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렬왕후와 예송(禮訟)
JTBC 주말연속극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극본 정하연, 연출 노종찬)에서 인조(이덕화)의 계비로 출연 중인 신인 배우 고원희가 뜻밖에 좋은 연기를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아직 어리지만 중전의 격에 맞는 단아한 미소와 기품을 제대로 소화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땐 인터넷 검색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다.
고원희가 분한 인조의 계비는 훗날 장렬왕후(莊烈王后)로 일컬어진 분이다. 인천부사((仁川府使) 등을 지낸 조창원(趙昌遠)의 딸로 1638년(인조 16)에 왕비로 책봉되고,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 자의(恣懿)라는 존호를 받았다.
1624년에 태어나 예순다섯살이던 1688년에 서거했다. 드라마에서도 그려지고 있는 대로 인조는 장렬왕후를 잘 찾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소생도 없다. 능은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휘릉(徽陵)이다.
장수하긴 했으나 여자로썬 불행한 생애를 살다간 장렬왕후는 1659년 효종의 죽음, 1674년(현종 15)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죽음과 관련해 당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조선 당쟁사의 큰 획을 그은 예송(禮訟)의 한가운데 서기도 했었다.
예송이란 조선 현종 때 어떤 궁중의례를 적용할 것인가, 특히 복상(服喪)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두 차례의 논란이다. 토론을 해서 결과만 도출한 게 아니라 어느 파당이 이겼느냐에 따라 승자는 정권을 쥐고, 패자는 죽거나 귀양을 가야했다.
기해년에 벌어져 기해예송으로도 불리는 1차 예송은 효종이 죽은 뒤 그의 계모로 당시엔 자의대비로 불리던 장렬왕후가 얼마동안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란이다. 성리학의 예론(禮論)으론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적장자(嫡長子)인 경우는 3년 상을, 그 이하는 1년만 입도록 돼 있다.
헌데 인조는 첫째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의문사한 뒤 세자의 맏아들이자 자신의 맏손자인 원손(元孫)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 왕통을 잇게 했다. 이로써 왕통은 인조에서 봉림대군(효종)으로 이어져, 적장자가 유고시 적장손이 잇게 돼 있는 종법(宗法)을 어긴 꼴이 됐다. 두 차례의 예송도 이 때문에 빚어진 인조의 업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효종 사후 벌어진 1차 예송에서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서인 계열은 효종이 둘째아들이었으니 1년 상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반면 윤휴(尹鑴) 허목(許穆) 등 남인들은 종법도 왕가의 의례에선 변칙 적용이 가능하다며 3년 상을 주장했다.
설왕설래 끝에 결국은 장자와 차자의 구분 없이 1년동안 상복을 입게 한 '경국대전'에 따르기로 결정돼 결과적으론 서인이 승리,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종법상 효종의 위상에 대한 논란에 대해선 결론을 내지 못해 2차 예송의 빌미가 되었다.
2차 예송(갑인예송)은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또 다시 대왕대비 조(趙)씨, 즉 장렬왕후가 얼마동안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효종을 장자로 볼 것이냐 차자(次子)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다시 표면으로 떠오른 것이다. 효종을 장자로 인정한다면 인선대비는 장자부(長子婦)이니 대왕대비는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지만, 차자로 볼 경우 9개월만 입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예조는 처음엔 1년으로 했다가 9개월로 고쳐 임금에게 아뢰었으나, 현종은 예조에서 9개월만 상복을 입도록 한 것은 효종을 차자로 본다는 뜻이라 잘못됐다며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따라 송시열계의 서인세력은 조정에서 축출당하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뒤 얼마 안 돼 현종이 죽고 그 뒤를 숙종이 이었다. 당시 조정은 남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서인은 별로 많지 않았다.
하지만 기호 세력의 유생들이 대다수였던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 구명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영남 유생들도 이에 가세해 선비 사회는 여전히 예론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숙종은 정권을 잡은 남인의 전횡이 심하다는 것을 듣고 보아서 잘 알고 있는터라 남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참에 영의정 허적(許積)이 자기 집안 행사에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고 유악(油幄)을 빌려간 사실이 드러났다. 격분한 숙종은 남인 쥐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겨주었다.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칠한 천막을 일컫는 유악은 군사용품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얼마 후엔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고변에 따라 경신대출척이라는 옥사(獄事)가 일어나 남인들은 죽거나 유배된 반면 송시열은 길고 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정권을 잡았다.
[출처] 장렬왕후와 예송(禮訟) |작성자 김용상
경희궁 태령전
경희궁 태령전 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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