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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펜화 에세이

중앙[김영택의 펜화 기행]한국과 일본, 베이징풍경 20개

 

[김영택의 펜화기행] 승보 사찰 송광사, 큰 깨달음의 입구

[중앙일보] 입력 2008.04.18 00:59 / 수정 2008.04.18 01:31

1930년대의 송광사, 종이에 먹펜, 43Χ60cm, 2008.
인간 세포를 복제하여 인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미세한 세포에 인간의 설계도와 제조 방법, 지능 등 엄청난 정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의 저장 능력이 얼마나 더 발달해야 비슷한 수준이 될지 전문가도 예측하기 어렵다 하니 인간과 신의 능력 차이라고 보아야겠지요.

불경 중에 가장 수준이 높다는 화엄경을 210자로 압축한 법성계의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는 ‘작은 티끌에 온 세상이 담겨있고, 모든 티끌은 모두 똑같다’라는 말입니다. 저장 능력이라는 단어가 무의미해집니다.

이 세상의 본질인 불성(佛性)은 시간과 공간, 수량과 질량 등에서 3차원 존재인 지구 인간의 상식으로는 설명과 이해가 불가능한데 깨달은 스님만이 알게 된답니다. 다차원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스님은 ‘내가 곧 너’‘나비와 내가 하나’라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을 합니다.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큰 스님, 즉 국사(國師)가 16명이나 배출된 절이 승보 사찰 송광사(松廣寺)입니다. 그래서 송광사에는 대웅전 뒤에 스님들의 수행 공간을 두었습니다. 불보 사찰인 통도사는 대웅전 뒤에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고, 법보 사찰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을 모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국내에서 건물이 가장 많았다는 송광사는 전란으로 많은 불당이 불타 없어졌으나 절 입구의 우화각과 육감정 누대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개울을 막아 만든 연못에 장주석을 세우고 누마루를 덧붙인 육감정과 우화각이 물속에 비친 모습은 송광사의 백미입니다. 1930년대와 다른 점은 육감정의 난간이 계자각으로 바뀐 정도입니다. 신문의 그림과 현장을 비교하여 달라진 부분을 찾아보세요. 


김영택

 

[김영택의 펜화 기행] 휴휴암 남순동자 … 거북바위에 가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08.05.01 15:06 / 수정 2008.05.02 02:43

 부산 노포동 터미널 앞에 장이 섰기에 둘러보았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닭이며 오리·토끼 등을 파는 곳에서 못 볼 것을 보았습니다. 닭장 앞에서 산 닭의 목을 치고, 삶은 물에 넣어 털을 뽑는 것을 보며 닭장 안의 닭과 오리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참 잔인한 동물이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입장을 바꾸어 보세요. 짐승들이 인간을 잡아놓고 보는 앞에서 죽이고 살가죽을 벗긴다면 어떻겠습니까.

일본에 개 소리를 사람의 말로 바꿔 주는 기계가 있습니다. ‘밥 주세요’ ‘아파요’ ‘오줌 마려워요’ ‘안아주세요’ 등 40여 가지 말을 통역해 준답니다. 이렇게 짐승도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요즈음 조류독감이 퍼진다고 수많은 닭과 오리가 살(殺)처분됩니다. 산 닭을 그대로 부대에 담아 구덩이에 묻는 모양이 아무렇지도 않게 방영됩니다. 이렇게 수십, 수백만 마리의 동물이 무자비하게 살육되는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천도제라도 지내줄 스님은 안 계십니까?




펜화를 시작하면서 식습관을 채식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여행길에 끼니 해결이 곤혹스럽습니다. 그러다 보니 절에서 식사할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합니다. 돈을 받지 않으니 더 좋고요. 이 절 저 절 다니며 식사를 하다 보니 반찬이 맛있는 절이 손에 꼽힙니다. 통도사 자장암, 화순 쌍봉사, 해남 미황사, 양양 휴휴암인데 그중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식사를 한 휴휴암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올해 2월 22일에 보여 드린 휴휴암 관음보살상 가까운 곳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습니다. 절에서는 관음보살 옆에 있다고 남순동자(南巡童子)라 부릅니다. 고려 불화의 관음보살 왼쪽 아래에 서 있는 동자승이 남순동자입니다. 동해안 여행길에 관음보살과 남순동자를 찾아보세요. 몸과 영혼에 좋은 채식 식사는 공짜랍니다.

김영택

 

[김영택의 펜화 기행]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탑…손톱 넓이 기와에 연잎 여덟 개

[중앙일보] 입력 2008.05.15 16:28 / 수정 2008.05.16 02:24

 가장 아름다운 부도탑으로 화순 쌍봉사 철감(澈鑑)선사 부도를 손꼽는 분이 많습니다. 신라 경문왕 때 국사에 오른 도윤 스님(798~886)의 부도로 국보 제57호입니다.

지붕돌과 몸돌, 받침돌의 크기와 비례가 완벽에 가깝습니다. 조각 솜씨가 뛰어난데 엄지손톱 넓이의 수막새 기와에 새긴 여덟 개의 연잎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납니다. 안타까운 것은 도굴꾼들이 사리기를 훔치려고 쓰러뜨릴 때 지붕돌이 파손되어 온전하게 남은 막새기와가 몇 안 되는 점입니다. 몸돌의 조각도 손상되었습니다. 철감선사 부도에는 사리기를 넣는 사리공 자체가 없는데도 무식한 도굴꾼들이 여러 차례 손을 댔으니 남아날 수가 있나요.



2002년 펜화에 담아 중앙일보에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깨어진 지붕돌과 조각들을 되살린 세밀한 복원도를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문제는 천 년이 넘는 세월에 마모되어 조각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고심 중에 해결책이 나왔습니다. 야간에 조명을 비추니 조각이 완벽하게 보이더군요.

철감선사 부도는 신라시대의 가옥 형태를 돌에 옮긴 것입니다. 몸돌의 기둥은 배흘림 기법이 완연합니다. 전면과 후면 출입문에는 고급 자물쇠를 채웠고, 스님을 호위하는 사천왕이 네 면에, 나머지 두 면에 비천상이 배치되었습니다. 서까래에 부연이 있는 겹처마 지붕의 선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상대석 여덟 면에 가릉빈가를 배치하고, 중대석에는 사람 얼굴을 한 특이한 조각을 넣었습니다. 하대석 윗돌에는 여덟 마리의 사자가 부도를 지키고 있는데 노는 모습이 강아지처럼 귀엽습니다. 아랫돌에는 구름과 용을 배치하여 스님의 집이 하늘 위 불국토에 있는 것을 상징하였습니다. 상륜부는 자료 부족으로 고증을 할 수 없어 그려 넣지 못하였습니다.

야간 조명을 위해 산 언덕까지 전선을 설치 해 준 쌍봉사 스님들과 팔자에 없는 조명기사가 된 황상희 박사에게 감사드립니다. 

김영택

 

[김영택의 펜화 기행] ‘미남’ 미륵을 모신 법당

[중앙일보] 입력 2008.06.19 16:19 / 수정 2008.06.20 03:35

금산사 미륵전

 종교 창시자가 살아 있을 때는 ‘스승’ 또는 ‘영적 지도자’라고 부릅니다. 스승이 죽은 뒤 스승의 이름을 넣은 ‘○○교’가 되며 스승은 ‘신’으로 추앙됩니다. 스승은 자기 모습으로 상징물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복신앙의 대상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기업에 심벌마크가 필요하듯이 종단에도 포교에 효과적으로 쓸 상징물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유언을 어기고 스승의 모습을 상징물로 만듭니다. 그 과정에서 본래의 모습과 전혀 다른 얼굴로 성형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인 예수는 서구형 미남이 되며 석가모니의 귀는 어깨까지 늘어납니다. 전파되는 국가에 따라 얼굴 모습과 복장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부처님도 중국을 거쳐 우리 땅에 들어오면서 얼굴 모습이 달라집니다. 우리 민족에게 친근한 얼굴이 된 것입니다.




김제 금산사(金山寺) 미륵전에 모신 장륙상 중 본존 미륵상은 참 잘생긴 한국인의 얼굴입니다. 키가 11.8m로 4층 건물 높이와 맞먹을 만큼 커서 머리를 한껏 뒤로 젖혀야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높이 18.91m인 미륵전을 밖에서 보면 3층이지만 내부는 터져 있는 통층 건물입니다.

흙으로 만든 소조 불상에 금칠을 한 본존불은 1934년 불에 타 1938년 석고로 복원했습니다. 요사이 좌우 협시불이 습기 때문에 흙이 무너져 내려 복원하고 있습니다.

미륵전 옆 언덕 위에 2단으로 쌓은 방등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과 같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입니다. 지붕 용마루 위에 탑 상륜부 장치가 튀어나온 대장전에 모신 석가모니불의 광배를 눈여겨보세요. 대단히 잘 만든 광배입니다.

본 그림은 방등계단의 석축이 고쳐지기 전 모습입니다. 1920년대 찍은 사진에는 미륵전 현판 하나만 있었으나 아래 두 개의 현판은 그 뒤 추가된 것입니다. 

김영택

 

[김영택의펜화기행] 북쪽 문, 그 험난한 세월

[중앙일보] 입력 2008.07.03 15:49 / 수정 2008.07.04 08:23

창의문

1900년대의 창의문, 종이에 먹물, 36X50cm, 2008
요즈음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옛 건축문화재 사진엽서를 구하는 재미에 흠뻑 빠졌습니다. 몇천원에서 몇십만원까지 호가가 이루어지는데 희귀한 엽서를 낙찰 받았을 때에는 없어진 문화재를 되찾은 것처럼 흥분됩니다.

얼마 전 창의문(彰義門) 엽서를 구해 그동안 자료 부족으로 그리지 못했던 복원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서울 성곽의 4대문과 4소문 모두를 펜화에 담은 셈입니다.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이란 아름다운 별칭처럼 주변 풍치가 장안 제일이었습니다. 경복궁과 창덕궁이 가까워 나들이 장소로도 최고였지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이 자랑하던 자하문 밖 별장을 대원군이 간계로 빼앗은 것도 주변 풍광 때문일 것입니다.

창의문을 지나는 길은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만 반대로 서울을 공격하는 반란군의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광해군 14년(1623) 3월 12일 반정군이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창덕궁으로 난입해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를 왕으로 세웁니다. 창의문에는 본래 문루가 없었으나 인조반정을 기리는 뜻으로 영조 17년(1741)에 문루를 세우고 반정공신의 명단을 붙였습니다.

1950년 6·25전쟁 때 북한군이 넘어왔고, 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난입합니다. 물론 성문 옆으로 난 도로였습니다. 실패하고 달아나다 잡힌 김신조는 “나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라고 해서 온 국민을 놀라게 했습니다.

창의문은 4소문 중 유일하게 제자리에 남아 있는 건물인데 바로 앞으로 높은 도로가 나는 바람에 옛 정취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창의문에서 숙정문에 이르는 길은 새로 개방된 문화산책 길로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등산을 겸해 찾아보시면 몸에도 좋고 머리에도 좋습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 펜화 기행] 깨달음의 높이

[중앙일보] 입력 2008.08.22 03:42 / 수정 2008.10.10 12:28

<펜으로 복원한 문화재> 만불사 아미타대불

만불사 아미타대불, 종이에 먹펜, 36X48cm, 2008
고타마 싯다르타가 훌륭한 부처가 돼 고국으로 돌아오자 사촌동생들이 제자가 되고자 합니다. 석가모니의 승낙을 받은 왕자들은 머리를 깎은 뒤 값비싼 장신구와 고급 옷을 이발사에게 주고 헌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이발사는 ‘많은 재산과 지위를 가진 왕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하는데 보잘것없는 내가 아낄 것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고 석가모니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간청합니다. 석가모니는 이발사를 제자로 입문시킨 뒤 왕자들을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다음 왕자들에게 입문 선배인 이발사에게 예를 갖추도록 합니다.

신분제도가 엄격한 인도에서 왕자들이 불가촉천민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석가모니는 왕자들이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도록 일부러 입문 순서를 뒤바꾼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출가 이전의 사회적 계급을 불문하고 한 시간이라도 먼저 계를 받은 자를 윗자리에 앉도록 해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가르쳤습니다. 많은 제자가 있어도 직접 탁발을 하며 부처와 제자가 평등함을 몸소 보여 줬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부처로서 ‘깨달은 부처’와 ‘깨닫지 못한 부처’로 구분될 뿐입니다.

경북 영천 만불사 아미타동산에 높이 33m에 달하는 아미타부처가 자비로운 모습으로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대불로 경부고속도로에서도 보입니다. 야간 조명을 받은 대불을 보면 신비한 느낌이 듭니다. 불상을 많이 모셨다고 만불사(萬佛寺)라 한답니다. 인등탑 3개가 있는데 탑 하나에 3만 기의 불상이 있어 모두 9만 기가 된답니다. 만불전에도 불상 1만7000기가 있는데 옥외에도 많은 불상이 있어 주지스님도 정확한 수를 모른답니다. 요사이 엄청나게 큰 대웅전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완공이 되면 영천에 세계 불교 중심도량이 생긴다니 기대가 됩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펜화기행] 지금은 사라진 정조임금 서재

[중앙일보] 입력 2008.09.04 14:58 / 수정 2008.10.10 12:27

<펜으로 복원한 문화재> 열고관과 개유와

열고관과 개유와, 종이에 먹펜, 36X48cm, 2008
펜화로 그린 복원도를 보고 “상상으로 그립니까”하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진을 보고 그립니다. 문헌에 기록은 있으나 실물이나 사진이 없는 경우 전문가 고증을 받아 복원도를 그린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주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앙일보에 연재한 그림은 모두 옛 흑백사진을 기초로 그린 것입니다. 힘든 점은 흑백 사진의 특성상 어두운 부분의 디테일을 알아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럴 경우 컴퓨터에 올려놓고 밝기 조정을 하기도 하고, 같은 시기에 지은 다른 건물 사진에서 찾기도 합니다. 훼손된 부분도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 넣습니다. 복원도에는 세밀한 부분이 잘 보이도록 밝기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필요 없이 가리는 것이 있으면 삭제하기도 합니다.

창덕궁 안정열 소장에게서 귀중한 자료를 받았습니다. 정조가 공부하던 서재인 개유와(皆有窩)와 열고관(閱古觀) 사진입니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연못 북쪽에는 큰 서고인 규장각이 있었고 연못 남쪽 언덕에 중국책을 보관하던 열고관이 있었습니다. 열고관은 아래, 위층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진짜 2층으로 당시에는 보기 드문 건물이었습니다. 법주사 팔상전이 5층, 금산사 미륵전과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3층, 화엄사 각황전 등이 2층입니다만 외부만 중층이고 내부는 위까지 터진 통층 건물입니다.

1928년에 찍은 유리건판 사진이니 열고관은 그 후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서고인 열고관 2층 창은 들어열개문으로 만들어 통풍이 좋게 하였고, 처마를 길게 해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2층 밖으로 마루를 덧붙이고 계자각 난간을 달았습니다. 마루를 받치는 낙양각도 크고 화려합니다. 세부 디테일은 같은 시기에 지은 규장각 건물을 참고하였습니다. 서재인 개유와에 수입도서 서고를 붙여 지은 것을 보면 정조의 학구열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이 됩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의 펜화기행] 영천 만불사 황동 와불 열반상

[중앙일보] 입력 2008.09.18 14:21 / 수정 2008.10.10 12:26

부처님과 함께 눕다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시작한 지 45년이 되던 해 석가모니는 쿠시나가라의 사라나무숲을 열반(涅槃)의 터로 삼습니다. 석가모니가 사라나무 아래에 누워 명상에 들자 사라나무는 계절이 아닌데도 수많은 꽃을 피워 부처에 대한 경의를 표합니다. 석가모니는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모여서 이루어진 모든 것은 반드시 흩어지게 돼 있다. 열심히 정진하라”는 말씀을 끝으로 80세의 생을 마감합니다. 뒤늦게 도착한 수제자 가섭존자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자 이중으로 짠 관 속에서 석가모니의 두 발이 밖으로 나옵니다. 부처의 진정한 법신(法身)은 삶과 죽음이 따로 없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다비식 후 수습된 사리를 8개국에서 나누어 가서 8개의 탑묘를 세웠고, 사리 분배 요청이 늦은 필발촌 사람들은 남은 재로 탑을 세웠으며, 사리 분배를 맡았던 바라문은 사리를 담았던 병으로 탑을 세웁니다. 이 사리들은 훗날 이리저리 흩어져 전 세계에 수많은 사리탑이 됩니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만불사에 세계 최초로 황동으로 만든 석가모니의 열반상이 있습니다. 길이 13m, 높이 4m로 국내에서 가장 큽니다. 열반상 아래 일반 대중을 위한 석조 부도들이 늘어선 모습이 부처님의 보호를 받는 듯 평온해 보입니다.

불교에서 화장을 하는 것은 시신을 영혼이 잠시 입었던 옷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수십만 번 이상 윤회를 한다니 수없이 갈아입은 옷 중의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스님이 입적하면 모두 부도를 세우는 것으로 잘못 아시는 분들이 있으나 고려 때까지는 국사를 지낸 큰 스님의 부도만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인을 모시는 예절이 대단하여 화장을 지낸 유골도 제대로 모셔야 마음이 놓입니다. 이래서 장묘 문화 개선이 어려운가 봅니다.

김영택

 

[김영택의 펜화기행] 0.03mm 펜촉에 담은 ‘대탑’

[중앙일보] 입력 2008.10.09 16:07 / 수정 2008.10.10 12:26

진천 보탑사 3층 목탑

종이에 먹펜, 43x58cm, 2008.
세계에서 제일 가는 펜촉의 굵기가 0.1mm인데 사포에 갈면 약 0.03mm가 됩니다. 숙달이 되면 이 펜촉으로 1mm 안에 5개의 선을 그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세밀한 기법을 한껏 발휘하여 진천 보탑사(寶塔寺) 3층목탑을 그렸습니다. 완성하는 데 한 달이 걸렸습니다. 지은 지 12년밖에 안 되었지만 꿈에서라도 보고싶던 황룡사 9층대탑을 보는 듯 감격하였기 때문입니다. 펜으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 복원한 실물을 꼼꼼하게 그린 것이지요.

현존하는 목탑과 중층 건물은 모두 통층 내부로 단층인 셈이지만 보탑사 목탑은 황룡사 대탑처럼 층계를 설치하여 각층에 법당을 만들었으며, 바깥에 난간마루를 설치하여 탑돌이를 할 수 있습니다. 높이가 일반 건물 14층 높이인 42.71m며, 1500명이 들어갈 수 있답니다. 1층과 2층 사이, 2층과 3층 사이에 암층이 있어 실제는 5층인 셈입니다.

지붕 귀퉁이 추녀마루 끝에 하늘로 치솟은 ‘곱새 기와’와 그 밑에 ‘도깨비 기와’로 잘못 알려진 ‘용면 기와’가 떡 버티고 있습니다. 박물관에서나 보던 유물이 실제 건물에 살아있으니 반갑기 짝이 없습니다. 사래 토수도 청동을 부어 만들어 새롭습니다. 처마 공포는 삼국시대 형식으로 기둥 위에만 설치된 주심포이며, 소의 혀처럼 생긴 ‘쇠서’가 없어 소박합니다.

보탑사 목탑을 지은 김영일 행수와 조희환 도편수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큰 법당 서너 채와 맞먹는 불사를 한 지광 큰스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옛 건물만 문화재가 아닙니다. 보탑사 3층목탑이 문화재가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제 작품을 보고 펜화를 공부하시는 분들은 보탑사로 가셔서 똑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어 제 펜화와 비교해 보세요. 카메라 렌즈와 사람의 눈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습니다. 사진 그대로 그리면 왜 감흥이 줄어드는지 생각해 보세요.

김영택

 

[김영택의 펜화기행] 수원 화성 화서문과 서북 공심돈

[중앙일보] 입력 2008.10.30 15:46 / 수정 2008.10.31 03:54

벽돌로 만든 한국의 선

1890년대의 화서문과 서북 공심돈, 종이에 먹펜, 43X58cm, 2008.
펜화로 옮기기 힘든 대상 중 하나가 벽돌 건물입니다. 수만·수십만 장의 벽돌을 보면 펜을 들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옵니다. 자랑스러운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에는 온통 벽돌 건물 천지입니다. 벽돌이 돌로 쌓은 성벽보다 강한 점을 이용한 것이랍니다. 즉위 18년(1794)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읍치로 옮기고 화성 공사를 시작합니다. 설계를 맡은 정약용은 중국과 서양 성의 좋은 점을 취해 화성을 당대 최고의 성으로 만듭니다.

성문 앞에 옹성을 둘러쌓아 문을 부수려는 적을 등 뒤에서 공격하도록 했고, 성벽을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무찌를 수 있도록 치성과 포루, 각루와 돈대를 튀어 나오게 지었습니다. 노대와 공심돈을 높이 세워 감시 기능과 공격 기능을 강화했습니다. 공심돈은 조선 최초의 건물로 정조의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답니다. 3층 건물 각 층에 총안을 두었고, 꼭대기에서는 적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습니다.

화성을 보면 ‘전투를 위한 성곽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위엄이 가득한 중국과 일본의 성곽과 다른 ‘선의 아름다움’으로 한국인의 미적 특성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곳 저곳 모두 멋진 그림이 됩니다만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옛 사진을 바탕으로 그렸기 때문에 복원된 현재 건물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화서문 지붕 추녀마루 용두의 위치가 다르고, 잡상이 생겼습니다. 화서문 뒤편에 잘생긴 소나무도 살렸습니다. 서북 공심돈의 취두가 달라졌고, 지붕의 넓이가 늘어났습니다. 누각의 널판 문은 옛 사진에 없는 것을 현 건물을 참고했습니다. 귀중한 사진을 제공해주신 수원 윤의영님과 김건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김영택의 펜화기행] 도심에서 신선이 되다

[중앙일보] 입력 2008.11.13 16:20 / 수정 2008.11.14 04:14

 펜화로 캘린더를 만드는 소임을 맡아 통도사에서 1년 반을 살았습니다. 절에서는 VIP룸으로 통하는 법사실에 문갑과 반다지를 들여놓고, 벽에 그림과 빨간 열매가 달린 망개 덩굴을 걸었더니 ‘아방궁이 따로 없다’는 스님이 있더군요. 한옥에서 풍기는 소나무와 흙 내음 속에서 차를 우려내고 있노라니 ‘신선이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웰빙 생활에는 불편함이 따릅니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옷을 갖춰 입어야 하고, 겨울에는 흙벽과 문풍지로 새어 드는 추위 등 이런저런 불편함 때문에 마음은 한옥에 있어도 몸은 아파트로 향하지요.



요즈음 이런 불편함을 개선한 한옥에서 멋지게 사는 분이 늘고 있습니다. 화장실과 옷장을 방에 붙여 짓고, 단열재를 쓴 벽에 이중창으로 난방 문제를 해결합니다. 입식 주방으로 편리한 부엌을 만듭니다. 이런 한옥 중에 서울 계동 낙고재(樂古齋)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진단학회가 사용하던 130년 된 한옥을 고쳐 짓고, 마당 작은 연못에 기둥을 세워 정자방을 들였는데 멋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잘생긴 소나무와 어울려 한 폭 그림이 되었습니다.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벽에 기와를 박아 넣어 운치를 살렸습니다.

한옥의 정취를 맛보려는 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데 만만치 않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끊이지 않습니다. 서화 골동이 비치된 격조 있는 방에서 담백한 한식을 즐기는 분들은 주로 외국인입니다. 이들은 한옥의 자연 친화적 환경과 마음을 편하게 하는 분위기에 반해 다시 찾는다고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음악만 한류가 아닙니다. 한옥·한식·한복·국악과 춤 등 우리의 전통도 품격 있는 한류가 될 수 있습니다.

김영택

 

[김영택의 펜화기행] 지금은 사라진 동십자각의 짝

[중앙일보] 입력 2008.11.27 15:57 / 수정 2008.11.28 00:42

경복궁 우측 모서리 길 가운데 동십자각이 외롭게 서 있습니다. 경복궁 동남쪽 담장 귀퉁이에 서 있던 망루인데 왜 길 가운데에 나앉았으며, 서쪽 귀퉁이에 있던 서십자각(西十字閣)은 어디로 갔을까요?

1910년 대한제국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1년 뒤 경복궁을 조선총독부 소유로 돌리고 많은 전각을 헐어냅니다. 무려 4000여 칸의 전각을 헐어내 남은 건물이 10% 정도였습니다.

1923년 10월 경복궁에서 열리는 조선부업품공진회를 위한 도로 확장으로 담장 모서리를 잘라 동십자각이 홀로 서게 됩니다.

전차 선로가 광화문 앞에서 영추문 쪽으로 놓이면서 서십자각은 담장과 함께 사라집니다. 전차가 삼청동 쪽으로 들어갔다면 동십자각도 똑같은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현존하는 동십자각 옛 사진은 많은데 없어진 서십자각 사진이 없어 아쉬운 차에 우연히 귀한 사진을 얻어 펜화로 되살려 보았습니다. 서십자각은 궁궐의 권위를 살리려고 화려하고 견고하게 지었습니다.

장대석을 쌓은 축대 윗부분과 여장 사이에 당초문을 둘렀으며, 배수구인 석루조는 돌짐승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여장의 총안을 열십(十)자 모양으로 만들어 고급 문양이 되었습니다. 기둥과 창방 아래에 화려한 문양의 낙양각을 붙여 치장했습니다. 지붕 꼭대기에 올린 절병통은 연꽃 잎과 당초문 조각을 넣은 보기 드문 걸작입니다.

사모지붕의 양성마루에 용두와 잡상 7개를 배치했습니다. 현재 동십자각의 잡상이 5개로 줄어든 시기와 이유가 궁금합니다.

광화문을 복원하는 김에 전면 궁장을 되살리고 서십자각을 지으면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합니다.

김영택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호류지 금당과 5층탑

[중앙일보] 입력 2009.04.16 01:04 / 수정 2009.04.16 02:12

꿋꿋하게 버텨온 1400년 왠지 낯익은 처마 곡선 …

세계건축문화재를 펜화에 담는 첫 작업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일본 나라의 호류지(法隆寺)를 골랐습니다. 호류지 금당은 아스카 시대인 서기 607년 건립되었으니 1400살이 넘은 건물입니다.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백제에서 많은 건축가와 장인을 초청해 지은 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호류지 금당은 670년 불에 탄 것을 재건했고, 그 뒤로도 여러 번 보수를 했습니다. 5층탑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입니다.

호류지 금당과 5층탑 호류지 금당과 5층탑 복원도, 종이에 먹펜, 40X57cm, 2009.

한국의 총각무를 일본에 심으면 커다란 단무지 무가 되듯이 백제 장인이 지은 호류지 금당과 5층탑이 오랜 세월에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본 순간 오랜 친구를 보는 듯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백제 건축의 원형이 살아 있는 듯 보였습니다. 처마 곡선과 비례 등 한국인의 특성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오히려 한국의 건물들이 더 많이 변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만 두 건물 모두 1층 모양이 무척 어색해 보였는데, 안내를 하던 쇼카쿠 후류야 집사장 스님이 “나라 시대에 덧붙여 지어서 그렇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한국 건축물의 복원도를 그리던 것처럼 고쳐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유물 전시관에서 5층탑 원형 모형을 만났습니다. 눈치를 챘는지 스님이 특별 촬영 허가를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이 원형을 바탕으로 펜화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복원도가 일본에서 그린 저의 첫 작품이 되었습니다. 호류지 금당과 5층탑이 어색하고 답답한 겉옷을 벗고 늘씬한 원래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펜화를 시작한 뒤 10여 년 동안은 현장에서 그렸습니다만 이제는 사진을 이용해 연구실에서 작업을 합니다. 호류지 금당과 5층탑은 회랑에 둘러싸여 있어 촬영 거리가 부족해 광각렌즈로 촬영했기 때문에 사진에는 건물 모양에 심한 왜곡이 생깁니다. 가까운 건물은 너무 커지고, 멀리 있는 건물은 아주 작아지며, 건물이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집니다. 펜화에는 이런 왜곡을 바로잡아 그렸습니다.

호류지에서 꼭 보아야 할 것에 고구려 담징 스님이 그린 금당 벽화가 있습니다. 중국 윈강석굴, 경주 석굴암과 더불어 동양 3대 걸작으로 손꼽습니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앙드레 말로가 극찬한 구다라(百濟) 관음상도 꼭 보셔야 합니다. 백제의 장인이 일본에 건너가 만들었다고 추정합니다. 백제 위덕왕이 보낸 구세관음(救世觀音)상도 일본 국보입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우지 뵤도인 봉황당

[중앙일보] 입력 2009.04.30 01:01 / 수정 2009.04.30 01:07

위엄 있는 좌우대칭 절집, 봉황이 나래 편 듯

교토 동남쪽 우지(宇治)시의 뵤도인(平等院) 봉황당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국의 절은 수행공간이어서 너무 아름답게 지으면 흉이 됩니다만 봉황당은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957년 전인 서기 1053년 당시 관백 후지와라 요리미치가 부친의 별장을 절로 개축하면서 지은 법당입니다.

뵤도인 봉황당, 종이에 먹펜, 41×58㎝, 2009.

본당 좌우에 회랑을 붙여 지은 모양이 봉황이 나래를 편 모습을 닮았다고 봉황당이라고 합니다. 회랑이 ‘ㄱ’자 모양으로 꺾어지는 부분에 사모지붕의 2층을 올려서 멋진 좌우대칭 건물이 되었습니다. 좌우대칭 건물은 아름다움과 함께 권위를 상징합니다. 청와대와 대법원 건물을 비교해 보세요. 2층은 용도가 없는 멋내기 건물입니다.

봉황당 자리에 일본인의 장기인 조경 기술을 한껏 발휘했습니다. 연못가에 자갈을 깔고 자연석을 박아 놓아 넓은 바다 한가운데 섬에 지은 건물처럼 보입니다. 1991년부터 12년간 발굴 조사한 결과에 따라 헤이안 시대의 사주(砂洲)정원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물에 비친 봉황당의 아름다움을 펜화로 표현하려고 무척 공을 들였습니다. 좌측의 다리는 헤이안 시대의 모습처럼 복원해 그린 것이며, 근래에 지은 건물들은 그림에서 삭제했습니다.

법당 용마루 좌우 끝에 청동으로 만든 화려한 봉황이 서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해 기억을 더듬어 보니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용봉대향로 뚜껑의 봉황과 형제처럼 닮았습니다. 법당에 모신 아미타부처와 광배, 천장 닫집 등 모든 표면에 금박을 입혀 놓았던 흔적이 보입니다. 온전한 상태라면 얼마나 휘황찬란할까요.

광배에 붙인 12구의 비천상과 벽에 걸린 운중공양보살상(雲中供養菩薩像)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조각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52구의 공양보살 중 일부가 경내 박물관에 전시돼 있어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구름을 올라탄 보살상의 아름다움에 반해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김영택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교토 기요미즈데라

[중앙일보] 입력 2009.05.21 00:58 / 수정 2009.05.21 01:26

139개 나무 기둥 위에 ‘부처의 마음’을 얹다

교토는 오랫동안 일본의 수도였기 때문에 건축문화재가 많습니다. 그중에서 교토 시민이 즐겨 찾는 곳이 기요미즈데라(淸水寺)입니다. 서기 778년 창건되었으나 여러 번의 화재를 겪으며 1633년 재건된 절로서 유네스코 등록 문화재입니다.



기요미즈데라에서 가장 볼 만한 건물이 오토와산 절벽에 139개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은 본당과 부타이(舞台)입니다. 높이 15m짜리 기둥을 5층 구조로 짜 맞추고 본당의 절반과 목조 마루를 지은 것입니다. 일본인의 건축 기술과 우수한 목재인 노송나무(편백)가 있어 가능하였지요. 가로로 쓰인 보에 작은 지붕을 올려서 썩지 않도록 한 장치는 눈여겨볼 점입니다. 부타이에서 바라보는 교토의 야경은 교토 시민의 자랑입니다. 봄철 벚꽃이 필 때에는 부타이에 사람이 넘쳐납니다. 부타이의 목조 기둥들이 숲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기에 나뭇가지들을 삭제하고 그려 제멋을 살렸습니다.

본당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히와다부키)을 여러 겹 붙인 일본 특유의 지붕입니다. 볏짚을 올리는 초가는 매년 갈아야 하지만 히와다부키는 수명이 길고 가벼워서 일본의 주요 건물에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무겁고 투박한 기와와 달리 가공하기도 쉬워서 지붕의 선을 다양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본당 옆 절벽에서 떨어지는 세 줄기 물을 받아먹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이 폭포 때문에 청수사란 이름이 생겼다는데 장수, 사랑, 학문의 소원을 이루어 준답니다.

일본에서는 절(寺)을 ‘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법륭사를 ‘호류지’라고, 약사사를 ‘야쿠시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요미즈데라 스님 앞에서 ‘기요미즈지’라고 했다가는 눈총을 받게 됩니다. ‘데라’라는 이름에 남다른 자부심이 있나 봅니다. ‘데라’라는 이름이 우리말 ‘절’이 변한 것을 스님은 알고 계실까요? 일본인들이 ‘ㄹ’ 받침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기 때문에 ‘데라’가 되었답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베이징 천단 기년전

[중앙일보] 입력 2009.06.18 00:40 / 수정 2009.06.18 00:50

19층 빌딩 높이 풍년 빌던 제단

중국 베이징(北京)을 상징하는 건물로 고궁(자금성)의 천안문과 천단의 기년전을 손꼽습니다. 많은 분이 고궁의 크기에 놀랍니다. 그러나 천단은 고궁의 세 배로 여의도 넓이와 맞먹습니다. 베이징에는 고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일단(日壇:르탄), 서쪽에 월단(月壇:웨탄), 남쪽에 천단(天壇:톈탄), 북쪽에 지단(地壇:디탄)을 두어 해와 달,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종이에 먹펜, 41cmX58cm, 2009

명나라 영락제 18년(1420)에 세우고, 청나라 건륭제 14년(1749)에 확장 개축한 천단에는 황제가 하늘에 제를 지내는 원구단(圓丘壇-위안치우탄), 원형 건물에 역대 황제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皇穹宇-황충위), 풍년을 위한 제례를 지내던 기년전(祈年殿-치넨뎬)이 남으로부터 북쪽으로 일직선상에 있습니다.

원구단은 애엽청석으로 바닥을 깔고 한백옥으로 난간을 두른 3단의 넓은 원형 제단으로 건물이 없어 단조롭습니다만 기년전은 더 큰 월대 위에 세운 3층 원형 목조건물로 높이 58m, 19층짜리 현대식 건물과 맞먹는 높이로 보는 이들을 압도합니다. 하늘을 상징하는 짙푸른 청색 기와에 용과 봉황으로 구성된 금색 단청이 잘 어울립니다. 바닥 중심부의 용봉석이 사람의 눈길을 끕니다. 직경 88.5cm 천연 대리석에 용과 봉황의 형태가 완연합니다.

그림을 그리다 문득 천단의 기년전과 황궁우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인데 왜 서울에 있는 원구단 황궁우는 8각이며, 우리나라에 원형 건물이 없는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원형 건물에는 중심 부분의 작은 기와부터 테두리의 큰 기와까지 크기가 다른 수십 장의 기와를 따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와를 올릴 때에도 암키와·수키와 모두 크기별로 맞추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지요. 조선의 목수들은 미닫이문보다 여닫이문을 선호했습니다. 미닫이문은 잘 건조한 결이 고른 목재를 써야 하는데 조선 목수들이 이런 까다로움을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조선 와장들이 원형 지붕을 기피한 것이 아닐까요. 8각 건물에는 보통 기와를 쓸 수 있거든요.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효고현 히메지성 천수각

[중앙일보] 입력 2009.08.20 00:32 / 수정 2009.08.20 00:48

강한 돌 부드러운 나무 둘이 만나 예술이 되다




일본은 영주들끼리 수많은 전쟁을 하면서 성을 쌓는 기술이 발전합니다. 특히 천수각(天守閣: 덴슈카쿠)은 한국과 중국에도 없는 독창적인 양식의 건물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12개입니다. 그중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히메지(姬路)성(城) 천수각은 빼어난 아름다움에 일본 최고의 성으로 꼽힙니다. 히메지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인 이케다 데루마사가 1609년 크게 개축한 성입니다. 히메야마에 14.85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세운 높이 31.5m짜리 7층 천수각은 당시 일본의 목조건축 기술이 최고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히메지성은 교묘한 나와바리(繩張: 평면계획)로 적군이 천수각에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진입로의 폭이 넓었다 좁았다 하며 구불구불하여 진격이 쉽지 않고, 무작정 내달리다 보면 반대쪽에서 들어오는 아군과 마주치게 됩니다. 천수각 외부의 모든 벽은 누리고메(塗籠: 회를 두텁게 바르는 공법) 처리를 하여 화공을 방지했습니다. 출입문은 두터운 목재에 철판을 씌워 철옹성이 따로 없습니다. 그 밖에도 곳곳에 기기묘묘한 방어시설이 있어 해설사와 함께해야 참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히메지성은 한 번도 전투를 치른 적이 없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막부 말기 천수각을 포위한 신정부군에 상인 기타가제 쇼조가 15만 량을 헌상하여 전투를 막았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 천수각이 백색 건물이라 미군의 폭격을 받기 쉽다고 생각해 검은 망을 씌웠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 말기인 1945년 7월 3일 소이탄이 천수각에 떨어졌습니다만 주민들의 염원 덕분인지 불발됐습니다. 다음 날 아침 무사한 천수각을 본 히메지시 주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1993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나라 야쿠시지(藥師寺) 동탑

[중앙일보] 입력 2009.07.30 00:46 / 수정 2009.07.30 01:37

6층 같은 3층탑에 켜켜이 쌓인 1200년 역사



일본에 불교가 자리 잡은 것은 요메이천황이 백제계인 소가 씨족과 손잡고 불교에 귀의하면서부터입니다. 서기 593년 섭정을 맡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는 백제에서 많은 장인을 불러 여러 절을 짓습니다. 이때를 ‘아스카(飛鳥)시대’라 하며, 1탑 1금당 형식이었습니다.

건메이(元明)천황이 710년 나라지역으로 천도를 한 후 ‘나라(奈良)시대’가 시작됩니다. 쌍탑 1금당이 주류로 야쿠시지(藥師寺)가 그 대표작입니다. 1528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서탑은 1976년 재건되었고, 금당도 화재 뒤 최근에 복원된 건물입니다. 사방불을 모신 동탑만이 1200년 고색창연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3층 목탑입니다만 각층마다 모코시(裳階:차양칸)가 있어 6층으로 보입니다. 탑의 처마 끝이 나오고 들어감이 있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입니다. 펜화에는 여러 번의 보수공사로 줄어든 높이 50cm를 되살렸습니다.

야쿠시지는 법상종 총본산으로 종정(管長)을 뽑는 의식이 엄격하기로 유명합니다. 시험이 있는 날, 큰스님 200여 명이 긴 무쇠 주장자를 끌고 절로 모일 때 나는 쇳소리를 나라 사람들은 ‘지축을 흔드는 소리’라고 합니다. 스님들은 범패(梵唄-높낮이가 없는 불교 성악)와 같은 음률로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추운 겨울, 백색 법복 한 벌만 걸친 후보는 7시간 동안 법상에 미동도 없이 앉아서 모든 질문에 범패 소리로 답을 합니다. 이때 답이 막히면 법상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전 종정인 다카다 고인(高田好胤) 스님과 에이인 야수다(安田暎胤) 현 종정 겸 주지(管主) 스님 모두 일본의 큰스님으로 존경받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야쿠시지는 큰 행사 때 한국식 된장국을 내는 등 여러 가지로 우리나라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천황 스스로 ‘한국인의 피가 섞였다’고 밝힌 것처럼 황실의 원사(願寺)였기 때문은 아닐까요.

김영택 화백(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창덕궁 주합루와 어수문

[중앙일보] 입력 2009.09.10 00:39 / 수정 2009.09.10 00:50

정조가 큰 공부를 했던 이 작고 섬세한 도서관



세계건축문화재를 펜화로 그려 연재하면서 한국 건축문화재 중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을 꼽아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창덕궁 후원 주합루(宙合樓) 일대입니다. 부용지 북쪽 양지바른 언덕에 장대석으로 석단을 쌓고, 정면 5칸, 측면 4칸 2층 누각을 지었습니다. 아래 위 모두 사방에 툇간을 내고 계자각 난간을 두른, 잘생긴 건물입니다. 정조 즉위년(1776)에 짓고 직접 이름까지 써서 달았습니다.

정조는 1층 규장각에 책을 보관하고, 2층 주합루를 열람실로 만들어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는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공부가 열심이었다는 정조는 신하들과 부용지에서 고기잡이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열성의 결과로 정약용·채제공·박제가·유득공 등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됐습니다.

주합루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은 한국의 문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공예품처럼 정교하며, 문인방 위 투각(透刻)과 창방 아래의 낙양 등은 최고급 장치입니다. 기와를 만든 김영림씨에 따르면 건물이 워낙 작고 섬세하다 보니 기와를 만드는 틀이 없어서 모두 손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합루와 어수문, 석계와 주변 풍광의 어울림은 한국 건축 백미 중의 백미입니다.

근래 어수문 옆에 취병(翠屛)이라는 담장을 복원했습니다. 취병은 나무로 짠 틀에 식물을 키운 담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없애 버려 1820년대에 그린 동궐도에만 남아 있었습니다. 어수문 옆 작은 문들은 일본식으로 만든 것이라 동궐도대로 고쳐 그렸습니다. 석계도 동궐도 그림에 맞추어 무성하게 자란 나무를 제거해 옛 자취를 되살렸습니다. 주합루 동북쪽의 제월광풍관과 서쪽의 서향각도 제대로 보이게 그렸습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나라 도다이지 대불전

[중앙일보] 입력 2009.10.08 00:31 / 수정 2009.10.08 05:25

16층 높이 목조건물 건축가는 신라 사람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은 일본 나라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전(大佛殿)입니다. 가로 57m, 세로 50.48m에 높이 48.74m로 현대 건물 16층 높이와 맞먹습니다. 쇼무 천황 때인 745년에 처음 지었을 때는 1.5배나 더 컸습니다. 100m 높이의 7층 쌍탑도 있었답니다. 건물만 큰 것이 아니라 안에 모신 비로자나 부처상도 대단히 큽니다. 앉은키 14.98m, 얼굴 길이 5.33m, 귀 길이 2.54m로 모든 것이 큼직큼직합니다. 일본인들의 자랑이 대단합니다. 일본 국보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입니다.

쇼무 천황은 왜 이렇게 큰 부처와 법당을 지었을까요. 서기 737년 일본 전역에 천연두가 무섭게 퍼졌습니다. 흉흉한 민심 속에 규슈 지역에서 반란까지 일어났습니다. 천황은 민중의 신망이 높은 교키(行基) 스님에게 큰 절을 지어 불심으로 국가를 안정시켜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스님은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보시를 받아 도다이지를 세우고, 세계 최대의 법당과 불상을 조성해 천황의 권위를 세워줬습니다. 또 700여 신을 모시던 일본인들에게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보여줬습니다.

아셔야 할 것은 도다이지를 지은 건축가가 신라 사람 이나베노모모요(猪名部百世)이며, 불상을 만든 장인은 백제 사람 구니나카노키미마로(國中公麻呂)라는 것입니다. 대불에 입힐 황금을 모은 이도 백제 왕 경복(敬福)이라는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의 부호와 권력자 중 많은 수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키 스님도 백제인으로 일본 최고의 승직인 대승정(大僧正)에 올랐으며, 천황 스스로 스님의 제자로 출가를 했습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펜화 전시회가 서울 인사동 통인화랑(02-733-4867)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2007~2008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펜화 작품을 선보입니다.

 

 

남한산성 한남루...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

 

남한산성 한남루 안내문...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