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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 강연

황창연신부의 행복특강 (7,8,9) [화 다스리기/기쁨과 감사는 신앙의 본질/습관변화로 화 줄일수 있어]

[황창연신부의 행복특강] (7)화(火)만 잘 다스려도 화(禍) 면할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화를 잘 다스리기만 해도 삶은 평탄해진다. 화가 나면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된다. 마음속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를 때가 많다.

 화는 보통 작은 일로 시작해 크게 터지기 마련이다. 폭약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기 전에 도화선이 타들어가다 산도 무너뜨리고 굴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화가 터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 전에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작은 불씨를 끄면 큰 불로 번지지 않지만, 불이 커지면 끌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화를 빨리 잘 다스리는 훈련이 중요하다.

 또 나만 희생하고 손해본다는 생각이 들 때 화가 난다. 내가 남들한테 해준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 불행은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라. 자신이 받은 은혜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갚았는가? 다 갚지 못한 감사할 일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받지 못한다고 화낼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모든 사람이 나를 인정할 수는 없으며 모두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10명 중에 1명만 나를 믿어줘도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연예인들이 악성댓글로 자살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5000명, 1만 명이 연예인을 좋아한다고 치면, 악성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50명에서 100명 정도다. 나쁜 소리를 하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화낼 필요가 없다. 내가 성당에서 봉사한다고 해서 모두가 나를 알아볼 거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대단한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그때부터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예수님께 일으키신 표징을 본 많은 군중은 갈릴래아 호수까지 예수님을 따라간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또 제자들이 서른 스타디온 쯤 떨어진 곳으로 배를 타고 건너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오셨다. 1 스타디온은 200m 정도로, 6㎞를 물 위로 걸어오셨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 53-55)는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다. 유다인들은 거북함을 느끼고 예수님 곁을 떠난다. 그 후로 제자들 12명만 예수님 곁에 남았다.

 봉사자 중에 다른 신자들의 참여도가 낮아서 힘들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 5000명 군중에서 12명의 지지를 받은 예수님의 삶을 보라.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화낼 이유가 없다.

 남이 나를 평가하는 게 전부는 아니다. 자기 소신과 확신이 있으면 남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다. 루카복음 9장 51절을 보면,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돌아서 다른 마을로 가신다. 정면돌파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돌아갈 상황이 되면 돌아가자. 공자는 "진정한 성인은 자기를 몰라줘도 분노하지 않고 유유자적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기도취에 취하면 갈등상황에 부딪히고 마음속 화를 키우게 된다.

 

 

 

 

 

개연꽃

 

 

 (7)화(火)만 잘 다스려도 화(禍) 면할 수 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 53-55)는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다. 유다인들은 거북함을 느끼고 예수님 곁을 떠난다. 그 후로 제자들 12명만 예수님 곁에 남았다.

 

 5000명 군중에서 12명의 지지를 받은 예수님의 삶을 보라.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화낼 이유가 없다.

 

루카복음 9장 51절을 보면,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돌아서 다른 마을로 가신다. 정면돌파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돌아갈 상황이 되면 돌아가자.


 

 

[황창연신부의 행복특강] (8)기쁨과 감사는 신앙의 본질, 나의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지만, 모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생긴 모습도 성격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정작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하셨을까? 그렇지 않다. 12명의 제자들도 똑같이 사랑하지 않으셨다. 거룩한 변모 때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다.

 예수님께서도 단죄할 사람들은 단죄하셨다. 마태오복음 18장에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고 말씀하시며 이웃이 잘못하거든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증인으로 세우고, 그리해도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또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고(마태 23장 참조)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요한 2,13-22 참조)을 통해 무조건 참고 인내하며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님을 보여주고 계신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참고 살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십자가 콤플렉스'라고 한다. 주님이 주시는 시련은 나의 십자가라고 여기며 견디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면에는 기쁨이 하나도 없고 정신적 질병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지옥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죄를 물으니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하고 우울하게 한숨만 쉬고 산 죄"라고 언급하고 있다. 슈바이처 박사는 "물 없는 강처럼, 기쁨 없는 그리스도인, 기쁨 없는 신앙, 기쁨 없는 사람이 세상을 피곤하게 한다"며 기쁨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금욕과 고행을 했던 요한 세례자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셨고, 축제를 즐기며 기쁘게 사셨다. 하지만 신자 중에는 신앙생활은 무조건 참고 견디며 인내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요한복음 13~18장을 묵상해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쁨을 강조하셨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요한 14,28)하고 말씀하신다. 15장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고 하시며,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고 말씀하신다. 17장에서는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신다.

 온통 기쁨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신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기쁨과 감사는 신앙의 본질이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
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는 말씀은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의 길잡이가 돼줄 것이다.

 

 

 

 

 


 

(8)기쁨과 감사는 신앙의 본질, 나의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하셨을까? 그렇지 않다. 12명의 제자들도 똑같이 사랑하지 않으셨다. 거룩한 변모 때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다.

 

예수님께서도 단죄할 사람들은 단죄하셨다. 이웃이 잘못하거든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증인으로 세우고, 그리해도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고(마태 23장 참조)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요한 2,13-22 참조)을 통해 무조건 참고 인내하며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님을 보여주고 계신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참고 살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십자가 콤플렉스'라고 한다. 주님이 주시는 시련은 나의 십자가라고 여기며 견디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면에는 기쁨이 하나도 없고 정신적 질병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지옥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죄를 물으니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하고 우울하게 한숨만 쉬고 산 죄"라고 언급하고 있다.

 

 

기쁨과 감사는 신앙의 본질이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
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는 말씀은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의 길잡이가 돼줄 것이다.


 

 

[황창연신부의 행복특강] (9)일상의 작은 습관 변화로 화 줄일 수 있어



  마음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에 답이 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 하는 율법학자들이 나온다. 중동지방에서는 지금도 간음죄에 해당하는 여인을 돌로 쳐서 쓰러뜨린 후 돌로 때려 죽인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여인을 데려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만히 보시니 화로 가득차 있었다. 지혜로운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8,6).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아무리 화가 머리끝까지 나더라도 속으로 열만 세면 가라앉힐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화가 좀 누그러진 다음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다시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신다. 이번에는 생각할 시간을 주셨던 것이다. 사람들이 떠나갈 때까지 기다리신 예수님께서는 혼자 남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고 말씀하신다. 흥분이 가라앉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화를 줄일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첫째, 숨을 잘 쉬어라.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 숨을 잘못 쉰다는 것은 생명을 잘못 다루는 것이다. 화가 날 때 씩씩거리는 것은 숨 조절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숨은 코로 들어와 심장을 거쳐 위와 단전, 간, 폐로 돌면서 온 장기 안에 산소를 공급해준다. 화가 나면 목에서 숨이 멈춰있기에 장기에는 산소공급이 잘 안 된다. 결국 화병의 원인이 된다. 화가 날 때 심호흡을 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숨을 잘 쉬면 차분해지면서 문제 해결이 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잘 걸어라. 걷기는 마음 정리와 치유에 도움이 된다. 야고보 성인의 무덤으로 가는 순례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화가 날 때 묵주를 들고 나와 동네 한 바퀴만 돌아보라. 차분히 문제를 바라보면 해결책도 얻게 될 것이다.

 셋째, 잘 먹어라. 인스턴트 음식이나 육식 위주 식단은 화를 키울 수 있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보다 포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반자연적 음식은 화를 더 잘 내는 성향으로 바꿀 수 있다. 닭장에 가두고 잠도 재우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은 닭이 낳는 달걀과 풀어놓고 기른 닭이 낳는 달걀을 비교해보면, 맛과 향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넷째, 인생을 즐겨라. 예수님께서도 6일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 태양도 달도 산도 사람 머리도 동그랗게 만드신 것은 동그랗게 살라고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이다. 노동과 휴식의 균형을 이뤄야 동그랗게, 여유있게 살 수 있다.

 다섯째, 자신에게 잘해라. 나 스스로가 행복하면 절대로 화가 나지 않는다. 자신에게 잘 해주는 것을 비신앙적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고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에게 잘해주고 내가 행복해야 그 행복을 온 세상에 나눠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모두 행복하길 바란다.

 

 

 

 

 

까마중 꽃과 열매


 

 (9)일상의 작은 습관 변화로 화 줄일 수 있어

 

마음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에 답이 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여인을 데려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만히 보시니 화로 가득차 있었다. 지혜로운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8,6).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아무리 화가 머리끝까지 나더라도 속으로 열만 세면 가라앉힐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화가 좀 누그러진 다음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다시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신다. 이번에는 생각할 시간을 주셨던 것이다. 사람들이 떠나갈 때까지 기다리신 예수님께서는 혼자 남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고 말씀하신다. 흥분이 가라앉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