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仁祖)의 또 다른 패착(敗着), 왕조실록을 고쳤다.
[출처] 인조(仁祖)의 또 다른 패착(敗着), 왕조실록을 고쳤다.|작성자 김용상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으로 국보 151호다.
조선시대의 정치 사회 외교 경제 군사 법률 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그 양도 1,187책에 이를 정도로 방대할 뿐 아니라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도 매우 높다. 이와 같은 가치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부터 13대 명종 때까진 실록이 하나뿐이다.
헌데 14대 선조 이후 수정본, 개수본 등 다른 명칭의 실록 여섯 개가 별도로 있다.
이중 '광해군일기'는 정본 외에 원래는 폐기됐어야 할 실록의 초안인 중초본이 따로 있는 것이고, '고종황제실록'이나 '순종황제실록'의 경우 일본인들의 지시를 받으며 편찬되었기 때문에 실록의 가치가 크게 손상됐으니 예외로 하더라도 나중에 고쳐진 실록은 4대나 된다.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숙종보궐정오, 경종수정실록이 그것이다.
보궐정오는 본래의 실록에 부록형식으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 것으로 그 분량은 얼마 안 되고, 수정실록은 본래의 실록에서 일부를 고친 것으로 보궐정오보다 고친 분량은 더 많지만 원래의 것보다는 적다.
헌데 개수실록은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으로 가장 많이 고친 현종개수실록의 경우, 그 분량도 원래의 현종실록보다 더 많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 실록 편찬 과정에는 왕은 물론, 그 어떤 정치권력도 개입할 수 없게 돼 있어 임금도 선왕(先王)의 실록을 고치기는커녕 볼 수 없었으며 그래서 폭군 연산군(燕山君)도 실록엔 손을 대지 못했었다는 데 4개 왕조의 실록이 수정 또는 개수됐다니.
실록 편찬은 국왕이 서거하고 다음 왕이 즉위한 후에 시작됐다. 임시 기관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관을 임명한 다음, 사관(史官)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등 조정의 기록이나 개인 문집 등을 참고해 편찬했었다.
사관들이 역사를 공정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건 앞서 말한 것처럼 왕이라도 함부로 실록이나 사초를 볼 수 없게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런 원칙이 깨진 건 인조 때였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세력은 자신들이 쫓아낸 광해군(光海君) 시절에 편찬된 선조실록이 자기들과 적대적이었던 북인(北人)의 시각으로 기록돼 자신들의 종주(宗主)라 할 수 있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정철(鄭澈) 등의 업적이 너무 간단하게 다루어졌거나 사실과 다르게 돼 있다며 선조실록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래도 인조가 '전례가 없는 일이니 그건 안 된다'고 딱 잘랐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헌데 인조는 이를 허락해주었다.
서인들은 곧 수정작업에 들어가 효종(孝宗) 8년인 1657년 '선조수정실록'을 완성했다. 당연하게 권력을 미화하는 기록이 상당량 들어갔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광해군 시절 편찬된 '선조실록'을 차마 폐기하진 못하고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진실만을 담았던 실록에 함부로 손을 대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들이 담기게 되면서 '집권세력이 바뀌면 역사 기록도 바뀔 수 있다'는 아주 나쁜 선례가 만들어졌다.
헌데 이보다 더 대대적으로 개정된 실록도 있다. 바로 '현종실록'이다. '현종개수실록' 역시 서인들의 작품이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본래 현종실록은 현종 말년 이후 숙종 초년에 걸쳐서 득세한 남인의 허적과 권대운 등이 주도, 1677년(숙종 3년)에 인쇄를 마쳤으나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현종실록'도 개정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현종대왕은 총명과 예지를 지닌 불세출의 임금인데도 함부로 무고한데다 주요 사건이 빠지거나 잘못된 점이 많고 오자까지 수두룩하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사실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적 서술을 뜯어 고치기 위해서였다.
숙종은 대신들과 의논 끝에 '현종실록'을 전면 보수하기로 했다.
서인들은 실록을 새로 만드는 거나 진배없는 대대적인 개수 작업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돼 왕비 김씨(仁敬王后)의 국상으로 비용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일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곧 다시 추진, 1683년(숙종 9년)에 인쇄를 끝냈다.
'현종실록'은 총 22권이었으나 새로 만들어진 '현종개수실록'은 현종의 치적을 대폭 첨가해 총 28권 29책으로 분량이 훨씬 늘어났고 '사신은 논한다‘나 기타의 인물평도 서인과 남인에게 유리하게 서술됐다.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선조 시절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 시작됐다고 보는 붕당정치의 초기에는 한 당파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는 순기능도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직후 서인 세력이 조식(曺植)의 제자들이 주축을 이룬 대북파(大北派)에 대한 피의 숙청 을 한 이후 붕당과 당쟁은 곧 당파들의 생사를 건 권력투쟁으로 변질됐다는 사실이다.
내가 너무 자주 인조를 헐뜯는 것 같지만 여러 면에서 비판을 받아야 할 임금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출처] 인조(仁祖)의 또 다른 패착(敗着), 왕조실록을 고쳤다.|작성자 김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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