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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장희빈, 악녀(惡女)인가 당쟁(黨爭)의 희생양인가?/월류봉과 월류정 2장

장희빈, 악녀(惡女)인가 당쟁(黨爭)의 희생양인가?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 나오는 장희빈(장옥정)은 우리가 알고 있던 장희빈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경우도 바르고 착하기만 하다. 사심(邪心)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듯하다. 제작진더 제작발표회를 통해 '착한 장희빈의 매력을 그리겠다'고 선언했었다.

문득 그렇다면 혹시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근래 일각에서 제기된 장희빈 재평가 움직임과 맞닿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장희빈은 조선의 3대 악녀, 혹은 요화(妖花)였다. 헌데 다른 시각은, 치열했던 남인과 서인 간 당쟁의 희생양이었을 뿐 그렇게 모질고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당쟁에 휩쓸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보려면 당시의 정국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훗날 인현왕후로 일컬어진 계비(繼妃) 민씨(閔氏)는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 했다. 그때 임금이 총애하던 후궁 숙원 장씨(淑媛 張氏), 즉 장옥정이 왕자 윤(昀)을 낳자, 숙종은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으려 했다.

이를 두고 당시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正妃) 민씨의 나이가 아직 젊으니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며 원자책봉을 반대한 반면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해주었다.

숙종은 전횡을 일삼던 서인들을 내치고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자기 뜻을 관철시켜 숙원 장씨를 희빈으로, 그의 소생 윤을 원자로 삼았다.

이때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이 상소를 올려 잘못된 처사라고 간하자, 숙종은 이미 임금이 결정해 끝낸 일을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왈가왈부해 정국을 어지럽힌다고 분개했고, 남인 이현기(李玄紀) 등은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를 빌미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 보냈다가 사약(賜藥)을 내렸다. 김수흥(金壽興) 수항(壽恒) 형제 등 서인들도 파직되거나 귀양을 가야 했다.

숙종15년이던 기사년(1689년)에 벌어진 일이다. 이 와중에 민비는 폐출되고, 장희빈은 정비가 되었었다.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일컬어지는 이 정변으로 권대운(權大運) 김덕원(金德遠) 등남인이 정권을 잡고 장씨가 왕비의 자리에 올랐으나 몇 년 뒤 이들도 숙종의 신임을 잃어가던 중 소론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하다 발각됐다.

남인은 이를 계기로 소론의 완전 제거를 목표로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은 도리어 남인의 영수였던 민암(閔黯)을 처형하고,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 윤지완(尹趾完)등 소론을 등용하는 한편 폐비 민씨를 다시 왕비로 맞아들이고 중전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장씨를 왕비로 책봉한지 약 5년 만인 갑술년(1694년) 4월12일의 일이다.

숙종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장씨에게 희빈의 옛 작호를 내려 주고 세자가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는 계속하게 하라'고 명하자, 승정원도 다음 날, '중전으로 올리고 내치는 중대사를 대신(大臣)과 조정에서 의논하게 하지 않고 종이 한 장에 쓴 비망을 내려 마치 통상적인 사안처럼 처리한 것은 온당치 않다고 여겨지니 대신들이 오기를 기다려 의논을 모아 정해야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라고 주청했다.

서인 중 온건파였던 서문중(徐文重)과 박태상(朴泰尙) 등은 대궐 밖에 모여 '중궁에 재위한 기간보다 아들이 있고 없는 것이 더 중하다'며 희빈 장씨와 남인들에 대한 징계를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벼슬을 내놓기도 했다.

몇달 뒤인 8월19일, 보덕 박만정(朴萬鼎)은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낮춘 것은 다른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 중전을 복위시킴에 따라 나라에 존위(尊位)가 둘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조치라는 건 다 아는 일이지만 장씨가 원자를 낳고 길렀으며 지존의 짝이 되어 온 나라의 국모(國母)로서 여러 해를 지내다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다시 후궁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은 민망한 일이니 옛 고사를 고찰해 따로 궁호(宮號)를 세우는 등 다른 후궁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이상의 기사들을 보면 이때까진 장희빈이 모든 신료와 백성들의 비난을 받을 만큼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말썽은 그 이후에 생겼다. 숙종 27년인 1701년 8월14일 왕비 민씨가 병으로 창경궁에서 죽은 뒤에 민비 생전에 장씨의 오빠 희재가 무당과 나인들을 동원해 저주 굿을 했다는 고변이 있었다. 격분한 임금은 장씨 처소의 여러 나인 등을 친국한 끝에 그들이 죄를 시인하자 9월23일엔 장희재를 처형하고, 장씨에게도 자진하라고 명했다.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생각해서 자진하라는 명은 거두시라'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10월8일자 왕조실록의 기사 말미엔 '궐밖에선 숙빈(淑嬪) 최씨(崔氏)가 평상시에 왕비 민씨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임금에게 몰래 고했다는 얘기가 돌았다'고 적혀 있다.

무수리로 궁궐에 들어와 인현왕후를 섬기던 숙빈은 인현왕후 폐출된 뒤 밤마다 그의 복위를 기도하다 그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고, 숙의(淑儀)였던 1694년 9월20일 왕자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훗날 영조가 된 연잉군(延礽君)이다.

어쨌든 장희빈은 자진한 뒤에도 한동안은 '권력 지향적이던 요부(妖婦)' 정도로 평가됐던 것 같다.

그랬던 그가 악녀로 몰리기 시작한 것은 장희빈을 발고했던 숙빈의 아들 영조가 즉위하고,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閔鎭遠)이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는 등 노론의 중추적 역할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노론이 인현왕후의 폐위와 죽음을 주도하고 두 차례의 급작스런 정권교체와 사화(士禍) 등을 조종한 원흉으로 장희빈을 지목해 비난하기 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때 세상에 나와 민간에 까지 널리 보급된 '인현왕후전'같은 언문 소설과 이문정(李聞政)이 장희빈의 아들이며 4년2개월 동안 재위한 경종 때 역사를 들은 대로 썼다는 수문록(隨聞錄)같은 야사집이 각종 역사서와 드라마 등의 자료로 활용되면서 손가락질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노론이 장난질한 것이고, 소설 인현왕후전도 애초 알려진 것처럼 왕후를 곁에서 모신 궁녀가 쓴 것이 아니라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 반대하다 심한 고문을 받고 옥독(獄毒)으로 숨진 박태보(朴泰輔)의 후예나 왕후의 친정 족친 중 누군가가 썼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인현왕후전의 내용이 상당부분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도 있다.

그 후 남인은 다시는 정가에 발을 붙이지 못 했으며 이후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나저나 7일 밤에 방송될 '장옥정, 사랑에 살다' 10회부턴 장옥정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다.

 

 

충청북도...월류봉과 월류정...우암 송시열이 공부하던 지역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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