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의 가계(家系)와 거부(巨富) 역관 장현(張炫)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극본 최정미, 연출 부성철) 첫 주 방송을 보고 느낀 점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사극에 패션을 입혔다'가 어떨까. '재미 있냐?' '괜찮게 만든 드라마 같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모르겠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줄거리를 소개하고 어디는 좋았고 어떤 건 부족했다고 하는 것보다는 이제부터 역사공부를 해보자.
'장옥정-'은 팩션 드라마니 왜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느냐고 시비를 걸 일은 아니다.
다만 픽션을 삽입해 재미를 배가한 드라마를 즐겨 보더라도'사실은 이랬다는 건 알고 보자'는 뜻에서 여기저기 찾아 써본다.
이 드라마에선 장옥정의 어머니가 어느 집 노비였던 것으로 나온다. 인터넷 어딘가에도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趙師錫)의 집 종이었던 관계로 조대비의 사촌동생인 조사석과 조대비의 조카사위인 숭선군, 그 아들인 동평군 집안과 가까웠다.'는 내용도 있다.
허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노비인 어머니 때문에 어머니의 주인인 조사석과 다른 왕족들과 가까웠다는 건 사리에도 맞지 않다.
장옥정은 역관 장경(張烱)의 딸이었다. 할아버지는 정3품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우의정에 추증된 역관 장응인(張應仁)이다.
당시 역관이나 의관 등 기술직은 세습화되다시피해 변승업(卞承業)을 배출한 초계 변씨(草溪 卞氏), 홍순언(洪純彦)으로 대표되는 남양 홍씨(南陽 洪氏), 그리고 인동 장씨(仁同 張氏) 가문에서 역관들이 많이 나왔다.
장옥정의 아버지는 제주 고씨와 결혼했으나 23살에 상처한 뒤 사역원 첨정(僉正 종4품) 윤성립(尹誠立)의 딸을 후실로 맞아들였다.
이 때문인지 장옥정이 장경의 서녀였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나,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장경의 첩이나 노비가 아니라 재취한 정실이었다. 윤씨는 아들 장희재(張希載)와 두 딸을 낳았는데 이중 차녀가 장옥정이다.
장옥정의 외조부 윤성립은 조선의 또 다른 유명 역관가문인 초계 변씨 집안의 사위이기도 했다. 외조모 변씨가 조선 최고의 갑부로 꼽혔던 역관 변승업(卞承業)의 큰 할아버지의 딸, 그러니까 당고모였다.
장옥정은 11살 되던 해인 1669년 아버지 장경이 병으로 죽자 5촌 당숙이며 큰부자였던 역관 장현(張炫)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드라마에선 장현이 옥정을 본 건 어렸을 때 딱 한번이라고 나온다. 요즘 같으면 사촌 아우의 자식을 딱 한번 밖에 못본 경우도 있을 것이나 당시엔 4촌, 5촌은 무척 가까운 친족이었던 데다 같은 역관이라 왕래가 적진 않았을 것이다.
가세가 빈곤해 제 자식 끼니 챙겨줄 형편도 못된다면 모를까 돈도 많았으니 사촌 아우가 어린 자식들을 남겨둔 채 죽었다면 그 식솔들을 거둬 돌봐주는 건 당시로썬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동일이 연기하는 장현(張炫)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드라마에선 동료를 죽인 적도 있고 난전을 휘젓고 다니는 조직폭력배처럼 그려지고 있으나 내 재주로는 그런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종2품 고위 역관이었던 장경인의 장남으로 태어난 장현은 1639년(인조 17년) 역과에 장원으로 합격해 한학교수 등을 거쳐 나중엔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으며 '국중거부'(國中巨富)로 불릴 정도로 대단한 부자였다고 한다.
부지런하면서 재주도 있고 풍채도 좋았다는 그는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을 수행, 청나라 심양(瀋陽)에 머물며 청나라의 여러 사정을 파악하는데 주력하다 6년 만에 귀국해선 역관의 우두머리인 수역(首譯)으로 일했다.
40년간 30차례나 북경(北京)을 오가며 나랏일도 보고 돈도 많이 번 그는 남인(南人) 세력을 후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중인 신분인 역관이 품계도 높고 돈도 많으니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한때는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과 함께 사사로이 부를 축척했다는 고발을 당하기도 했었다. 실제로 1653년(효종4)에 역관들이 무려 50수레가 넘는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는데, 서인(西人)들은 그 인삼의 주인으로 장현을 지목해 곤욕을 치를 뻔 했으나 효종이 적극 비호해줘 큰 탈은 없었다.
장현은 청나라를 오가며 돈만 챙긴게 아니라 사재를 털어 청나라의 기밀을 탐지하고 몰래 무기를 들여왔는가 하면 비밀문서를 입수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숙종 3년이던 1677년, 역관의 신분으로 이미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른 장현에겐 더 이상 자급을 올려줄 수 없다며 문관들이 반발하자, 숙종은 그의 아들들이나 조카들의 자급을 올려주었다고 한다.
[출처] '장옥정'의 가계(家系)와 거부(巨富) 역관 장현(張炫)|작성자 김용상
서오릉 장희빈 대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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