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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천명] 윤원형(尹元衡)의 최후/태릉 2장

[천명] 윤원형(尹元衡)의 최후

조선 중기에 윤지임(尹之任)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8촌 아우인 윤임(尹任) 덕분에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임금의 장인인 국구(國舅)의 자리에 앉는 광영을 누린 사람이다.

윤임이 발벗고 나서준 까닭이 있었다. 친정이 연산군의 처가였다는 이유로 중종의 첫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가 폐위된 뒤 윤임의 누이동생(장경왕후 章敬王后)이 계비(繼妃)로 들어갔었다. 그런데 장경왕후가 1515년(중종 10) 세자(인종)를 낳은 뒤 곧바로 죽자, 윤임은 집안에서 계비를 들여야 세자(당시엔 원손)가 무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8촌 형의 딸이 간택되도록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던 것이다.

그렇게 국구가 됐던 윤지임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엇갈린다. 농번기에 매사냥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처첩을 빼앗기도 하는 등 행동에 절제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딸이 왕비가 된 이후에도 늘 온화하고 검소해서 매우 현명한 외척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국구가 된 이후에도 한나라(前漢)의 5대 황제이며 태평성대를 이룬 성군으로 평가되는 문제(文帝)가 장인 두광(竇廣)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던 옛일을 들먹이며 외척의 전횡을 경계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딸과 아들은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중궁이고 외척이라는 지위를 악용해 권력을 틀어쥐고 국정을 농단했다.

한마디로 자식농사엔 실패한 인물이었다.

그 자식들이 K2TV 수목드라마 '천명; 조선조 도망자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조선 최고의 악후(惡后) 문정왕후(文定王后 박지영)와 그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다.

김정균이 연기하는 윤원형은 1533년(중종 28) 문과에 급제했지만, 4년 뒤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김안로(金安老)에게 밉보여 파직에 귀양까지 갔다가 그해 김안로가 사사되자 곧 재기해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을 두루 거친 뒤 공조참판(종2품)에 이르렀었다.

중종 후반의 조정은 세자(뒤의 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한 대윤(大尹)과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慶原大君, 뒤의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을 영수로 삼는 소윤(小尹)으로 나뉘어 파평 윤씨 집안끼리 팽팽하게 대립했었다.

이 대립은 인종이 즉위한 뒤 대윤이 소윤의 영수 윤원형을 탄핵, 파직하는 등 거세게 몰아붙이면서 끝이 나는 듯 했으나 인종이 즉위한지 8개월 만에 숨을 거두자 역전됐다. 문정왕후 소생 경원대군이 겨우 12살에 보위를 물려받아 그의 모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윤원형은 곧 예조참의(정3품)로 복귀했고, 그 후 대대적인 보복이 시작됐다. 인종이 병석에 있을 때 경원대군 대신 성종의 셋째아들인 계성군(桂城君) 순(恂)의 양자인 계림군(桂林君)을 추대하려고 모의하는 등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윤임을 비롯한 대윤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한 것이다. 이것이 을사(乙巳)사화다.

윤원형은 2년 뒤 '여주(女主, 문정왕후를 가리킴)가 정권을 잡고 이기(芑)를 비롯한 간신들이 그 밑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격문이 나붙은 이른바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을 기화로 대윤의 잔당을 처형하고 권벌(權橃) 이언적(李彦迪) 노수신(盧守愼) 같은 명망 높은 사림(士林)들까지 처벌한 미(丁未)사화(1547년, 명종 2년)를 일으켜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다.

이후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자그마치 20년 동안 권력을 독점,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1563년, 명종 18)에 까지 올랐다. 명종은 나이가 스물이 되면서 친정(親政)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모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 했다. 윤원형은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누나인 대비와 내통해 명종을 위협했고, 임금의 동태는 내관이나 궁인들을 통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대처했다.

어느 날, 명종이 내관에게 ‘'척이 큰 죄가 있을 땐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하고 물었는데 그 외척은 바로 윤원형이었다. 그 말이 곧 문정왕후에게 들어가자 왕후는 아들을 불러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으면 주상의 오늘이 어떻게 있었겠느냐'고 크게 꾸짖기도 했다 한다.

명종은 윤원형이 군국의 정사 대부분을 제멋대로 처결하고 있는데 대해 내심 못 마땅해 했고 매우 미워했다고 한다.

20년 동안 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그가 받아 챙긴 뇌물도 어마어마했다. 오죽하면 '윤원형의 재산이 국고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뇌물 뿐 아니라 정난정(鄭蘭貞)이 남편의 위세를 빌어 상권을 장악해 축적한 부(富) 또한 막대했다 한다. 부총관(종2품) 정윤겸(鄭允謙)의 서녀(庶女)였던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안방을 차지한 뒤 나중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까지 올랐었다.

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윤원형도 대비가 죽으면서 끝장이 났다. 대비가 죽자 신료들은 앞을 다투듯 윤원형을 탄핵했고, 외숙에게 불만이 많았던 명종은 이를 받아들여 윤원형과 정난정을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귀양 보냈다.

그뒤 얼마 안돼 본처를 독살했다는 발고에 따라 조사가 시작되자 정난정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명종 20년(1565년)11월13일 자살했고, 닷새 뒤엔 윤원형도 뒤따라 죽었다.

그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포함돼 있다. <윤원형이 사림들을 풀 베듯 죽이며 흉악한 짓을 있는 대로 다했는데, 오래도록 천벌을 면하더니 금일에 이르러 마침내 핍박으로 죽으니, 조야가 모두 쾌하게 여겼다.>

 

 

태릉 전경...문정왕후 릉...^-^

 

태릉(문정왕후) 상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