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 가 존경과 추앙받는 이유, ‘6無’의 生涯를 들여다보며
구기차 논설가 (발행일: 2011/05/22 19:18:24)
▲ 마오쩌둥(우, 毛澤東)과 저우언라이 ⓒ자료사진 |
저우언라이(周恩來, Zhōu Ēnlái: 1898~1976)는 중국의 문화혁명시기에 혁명가이며 정치지도자, 사회주의운동가로서 주석 마우쩌둥(모택동)을 보좌하며 제 1대 총리로 27년간 자리를 지켜왔다.
공산당 창당 90주년을 맞이한 중국인들은 사망한지 35년이나 지난 지금도 저우언라이(주은래) 전 총리를 잊지 못하고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생전에 그의 지나온 ‘6無’ 생애에 대해 지금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추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6無’가 뭐 길래 그토록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일까?
즉 ‘1無’는 죽은 뒤 遺骨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2無’는 유언에 ‘재 한줌 남기지 말라’고 해서 화장 후 유족들이 유골을 비행기에 싣고 보하이(渤海)만 상공에 뿌렸다고 한다.
‘3無’는 중국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효는 無子息’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문화혁명기간 중 부모를 잃은 동지의 자녀들을 양자로 삼아 키웠는데 그 중 리펑은 총리를 지냈다고 한다.
‘4無’는 27년간(1949~1976)이나 총리를 지냈지만 겸손하고 청렴하여 권력자로 행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5無’는 누구와 한 번도 당파를 이루지 않아 ‘無黨派 정치인’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6無’는 고생스런 일은 도맡아하면서도 누구도 원망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즉 남의 탓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것이다.
그를 만났던 인사들은 그와 대화를 나눌 때는 마치 孔子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고 우아함과 높은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며 칭송했다고 한다. 거참, 공산국가에도 그처럼 훌륭한 인물이 있었다니, 아무리 공산국가일망정 귀담아 들을 것은 들어야 하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한반도와 관련해 흥미 있는 것은 그가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려는 이른바 ‘東北工程’을 시도하던 중국사회과학원을 경고하였으며 역사침공행위를 자랑삼는 중국 國粹主義자들을 질타했다는 것이다.
(구기차 논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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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6無’ 생애----
‘1無’는 죽은 뒤 遺骨을 남기지 않았다/‘2無’는 유언에 ‘재 한줌 남기지 말라’/‘3無’는 자식이 없다는 것/‘4無’는 27년간(1949~1976)이나 총리를 지냈지만 겸손하고 청렴하여 권력자로 행세하지 않았다는 것/‘5無’는 누구와 한 번도 당파를 이루지 않아 ‘無黨派 정치인’이였다는 것/ ‘6無’는 고생스런 일은 도맡아하면서도 누구도 원망해 본적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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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중공제일미남 주은래가 추녀에 속하는 등영초와 결혼한뒤
평생을 함께 할거라고 생각한 간부들은 아무도 없었다. ...주은래는 평생 4가지를 절제하며 살았다. 물욕이 없었으며
미녀욕이 없었으며, 자식욕이 없었으며 , 권력욕이 없었다...욕심이 없는 주은래는 사람인지
부처인지 공자인지 알수가 없었다. ....
[책갈피]주은래와 등영초 외
경향신문/입력 2006.07.07 17:24
▲ 주은래와 등영초
리훙 외 엮음|지식산업사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인 주은래(1898~1976)와 그의 부인이자 혁명동지였던 등영초(1904~92) 평전이다. '5·4운동'이라는 역사의 격랑속에서 만난 그들은 인민에 대한 애정보다 깊은 사랑을 죽는 날까지 유지해 중국 인민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정식 결혼식을 대신해 친구들에게 선포한 '8호 정신'은 현대의 부부들도 귀기울일 만하다.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신뢰하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 돕고, 서로 의논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자는 내용이다. 훤칠한 키에 매우 잘 생긴 주은래와 그리 아름답지는 않은 외모의 등영초 사이에 오갔던 편지에서는 이들이 사별할 때까지 8호정신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양자·김형열 옮김. 1만8천원
(요점) '8호 정신'은 현대의 부부들도 귀기울일 만하다.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신뢰하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 돕고, 서로 의논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자는 내용이다. ...
[강원구 칼럼]영원한 2인자, 주은래(周恩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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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의 자리는 항상 최고 실권자로부터 견제를 받기 때문에 똑똑하지도, 못나지도 않아야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북한의 장성택은 김일성의 사위이니까, 부마(駙馬)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많은 여자를 거느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왕의 사위인 부마는 공주 단 한명만 두어야 한다. 장성택이 다른 여자들을 좋아 했으니, 김경희와 관계는 좋을 리 없을 것이다.
중국에 돌아다녀 보면 모택동(毛澤東)의 기념관보다 주은래 기념관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중국에서 모택동 다음의 2인자로 끝까지 대접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김종필 총리가 중간 중간 버림을 받았으나 2인자의 자리를 유지했으며, 장성택은 40여년간 완전히 누렸으나 불과 며칠 만에 사형되고 말았다.
주은래는 중국공산당의 주요인물이며 중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혁명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후에 중국정부의 외교문제를 전담했다. 중국공산당 초기부터 지도자적 역할을 했으며, 위대한 정책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는 정책 시행에 뛰어났고 세부사항을 파악하는 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언제나 당 지도부에서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내부 갈등으로부터 비롯된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우아함과 섬세함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친화력있고 실용적이며 설득력있는 사람으로 정평이 났다.
그는 강소성 회안(淮安) 명문가에서 태어나 천진(天津)에 있는 남개[南開]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한 뒤에 요녕성 철령(鐵嶺)에서 6개월간 공부하였으며, 그 뒤 계속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며, 1920년 가을에 석방되어 근로장학생제도의 일환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남창(南昌) 사건(1927. 8. 1)으로 알려진 공산당 봉기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민당이 남창을 재탈환하자 광둥 동부지역으로 퇴각했고 곧 홍콩을 거쳐 상해로 도피했다.
모택동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 관계는 평생 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장개석의 계속되는 토벌작전으로 인해 공산당은 마침내 1934년 10월 강서 소비에트 지역을 버리고 중국 북부의 새로운 근거지를 향해 1935년 10월 섬서성 연안(延安)에 이르러 장정은 끝났다.
이곳에서 공산당의 근거지를 확보하자 주은래는 당의 주요 협상자가 되었고, 국민당과 전략적으로 연합을 맺는 어려운 일에 착수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항일감정에 호응하고 파시즘에 대항하라는 모스크바의 이른바 신(新)인민전선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항일'이라는 기치 아래 국민당을 비롯한 모든 애국인사들과 연합하겠다고 제의했다.
1936년 겨울 장개석이 국공내전을 중지하고자 하는 부장(部將)들에 의해 서안(西安)에서 체포되자 주은래는 곧 그곳으로 갔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에게 장개석을 살해하지 말라고 설득한 뒤, 장개석이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공산당과 연합전선을 편다는 조건 아래 그의 석방을 성사시켰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총리가 된 주은래는 중국의 대규모 민간 관료체제를 관리하는 주요행정가가 되었다. 외교부장을 겸임하면서 외교문제에서도 중책을 수행했고 이 직책을 사임하고 난 뒤에도 계속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71년 7월 미국 특사 헨리 A. 키신저가 북경을 방문하여 주은래를 처음 만난 후 외교관·협상가로서 그의 명성은 미국 언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2월 북경에서 열린 모택동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사이의 역사적 회담은 대부분 주은래가 조직·성사시킨 것이었다.
주은래는 공산당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끝까지 유지했다. 문화대혁명 이후에 임표(林彪)에게 밀렸지만, 문화대혁명 기간에 모택동 사상을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제동을 거는 주된 역할을 했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유일하게 안정의 구심점이 되었다. 1970년대 초 문화대혁명의 기운이 쇠퇴하는 동안 등소평(鄧小平)과 기타 전직 온건지도자들을 권좌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영원한 2인자로 지금도 대접 받고 있다.
2013. 12. 18 |
(요점) 중국에 돌아다녀 보면 모택동(毛澤東)의 기념관보다 주은래 기념관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중국에서 모택동 다음의 2인자로 끝까지 대접을 받은 사람이다.
1971년 7월 미국 특사 헨리 A. 키신저가 북경을 방문하여 주은래를 처음 만난 후 외교관·협상가로서 그의 명성은 미국 언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2월 북경에서 열린 모택동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사이의 역사적 회담은 대부분 주은래가 조직·성사시킨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모택동 사상을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제동을 거는 주된 역할을 했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유일하게 안정의 구심점이 되었다. 1970년대 초 문화대혁명의 기운이 쇠퇴하는 동안 등소평(鄧小平)과 기타 전직 온건지도자들을 권좌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도청도설] 유엔의 조기
조기(弔旗)는 대통령 등이 타계했거나,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 다는 것이 일반적. 특이한 경우도 있다. 러시아는 1941년 6월 22일 독일에게 침공을 당한 날을 잊지 말자며 매년 이날 조기를 게양한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이다. 종전기념일이라면 전쟁이 끝났으니 기뻐해야 마땅할 터. 그런데도 조기를 다는 것을 보면 역시 겉과 속이 다른 국민성이 드러난다.
국제기구인 국제연합(UN)도 조기를 게양한다. 회원국의 현직 국가원수가 사망해 해당 회원국의 조기 게양 요청이 있거나, 기타 유엔 사무총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안이다. 단, 해당 회원국 국기가 아니라 유엔기가 내걸린다. 간혹 이해하기 힘든 일도 벌어진다. 2011년 11월 28일 유엔본부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가 걸렸다. 북한의 게양 요청이 있었다지만 국제 인권단체가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에 비하면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 서거에 대해 유엔이 조기를 게양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런데 그의 사후 관련 보도 중 의외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그의 유산이 우리 돈 172억 원에 달한다는 것과 그 때문에 가족과 옛 동지들이 이미 지난 4월 법적 소송까지 벌였다는 내용이다. 그의 재산은 자서전 인세나 27개 펀드 외에 '만델라'라는 브랜드로 그의 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와인, 의류, 예술품 제작 업체들이다. 만델라는 청렴하며 부유하지 않을 것이라는 세계인들의 인식과 거리가 있다.
1976년 1월 8일 뉴욕 유엔본부에 조기가 게양됐다. 유엔 창설 이래 최초. 주인공은 서거한 중국공산당 총리 주은래였다. 냉전시대 미국의 심장부에 중국 총리를 위한 조기가 걸린 것이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자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이 나섰다. "그는 생전에 한 푼의 저축도, 한 명의 자녀도 없었다. 어느 나라 수반이든 앞으로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충족해도 그가 서거하는 날 유엔은 조기를 게양할 것이다." 아직까지 그런 명분으로 조기가 게양됐다는 말은 없다. 만델라의 서거 소식을 접하며 느끼는 한 가지 아쉬움이다.
(요점) 1976년 1월 8일 뉴욕 유엔본부에 조기가 게양됐다. 유엔 창설 이래 최초. 주인공은 서거한 중국공산당 총리 주은래였다. 냉전시대 미국의 심장부에 중국 총리를 위한 조기가 걸린 것이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자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이 나섰다. "그는 생전에 한 푼의 저축도, 한 명의 자녀도 없었다. 어느 나라 수반이든 앞으로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충족해도 그가 서거하는 날 유엔은 조기를 게양할 것이다." 아직까지 그런 명분으로 조기가 게양됐다는 말은 없다. 만델라의 서거 소식을 접하며 느끼는 한 가지 아쉬움이다.
[2인자 주은래가 존경과 추앙받는 이유]
TV 채널A_쾌도난마 507회 뉴스쇼에서...'전원책 변호사가 "오늘날 G2 중국 만든 이는 '2인자 주은래' 라는 주제의 평론을 한다...^-^
전원책 변호사의 평론을 듣고...그 내용을 추린 것은 다음과 같다...ㅎㅎ...^-^
2인자의 최후는 대부분 비참하다...한국의 2인자도... '실세' 라는 소리가 나왔을 때 그 말로가 참람했고...'토사구팽'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때 이기붕...박정희 대통령 때 김영욱, 이후락...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김대중 대통령 때 권노갑...노무현 대통령의 형 '봉화대군 노건평'...이명박 대통령의 이상득 형님...등을 그 예로 든다...^-^
2인자의 위치는 마치 "늪이 깔린 벌판을 안대를 하고 걷는 형국"과 마찬가지 이다.
북한의 2인자 '장성택'이 며칠만에 사형을 당한 것도 2인자의 위치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경우 이다...^-^
2인자 중에서 가장 성공한 2인자는 '주은래'이다 ...중국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정치가 역시 '주은래' 이다...^-^
주은래와 등소평은 파리유학을 다녀왔던 사람으로...모택동을 도왔는데...주은래는 모택동 휘하에서 철저히 겸양을 지켰다...^-^
모택동은 4년 정도만 공부 한 사람으로... 어떻게 보면 학문적 내공이 얕은 사람인데도 2인자의 위치에서 그에게 철저히 겸손했다...^-^
모택동이 주은래를 견제하기도 했지만...주은래가 부하, 돈, 권력, 자식 등에서 욕심을 부리는 것이 전혀 없으므로...그를 신뢰한 것이다...^-^
모택동이 등소평을 죽이려고 했을 때...주은래의 청으로 등소평을 살려주었기 때문에...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이 꽃 피게 되어...
오늘날 G2 중국을 만들게 한 이는 결국 '2인자 주은래' 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은래가 1976년 죽었을 때 뉴욕 유엔본부에 조기가 게양됐다...냉전시대 미국의 심장부에 중국 총리를 위한 조기가 걸린 것이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자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이 나섰다. "그는 생전에 한 푼의 저축도, 한 명의 자녀도 없었다. 어느 나라 수반이든 앞으로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충족해도 그가 서거하는 날 유엔은 조기를 게양할 것이다."라는 일화가 있다...^-^
박종진의 쾌도난마 뉴스쇼에서...가장 성공한 2인자 '주은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13억 중국사람들이 충분히 존경하고 추앙할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었던 관료가...욕심이 없는 삶을 살아서...
국민에게 사랑받고 존경받고...추앙받는 정치가가 나왔으면 좋겠다...ㅎㅎ...^-^
- 2013년 12월18일 수요일...대림3주간 수요일에...수산나 -
인천 차이나타운...청일 조계지 경계계단...^-^
인천 차이나타운...청일 조계지 경계계단 공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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