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교토 은각사(銀閣寺)
[중앙일보] 입력 2009.10.29 00:26 / 수정 2009.10.29 04:49
다도와 철학을 낳은 어머니 배 속 같은 절
교토를 찾는 외국 관광객의 대다수가 금각사(金閣寺 : 긴카쿠지)를 필수 코스로 삼는 대신 은각사(銀閣寺: 긴카쿠지)는 빼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금박을 입힌 화려한 금각사에 비해 은각사는 은박도 없고 규모도 작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인 중에는 은각사를 더 좋아하는 이가 많답니다. 왜 그럴까요.
은각사라는 별칭이 더 유명한 자소사(慈昭寺: 지쇼지)는 무로마치 막부 제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지은 산장을 그가 죽은 뒤 절로 개조한 것입니다. 이 절 도큐도(東求堂) 안에 도닌자이(同仁齋)라는 차실이 있습니다. 일본 최초의 차실로 다다미 4장 반 크기의 좁은 방입니다. 그 뒤 도닌자이가 일본 차실의 표준이 됩니다. 인간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다고 하듯이 좁은 차실이 같은 역할을 하나 봅니다. 은각사는 작은 차실로 일본인의 소중한 정신적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일본 국보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입니다.
은각사에서 눈여겨볼 것이 관음전 앞에 모래로 만든 지센카이유식 정원입니다. 모래를 파도 모양으로 너울지게 한 은사탄(銀沙灘)과 후지산을 상징한다는 향월대(向月臺)는 한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조형물입니다. 일본인들이 무척 자랑하는 것이니 그 의미를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각사 앞 ‘철학의 길’이라는 산책로를 걸어 보세요. 니시다 기타로라는 철학자가 산책을 했다는 길입니다. 개울을 따라 30분쯤 걸을 수 있어 데이트 코스로 일품입니다. 산책로 주변에 카페가 많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문을 닫은 곳이 제법 있었습니다.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았더니 경제가 어려워 그렇게 되었는데 회복될 가망이 없어 걱정이랍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교토 헤이안신궁 태평각
[중앙일보] 입력 2009.11.26 01:22 / 수정 2009.11.26 02:20
나무로 만든 정자형 다리 나래 편 봉황 솟아오를 듯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은 “간무(桓武·781~806)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것이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은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다”며 한국과의 혈연을 인정했습니다. 사실은 간무 천황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 고닌(光仁) 천황도 백제 성왕의 손자였습니다.
간무 천황은 혼란했던 일본을 강력한 통치력으로 안정시키고, 훌륭한 치적을 남겼습니다. 도읍을 헤이안(平安·교토)으로 옮기고, 신사를 지어 백제 성왕·비류왕·초고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헤이안 천도 1100주년이던 1895년 일본은 간무 천황을 일본 문화의 국조신으로 모시기 위해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을 세웠습니다. 일본에서 제일 큰 도리이(鳥居:신사나 신성한 곳의 입구에 세우는 일종의 문)를 세우고, 외배전 좌우 행랑 끝에 아름다운 다층 누각을 붙였습니다. 신궁을 둘러싼 정원은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남신원에서 시작해 서신원·중신원을 거쳐 동신원에서 끝나는 정원에는 일본 정원의 진수가 몽땅 담겨 있습니다. 남신원은 봄 벚꽃으로 알아주고, 서신원은 꽃창포를, 중신원은 가을 단풍과 멋진 징검다리의 어울림을, 동신원에는 태평각의 설경을 절경으로 손꼽습니다.
동신원 큰 연못을 가로지르는 태평각은 헤이안신궁의 백미입니다. 동심원 큰 연못에 장주석을 세우고, 그 위에 지은 좌우 긴 익랑이 딸린 정자형 다리입니다. 중심 건물 지붕 위에는 봉황이 나래를 펴고 막 날아오르려 합니다. 목조 건축의 천국이라는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명작입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종묘 정전
[중앙일보] 입력 2009.12.17 01:59 / 수정 2009.12.17 13:44
조선의 기품 드러낸 101m 영혼의 공간
조선의 임금이 몽진(蒙塵: 피란)을 갈 때 금은보화나 식량보다 우선하여 챙기는 것이 선대왕들의 신주(神主)입니다. 왕권의 근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할 때도 신주를 모시는 종묘(宗廟)를 궁궐보다 먼저 지었습니다.
태조 4년(1395)에 지은 종묘는 7칸의 태실에 4대 조상을 모셨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셔야 할 신주가 늘자 영녕전(永寧殿)을 추가로 짓고, 정전을 여러 번 증축했습니다. 그 결과 정전은 태실 19칸에 협실 각 3칸, 동·서월랑 각 5칸씩이 딸린 길고 아름다운 건물이 되었습니다. 길이가 101m에 달하여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이라고 하였으나 일본 교토의 ‘33칸당’이 120m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세계 2위로 물러났습니다.
임진왜란에 불타버린 뒤 선조 41년(1608) 중건을 시작하여 증축을 거듭한 종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정전에 49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영녕전에 34분이 있어 총 83위의 신주가 있습니다.
종묘는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있어 가깝고 친근한 휴식 공간이 되었습니다. 정문인 창엽문을 들어서면 길 가운데 박석을 깐 길이 있습니다. 가운데 높은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향로(神香路)랍니다. 그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이고 왼쪽 길은 왕세자의 세자로입니다. 이 박석길은 정전에 들어서면서 진한 회색의 전돌로 바뀝니다.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지내는 종묘제례에는 제관들이 조선시대 복장을 그대로 갖추고 진행하는 모습이 무척 장엄하여 볼 만합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이며, 제례 때 연주하는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입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중국 베이징 자금성 천추정
[중앙일보] 입력 2010.01.14 01:09 / 수정 2010.01.14 08:56
황제의 정원에 핀 둥그런 ‘기와 꽃’
자금성 천추정, 종이에 먹펜, 41X58㎝, 2010 |
자금성의 많은 건물 중 볼수록 예뻐 보이는 것이 천추정(天秋亭)입니다. 모란꽃이 만발한 후원에 백옥으로 기단과 난간을 만들고, 십자형 건물에 둥근 지붕을 올렸습니다. 짙은 적색 칠에 청회색 단청을 하고 황색 기와를 얹었는데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습니다. 문틀에 금박을 올린 안목도 뛰어납니다. 중국 건축물에서 자주 보이는 둔탁함이나 번잡함이 없습니다.
명대에 세워 청대까지 사용하던 정자로, 내부 구조와 천장도 볼 만합니다. 추녀마루의 잡상(雜像)이 무척 사실적입니다. 현장법사는 상투를 틀고 관을 쓴 모습에 색칠까지 되어 있습니다. 중국에 많은 원형 건물이 우리나라에는 없는 이유가 궁금하지요. 원형 건물은 황제국에서만 쓰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대한제국을 선언한 뒤에 지은 원구단 정도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인은 말할 때 생략을 잘한답니다. 주어를 생략하기도 하고, 머리카락 대신 머리라고 하기도 합니다. 언어는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건축에서도 생략을 잘합니다. 한국인이 원형 건물 대신 팔각 건물을 짓는 이유는 복잡한 재료와 공정을 생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형 건물에는 기와만 해도 수십 가지가 필요하지만 팔각 건물에는 보통 기와 몇 종류만 있으면 됩니다. 문인방 등에 쓰이는 목재를 곡선으로 가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잡상이 한국에 와서 두루뭉술해진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영택 화백 penh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나고야 이누야마성
[중앙일보] 입력 2010.08.12 00:28 / 수정 2010.08.12 00:28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나고야의 자존심
종이에 먹펜, 42X58cm, 2010 |
이누야마성은 1537년 오다 노부나가의 숙부 오다 노부야스가 기소가와 강변 절벽 위에 지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천수각은 작지만 일본 국보입니다. 천수각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일품입니다. 둘러보신 후에는 강 건너편에 가서 절벽 위의 성을 바라보세요.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성 앞 유라쿠엔(有樂苑)에 국보로 지정된 다실 조안(如庵)이 있어 일본 전통다실이 어떤 모습인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목 디스크 증세로 쉬는 동안 염려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중앙일보] 입력 2010.08.26 00:12 / 수정 2010.08.26 00:27
하늘에 바치는 웅장한 꽃다발
종이에 먹펜, 42X58㎝, 2010 |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왕조의 왕인 수리아바르만 2세가 서기 1113년에서 1150년 사이에 브라만교 사원과 왕궁을 겸해 세웠답니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본디 모습이 제대로 남아 있는 조각이 드뭅니다.
검토 끝에 복원도를 그리기로 하였습니다. 중앙탑 하나 그리는 데 열흘이 넘게 걸렸습니다. 취재 때 찍은 3000여 장의 사진과 10권의 책, 인터넷 정보를 다 참조했지만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에는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문틀 위 상인방(창이나 건물 입구 등의 위에 가로로 댄 구조물)과 박공(건물의 입구 위쪽과 지붕 사이에 위치한, 삼각형의 마감 장식을 한 건물 벽)의 세밀한 조각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그림 좌측 2개의 탑은 복원해 그린 것입니다. 검게 변한 돌의 색을 원래대로 그렸기 때문에 다소 어색해 보일 것입니다. 펜화를 시작한 이래 가장 세밀한 작품입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캄보디아 타프럼
[중앙일보] 입력 2010.09.09 00:25 / 수정 2010.09.09 00:26
사람의 발길이 끊긴 사원에 나무의 뿌리가 돌 틈으로 파고들어 자라면서 틈새가 크게 벌어집니다. 이 뿌리가 썩어 공간이 되면 건물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타프럼’입니다. 크메르 왕조의 가장 걸출한 왕인 쟈야바르만 7세(1125~1218)가 1186년 어머니를 위해 지은 불교 사원입니다. 승려와 종사자 5500여 명이 살았던 크고 화려한 사원이었답니다.
종이에 먹펜, 41X58cm, 2010 |
중앙일보 연재가 10년째입니다. 2001년 2월 16일부터 시작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2~3주 간격으로 120회가 연재되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펜화도 많이 변했습니다. 꾸준히 보살펴 준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 드립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담양 소쇄원
[중앙일보] 입력 2010.10.07 00:16 / 수정 2010.10.07 00:44
빛도 바람도 쉬어 간다 은밀한 별천지
종이에 먹펜, 41 X 58㎝, 2010 |
둘째는 소쇄원의 중심 정자인 광풍각(光風閣)의 높이입니다. 높게 짓는 여느 정자와 달리 무척 낮게 지었습니다. 폭포 소리가 잘 들리는 높이를 찾느라 여러 번 공사를 했답니다. 베갯머리에서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무나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광풍각 마루 가운데에는 1칸짜리 작은 온돌방을 들였습니다. 이 방 3면의 문이 들어열개문입니다. 이것이 셋째 주요 포인트입니다. 문을 접고 들어올려 걸쇠에 걸면 온돌방으로 계곡의 풍치가 몰려듭니다. 마루도 넓게 트인 통마루가 됩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멋쟁이 문입니다. 광풍각에 10분쯤 앉아 있으면 전문가가 아니라도 한국 특유의 별서정원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경주 불국사 대석단과 자하문
[중앙일보] 입력 2010.10.28 00:14 / 수정 2010.10.28 00:17
불국토를 향한 신라의 마음
울긋불긋한 단풍과 어울린 불국사(佛國寺) 전면 사진을 보면 ‘불국토가 있다면 이렇게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들의 구도는 모두 왼쪽에서 찍은 것입니다. 오른쪽에서는 큰 소나무들이 시야를 가려 사진 찍기가 어렵습니다.
불국사 전면 축대를 대석단(大石壇)이라 합니다. 대석단 왼쪽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오르는 작은 계단이고, 오른쪽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으로 가는 큰 계단입니다. 청운교 위 자하문(紫霞門)이 주 출입구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 펜화로 도전해 보았습니다. 신라 법흥왕 15년(서기 528년) 창건 당시 모습은 알 수 없습니다만 1920년대에 찍은 사진에 큰 소나무가 없으니 원래 모습을 되찾은 셈입니다. 대석단 앞 연못은 자료가 없어 재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단단한 돌을 세밀하게 가공하여 목제 가구 만들 듯 짜 맞춘 공법, 자연석 모양에 맞추어 장대석을 도려내 결합시킨 그랭이 기법 등은 축대를 튼튼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최고급 기술입니다. 돌을 떡 주무르듯 하던 솜씨로 석가탑·다보탑과 대석단을 만든 것입니다.
신라 장인들이 혼을 담아 쌓은 대석단 위에 안양문·범영루·자하문·좌경루가 날아갈 듯한 자태로 서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목조 건축의 백미입니다. 이쯤은 돼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연화교와 칠보교가 국보 제22호, 청운교와 백운교는 국보 제23호입니다.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오사카성 천수각
[중앙일보] 입력 2010.11.18 00:11 / 수정 2010.11.18 00:11
화려하고 웅장한 … 그러나 비극을 품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3년부터 3년간 10만여 명을 동원해 오사카(大阪)에 일본에서 제일 큰 성을 지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지요. 내부 9층, 외부 5층으로 이뤄진 천수각(성의 상징이자 망루 역할을 하는 높은 건물로, 일본 고유의 건축물)을 지어 외부에 검정 칠을 하고 기와와 문양에는 화려한 금박을 입혔습니다. 성 둘레엔 3중 해자와 운하를 만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난공불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에서 부인과 늦둥이 외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도요토미 가문이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도요토미는 조선을 침략해 대륙을 정벌하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다가 1598년 세상을 뜹니다. 기회를 노리던 2인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도요토미의 아들 히데요리는 1615년 오사카성 여름전투에서 3배에 가까운 도쿠가와 대군을 맞아 6개월 동안 버티다 끝내 생모와 함께 최후를 맞습니다.
도쿠가와는 오사카성 전체에 흙을 덮어 도요토미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새로 성을 만듭니다. 천수각은 도요토미 때와 같은 규모인 외부 5층으로 지었습니다. 그 천수각은 1665년 번개를 맞아 불타버렸는데 1931년 복원됐습니다. 1층에서 4층까지는 도쿠가와풍인 백색 회벽으로, 5층은 검정 칠에 호랑이와 두루미 문양을 금박으로 살려 도요토미풍으로 절충했습니다. 구마모토성·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으로 손꼽힙니다.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화순 쌍봉사 삼층목탑
[중앙일보] 입력 2010.12.09 00:11 / 수정 2010.12.09 00:19
우리 목탑의 살아있는 원형
중국을 ‘전탑(벽돌로 만든 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 하고 한국을 ‘석탑의 나라’라 합니다. 각국마다 탑을 만드는 데 주로 쓰인 재료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좋은 목재가 풍부한 일본에는 오래된 목탑이 51개나 된답니다. 그럼 우리나라에는 목탑이 없었을까요?
세계 최대 목조건물인 일본 나라 도다이지(東大寺) 대불전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류지(法隆寺) 5층 탑을 세운 것이 우리 선조입니다. 그 기술로 높이 80m로 세계 최대인 황룡사 9층 대탑 등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전란 등으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법주사 팔상전이 있으나 우리 본래의 탑과는 모양이 다릅니다.
우리 목탑의 원형이 살아있는 탑이 화순 쌍봉사(雙峰寺)에 있습니다. 저는 이 목탑이 좋아서 자주 찾아갑니다. 산골 길을 돌아 밭두렁 위로 삼층탑의 상륜부(원기둥 모양의 장식이 있는 불탑의 꼭대기 부분)와 지붕이 보이면 얼마나 반가운지 가슴이 콩닥거립니다.
대웅전으로 이용하던 목탑은 1984년 화재로 소실돼 보물 제163호 타이틀은 반납했습니다. 86년 복원하면서 삼층 지붕을 사모 지붕으로 만들고 상륜부를 올려 탑다워졌습니다. 그 전에는 팔작지붕이었거든요.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도도 있습니다. 국보 제57호로 쌍봉사를 세운 철감선사 도윤(798~886) 스님의 부도입니다.
펜화를 배우고 싶다는 분들이 있어도 응하기 어렵던 차에 예술의전당에서 펜화 강좌를 마련하자고 해 시간을 내기로 했습니다. 전화 02-580-1607~9로 연락하세요.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순천 선암사 승선교와 강선루
[중앙일보] 입력 2010.12.30 00:15 / 수정 2010.12.30 00:15
속세와 피안을 잇다
스님이 쌓은 돌다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가 순천 선암사에 있습니다. 이름도 참 멋있습니다. ‘신선이 되는 다리’라는 뜻의 승선교(昇仙橋)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 선암사에 가서 도를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지요.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시대 생활이 궁핍해진 절에서는 스님이 목수가 되어 법당을 짓습니다. 직접 기와도 굽고, 단청과 불화도 그립니다. 쇠를 녹여 범종을 만드는 스님에 돌다리를 쌓는 스님도 있었습니다. 선암사 호암 스님이 숙종 39년(1713)에 세운 승선교는 잘 만든 돌다리로 보물 제400호입니다.
높이 7m, 길이 14m, 너비 3.5m로 무척 큽니다. 양쪽 기단을 천연 암반에 두고 훌륭한 솜씨로 쌓았기 때문에 폭우에 계곡물이 범람하여도 끄떡없습니다. 앞뒤의 잡석만 쓸려 내려갈 뿐 장대석으로 쌓은 홍예 틀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벌교 홍교도 기술을 전수받은 선암사 스님들의 작품입니다.
승선교를 제대로 보려면 계곡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사진 찍기 좋은 너럭바위에서 보면 다리 밑으로 보이는 강선루(降仙樓)와 승선교가 한 폭의 그림이 됩니다. 강선루는 작은 개울 위에 지었습니다. 왜 멀쩡한 자리를 두고 위태로운 자리에 지었을까요. 혹시 멋을 아는 스님이 그림과 같은 구도를 위하여 터를 잡은 것은 아닐까요.
승선교와 선암사 사진을 보고 싶은 분은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사진과 해설을 함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양루
[중앙일보] 입력 2011.01.20 00:28 / 수정 2011.01.20 00:50
천년 세월 끄떡없는 고려의 명품 건축
펜화 작업을 하면서 미술 원근법과 인간의 시각이 다른 것을 발견했습니다. 서양화의 원근법은 거리에 따라 크기의 비례가 일정합니다. 사람의 눈은 중심부분만 또렷하게 보고 주변은 흐릿하게 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훑어본 것을 두뇌에서 한 덩어리의 영상으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물은 표준렌즈처럼 보고, 먼 곳은 줌렌즈처럼 당겨 보기 때문에 서양화의 원근법과는 사뭇 다른 영상으로 기억합니다. 중요하거나 아름다운 것은 크게 기억합니다. 이런 인간 시각 특성에 맞추어 펜화를 그립니다. 현장에서 느낀 감흥을 그대로 담기 위해서입니다.
영주 부석사(浮石寺)는 산비탈에 지은 절입니다. 가파른 경사에 법당을 지으려고 쌓은 축대들이 걸작입니다. 큰 돌을 퍼즐 맞추듯 치밀하게 쌓아 1300여 년을 끄떡없이 버텨온 축대를 ‘대석단’이라고 합니다.
누각 건물인 안양루(安養樓) 밑을 오르면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이릅니다.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고려 때 건물로 간결하면서도 품격 높은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무량수전의 특징인 주심포·배흘림기둥·안쏠림과 귀솟음·안허리곡 등의 수법에 대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짧은 지면에 다 써넣을 수도 없거니와 읽고 나면 금방 잊게 마련이니까요. 직접 가서 설명을 들으시면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이 마음속에 각인됩니다.
무량수전과 안양루를 그리면서 ‘인간시각도법’을 적용했습니다. 무량수전 현판을 가리는 나무는 좌측으로 옮겼습니다. 대석단을 잘 보이게 하려고 잡목들도 없앴습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중앙일보] 입력 2011.02.10 00:29 / 수정 2011.02.10 00:29
400년 한결같은 모습
늠름도 하여라
저는 본래 그래픽 디자이너였습니다. 1993년 세계 정상의 디자이너 54명에게 수여하는 ‘디자인 앰배서더’ 칭호를 한국 최초로 받았습니다. 다음해 디자인 비엔날레에 초대돼 파리에 가서 펜화를 만났습니다. 박물관에서 많은 건축문화재 펜화를 보며 ‘한국 건축문화재를 펜화에 담아 세계에 알리자’는 결심을 하고 나이 오십에 전업을 했습니다.
동양에서 수천 년간 붓으로 글과 그림을 그릴 때 유럽에서는 펜으로 글을 쓰고 기록화를 그렸습니다. 펜화는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사진제판 기술이 발달하면서 기록화를 그리는 화가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이나 일본뿐 아니라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드문 기록화를 그리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한국 건축가들이 좋아하는 건물로 병산서원(屛山書院) 만대루(晩對樓)를 손꼽습니다. 강변에 병풍같이 둘러선 병산과 만대루의 어울림에 누구나 반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좌우에 지은 동재와 서재에 가려 제 모습을 볼 수 없기에 과감하게 밀어냈습니다. 서원 앞에 심은 은행나무와 전나무를 삭제하고 소나무를 배치해 옛 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진으로 불가능한 새로운 기능의 기록화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병산서원은 풍산읍내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2년 유성룡 선생이 병산으로 옮겨지은 것입니다. 만대루를 그리면서 기와의 단일 색상이 몹시 눈에 거슬렸습니다. 건물은 400살이 넘은 할아버지인데 지붕은 10살짜리 어린이인 꼴입니다. 단가마에서 구운 재래식 기와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고쳐 그렸습니다. 우리도 일본처럼 재래식 기와로 문화재의 참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경복궁 향원정
[중앙일보] 입력 2011.03.03 00:26 / 수정 2011.03.03 00:26
아래층은 온돌 위층은 마루
고종이 노닐던 섬 속의 정자
경복궁 후원 향원지 가운데 둥근 섬에 향원정(香遠亭)이 화려한 자태를 자랑합니다. 육모 정자에 기둥도 육모로 무척 드문 구조입니다. 2층 정자는 더욱 드문 경우입니다. 아래층은 온돌이고 위층에는 마루를 깐 전천후 휴식처입니다. 아자살 창호 아래 궁창에 장식한 꽃무늬가 화려합니다. 위층 창호는 들어열개문으로 모두 들어서 들쇠에 걸 수 있습니다. 아래층 툇마루 난간은 평난간이며 위층은 계자각인데 투각 무늬가 정교합니다. 지붕 꼭대기에 청동 절병통을 올렸습니다.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함께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전깃불이 켜진 곳이 향원정 일대입니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한 지 7년 만인 1887년으로 일본이나 중국보다 2년이 빨랐습니다. 이것을 보면 고종황제가 얼리 어답터(남들보다 먼저 신제품을 사서 써 보는 사람)였나 봅니다. 발전기는 에디슨 전기회사 것이었습니다. 에디슨이 ‘신비한 동양의 왕궁에 자신이 발명한 전등이 켜졌다’고 무척 좋아했답니다. 발전기가 향원지 물로 증기기관을 돌려 전기를 만들어 ‘물불’이요, 고장이 잦아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여 ‘건달불’이라 했습니다.
경복궁 경회루가 대형 연회를 위한 것이라면 향원정은 임금 개인의 휴식공간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리가 남쪽에 있으나 원래 북쪽 건청궁 입구와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6·25동란에 부서진 것을 새로 놓으면서 남쪽으로 돌린 것입니다. 임금이 없으니 건청궁과 연결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향원정이 우측으로 약 2도 기울어 있어 바로 세워 그렸습니다. 걱정이 되는군요.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
[중앙일보] 입력 2011.03.24 00:18 / 수정 2011.03.24 00:55
이 아름다운 성곽을 보며
전쟁을 떠올릴 수 있나요
수원 화성을 보면 ‘전쟁을 위한 성곽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과 중국의 평지성은 직선이어서 무척 고압적으로 보입니다. 화성은 평지에도 구불구불하게 성벽을 쌓아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우리 민족은 성곽도 참 아름답게 만듭니다.
1980년대 초 모두 ‘포장 디자인이 좋아야 수출이 잘 된다’고 할 때 ‘디자인 용역으로 많은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다’고 과감하게 주장하였습니다. 한국인은 디자인에 관한 천부적 자질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질 중 하나가 ‘자연친화적 디자인 능력’입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제 뜻을 받아들여 ‘디자인 산업 육성정책’이 수립되었습니다. 요사이 많은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외국의 유수한 디자인 회사에서 실력을 뽐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자연친화적 디자인 감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화성 성곽에 배어 있습니다. 그중 가장 빼어난 건물이 동북각루(東北角樓)입니다. 화성 동쪽 언덕에 세운 2층 누각 건물로 매우 독특한 모습입니다. 그동안 44개의 누각과 정자를 그렸습니다만 동북각루만큼 복잡한 건물은 처음입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란 멋진 별칭에 걸맞은 아름다운 누각입니다. 보물 제1709호로 새로 지정되었습니다.
일본 지진 피해를 돕기 위해 제 대표작품 20종의 판화본 2000점을 중앙일보에 내놓았습니다. 기부금 100만원당 작품 1점을 드립니다. 입금계좌 우리은행 1005-480-019595. 예금주 대한적십자사. 펜화 신청 및 기부 문의는 02-751-5655~6. 그림 선택 등 자세한 내용은 중앙일보 홈페이지(joongang.c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교토 니조성 니노마루 정원
[중앙일보] 입력 2011.04.14 00:25 / 수정 2011.04.14 00:41
연못 안에 섬 3개 뜰로 들어온 자연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을 시작한 이래 일본 건축 문화재를 11회나 연재하면서 일본 건축의 중요 부분인 정원을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교토 니조성(二條城)의 니노마루(二の丸) 정원을 펜화로 소개합니다.
일본의 정원은 자연을 모사한 쓰키야마린센(築山林泉)식 정원, 모래와 바위 등으로 바다와 섬 같은 형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가레산스이(枯山水)식 정원, 다실과 함께 발달한 장식적 요소를 최소화한 차테이(茶庭)로 구분합니다.
니조성은 일본을 통일하고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이에야스가 천황이 있는 교토에 머무를 숙소로 지은 성입니다. 니노마루 정원은 일본 정원의 명장인 ‘고보리 엔슈’가 쓰키야마린센식 정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연못 안에 섬 3개를 만들고 다리로 연결하여 산책할 수 있어 지천회유(池泉回遊)식으로 분류합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의 성으로 ‘니조궁’이라고 불렀던 만큼 장인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도 대강 고른 것이 없습니다. 돌을 세우고 눕힌 솜씨가 탁월합니다. 일본 정원의 아름다움은 장인들의 비법 전수로 지켜져 왔습니다. 비법을 책으로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니조성과 니노마루 정원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입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창덕궁 부용정
[중앙일보] 입력 2011.05.05 00:23 / 수정 2011.05.05 00:23
못에 살짝 발 담근 정자
세상 근심 씻고 가시라
세계건축문화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를 추천하라면 열에 아홉은 창덕궁 부용정(芙蓉亭)을 선택할 것입니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일대는 한국을 대표하는 명승지입니다. 부용지 북쪽 언덕에 어수문과 주합루가 빼어난 자태를 자랑합니다만 주인공은 연못 남쪽 호안에 걸터앉은 부용정이지요.
팔각 돌기둥을 물에 세우고 十자형 정자를 세워 방 하나가 물 위에 떠 있습니다. 건물 전체에 쪽마루를 둘러 멋을 더했습니다. 방이 4개입니다. 물 위에 지은 한 단 높은 방은 임금의 방일 것이며, 나머지 3개는 상궁과 나인들이 대기했을 것입니다. 1707년에 지은 택수재를 1792년(정조 16년) 고쳐 지으며 이름도 바꿨답니다. 모든 창을 접어 들쇠에 올리면 정자는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이 됩니다. 부용정은 건물 자체도 국내 제일이지만 정자에서 내다보는 정경도 일품입니다.
부용정 그림은 2004년 6월에도 중앙일보에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부용정을 좌측에서 본 그림으로 ‘클로즈 업’이라는 기사의 일러스트로 쓰였습니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이 본 김영택의 펜화세계’라는 제목의 전면 기사였습니다. 당시 인사동 학고재 3개 층 전관에서 4주간 초대전을 하고 있었는데 기사가 나간 뒤 1만원짜리 도록 556권이 매진됐습니다. 포스터와 엽서도 동이 났습니다. 탤런트 고두심씨가 마수걸이를 한 뒤 작품도 매진돼 학고재 개관 이래 최초 기록이라고 했습니다. IMF 외환위기로 어려울 때 중앙일보에 큰 신세를 졌습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석파정 안 유수성중관풍루
[중앙일보] 입력 2011.05.26 17:23
서울 속의 호젓한 산골
흥선대원군이 탐낸 정자
창의문을 자하문(紫霞門)이라고 합니다.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붙인 별칭입니다. 자하문 밖에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삼계동 정자’가 있어 한양 제일이라 했습니다.
소치 허유 화백은 ‘산은 깊고 숲은 울창했으며 정자와 누대의 경치는 흡사 신선의 별장이었다’고 극찬을 하였습니다. 사랑채인 현대루와 부속 건물인 중국식 벽돌건물, 월천정, 육모정에 수각(水閣)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수각이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입니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단풍을 볼 수 있는 누대’라는 멋진 이름입니다. 화려한 투각판을 귀퉁이마다 세웠고, 지붕에는 동판을 붙인 청나라식 정자입니다. 소치는 ‘계곡 위 샘물을 수각 아래로 흐르게 하였는데 족히 수천금이 들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김흥근이 정성을 들인 정자였습니다. 정자는 깊은 산골처럼 호젓하여 세상을 잊게 만듭니다.
이 별장에 눈독을 들인 대원군이 술수를 써서 손에 넣습니다. 이름도 자신의 아호를 따서 ‘석파정’으로 바꿉니다. 후손에게 대물림되던 정자는 주인이 바뀐 후 훼손이 됩니다. 1958년 서예가 손재형이 사랑채 부속 건물을 사서 계곡 아래 자신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지금은 석파랑이란 식당의 별채가 되어 석파정과 헷갈리게 합니다. 석파정은 개인 소유로 출입이 어렵습니다. 이 칼럼을 보고 찾아가시면 헛걸음하게 됩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인도 아그라 타지마할
[중앙일보] 입력 2011.06.16 00:11 / 수정 2011.06.16 00:14
타지마할 만든 샤 자한
정작 그는 아들에게 갇혀
그 뒷모습만 보다 갔다
5월 인도 아그라의 한낮 온도가 46.8도, ‘아이고 죽겠다’ 소리가 절로 납니다. 날씨가 더워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관광객이 적어 취재가 수월했거든요.
인도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아그라성에서 바라본 타지마할이었습니다. 타지마할은 정면 중앙에서 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흰색 돔과 첨탑이 대칭을 이루어 완벽에 가까운 고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뒤편 먼 곳에서 타지마할을 보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다.
무굴제국 5대 황제 샤 자한(1592~1666)은 지극히 사랑하던 왕비 뭄타즈 마할이 죽자 국력을 기울여 왕비의 무덤 타지마할을 짓습니다. 국제 공모를 거쳐 선택된 설계에 각종 보석과 대리석을 아낌없이 사용하며 22년에 걸쳐 세계 최고의 명건물을 만든 것입니다.
타지마할이 완공된 5년 뒤 샤 자한은 형제를 죽이고 권력을 탈취한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아그라성에 유폐됩니다. 감금된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죽을 때까지 샤 자한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뒷모습뿐이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자신도 권력을 잡기 위해 형제를 죽였으니까요. 샤 자한이 애절한 시선으로 보았던 타지마할의 뒷모습을 펜화에 담았습니다.
펜화기행 취재를 다니며 틈틈이 그린 스케치 소품을 선보입니다. 인사동 라메르(730-5454)에서 7월 5일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남한산성 수어장대...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
남한산성 수어장대 안내문...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
'포토·펜화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앙[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세계풍경 19개 (0) | 2013.07.31 |
---|---|
중앙[김영택의 펜화 기행]한국과 일본, 베이징풍경 20개 (0) | 2013.07.31 |
중앙[김영택의펜화기행] 한국풍경 20개 (0) | 2013.07.31 |
중앙[김영택의 펜화기행] 한국풍경 20개 (0) | 2013.07.31 |
중앙[김영택의 펜화기행]-한국 풍경 22개 (0) | 2013.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