 있던 것은 1990년 호의 편집 안이었다.

앞에는 큰 사진이 놓여 있었다. 터질 듯한 몸매의 세 미녀를 엉덩이만 클로즈 업 해 찍은 것이었다. 갈색 피부엔 물방울이 맺혀있고, T팬티 형 비키니 수영복은 탐스런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 사이로 깜찍한 삼성 카세트 라디오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브라질의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내가 촬영한 사진이었다.

홍 여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사진이 참 좋긴 한데…, 너무 앞서 가는 거 아닌가요?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지 못할 거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삼성이 지향하는 것이 '국제화' 아닙니까? 세계무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행정관청에서 문제 삼을지도 몰라요." "국제 기준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사진으로 대형 광고판을 만들어 우리나라 곳곳에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들고 있던 이 회장이 결론 내듯 말했다. "국제화 시대인데 이 정도는 무방하지요. 그대로 쓰도록 합시다."

이 회장이 추구하던 것은 '국제화'와 '질(質)'이었다. 회사를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우고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삼성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어느 날 자택을 방문했더니 회장은 새로 만든 휴대전화를 들고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화기 버튼을 눌렀는데 버튼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93년, 이 회장은 '신경영'을 선포하고 제품 고급화를 직접 이끌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10년 남짓 만에 삼성의 브랜드 가치가 소니를 누르고, 애니콜은 세계 최고의 명품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처음 본 삼성이 '계산도 못하는 전자계산기'를 생산하는 기업이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기적과 같은 일이다. 리더의 비전과 열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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