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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펜화 에세이

중앙[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세계풍경 19개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나라 고후쿠지 동금당과 오층탑

[중앙일보] 입력 2011.07.07 00:22 / 수정 2011.07.07 00:22

바다 건너 일본서 만나다
섬세한 백제 건축의 원형

종이에 먹펜, 41×58㎝, 2011

경복궁 안내를 하는 중국인 가이드가 ‘모든 건축기술이 중국에서 배운 것이다’ 하더라며 분개하는 분이 있더군요. 기분 나쁘겠지만 되짚어보면 우리가 일본에서 하던 말과 똑같지 않습니까. 몰락한 스승과 출세한 제자의 관계가 이와 비슷합니다. 제자는 스승의 존재를 애써 감추려 하고, 스승은 제자를 내세우려 합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동란을 보며 일본인들은 한반도와의 과거를 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문화재 해설서에 한반도 관련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백제와 신라의 후손이라고 밝히는 분이 늘고 있습니다.

 일본 건축문화재를 펜화로 그리면서 일본인들을 다시 보았습니다. 한반도에 없는 신라·백제의 건축 원형을 일본에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후쿠지(興福寺)는 서기 669년 백제계인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세운 절로 710년 새 수도인 헤이조코(현 나라시)로 이전하였습니다. 가마타리의 손녀딸 고묘지와 결혼한 쇼무천황이 726년 동금당을 지었고, 4년 뒤 고묘황후가 오층탑을 세웠습니다.

 고후쿠지 오층탑은 일본 국보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나라 지역에서 제일 큽니다. ‘더 큰 탑은 세우지 말라’는 명령이 지켜졌기 때문입니다. 120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다시 지으면서도 원형을 유지한 것은 원칙을 잘 지키는 일본인의 특성 때문입니다.

 3주간 열렸던 제 스케치 작품전에 다녀가신 많은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연재한 펜화를 모두 스크랩하였다는 분도 여러 분 계셨습니다. 전시 내내 참 행복했습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창덕궁 후원 소요정

[중앙일보] 입력 2011.07.28 00:14 / 수정 2011.07.28 00:14

정자에 올라 앉으면
눈앞에 옥류천 폭포

종이에 먹펜, 25×35㎝, 2011

이번 호에 인도 자이푸르의 ‘하와마할’을 보여 드리려 했습니다. ‘바람의 궁전’이라는 하와마할은 창문만 176개인데 돌로 만든 창마다 구멍이 수백 개여서 연필로 초를 잡는 데 일주일이 넘게 걸렸습니다. 펜으로 구멍 하나하나를 그리고 있노라니 머리에 쥐가 나더군요. 도저히 참기 어려워서 카메라를 들고 창덕궁으로 달려가 후원 소요정(逍遙亭)에서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외국 건축 문화재를 그리면서 크고, 세밀하고, 화려한 건물이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인 것을 알았습니다. 인공적인 것이 많을수록 사람의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한옥이 왜 좋은지 밖에 나가니 더 잘 보였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옥에 반하는 이유로 ‘마음의 편안함’을 듭니다.

 소요정은 옥류천의 폭포를 감상하기 위한 정자입니다. 뒷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위이암(逶迤巖)’이라는 바위 앞에서 둥글게 흘러 폭포가 됩니다. 분명 사람의 솜씨인데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바위에 새긴 시에 ‘비류삼백척(飛流三百尺)’이란 글이 보입니다. 5척 정도의 폭포를 보며 장대한 폭포를 꿈꾼 것입니다. 창덕궁 후원은 인공적인 요소를 최소화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정원으로 손꼽힙니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소요정은 단출한 형태입니다. 옥류천이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위이암 위로 초가지붕을 얹은 청의정이 벼가 자라는 논 속에 서 있고, 오른쪽에 태극정이 있어 ‘상림삼정(上林三亭)’이라 합니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어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은밀한 곳입니다. 임금과 신하가 둘러앉아 잔을 들고 시를 읊던 멋진 곳입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인도 파테푸르 시크리의 불란드 문

[중앙일보] 입력 2011.08.18 00:01 / 수정 2011.08.18 00:08

아들 본 황제 기뻐서 짓다…인도서 가장 아름다운 문

종이에 먹펜, 41X58㎝, 2011

인도는 종교 간의 불화로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러고도 크고 작은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무굴제국 3대 황제 악바르(1542~1605)를 훌륭한 통치자로 손꼽는 것은 여러 종교를 융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이슬람교도이면서도 다른 종교의 행사에도 참여하고, 수도 아그라에 가톨릭교회를 짓도록 합니다. 종교별로 부인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런 훌륭한 황제가 큰 사고를 칩니다. 수도를 옮긴 사건입니다. 아그라에서 서남쪽으로 40㎞ 떨어진 시크리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수도를 이전한 것입니다.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후사가 없어 큰 걱정을 하던 터에 시크리에 사는 이슬람 성자 ‘셰크 사림 치슈티’의 예언대로 아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새 수도의 이름을 ‘승리의 도시 시크리’라는 뜻인 ‘파테푸르 시크리’로 정하고, 붉은 사암으로 아름다운 성과 모스크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턱없이 부족하고 역병까지 돌아 15년 만에 다시 아그라로 돌아갑니다.

 펜화는 시크리성 모스크의 정문인 ‘불란드’ 문의 뒷모습입니다. 높이 41m로 요즘 건물 13층 높이입니다.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손꼽힙니다. 300년간 사람이 없는 빈 도시로 남아 있던 덕에 보존 상태도 좋습니다.

김영택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함양 화림동계곡 동호정

[중앙일보] 입력 2011.09.08 00:22 / 수정 2011.09.08 00:22

바람에 마음 씻어볼까
자연 속에 폭 안긴 정자

종이에 먹펜, 35.5×50㎝, 2011

여름을 바닷가에서 즐기셨다면 가을에는 계곡 정자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추슬러보세요. 우리 선조들은 풍치 좋은 곳에 정자를 세우고 심신수양을 하였습니다. ‘내 건물이니 나만 쓰겠다’는 욕심도 없었습니다. 정자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길손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지꼴을 한 이몽룡이 변사또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지요. 마을마다 멋진 정자를 세우고 길손을 대접하는 전통을 되살리면 어떨까요.

 계곡에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자가 여럿인 곳이 함양의 화림동 계곡입니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계류를 따라 거연정·군자정·동호정이 있습니다. 동호정(東湖亭)에서 눈여겨볼 것이 누하주(누마루 아래 기둥)와 계단입니다. 구불구불 제멋대로 자란 원목을 그대로 쓴 누하주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보기 힘듭니다. 한국인의 자연 친화적 성격이 잘 드러난 것입니다. 통나무 두 개를 파서 만든 계단도 누하주와 형제처럼 보입니다.

 누마루에 오르면 강 속에 ‘차일암’이라는 넓은 너럭바위가 눈에 꽉 찹니다. 100여 명이 야유회를 해도 여유가 있습니다. 동호정을 높이 지은 이유가 차일암을 잘 보기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호정 마루에서 책을 보거나, 차일암에서 탁족을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계곡 맨 아래, 1000여 평이 넘는 달바위에 있던 농월정은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되었습니다. 함양군 예산으로 지으려고 했으나 후손 한 분이 반대를 해서 못 지었답니다. 본래 후손들이 모금을 해서 지었던 정자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은 참 알기 어렵습니다.

김영택 화백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인도 오르차 유적

[중앙일보] 입력 2011.10.06 00:08 / 수정 2011.10.06 01:18

폐허로 남은 쓸쓸한 유적
인도의 맨얼굴이 그곳에 …

종이에 먹펜, 35.5×50㎝, 2011

여성비하 표현 같아 주저됩니다만 옛 어른들의 말씀에 ‘소피 마려운 계집 국거리 썰 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을 대충대충 한다는 뜻이지요. 문화답사여행지에서 이런 모습들을 자주 봅니다. 단체로 몰려와 대충 돌아보고 사진 몇 장 찍고는 돌아갑니다.

 답사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아름다운 탤런트를 만나 사진이나 찍고 바로 헤어진다면 하루에 몇십 명을 만나본들 뭐가 남겠습니까.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가치가 있을 것이고, 하룻밤을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저는 답사지에서 가능한 한 하룻밤을 보내라고 권합니다. 여행지의 품에 안겨보는 것입니다. 어스름한 새벽 전혀 다른 모습에서 여행의 진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새벽 사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찍어 본 사람만 압니다.

 진짜 여행을 즐기는 분들이 추천하는 인도 여행 1급지가 오르차 유적군입니다. 단체관광으로 보기 어려운 시골 마을로 폐허가 된 유적들이 화장하지 않은 인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르차 성에서 맞는 낙조도 일품이지만 새벽 어스름에 여기저기 흩어진 유적 사이를 거닐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분델라 왕조 시대로 돌아간 듯 착각에 빠집니다. 1500년께 분델라 왕조의 수도가 된 오르차는 1600년 초 무굴제국 제항기르 황제의 후원으로 큰 도시가 됩니다. 그러나 1627년 분델라 왕조가 제항기르의 아들 샤자한에게 도전했다가 무참하게 짓밟히고 폐허가 됩니다. 그러나 제항기르 마할을 비롯한 성과 사원들은 아직도 꿋꿋하게 옛 영화를 말해줍니다. 도시 인도인과 다른 진짜 인도인들을 볼 수도 있습니다.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진주성과 촉석루

[중앙일보] 입력 2011.10.27 00:13 / 수정 2011.10.27 00:13

2만 왜군 물리친 진주대첩
곳곳에 서린 의병의 혼

종이에 먹펜, 26×60㎝, 2011

첫 손자의 작명을 승제 한정훈 선생에게 부탁드렸습니다. 작명소를 운영하지는 않지만 이름만 보고도 문제점을 족집게처럼 맞혀 놀란 적이 여러 번 있었거든요. 생년월일을 보고는 “요즈음 태어나는 아이들 사주가 무척 좋은 걸 보면 한국이 아주 잘살게 될 모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명한 외국 연구기관이 ‘한국이 세계 2대 강국이 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 국운이 좋아서일까요. 국민의 특성이 강하기 때문일까요.

 6·25전쟁 때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장군이 “서구 군대는 패하면 뿔뿔이 흩어져 버리는데, 한국군은 패잔병들이 모여 부대를 만들고, 다시 패해도 또 모여 싸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합지졸이었던 한국군은 이런 정신으로 단련되어 국공내전을 거치며 전투 경험이 쌓인 중공군과 맞겨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관군이 패하고 임금은 피란을 갔어도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킵니다. 1592년(선조 25) 10월 2만여 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합니다. 조선 관군과 의병 3800여 명이 6일간의 전투 끝에 이를 물리칩니다. 백성들까지 나서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부으며 싸워서 성 안에 기와와 돌이 남아있지 않았답니다. 이를 ‘진주대첩’이라 합니다.

 남강변 언덕 위 촉석루는 당시 전투 지휘소였습니다. 1241년(고려 고종 28)에 창건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8년(광해군 10)에 중건하였으나 6·25전쟁 때 또 불에 타 1960년 다시 지은 것입니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넓이가 20칸인 큰 누각입니다. 진주성 안에는 임진왜란 유물이 많습니다. 찬찬히 둘러보며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상상해 보세요.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일본 규슈 구마모토성 천수각

[중앙일보] 입력 2011.11.17 00:59 / 수정 2011.11.17 00:59

적의 공격 50일간 막아낸 ‘난공불락’ 6개 망루 중 하나

종이에 먹펜, 41×53㎝, 2011

자전거 여행을 하던 부부가 구마모토시 다쓰다 자연공원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자려 했으나 이미 문을 닫은 후였습니다. 근처에 다른 문이 있기에 인터폰을 누르고 “한국에서 온 여행자인데 텐트를 칠 장소를 찾는다”고 하자 젊은 여자가 관리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좋은 장소로 안내하더랍니다. 알고 보니 공원이 아닌 호소카와 전 총리의 별장이며, 젊은 여자는 ‘유코’라는 딸로 이들에게 온천에 가자고 초대까지 하였답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는 한반도 식민 통치에 대해 ‘참기 힘든 고통을 끼쳤다. 우리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여 마음으로 사과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일본 일왕과 총리 중 가장 깊이 있는 사과였습니다. 부인 가요코 여사는 ‘퇴계 선생을 공부하는 모임’의 회장을 하였습니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구마모토번의 영주였던 호소카와 가문의 제18대 당주입니다.

 구마모토성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하였던 가토 기요마사가 1608년 완성한 성입니다. 천수각 외에도 다섯 개의 망루가 있어 ‘난공불락의 성’이라 했습니다. 구마모토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 호소카와 가문의 영지가 됩니다. 성 건축의 명인 기요마사의 실력은 1877년 ‘세이난 전쟁’ 때 증명됩니다. 사쓰마군의 공격을 50일간 막아낸 것입니다.

 그러나 천수각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전쟁 중에 불타 버립니다. 현재 천수각은 1960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일본 3대 명성입니다. 펜화는 세이난 전쟁 때 사진을 참고로 고쳐 그렸습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터키 이스탄불 술탄 아흐멧 자미

[중앙일보] 입력 2011.12.15 00:00 / 수정 2011.12.15 00:00

이스탄불에 남긴 오스만 유적 … 우람한 돔 지붕 ‘블루 모스크’

종이에 먹펜, 41X58㎝, 2011

펜화기행 여정이 일본·중국·캄보디아·인도를 거쳐 유럽에 이르렀습니다. 터키 이스탄불은 도시 안에 아시아와 유럽이 공존합니다.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었던 만큼 볼거리가 넘쳐납니다. 오래된 사원의 첨탑이 서울 교회 십자가만큼 흔합니다.

 인심도 넘쳐납니다. 한국이 형제의 나라라며 반가워합니다. 발해와 형제국가였던 돌궐이 터키의 옛 이름 ‘튀르크’와 같은 이름이거든요. 같은 우랄알타이어 계통이어서 언어의 순서도 같습니다. 동터키에서는 김치도 담근답니다. 에누리가 통할 만큼 성격도 비슷합니다.

 술탄 아흐멧 자미는 아야 소피아 성당, 톱카프 궁전과 같이 구시가지 동쪽에 모여 있습니다. 전체를 술탄아흐멧 지구라 하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입니다. 아야 소피아가 비잔틴 문화를 대표한다면 술탄 아흐멧 자미는 이슬람의 자존심입니다. 오스만 제국 14대 술탄 아흐멧 1세가 1616년 준공한 사원으로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합니다.

 직경 5m가 넘는 큰 기둥 4개 위에 반원형 돔 4개를 올리고 그 위에 지름 27.5m의 큰 돔을 지었습니다. 중앙 큰 돔의 높이가 43m이며 30개의 작은 돔이 4개의 반원형 돔을 둘러싸고 있어 실내 공간이 무척 넓습니다.

 이스탄불을 제대로 보시려면 걸어 다니세요. 그랜드 바자르, 이집시안 바자르 등 대형 시장은 구경만 해도 즐겁습니다. 노면 전차인 트램을 이용하면 행동반경이 넓어집니다.

 펜화를 배우려는 분은 예술의 전당(전화 580-1607)에서 기초과정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penwhaga@hanmail.net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체궁

[중앙일보] 입력 2012.01.05 00:00 / 수정 2012.01.05 00:14

금14t 은40t 들인 화려한 궁전
비운의 오스만 마지막 황태자
추방 68년 만에 자기 집 찾아
입장권 사서 돌아보고 갔다는 …

종이에 먹펜, 41X58cm, 2012

1992년 8월 오스만제국 마지막 황태자 마흐멧 오르한이 83세의 노구를 이끌고 이스탄불 공항에 내립니다. 추방된 지 68년 만입니다. 그는 추방되기 전에 살던 돌마바체궁에 입장권을 사서 들어갑니다. 그가 살던 방에는 침대며 놀이기구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었습니다. 망명지로 돌아간 오르한은 1년 뒤 공장 직공, 택시기사 등 고난의 세월을 뒤로하고 숙소에서 죽은 지 이틀 만에 발견됩니다.

 오스만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개 대륙에 걸친 강대국이 됩니다. 현재의 알바니아, 그리스, 불가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알제리에 아라비아 반도 일부를 점령한 것입니다.

 모든 국가는 흥하면 쇠하기 마련입니다. 점점 약해지는 국력을 보며 술탄 압둘 메지드는 보스포루스 해변에 11년간 공사를 거쳐 1853년 돌마바체궁을 완공합니다. 방이 무려 285개, 연회장 43개로 금 14t, 은 40t을 들여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을 만든 것입니다. 최고의 궁으로 국가 이미지를 쇄신하려고 했으나 결국 제국은 망하고 맙니다. 1924년 터키공화국 설립 후 모든 왕족은 해외로 추방됩니다.

 돌마바체궁은 3개로 나누어집니다. 입장료도 다릅니다. 업무동과 연회장, 하렘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수입한 화려한 가구와 장식품은 눈을 즐겁게 합니다. 무게가 4.5t에 달하는 샹들리에도 볼 만합니다. 오스만제국이 망하는 데 일조하였다는 돌마바체궁이 터키의 큰 수입원이 되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터키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 박물관

[중앙일보] 입력 2012.01.26 00:00 / 수정 2012.01.26 00:00

터키의 절묘한 선택
‘소피아 대성당’을
박물관으로 부르는 까닭

종이에 먹펜, 41×58㎝, 2012

1453년 4월 6일 새벽, 오스만제국의 우르반 대포가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대 신형 대포로 직경 75㎝, 무게 500㎏의 돌로 만든 포알을 쏘았습니다. 명중률은 낮았지만 엄청난 파괴력과 큰 소리에 방위군을 공포에 떨게 하였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은 난공불락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10여 만 명 오스만제국군의 공격에 7000명에 불과한 비잔티움군의 처절한 저항은 5월 29일까지였습니다. 천년 역사를 자랑하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는 침략군에 짓밟혔습니다. 겁에 질린 시민들이 도망간 곳은 탈출을 위한 해안이 아니라 소피아 대성당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 대천사 미카엘이 적들을 쫓아낼 것”이라는 전설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하는 그들에게 들이닥친 것은 대천사가 아닌 침략군의 창칼이었습니다.

 대성당은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6년 공사 끝에 537년 완성한 기념비적 건축물이었습니다. 직경 31m의 중앙 돔은 높이 56m로 세계 최대 규모였고, 황금 모자이크 벽화는 화려함의 극치였습니다. 천년 동안 기독교의 자존심이었던 대성당의 벽화에 회칠이 덮이고, 첨탑이 추가되어 이슬람 모스크로 바뀐 뒤 다시 500년 세월이 흐릅니다. 1500년간 수많은 지진을 견디어낸 건물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1923년 오스만제국이 망하고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자 서구 각국은 대성당의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터키는 성당도 모스크도 아닌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논란을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매년 방문객 2000만 명 중 아직도 아야 소피아 성당이라 부르는 분이 더 많답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요르단 페트라 알카즈네

[중앙일보] 입력 2012.02.16 00:05 / 수정 2012.02.16 00:08

협곡 끝에 우뚝 선 2000년 전 왕국의 당당함
그 신비로움, 탄성 저절로

종이에 먹펜, 41×58㎝, 2012

요르단 여행안내 책은 어느 서점에도 없었습니다. 볼만한 여행지가 적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르단에는 페트라라는 신비한 유적이 있어 많은 세계인들이 몰려듭니다.

 한국에서 요르단으로 바로 가는 항공편이 없어 아시아나항공으로 이스탄불까지 가서 암만행 항공편으로 갈아탔습니다. 수도 암만에서 황량한 도로 262km를 달려간 끝에 그랜드 캐니언을 닮은 검붉은 아론산을 만났습니다.

 아론산 협곡의 좁고 굽은 길은 파도처럼 일렁이는 붉은 사암 무늬로 신비감을 자아냅니다. 1.2km를 걸어 협곡 끝에 도달하는 순간 알카즈네가 마술처럼 나타납니다. 사진으로 미리 보았는데도 맞닥뜨리는 순간 시각적 충격과 함께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암벽을 파서 헬레니즘 건축 형식으로 지은 알카즈네는 높이 43m, 폭 30m의 당당한 건물입니다. 페트라의 건물 중 가장 아름답습니다. 펜화는 영국화가 데이비드 로버트가 1839년 그린 기록화를 참고하여 마모된 조각의 일부를 되살렸습니다.

 페트라는 2000여 년 전 나바테아인들이 건설한 왕국입니다. 한때 교역의 중심지로 부강한 국가를 이뤘으나 로마의 침략을 받고 교역로가 바뀌며 쇠락했습니다. 6세기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뒤 1812년 발견될 때 까지 천년 간 전설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붉은 사암을 파내 지은 독특한 건물들로 ‘사막의 붉은 장미’라고 불리는 페트라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아직도 발굴 되지 않은 유적이 더 많다니 페트라의 원래 모습은 얼마나 웅장했을까요.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요르단 제라시 님파에움 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2012.03.08 00:00 / 수정 2012.03.08 00:01

종이에 먹펜, 41×58cm, 2012

요르단 수도 암만 북쪽 51km 떨어진 곳에 로마 식민 도시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는 제라시가 있습니다. 기원전 63년 로마가 점령하며 에라사라 불렀던 도시는 서기 106년 부유한 페트라와 합병한 뒤 무역으로 벌어들인 엄청난 돈으로 많은 건물을 세웠습니다.

 1만5000명을 수용하는 전차경기장에 대형 원형극장 3개, 로마황제 하드리안의 방문을 기념하여 지은 개선문, 코린트식 화려한 대형기둥 12개를 세운 아르테미스 신전 등 로마에 버금가는 화려한 도시를 만든 것입니다. 이오니아식 기둥 76개가 둘러싼 직경 90m의 타원형 오벨광장은 로마시대의 화려한 퍼레이드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가 중심을 관통하는 길이 800m 열주대로에 깔린 박석은 마치 붉은 망토를 걸친 장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합니다.

 제라시는 무역로가 해상으로 바뀌어 교역의 중심에서 멀어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서기 614년 페르시안, 636년 무슬림에 약탈된 도시는 서기 749년 여러 차례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인적이 끊어집니다.

 펜화에 담은 님파에움은 서기 191년에 완성한 춤과 노래와 물의 요정 님프를 위한 공중분수대입니다. 2층 구조로 7개의 사자 머리 조각에서 물이 흘러내렸다고 합니다. 펜화로 옮기면서 배흘림기둥 위 아칸서스 잎 모양 조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한국펜화가협회전이 알파갤러리(전화 3788-9498)에서 3월 9일부터 21일까지 열립니다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요르단 제라시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중앙일보] 입력 2012.03.29 00:00 / 수정 2012.03.29 00:16

황제가 이 길을 갔다…로마의 영광 간직한 우아한 3개의 아치

종이에 먹펜, 41×58㎝, 2012

제라시 남쪽 입구에서 처음 만난 건물이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입니다. 로마 역사에서 현명한 황제로 손꼽히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서기 129년 제라시를 방문한 것을 기념해 세운 건물입니다. 3개 아치로 문을 냈는데 가운데 아치는 높이 13m, 폭 7m에 달합니다. 펜화로 옮기면서 기둥의 아름다움에 반했습니다. 배흘림기둥의 선이 너무 곱기 때문입니다.

 개선문을 비롯한 제라시 건물들을 보면서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거대한 제국이 되어 1000년을 유지한 이유에 대해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로마는 여러 식민 국가에 로마식 도시를 세웠습니다. 거대한 신전, 원형 극장, 열주대로 등 크고 아름다운 석조 건물로 이루어진 로마식 도시가 식민지 통치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문화 수준이 낮은 국가가 강한 군사력으로 문화 수준이 높은 국가를 점령한 후 오히려 식민 국가에 동화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통치에 유리하였습니다.

 로버트 베번은 ‘민족 고유의 건축물들이 파괴되면 민족의 정체성도 파괴된다’고 밝혔습니다. 요즈음 드라마를 비롯하여 음악 한류까지 세계에 진출하였습니다. 건축 한류를 추천해 봅니다. 해외 도시와 자매결연 할 때 크고 번듯한 2층 누각을 지어주고,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한옥으로 지으면 어떨까요. 건물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효과적 홍보수단입니다.

 개선문을 복원하면서 허술하게 처리된 부분들이 있어 펜화에서는 일부를 고쳐놓았습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불국사 다보탑

[중앙일보] 입력 2012.04.26 00:19 / 수정 2012.04.26 00:27

나무처럼 짜맞춘 화강암
신라 석공의 솜씨여
사라진 난간 살려보니
돌사자 앉은 자리 보이네

종이에 먹펜, 41X58cm, 2012

건축문화재를 그리면서 ‘내가 화가인가, 장인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건축문화재는 보이는 것만으로 그리기 어렵습니다. 파손되거나 잘못된 부분을 고쳐 그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와지붕의 종류, 기와의 형태, 올리는 공정을 배웠습니다. 목재 부분은 종류가 너무 많아 아직도 배우고 있습니다. 다행히 중학생 때 어깨너머로 배운 건축설계와 스케치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취미로 수집했던 옛 사진엽서로 없어진 건축문화재를 재현하고, 잘못 복원된 수원 화서문이나 기념비전의 올바른 모습을 보여드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러니 저를 ‘장인’이라 불러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불국사 다보탑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걸작입니다. 법화경의 기록을 표현한 것이랍니다. 강도 높은 화강석을 나무처럼 다듬어 짜맞춘 솜씨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요즈음 다보탑 돌사자가 기단 ‘가운데 있었다’와 ‘귀퉁이에 있었다’를 놓고 말이 많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해 보았습니다.

 다보탑 사방 계단 앞에 기둥이 두 개씩 있습니다. 이 기둥 뒷면에 둥근 구멍이 있습니다. 이를 보고 여러 전문가가 “기단에 난간이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없어진 난간을 살려 보았더니 돌사자 위치가 명확해졌습니다. 난간이 있으면 기단 위는 모두 통로가 됩니다. 사자를 통로에 둘 수는 없겠지요. 기둥 사이 감실에 앉아 입구를 지키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난간 자료를 제공해 준 KAIST 박진호 선임연구원께 감사 드립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프랑스 생말로 몽생미셸

[중앙일보] 입력 2012.05.17 00:00 / 수정 2012.05.17 00:13

천사 꿈속에서 계시 “수도원 지으라” 하늘 맞닿은 천국 탄생

종이에 먹펜, 41×58㎝, 2012

아브랑슈의 주교 아베르의 꿈에 대천사 미카엘이 나타나 ‘바위섬에 수도원을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이나 같은 꿈을 꾸었으나 ‘그냥 꿈이겠거니’ 하였더니 세 번째 꿈에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누르더랍니다. 잠에서 깨어나 이마에 난 자국을 보고서야 계시임을 깨달았습니다. 험난한 공사 끝에 서기 709년 몽생미셸을 세웠습니다.

 프랑스 북부 생말로 해안에서 1㎞쯤 떨어진 높이 80m 바위섬에 지은 몽생미셸은 동화에 나오는 ‘마법의 성’처럼 신비롭습니다. 첨탑 꼭대기 미카엘 동상이 황금색 나래를 펼치고 날아오를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서 제일 처음 유네스코문화재로 지정된 곳으로 루브르박물관 다음으로 방문객이 많답니다.

 좁고 가파른 계단 꼭대기에서 만나는 회랑과 꽃밭은 하늘에 맞닿은 천국처럼 아름답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면 가슴속 응어리들이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건물 돌벽돌이 펜화에는 두께 0.3㎜가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늘다는 굵기 0.1㎜ 펜으로도 그릴 수 없어 펜촉을 0.05㎜ 정도로 갈아서 그렸습니다. 0.3~0.4㎜ 간격의 세밀 펜화는 잡생각 없이 그려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그림의 대상과 펜선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념무상이어서일까요. 그림을 그리면 머리가 맑아집니다.

 국가브랜드위원회 웹사이트(http://www.koreabrand.net/net/kr/book.do?kbmtSeq=1349)에서 우리 문화재를 그린 펜화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프랑스 파리 사크레 퀴르 대성당

[중앙일보] 입력 2012.06.07 00:00 / 수정 2012.06.07 00:00

파리, 가장 높은 곳 순백의 랜드마크
전후 상처받은 민심 희망과 긍지로 바꾸다

종이에 먹펜, 41X58㎝, 2012

지난 2001년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준공식에서 대통령이 건설회사 사장은 소개하면서 설계를 한 건축가는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설계자인 류춘수 건축가는 “출판기념회에서 출판사 사장은 소개하고, 저자 소개를 빼놓는 격”이라며 잘못된 관행을 지적했습니다.

 프랑스 여행을 하다 보면 유명 건축물마다 건축가 이름이 소개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펠탑처럼 설계자의 이름이 건물명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역사는 글로 쓸 수 있지만 건축으로도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몽마르트르 언덕은 해발 129m밖에 안 되지만 평지인 파리에서 제일 높은 곳입니다. 이 언덕에 사크레 퀴르 성당이 눈이 부시도록 하얀 모습으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1870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파리 시민에게 희망을 되찾아 주기 위해 몽마르트르 언덕에 성당을 세우기로 합니다. 총 77개 응모작 중 ‘폴 아바디’의 비잔틴식 작품이 채택되어 1875년 공사를 시작합니다.

 약한 지반을 보강하기 위해 40년이 걸렸습니다. 공사비도 일곱 배나 늘었으나 모두 시민이 부담하여 1919년 완공을 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희어지는 돌로 만든 높이 83m, 폭 50m의 거대한 돔은 파리 시내 어디에서나 보이는 랜드마크입니다.

 성당 계단에 앉아 파리 시내를 내려다본 뒤 성당 왼쪽으로 돌아서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려 주는 테르트르 광장을 둘러보면 파리의 절반은 본 셈이 됩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경주 불국사 석가탑

[중앙일보] 입력 2012.10.11 00:01 / 수정 2012.10.11 00:16

지진에도 꿋꿋 도굴에도 의연 절제된 한국미

종이에 먹펜, 41×58㎝, 2012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탑을 손꼽으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을 꼽습니다. 다보탑은 화려한 모습으로 여성적이고, 석가탑은 절제된 단순미로 남성적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석가탑은 신라 3층 석탑의 대표작으로 국보 제21호입니다. 2008년 수리를 한 다보탑에 이어 석가탑도 전면 해체 수리에 들어갔습니다.

 신라 경덕왕 10년(751) 건립한 석가탑은 큰 지진을 겪기도 하고, 번개를 맞기도 합니다. 자연재해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에 의해 피해를 보기도 합니다. 1966년 사리장엄구를 노린 도굴 미수로 탑의 일부가 깨지고 탑이 기울게 됩니다. 이를 수리하기 위해 탑을 들어 올리다 2층 지붕돌이 떨어지면서 먼저 내려놓았던 3층 탑신석을 훼손하는 대형 사고가 생깁니다. 이 수리 때 발견된 사리장엄구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됩니다. 이래저래 석가탑만큼 매스컴에 많이 오른 문화재가 없을 것입니다.

 2010년 12월 안전점검에서 석가탑에 균열이 생기고, 틈이 벌어지는 등 심각한 훼손이 드러났습니다. 문제된 부분이 많아 몽땅 해체하여 수리하기로 했습니다. 고려 정종 4년(1038) 큰 수리 이후에 약 1000년 만에 이루어지는 ‘금세기 최대의 수리’ 입니다.

 2014년 완료할 예정입니다만 탑 밑에서 유물이 발견되면 늦어질 수도 있답니다. 공사 중에는 철골로 만든 덧집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아쉬운 마음에 공사가 완료된 모양을 펜화로 미리 그려 보았습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중국 지린성 지안현 장군총

[중앙일보] 입력 2012.11.01 00:31 / 수정 2012.11.01 00:47

위풍당당하구나 ‘동방의 피라미드’

종이에 먹펜, 30.5X43㎝, 2012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속국이었다며 역사 왜곡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양심이 있는 일부 중국의 사학자들이 반대하는 것은 속국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자체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 때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랴오허, 동으로는 훈춘, 북으로 부여성(지금의 눙안), 남으로 남한강 유역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강국이었습니다. 수나라가 망한 건 고구려와의 싸움에 총력을 기울였다 패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습니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의 장군총도 고구려의 국력을 보여줍니다. 화강암 장대석으로 사각의 단을 7층으로 쌓은 높이 11.28m, 한 변의 길이 29.34m의 거대한 고구려기단식 돌방돌무지무덤입니다. 동방의 피라미드라고도 하는 무덤 꼭대기에는 사당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군총에 쓰인 석재 중 큰 것은 길이 5.7m, 너비 1.12m, 두께 1.10m에 달합니다. 무덤 내 현실 천장을 덮은 돌은 길이 4.5m, 너비 3.8m의 거대한 판석입니다. 이 돌들을 20㎞나 떨어진 양펀현 가오타이춘에서 가져왔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의 기술과 국력을 보여줍니다.

 무덤 주변에 태왕릉과 광개토대왕비가 있어 장군총의 주인을 광개토대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고,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보는 분도 많습니다.

김영택 화백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 (끝) 영국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중앙일보] 입력 2012.12.13 00:06 / 수정 2012.12.13 00:30

대화재 휩쓴 런던 희망으로 솟아오른 거대한 돔 성당

종이에 먹펜, 41X58㎝, 2012

런던에는 온통 석조건물뿐이어서 아주 옛날부터 그랬으리라 생각하기 쉬우나 3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다수가 목조건물이었습니다. 1666년 9월 2일 새벽, 왕실 빵가게에서 일어난 불은 거센 바람을 타고 시가 전체로 번집니다. 나흘간의 대화재로 시내 건물 중 85%가 넘는 1만3200채가 소실됐습니다. 교회 87곳도 화마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듯이 대화재가 크리스토퍼 렌(1632~1723)이라는 대건축가를 탄생시킵니다. 옥스퍼드대학 천문학 교수로 건축을 독학으로 배운 렌은 대화재가 일어나자 런던 재건 계획서를 국왕에게 제출합니다. 준비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습니다. 건설총감이 된 렌은 51개 교회와 그리니치 병원, 햄튼코트 궁전 신관 등 많은 건축물을 설계했는데,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게 세인트 폴 대성당입니다.

 돔을 올리는 고전주의 양식에 고딕 양식을 접목한 획기적 설계였습니다. 높이 111m, 정면 폭이 약 74m, 길이 156m로 세계에서 셋째로 큰 성당입니다. 본당 회중석, 수랑, 위스퍼링 갤러리, 골든 갤러리, 돔의 아름다움은 감탄을 하게 만듭니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중앙일보 연재를 끝냅니다. 2001년 시작해 다섯 가지 제목으로 만 9년간 160여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한국 신문 연재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랍니다. 지난 9월 경주시 초대전에 중앙일보에 연재된 제 칼럼 스크랩북을 가져오셨던 여러분들에게 감격했습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많은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마음먹은 대로 이루시고 늘 행복하십시오.

김영택 화백[penwhaga@hanmail.net]

 

 

 

수원 팔달문 100년전 사진...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

 

수원 팔달문 100년전 사잔 안내문...경기도박물관 100년전 거리 기획사진 전시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